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315화: 외전. 아기가 찾아왔어요!
아르티나 일가부터 악마들까지 참석자들 모두가 느리게 고개 돌려 아가레스를 바라봤다.
무슨 답을 원한다기보다는 그저 반응을 살피면 이 사태를 파악하는 데 도움이 되지 않을까 하는 마음으로.
아가레스의 동공은 하염없이 흔들리고 있었다. 제법 오랜 시간 이 악마를 봐온 참석자들로서도 단연 처음 보는 수준의 동요.
자신 몫의 고기를 잘라 건네주려던 나이프를 던지듯 내려두고, 아가레스가 벌떡 일어섰다.
힘을 이기지 못한 의자가 처참히 넘어져 나뒹굴었으나 이 자리 그 누구도 그깟 것을 신경 쓸 여력은 없었다.
흡사 세상으로부터 보호하려는 것처럼 이벨리아를 번쩍 들어 품에 안은 악마는 눈을 휘둥그레 뜨고 있는 마르바스에게 명했다.
“의사.”
“의, 의사. 그, 그렇지, 의사. 의사! 의사아아아!”
사자로 변한 마르바스가 훌쩍 뛰어오름과 동시. 무려 본체로 현현한 엔리르 역시 돌풍을 일으키며 날아올라 웅혼한 존재력을 담아 외쳤다.
[의사아아아아-!]
온갖 유난을 떨며 사라진 용과 사자를 바라보던 이벨리아가 민망하다는 표정으로 중얼거렸다.
“내가 의사 부른 거 온 제국이 다 알겠다. 사람이 살다 보면 속이 좀 안 좋을 수도 있고 그런 건데…….”
“혹시 모르니까 검사받자.”
“그냥 아까 먹은 쿠키가 체한 것 같은데도?”
“네가 송아지 스테이크를 앞에 두고 체한 거면 그건 그것대로 문제야.”
……그도 그렇지. 고개를 끄덕이던 이벨리아는 아가레스의 표정을 보고 눈을 가늘게 떴다.
“근데 너 말하고는 다르게 눈이 왜 이렇게 반짝거려? 뭔가를 잔뜩 기대하는 표정인데?”
“전혀.”
“전혀는 무슨.”
악마의 눈에는 숨길 수 없는 기대가 가득 들어차 있었다. 그렇지 않아도 빛나는 금빛 눈은 숫제 금덩어리를 뚝뚝 쏟아낼 기세였다.
그때였다. 뒤편에서 작은 속삭임이 들려왔다.
아이 이름은 뭐로 하지?
둘이 어련히 잘 정하겠어요?
아가 옷부터 살까?
직접 만들어야죠.
저 먼 미래까지 앞서나간 대화에 이벨리아가 고개를 모로 돌렸다.
“아빠랑 엄마는 뭘 그렇게 속삭이는 거야…….”
“이브. 아가 이름은-.”
그러자 엘리시아가 휴고의 팔뚝을 내려쳤다.
“아직 확실하지도 않은데 부담 주지 말아요.”
그러더니 딸을 바라보면서 어색하기 그지없게 씨익 웃는다.
“아무것도 아니란다, 이브. 네가 심하게 체한 건 아닐지 걱정하고 있었어.”
……그게 걱정하는 표정인가요, 엄마.
기실 휴고와 엘리시아로서는 기대하지 않을 수가 없는 상황이기는 했다.
아르칸과 세드릭 모두 혼례를 치른 지는 제법 되었으나 아직 자식은 없었으니까.
렐리안은 잉태할 수 있을 정도까지 몸을 회복하려면 엔리르의 마력 유도가 몇 달 더 필요한 상황이었고 신격인 페르세스는 보통의 인간처럼 아기를 태에 품을 수는 없어 다른 방법을 강구하는 중이었다.
그러한 사유로, 장성하여 제각기 혼인한 아르티나 세 남매 중 첫 태기(胎氣)인 것이다.
그리고 오래 지나지 않아.
[의사 데려왔다-!]
일순 해를 가릴 정도로 거대한 용이 이바스 저택으로 날아들었다.
신년제라 모처럼 퇴근하여 휴가를 즐기던 아르티나 가문의 주치의가 용의 등에서 비틀비틀 내렸다.
“으, 세상이 빙빙 돕니다…… 급한 일이 있다고 하시던데……?”
어디 내 휴가를 빼앗아 용님의 등을 타고 날아오게 한 급한 일이 뭔지 들어나 보자는 표정으로 묻던 주치의는.
“이브가 송아지 스테이크를 앞에 두고 헛구역질을 했다.”
휴고의 한마디에 소스라치게 놀라더니 진료 가방을 열어 온갖 도구를 늘어두었다.
혹시 진료에 방해가 될까 봐 참석자들은 숨조차 멈췄고, 페르세스는 흐르는 바람도 잡아버렸다.
배를 청진하던 주치의가 고개를 갸웃하며 손가락으로 이벨리아의 손목을 짚었다.
“흐음…….”
신음 한 번에 정원에 모인 이들 모두가 꿀꺽 침을 삼켰다.
손을 뗀 주치의는 안경을 쓰더니 마력을 담은 구슬을 꺼내 신중하게 가져다 댔다.
“호오…….”
짧게 호흡을 내뱉은 의원이 몸을 바로 하고 안경을 벗었다.
그 누구도 소리 내 묻지 못하고 그저 의원의 입만 바라봤다.
그리고.
주치의의 입가가 함지박만 하게 벌어졌다.
“경하드립니다, 아가씨.”
“나 송아지 고기 먹어도 돼?”
“복중 아기씨께서 드시고 싶다고 하시면 얼마든지 드셔도 되지요.”
“다들 들었지? 복중…….”
모두 똑똑히 들으라는 듯 의원의 말을 따라 하던 이벨리아가 뚝 멈췄다.
잠깐. 복중이라는 건 내 배 속인데…….
그렇다면…….
“아, 아기가 생겼다고? 진짜?”
“예, 아가씨. 이 늙은이는 눈물이 다 나오려고…….”
“그러면 이제 내가 먹은 송아지 고기를 얘랑 반씩 나눠서 차지하게 되는 거야?”
“……하다가 쏙 들어갔습니다. 네.”
입을 떡 벌린 이벨리아가 고개를 끼긱 돌려 가족들을 바라봤다.
“그, 그렇다네?”
휴고가 득달같이 주치의에게 물었다.
“우리 딸을 닮았나, 저 개사위를 닮았나.”
“예? 아직 형체도 생기기 전입니다, 각하.”
“분명 우리 딸을 닮았을 거다. 우리 딸 어릴 적이 얼마나 귀여웠는지 아는가? 알겠지, 자네도 보았으니까.”
“주책 그만 떨어요, 여보. 그보다 이름은 뭐로 하지? 둘이 정한 건 있니? 우리는 이브가 태어나기 한참 전부터 미리 지어뒀었는데. 아기 침대랑 장난감은 미리 준비해두는 게 좋겠고, 아, 무엇보다도 태어난 기념으로 받을 선물이 있으면 좋겠지. 땅? 성? 뭐가 좋을까?”
“어머니께서도 조금 진정하십시오. 이브를 꼭 닮은 아이가 태어날 것이니, 선물로는 아르티나 가문이 좋겠습니다.”
“무슨 소리야. 아르티나는 형 자식이 이어야지.”
“나를 닮았으면 진저리를 칠 거다.”
“이브 자식은 뭐 다르겠어? 이브를 닮았으면 더 진저리를 치겠지. 그런 측면에서 선물로는 베르타샨이 적격이야. 내 영지는 산 좋고 물 좋거든.”
아르티나 일가가 각자 자신의 영토와 지위를 물려주겠다고 아웅다웅하는 모습을 바라보던 악마들이 위기감을 느끼고 참전했다.
“왕의 아가…… 그러니까 아가 왕께서는 마계를 가지실 거야.”
“태어나지도 않은 아이에게 장차 마왕이 되라는 건 저주다, 이 모자란 사자.”
왁자지껄한 소란 속.
쥐면 깨질까 불면 날아갈까 이벨리아를 소중히 안고 있던 아가레스가 고개 숙여 이마에 입을 맞췄다.
애가 달아 어쩔 줄을 모르겠다는 심정이 주변 모두에게 여실히 느껴져 정원은 잠시 침묵에 휩싸였다.
이벨리아가 아직도 얼떨떨한 표정으로 말했다.
“토끼야. 너 아빠 토끼 되나 봐.”
“……고마워. 정말.”
닻 없는 배처럼 세상을 부유하던 악마에게 두 번째로 가족이 생겼다.
이벨리아가 그를 세계로 끌어내린 중력이었다면, 아직 기운조차 느껴지지 않는 이 작은 존재는 그를 세계에 박아넣는 뿌리처럼 느껴졌다.
악마는 울었다.
기뻐서 울었다.
체통도, 위엄도, 가식도, 부끄러움도, 그 모든 헛된 것 없이. 그저 너무 벅차서.
한때 그가 그토록 증오했던 세계는 이제 하릴없이 아름답기만 했다.
***
의원은 각별히 주의해야 할 점을 일장 연설하고 돌아갔다.
그 말을 금과옥조처럼 받아적은 이들은 적은 것을 이바스 저택 내에 경고문처럼 붙이고 사본은 자신들 주머니에 소중히 넣었다.
“아가가 태어날 때까지 이것이 우리의 계율이자 율법이다.”
“제5조. 충분한 낮잠을 자도록 해라. 낮잠 자자, 이브.”
으아아 반항하는 이벨리아를 기어코 안아다가 침대로 옮긴 이들은 그 주변을 빙 둘러싸고 제각기 기대에 부푼 추측을 내뱉기 시작했다.
“우리 아가를 닮은 금발이겠지?”
“주군을 닮은 흑발이어도 멋있을걸.”
“하긴. 우리 아르티나에는 온통 금발만 있으니 흑발이 있는 것도 나쁘지 않지.”
“공주님일까? 왕자님일까?”
“입덧하는 음식에 따라 알 수 있다는 속설이 있기는 한데.”
렐리안의 말에 아가레스가 슬쩍 다가와 물었다.
“송아지 고기 입덧은 뭐라고 하던가.”
그러자 세드릭과 아르칸이 놀려댔다.
“아이고, 우리 울보 매제 오셨어요?”
“다 울었나.”
“막 그렇게 눈물을 줄줄 흘릴 정도로 감격스러워?”
“잘 울던데. 아주.”
“이야. 아주 그냥 이브가 네 눈에 폭포 소환한 줄 알았어, 나는.”
“……네놈들도 렐리안과 페르세스가 아이를 가졌을 때 두고 보자.”
위협적이지 않은 ‘두고 보자’에 세드릭이 킥킥 웃었다.
이벨리아는 이불을 세 개째 가져다 놓는 구시온을 향해 손을 내저어 보이며 물었다.
“토끼는 딸이었으면 좋겠어, 아들이었으면 좋겠어?”
“너를 닮았으면 좋겠어.”
“성별은 상관없고?”
“성별이 어떻든 네 흔적이 남아 있지 않을 리 없으니까. 난 그거면 됐어.”
“그런 거 치고는 아까 입덧 얘기에 지대한 관심을 보이던데.”
“……딸이면 조금 더 너랑 비슷하지 않을까?”
아가레스가 고개 돌려 렐리안을 바라봤다. 하던 얘기를 마저 해보라는 듯.
“고기에 입덧을 하면…….”
운을 띄우자 악마가 착한 학생처럼 끄덕인다. 이를 바라보던 렐리안이 싱긋 웃으며 고개를 저었다.
“역시 안 가르쳐 줄래요.”
“……왜!”
“속설에 불과하기도 하고, 애가 달아서 기다리시는 공작님을 보는 게 재밌기도 하고요.”
“힌트라도 줘.”
아가레스가 답지 않게 렐리안에게 조르던 그때.
- 콰앙.
방의 발코니 문이 부서질 듯 열리더니 다급한 외침이 날아들었다.
“계약자! 페르세스가 전한 소식이 진짜입니까?”
“엘라임의 아가 계약자에게 아가가 찾아왔다고?”
열린 창문을 통해 차가운 바람이 들어오자 눈을 찌푸린 아가레스가 이벨리아를 조금 더 꽁꽁 싸맸다.
“사실이니 조심 좀 하지.”
“진짜? 그럼 널 닮은 미니 병아리가 태어나는 거냐?”
“맙소사. 모든 정령에게 미리 알려둬야겠군요.”
어어, 정신없어. 몰아치는 질문에 이벨리아가 눈을 깜박이던 찰나.
“중요한 질문이 있어, 이벨리아.”
트로이가 씩 웃으며 폭탄 하나를 투척했다.
“혹시 아이의 대부는 정했어?”
***
그 시끌벅적 신년제로부터 두 달이 지났다.
태어날 아기의 대부를 누가 맡을 것인지에 대한 논쟁은 아직도 사그라들 기미를 보이지 않았다.
악마들과 아르티나 기사단이 나름대로 대부의 지위를 주장했지만, 신하 된 몸으로 모셔야 하는 주인의 대부가 될 수는 없다는 이유로 기각.
엔리르가 제국의 수호룡이 아가의 수호룡을 맡는 것이 바람직하다고 선언했으나 이벨리아의 동생이라는 이유로 기각.
그런 고로, 이미 아가와 가족인 페르세스를 제외한 나머지 세 정령왕이 말 그대로 박 터지는 각축전을 벌이는 중이었다.
한편, 임신한 아내에 대한 악마의 배려는 가히 상상을 초월했다.
아침에 눈을 뜨면 살이 트지 않게 하는 크림을 살살 문지르고 있는 것은 물론이요, 주치의가 알려준 방법에 따라 부지런히 마사지를 해주고, 간단한 스트레칭을 도와주기도 했다.
덕분에 오늘 아침도 호강한 이벨리아가 쭈욱 기지개를 켜며 일어났다.
“아무래도 산책 좀 다녀와야겠어.”
그러자 바람처럼 다가온 아가레스가 부인을 번쩍 안아 들었다.
“말만 해. 어디로 갈까.”
“내 발로 걷고 싶은데.”
“땅에 돌이 많아서 위험해.”
“……불과 몇 년 전만 해도 내가 악마 모가지를 따던 장군인데.”
땅에 박힌 돌이 아니라 하늘에서 떨어지는 운석도 막으면서 살았는데 태중 아기 덕분에 이런 유리 몸 취급도 받아보네.
그렇게 편안히 안겨서 바람을 쐬고 들어와 낮잠이라도 잘라치면 다정한 목소리가 어김없이 소곤소곤 울렸다.
“자. 오늘 읽어줄 동화책 제목은 위대한 공녀님.”
“……그 심상치 않은 제목은 혹시 나를 지칭하는 걸까?”
“맞아.”
“그런 이상한 책 어디서 났어.”
“내가 썼어.”
“네가?”
“응. 동화책 공장 공장장은 이제 나다.”
이벨리아가 남편의 손에 들린 양피지를 빼앗아 눈으로 훑었다.
자신의 일대기가 아주 편향적인 시각에서 잔뜩 부풀려져 있다.
“이 말도 안 되는 무용담과 수식어 덕지덕지 붙은 서술은 대체 뭐야.”
“아가도 알아야 해. 엄마가 얼마나 대단한지.”
그러더니 이벨리아의 배에 손을 얹고 아가에게 말을 건넨다.
“너는 엄마만 보고 자라면 된다. 그러면 세상에서 가장 멋진 어른이 되어 있을 테니까.”
“…….”
“아, 읽기 전에 창문 좀 닫고 올게. 추우니까.”
발코니 쪽으로 걸어가는 남편의 뒷모습을 따뜻한 시선으로 바라보던 이벨리아는 고개 숙여 배를 향해 속삭였다.
“아가. 만일 네가 딸이라면 단 하나만 기억해.”
아직 태동이 있을 시기는 아니지만, 꼭 듣고 있다는 것처럼 뭔가 꼬물거리는 기분이 났다. 이벨리아가 배시시 웃었다.
“네 아빠 같은 사내를 만나.”
그거면 삶의 저 끝까지 모든 걸음이 꽃밭일 테니까.
***
임신 13주 차. 이벨리아의 입덧은 극에 달했다.
아가레스의 걱정은 이만저만이 아니었다.
“이브. 이거 조금만 먹을까? 좋아하던 오렌지인데.”
“……우욱.”
“치울게. 창문도 잠깐 열어줄까?”
힘없이 고개를 끄덕인 이벨리아가 남편의 품에 얼굴을 묻었다.
“속상해…… 고기 못 먹어서 서러워…….”
“…….”
“아가는 왜 고기의 맛을 모르니. 진짜 맛있는 건데…….”
아가레스는 하루에도 수십 번씩 믿지도 않는 신에게 기도했다.
하다못해 입덧만이라도 자신이 대신할 수 있게 해달라고.
감정 기복이 심해져 훌쩍이던 이벨리아가 작게 중얼거렸다.
“낑깡…….”
“낑깡?”
“구시온 영토에 있는 낑깡이 먹고 싶어…….”
최근 들어 아내가 뭔가 먹고 싶다고 한 건 거의 없던 일이다.
다급한 표정으로, 아가레스는 곧바로 마기를 피워 구시온을 불러냈다. 후다닥 달려온 구시온이 납작 엎드렸다.
“폐하! 주군! 부르셨습니까!”
“낑깡을 가져와라.”
“엇, 폐하께선 입덧이 심하시다고 들었는데…….”
“심한데 그 낑깡이 먹고 싶어.”
작고 새콤한 열매를 생각하니 입에 침이 고였다. 이벨리아가 꿀꺽 침을 삼켰다.
구시온이 눈을 빛냈다. 미쳤다. 이건 천재일우의 기회다. 출셋길 탄탄대로다.
입덧이 심하신 폐하께서 흡족히 여기실 만한 과일을 드릴 수만 있다면……!
“이 구시온, 곧 죽어도 여한이 없습니다!”
후다닥 달려나간 구시온이 휘하 마족들을 시켜 낑깡을 바구니에 우르르 털어 왔다.
바로 한 알 집어 입에 넣은 이벨리아는 입안에서 퍼지는 신맛에 환하게 웃었다.
“맛있다. 마음에 드네.”
“서엉은이 마앙극하옵니다, 폐하아-!”
물도 입에 대기 어려워하던 부인이 만족스러운 표정으로 낑깡을 먹는 모습을 보며, 아가레스가 구시온에게 말했다.
“원하는 것을 말하라.”
“……!”
“무엇이든 들어주지.”
“그, 그렇다면 주군. 저에게 감투 하나만 씌워 주십시오.”
“예를 들면.”
“갓 태어날 아기씨의 호위, 아니 시종도 좋습니다!”
낑깡을 입에 넣고 굴리던 이벨리아가 고개를 끄덕였다.
“호위 맡아. 시종 말고.”
“허억. 그런 지고한 자리를……!”
납작 엎드려 몇 번이고 감사를 표한 구시온은 밖으로 나오자마자 팻말을 만들어 등에 꽉 묶었다.
[아가 왕님의 호위무사.]
“흐흐흐…… 출세…… 권력…… 달콤한 맛……!”
***
배가 불러온 것이 제법 표가 나는 20주 차.
송아지 스테이크를 앞에 둔 이벨리아가 신나게 포크를 흔들었다.
“이제 입덧이 완전히 끝났나 봐. 스테이크가 아주 꿀떡꿀떡 넘어가네!”
“…….”
“그래, 아가야. 어차피 인생은 고기야. 이제라도 깨달았다면 다행이다.”
“…….”
“고기를 이만큼 먹는 건 내가 돼지라서가 아니야. 아가를 세상 밖으로 꺼낼 추진력을 얻기 위해서지.”
고기를 양껏 물고 행복하게 우물거리던 이벨리아는 묘한 기시감에 고개를 기울였다.
보통 무슨 말만 해도 ‘그렇지, 그렇지, 우리 부인이 다 맞아’ 맞장구를 치던 남편이 오늘따라 조용하다.
“토끼야. 왜 이렇게 조용해?”
“…….”
“토끼야?”
“……속이…….”
나이프를 내려두고 마치 고기를 외면하듯 고개를 모로 돌린 남편.
이벨리아가 황당하다는 듯 입을 벌렸다.
“내 입덧이 사라진 게 아니라 너한테 옮겨간 거였어……?”
아내의 감정과 상태를 온전히 공유하면 남편에게도 입덧이 올 수 있다고 주치의가 그러긴 했는데…… 근데 그거 진짜 드문 일이랬는데…….
“네가 고기를 먹을 수만 있다면 평생 내가 입덧을 해도 좋…….”
“토끼야!”
“윽…….”
“내가 살아나니까 남편이 죽네!”
아가야. 아빠 좀 봐줘.
속삭이자 마치 놀리기라도 하는 것처럼 움찔 태동이 느껴졌다.
부모-.
하늘 아래 가장 위대한 그 타이틀을 달기는 여러모로 쉽지 않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