## 316화: 외전. 아기천사의 탄생
아직 태어나지도 않은 아기에게 미리 얼굴도장을 찍어둬야 한다는 이유로, 루페르트 공작저에는 아르티나 일가부터 악마들까지 연일 방문객이 넘쳤다.
그중 아가레스의 호의로 이바스 저택 별채 하나를 얻은 휴고와 엘리시아는 이틀 걸러 한 번꼴로 저녁 식사를 함께하자며 본채로 넘어오기도 했다.
지난 며칠간 그랬던 것처럼 오늘 역시 마찬가지.
그러나 아가레스는 전에 없이 난색을 보였다.
“늘 그렇듯 환영이긴 한데…….”
“그런데?”
“……웃지 않겠다고 약조하고 들어와라.”
무슨 일이길래 이러지.
서로 마주 보며 고개를 갸웃한 휴고와 엘리시아가 대충 알겠다는 취지로 고개를 끄덕였다. 뭐, 그쯤이야 어렵지 않으니까.
그리고 불과 반 각 뒤.
“아하하하하-!”
“크흡.”
어려웠다. 고기 앞에서 헛구역질하는 사위를 본 엘리시아와 휴고는 결국 시원하게 웃음을 터뜨렸다.
“입덧이라니! 가관이네, 가관이야!”
“꼴이 퍽 우습군.”
“……웃지 않는다고 불과 반 각 전에 약속했던 것 같은데.”
“이걸 어떻게 안 웃고 참아?”
“못 참지. 신격이라는 자가 고기 앞에서 벌벌 떨고 있는데.”
“입덧이 옮겨가는 경우가 있다는 말은 들어봤어도 실제로 본 건 처음이야.”
“그게 하필 내 사위일 줄이야!”
“에비. 고기다. 에비.”
“…….”
아가레스가 서러운 눈으로 이벨리아를 바라봤다.
부인. 장인어른과 장모님이 나를 놀려.
그러자 이벨리아가 짐짓 안쓰럽다는 표정으로 남편의 머리칼을 쓰다듬었다.
“아이구, 우리 토끼. 고기가 무서워쪄요?”
“……부인마저.”
***
황제가 궁 밖으로 외출한다는 것은 상당히 번거로운 일이다.
기본적으로 엉덩이 한 번 떼는 데 붙어야 하는 호위와 수행원이 적지 않은 데다가 까딱 불의의 사고로 다치기라도 했다가는 온 궁에 난리가 날 테니까.
하여 친우가 아이를 가졌다는 대사건에도 쉽사리 찾아가지 못하던 루드비히는 애가 타서 전서를 보냈다.
[아무리 황궁이 싫다고 해도 그렇지. 어떻게 한 번을 안 올 수가 있어? - 루이]
[아기를 가진 상태에서는 좋지 않은 곳에 가는 거 아니랬어. 부정 타. - 이브.]
[좋은 날을 골라둘 테니 입궐해라. 황명이다. - 루이]
[비밀기지로 와라. 이브령이다. - 이브]
황명 따위 지나가는 개의 짖음과 동일시하는 벗의 명령에 따라 비밀기지 오두막으로 들어온 루드비히는 벽난로 근처에 앉아 낑깡을 바구니째 껴안고 털어 넣는 이벨리아를 보고 헛웃음을 지었다.
“그건 뭐야. 자라다 만 오렌지?”
“낑깡이라는 과일이야. 내 충신이 재배한 열매지.”
별 게 다 있군. 큰 보폭으로 다가온 루드비히가 이벨리아 곁에 털썩 주저앉았다.
여름을 앞둔 시기임에도 이례적으로 벽난로가 타오르고 있다. 열기가 둘의 얼굴 옆면을 주황색으로 물들였다.
“황궁이 그렇게 싫냐. 한 번을 안 오고.”
“싫지, 그럼. 거기 뭐 좋은 기억이 있다고.”
“딱히 나쁜 기억도 없잖아.”
“황비. 에드윈. 세레스.”
“……대번에 이해가 가서 안타깝네.”
봐. 우리 아가는 황궁 문턱을 넘어선 안 돼. 장난스럽게 답하며 이벨리아가 낑깡 하나를 친우의 입에 넣어 주었다.
떫고 신 느낌에 루드비히가 미간을 살포시 찌푸렸다.
“이게 무슨 맛이야.”
“너는 원래 맛을 모르잖아.”
“……치료받는 중이다. 못된 땅 도둑 같으니.”
루드비히의 시선이 언뜻 이벨리아의 배로 향했다.
“힘들지는 않고?”
“얼마 전까지는 죽는 줄 알았는데 지금은 살 만해.”
“입덧이 심하다고 들었는데.”
“응. 그랬었는데 이제 나는 안 해.”
나는. 이라고 주체를 한정하는 말을 알아채지 못한 루드비히는 그저 다행이라며 들고 온 바구니를 테이블 위에 올려뒀다.
안에는 보기만 해도 군침이 흐르는 정갈한 음식이 가득했다. 이벨리아가 반짝 눈을 빛내며 몸을 앞으로 기울였다.
“우와, 이게 다 뭐야?”
“네가 물도 제대로 못 넘긴다는 소식을 듣고 황후가 직접 만들었다.”
“카밀라가?”
“정성이 가득 담긴 음식이면 아가님께서도 조금은 봐주지 않겠냐면서.”
“……감동이야. 내가 친구 하나는 진짜 잘 뒀다니까.”
“새삼스럽긴.”
“너 말고 카밀라.”
이벨리아는 얇은 고기로 돌돌 말린 쌈을 입에 넣었다. 상큼한 소스의 맛이 단번에 식욕을 돋게 했다.
“카밀라는 황후 안 했으면 제국 제일의 요리사가 됐겠어.”
“황후는 황후 안 했으면 제국 제일의 싸움닭이 됐을 거다.”
지금도 황궁 예산안을 탈탈 털어 궁의 재정부를 괴롭히고 있는 황후를 떠올리며 루드비히가 부르르 몸을 떨었다.
“악마. 너도 먹어라. 이브 챙기느라 식사가 부실할 텐데.”
“됐다.”
“피골이 상접한 얼굴로 아기 겁줄 게 아니라면 먹지?”
루드비히가 바구니 속의 샌드위치를 들어 권하는 것처럼 살짝 흔들었다. 그러자.
“우욱.”
저 악마의 입에서는 나올 리 없는 소리가 난다. 잘못 들었나. 루드비히가 다시 한번 샌드위치를 살랑 흔들었다.
“……치워라.”
일순 루드비히의 입매에 장난기 가득한 미소가 스쳤다.
“설마 입덧?”
“…….”
“이브 대신?”
“…….”
놀리듯 말하자 악마의 표정이 사정없이 일그러진다. 루드비히가 허리 숙여 탁자 모서리를 잡고 큭큭 웃음을 터뜨렸다.
아. 저 미련한 악마가. 세상 강한 척은 혼자 다 하더니 부인 배 속의 작은 아기 하나를 이기지 못한 채 헛구역질을 하고 앉았다.
“그만 놀려. 토끼야, 오렌지 주스 가져다줄게.”
입덧하는 남편을 위해 이벨리아가 일어서려고 하자, 루드비히와 아가레스가 즉각 자리를 박찼다.
“너는 먹고 있어.”
“우리가 가지고 올게.”
냉동고가 있는 방으로 간 둘은 커다란 오렌지 주스 병을 꺼냈다.
주변에 널린 육포 냄새를 맡고 다시 한번 인상을 찌푸리는 악마를 보며 루드비히가 낮게 웃었다.
“재밌군.”
“……이브가 입덧을 안 하니 그것으로 됐다.”
“쯧. 재수 없긴.”
“왜 또 시비야.”
“응원하지 않고서는 못 배기게 하는 게 꼴 보기 싫어서.”
배배 꼬인 성격대로 빙 돌려 말하기는 하지만, 그 속에 담긴 진의를 파악하기는 어렵지 않았다. 잠시 침묵하던 아가레스가 물었다.
“너는.”
“나 뭐.”
“……행복한가.”
“아니. 내 유일한 행복은 그대에게 빼앗겼잖아.”
농담인지 진담인지 알 수 없는 옅은 미소가 수려한 얼굴에 떠올랐다 빠르게 사라진다.
“하지만 적어도, 나 역시 너희와 함께 앞으로 나아가고 있다고는 할 수 있겠군.”
“…….”
“일전에 그대가 건넨 조언 덕분이다.”
처음 만났던 그때가 기억나지 않을 정도로 강인해진 손이 악마의 어깨를 툭 두드렸다.
***
임신 32주 차.
얇은 커튼에 가린 달빛이 흐리게 방으로 스며드는 밤이었다.
이벨리아의 배는 이제 거동이 불편할 정도로 불러 있었고, 아가레스는 임신 초기보다 더욱 극진하게 부산을 떨기 일쑤였다.
지금도 그랬다. 배에 귀를 가져다 댔다가, 동화를 읽었다가, 쓰다듬었다가, 혼자 바삐 움직이던 악마가 속삭였다.
“아가. 자나.”
“밤이니까 아가는 자야지.”
“엄마가 깨어 계시는데 어디 버릇없이.”
“아가한테 못된 말 하면 아가가 토끼한테 또 입덧 형벌을 내릴 거야.”
“……입 다물어야겠군. 입덧 형벌은 세계에서 배척되는 형벌보다 괴로웠다.”
킥킥 웃으며 남편의 어깨에 기댄 이벨리아가 마침 생각났다는 듯 물었다.
“근데 토끼야. 우리 아가를 계속 아가라고 부를 순 없잖아.”
“이름을 미리 지어둘까?”
“그게 좋겠어. 뭐로 하지?”
악마는 미리 생각해두었던 것처럼 망설임 없이 답했다.
“미니미 이브. 줄여서 미브.”
“어우, 기각.”
“이브 주니어. 줄여서 이주.”
“세상에! 기각.”
“그렇다면 이브-.”
“내 이름이 들어가면 다 퇴짜야.”
“…….”
“토끼 창의력 형편없어.”
“……그러면 어떤 이름을 원하는데?”
배를 쓰다듬으며 잠시 고민하던 이벨리아가 말했다.
“용기. 그런 의미면 좋겠어. 전란을 헤쳐온 우리에게 가장 중요한 가치였으니까.”
“용기라…….”
“토끼는 고대어도 잘 알잖아. 뭐 멋진 거 없어?”
낮잠을 많이 자서 말똥말똥한 부인의 눈가에 입을 맞추며 악마가 답했다.
“딸이라면, 비비안.”
“……비비안?”
“용감함을 뜻하는 이름에 그 이상은 없을 것 같은데.”
“…….”
이벨리아가 입술을 깨물었다.
이제는 제법 오랜 시간이 지났으나 되뇔 때마다 여전히 심장이 아린 이름.
나를 대신해 몸 던져 전사(戰死)한 두 번째 어머니, 비비안.
볼을 가로질러 흐르는 눈물을 손등으로 훔쳐내며 이벨리아는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 맞아…….”
용기라는 단어에 비비안 그 이상은 없지.
“……비비안 루페르트.”
언젠가 꼭 말해줘야지.
아가야, 네 이름은 있잖아.
엄마랑 아빠가 아는, 이 세계 가장 용감한 인간의 이름이었어.
***
저벅, 저벅, 저벅.
휙-.
저벅, 저벅, 저벅.
휙-.
베르타샨의 가주, 세드릭은 눈앞에서 정신없이 왔다 갔다 하는 이 제국 단 둘뿐인 공작이자 매제인 아가레스를 불만 어린 눈으로 바라봤다.
“이브 배 속의 아기가 정신 사납다고 뛰쳐나오겠다. 좀 가만히 앉아 있지?”
“……됐다.”
“네가 그러니까 나까지 초조하잖아.”
“나는 지금 미칠 것만 같다.”
난산이었다.
이벨리아가 산통을 느끼고 분만실로 들어간 지 어언 일곱 시간이 지나 해가 지고 만월이 뜬 지 오래.
그럼에도 불구하고 아이의 울음소리는 들릴 기미가 보이지 않았다. 대신 악마의 심장을 망치로 내리치듯이 들려오는 소리는.
- 아아아악!
- 조금만 더 힘을 주셔요, 아가씨, 조금만 더!
- 호흡하시고요! 호흡!
돌아버릴 것처럼 만드는 고통에 찬 비명과 신음.
분만실 앞을 서성이던 악마가 그대로 주저앉았다.
세상 모든 고통을 다 대신 겪어줘도 단 하나, 출산의 고통만큼은 분담할 수 없다는 사실이 이렇게 개탄스러울 수가 없었다.
마찬가지로 곁에서 서성이던 엘리시아와 휴고가 무너져 내리는 악마를 보다 못했는지 들으라는 듯 말을 꺼냈다.
“이브 태어날 때가 생각나네요.”
“나도 딱 저놈처럼 저러고 있었어. 세드릭은 세드릭처럼 이러고 있었고.”
“그때도 제가 아버지께 진정 좀 하시라 말씀드렸던 것 같은데.”
“너도 페르세스가 출산할 때 되면 알 거다. 진정 따위 절대 못 한다는 것을.”
핀잔한 휴고가 아가레스의 어깨에 손을 얹었다.
“그렇게 걱정만 하고 있지 말고 아이에게 해줄 말이라도 미리 생각해두는 건 어떤가.”
“……해줄 말?”
“태어나서 처음 듣는 게 아비가 건네는 다정한 말이면 좋을 테니까.”
“…….”
이 지난한 과정을 모두 겪어 세 아이를 성공적으로 키운 휴고와 엘리시아는 지금 이 순간 아가레스에게는 신이나 다름없었다.
고개 숙이고 잠시 고민하던 악마가 휴고에게 물었다.
“이브가 태어났을 때 그대는 뭐라고 했었지?”
“왜. 따라 하려고?”
“이브가 그대의 그 말을 듣고 저리 멋지게 자랐으니까. 우리 아이도 같은 말을 들으면 이브처럼 자라지 않을까 해서.”
이놈 입에서 언제부터 이렇게 흡족한 말만 나오기 시작했는지. 옅게 웃으며, 휴고는 자신이 딸에게 처음 건넸던 맹세를 그대로 읊어주었다.
아가레스가 이를 입으로 몇 번 되뇌던 찰나.
- 으아아아아앙!!
우렁찬 아기 울음소리가 두꺼운 분만실 문을 뚫고 회랑을 쩌렁쩌렁 울렸다.
세드릭이 씩 웃으면서 읊조렸다.
“울음소리가 천하대장군 감이네! 가만. 우리 이브 태어났을 때도 내가 이 말을 했던 것 같은데?”
벌떡 일어나 분만실 앞으로 날 듯이 달려간 아가레스가 분만을 돕고 나오던 테사에게 득달같이 물었다.
“이브는!”
“무사하십니다. 각하.”
“아이는.”
젖은 손을 흰 천에 닦으며 테사가 빙그레 웃었다.
“눈이 우리 아가씨를 똑 닮으셨습니다.”
“……하.”
긴장이 풀린 아가레스가 비틀거리며 벽을 짚었다.
“어서 들어가 보시지요. 아가씨께서 기다리십니다.”
너무 벅차서 세상이 빙글빙글 도는 느낌이다.
분만실로 한 발 들어서자마자 맡은 피 냄새. 약 냄새. 그리고 그사이 여리고 부드럽게 와닿는 아기의 냄새. 그는 아마 죽을 때까지 잊지 못할 터다.
창백한 얼굴로 힘없이 누워 있는 부인이 한없이 안쓰럽고 감사하여 악마는 침대 옆에 무릎을 꿇고 이벨리아와 눈을 맞추었다.
“……정말 고생 많았어.”
“토끼야…… 네가 그렇게도 원하던 공주님이래.”
“…….”
“……이 울보. 또 우네.”
힘겹게 손을 든 이벨리아가 남편의 볼 위에 흐르는 눈물을 닦아주었다. 그러자 악마가 애틋하게 부인의 손에 얼굴을 비볐다.
행복. 그 이상을 뭐라고 표현할 수 있을까. 존재하는 언어로 빚어낼 수 없는 아득한 감정은 둑 터진 강물처럼 밖으로 흘러내렸다.
이벨리아의 고갯짓에 따라 하녀가 아가레스의 품으로 아기를 넘겨주었다.
악마는 마치 깃털을 쥐듯 조심스러운 손길로 아이를 받아들었다.
세상 그 무엇보다도 가볍고, 동시에 세계 그 무엇보다도 무겁다.
포대기를 살짝 들춰 보니, 솜털 같은 머리카락은 그를 닮은 검은빛이다.
“……아가.”
지난 열 달 그토록 말을 걸던 익숙한 목소리를 알아듣는 건지 아기가 꼬물꼬물 눈을 떴다.
그 가는 틈 사이로 보이는, 너를 꼭 빼닮은 푸른 눈동자.
악마는 전율했다.
“……비비안.”
아기의 볼을 한 손가락으로 조심스럽게 쓸며 부르자 제 이름이라는 것을 알기라도 하는 듯 입을 오물거린다.
경탄할 광경에 아가레스는 잘게 떨며 속삭였다.
“네 하늘에 비가 내린다면 내가 언제든 달려가 우산이 되어주마. 네 땅에 가시가 돋는다면 세상 모든 꽃을 꺾어 발밑에 뿌려주겠다.”
그렇게 오랜 시간이 지나 대를 이어 전해지는 첫 맹세.
“……우리 아가, 우리 딸. 우리에게 와주어 정말 고맙다.”
전란의 화마 속 그들이 끝내 지켜낸 꽃밭에서, 바야흐로 새로운 시대가 움텄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