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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녀님의 꽃밭에는 그들이 산다-312화 (312/323)

##  312화: 외전. 신혼여행의 밤

햇볕 따뜻한 남부의 어느 섬.

“으으, 해방이다!”

인적 없는 백사장에 폴짝 뛰어내린 이벨리아가 환호했다.

연인, 아니, 부인의 격에 영 맞지 않는 단출한 신혼여행지가 못마땅해 눈 끝을 살짝 찌푸리던 악마가 손으로 차양을 만들어 햇볕을 가려주었다.

“힘들었지, 이브.”

“혼례식이 하루만 더 늦었으면 난 아마 말라 죽었을 거야. 간식도 못 먹게 하고. 새벽부터 앉혀두고 뭘 자꾸 칠했다 치웠다 하고. 심지어 토끼도 못 만나게 하고!”

이벨리아의 볼이 해바라기 씨를 한껏 문 햄스터처럼 빵빵하게 부풀어 올랐다.

탐스럽게. 악마가 오른손을 벌려 양 볼을 살짝 눌렀다. 그러자 피슉, 바람 빠지는 소리와 함께 붕어 입이 된다.

“귀여워…….”

입술이 흉하게 튀어나온 몰골도 귀엽다며 해롱거리는 아가레스를 푸르르 털어내며, 이벨리아가 말을 이었다.

“심지어 여기 오는 과정도 험난했어.”

몇 시간 전을 되돌아보며 이벨리아가 몸을 떨었다. 신혼여행이고 나발이고 하마터면 저승 여행 갈 뻔했다.

혼례가 끝난 후에는 마땅히 신혼여행.

그 통상적이고 관습적인 과정 한 번 밟아보겠다는데, 피로연에서 술을 동이째로 들이마시던 아빠가 벌떡 일어나 외쳤더랬다.

“이놈의 사위 새끼! 내 딸 데리고 어딜 가!”

“아빠, 우리 신혼여행…….”

“어딜 단둘이 여행을 가려고! 안 돼!”

“가야 한다. 이브가 가고 싶다고 했으니까.”

“남녀가 유별한데 이 개사위가 장인어른 말씀은 듣지도 않고…….”

뭐야. 아빠 왜 저러지. 낯빛부터 태도까지 평소와 같은데, 말투만 묘하게 이상하다.

눈을 데구루루 굴리던 이벨리아는 이내 이유를 깨달았다. 아빠가 앉았던 테이블에 술이, 아니, 술독이 셀 수도 없이 늘어서 있다.

“아빠 취했나 봐.”

태어나서 처음 본다. 아빠의 취한 모습. 그리고 그 뒤로.

“딸꾹, 못 간다…….”

“작은 오라버니? 오라버니까지 왜 이래!”

“딸꾹…… 좋냐, 개자식아.”

미세하게 얼굴이 발개진 세드릭이 아가레스의 가슴팍을 머리로 툭툭 들이받았다.

야, 쳐 봐, 쳐 보라고, 엉? 뒷골목 부랑배 같은 시비를 걸면서. 그러던 세드릭이 불현듯 휙 몸을 돌려 이벨리아를 꼬옥 껴안았다.

“아이고, 우리 동생! 눈에 넣어도 안 아픈 내 동생! 업어 키운 내 동생!”

으으. 술 냄새.

“이 개잡놈은 얼굴, 돈, 능력, 너를 생각하는 심성, 그런 거 말고는 볼 게 하나도 없어요!”

그 외에 뭘 봐야 하는데?

“신이면 다냐? 이브랑 전생에 연이 있으면 다야? 아니, 이거 말할수록 다인 것밖에 없네, 짜증 나게.”

아빠와 작은 오라버니가 전례 없이 술에 취해 주정을 부린다.

아무래도 그냥 튀는 게 좋겠다고 이벨리아는 생각했다.

‘제정신일 때도 분노 조절에 소질 없는데, 술에 취한 지금은……!’

저 봐, 저 봐!

아빠가 나무 던지려고 하잖아!

이벨리아가 아가레스의 손을 휙 잡아챘다.

“튀자, 토끼야!”

“그게 좋겠다.”

가족들의 유난을 잘 알고 있는 이벨리아.

이제는 처가댁 식구들이라면 껌뻑 죽는 아가레스.

누가 나서도 저 깽판을 말릴 수 없다는 것을 깨달은 둘은 그대로 손을 잡고 피로연장을 탈주했다.

꽁무니에 아빠의 고함, 작은 오라버니의 울먹임 섞인 투정, 그리고 이를 말리는 엄마와 큰 오라버니의 다그침을 주렁주렁 매단 채.

그렇게 해서 어렵사리 도착한 이 섬.

새 지저귀는 소리와 바람에 나뭇잎 스치는 소리, 그리고 바다가 밀려오는 소리 외엔 고요하다.

한바탕 피로연이 꿈이었던 것처럼. 이벨리아가 환히 웃으며 발로 바닷물을 튀겼다.

“평화로워서 좋다-!”

밑단이 물에 젖는 드레스를 잡아 살짝 올려주며 악마가 물었다.

“미리 정해뒀던 곳으로 안 가고. 왜 여기야?”

“왜? 마음에 안 들어?”

“체티네 섬에는 성도, 음식도, 시중을 들 이들도 다 준비해 뒀는데, 여기엔…….”

아가레스가 주변을 둘러봤다.

이곳엔 아무것도 없다. 정말 아무것도. 굳이 있는 것을 꼽자면 짐승 정도랄까.

휘황찬란한 성도, 맛있는 음식도, 편안한 침구도, 그의 아내에게 어울리는 그 모든 안온한 것들이 없다. 세상 가장 좋은 곳으로 너를 데려가고 싶었는데.

그 마음을 읽은 이벨리아가 답했다.

“그냥. 답답했거든.”

“……?”

“잘 준비된 호화로운 여행지도 좋지만, 이번엔 좀…… 아무도 없는 곳에서 쉬고 싶었어.”

이벨리아는 다소 지친 표정으로 사르륵 발을 덮는 모래를 내려다봤다.

“시중드는 하녀들도, 맛있는 연기를 피워올리는 주방장도, 매번 분위기를 띄우는 친구들도, 지켜야 하는 사람들도, 그 무엇도 없는 곳에서.”

그런 것들은 평생 어깨에 지고 살았으니까. 이벨리아가 까치발을 들어 아가레스와 코를 톡 맞부딪쳤다.

“오롯이 우리 둘만.”

그 말에 조금 전까지만 해도 조촐해 보였던 섬이 마치 지상낙원처럼 보인다. 악마가 픽 웃었다.

이러니 내가 너를 신으로 숭배하지 않고 배길 수가. 네 한마디에 지옥이 천국으로, 수라장이 낙원으로 바뀌는데.

“그럼 잠시만, 이브.”

가볍게 입을 맞춘 악마가 몸을 돌려 섬 쪽을 바라봤다. 그리고 엄지와 중지를 가볍게 맞부딪친다.

그러자 찰나.

신격(神格) 특유의 맑은 기운이 몰려들어 대기를 감싸더니, 뭔가를 빚어내듯 부드럽게 맥동했다.

한바탕 훑고 지나간 곳에는 물과 바다를 닮은 푸른색 저택이 서 있었다.

아르티나 공작저나 이바스 저택보다 작지만, 그래도 둘이 사용하기엔 지나치게 거대한 저택이.

“우와아…….”

“어때, 네 토끼 능력.”

“뛰어난 건 알았지만 건물도 뚝딱 짓네.”

이벨리아가 마치 동화 속에서 튀어나온 것만 같은 저택의 벽을 손으로 쓸었다.

“근데 조금 아깝다. 우리 고작 며칠 있다가 갈 건데.”

“찰나여도. 제대로 모셔야지.”

악마가 저택 문을 열고 안으로 들어가라는 몸짓을 취했다. 정중하게. 이벨리아가 키득 웃었다.

“집도 집사도 하녀도 다 필요 없어. 우리 토끼만 있으면 난 평생 호의호식하겠다!”

그게 내 존재 의의야. 아가레스의 입매에 뿌듯한 미소가 걸렸다.

***

이른 아침부터 정신없는 시간을 보냈으니 옷을 갈아입을 힘도 없다. 이벨리아는 창가에 있는 의자에 추욱 뻗어버렸다.

아가레스가 피로연장에서 챙겨온 차를 우리러 가는 바람에 홀로 창문가에 앉아 밀려왔다 멀어지는 파도를 멍하니 응시하던 그때.

- 빼꼼.

산처럼 거대한 무언가가 시야를 가린다.

“……?”

뭐야.

눈을 깜박이자 시야를 가린 그것이 움직인다.

피부가 보인다. 초록색이다.

소리도 들린다. 그워어어어-.

“…….”

“…….”

“으아아아악!”

“그워어어어!”

“이 몬스터 새끼가! 간 떨어질 뻔했잖아!”

부인의 비명에 차를 우리다 말고 달려온 아가레스 역시 창문 밖에서 몸을 일으켜 세우는 침입자, 아니, 이 섬의 거주민을 마주했다.

“괜찮아, 이브?”

“심장이 안 괜찮아!”

“몬스터가 있을 줄은 몰랐는데. 내 불찰이야.”

오밀조밀한 기운들이 느껴지긴 했었으나 산짐승인 줄로만 알았다. 까마득한 격(格)의 그에게는 몬스터나 짐승이나 나무나 돌이나 별 차이 없이 와닿았으니까.

“쟤 나무 든다! 아니, 저걸 몽둥이로 써? 막 붕붕 휘두르네?”

“저택을 부수려나 본데. 잡고 올게.”

“어허, 아니지, 아니지. 토끼는 그냥 편히 있어. 든든한 부인께서 금방 잡고 돌아올 테니까.”

저깟 초록 괴물 몬스터 따위. 내가 왕년에 악마 사냥꾼으로 이름 좀 날렸다 이거야.

거들먹거리며 물로 빚은 창을 들고 저택 밖으로 나선 이벨리아는.

“히익.”

눈 앞에 펼쳐진 믿을 수 없는 광경에 숨을 크게 들이쉬고는.

“토끼야아아악!”

태도를 손바닥 뒤집듯 바꿔 토끼를 소환했다.

밖으로 나온 아가레스가 헛웃음을 지었다.

“여기가 무인도인 이유가 있었군.”

위로 이벨리아 서넛은 붙여놓은 것처럼 거대한 크기의 몬스터. 트롤 군단이 우르르 몰려와 난데없이 생긴 저택을 적대적인 표정으로 바라보고 있는 것이 아닌가.

- 부오오오.

- 크어어어.

태양을 가릴 정도로 높게, 또 숲의 나무처럼 빼곡하게 공간을 메운 트롤 군단은 그 시각적인 효과만 두고 보더라도 상당히 위협적이었다. 울상을 지은 이벨리아가 발을 콩 굴렀다.

“이게 뭐야! 신혼여행인데!”

매일 새로운 사건이 터지는 삶을 살아왔는데, 신혼여행마저 스펙터클이라니.

트롤 군단의 발에 질질 끌려온 팻말에는 절대 진입하지 말라는 경고문구, 해골 표시, 그리고 이 섬의 이름이 야속하게도 적혀 있었다.

「괴수들의 섬」

“…….”

“…….”

그러니까, 단둘이 좀 쉬어보겠다고 마음 내키는 대로 목적지를 바꿨는데 하고많은 섬 중에 이름도 직관적인 이따위 섬에 내려버린 것이다. 찍기 운도 더럽게 없지.

둘의 시선이 느리게 마주쳤다. 그리고.

“푸핫. 아하하하-!”

“큭큭.”

시원한 웃음이 터졌다.

그래. 이래야 우리답지. 우리 여행이 그저 순탄하면 왠지 좀 섭하지.

머리 위로 고목 한 그루 크기의 몽둥이가 동시다발적으로 떨어져 내린다.

거대한 그림자가 져 시야는 어둡고 파공음에 귀는 먹먹하지만, 둘의 표정에는 긴장 한 조각 없다.

“반반씩 쓸자. 내가 앞, 네가 뒤.”

“존명.”

모든 걸음이 투쟁과 전투로 점철되어 있던 제국의 두 영웅은.

- 콰아아앙.

항상 그래왔듯 서로의 등을 마주한 채 트롤 군단을 향해 검과 창을 내질렀다.

***

“신혼여행까지 와서 섬 토벌이라니. 이건 특별포상 받아야 해.”

오래지 않아 아늑한 저택으로 들어온 이벨리아는 비척비척 침대로 걸어가 폭 드러누웠다.

“으으. 힘들어. 고단해.”

밖은 벌써 어두워져 있었다. 흘끗 시간을 확인한 아가레스가 침대에 어지러이 흩어진 머리칼을 쓸어올려 주며 물었다.

“먼저 씻고 올래?”

“……!”

움찔 놀란 이벨리아가 이불을 주섬주섬 그러모아 방패인 양 앞에 쌓고 외쳤다. 가시 뾰족 세운 고슴도치처럼.

“씨, 씨, 씻기는 뭘 씻어!”

“……?”

“뭐! 이, 이, 아주…….”

“그럼 안 씻고 그냥 자게?”

“응큼한…… 으응?”

아가레스가 옷을 빤히 바라봤다. 그 시선 따라 이벨리아의 눈동자도 또르르 아래로 구른다.

신나게 창을 휘두르는 바람에 트롤의 피가 튀어 묻어 있었다.

“아아. 아아아. 그, 그냥 씻고 오라고? 나는 또…….”

크흠. 민망해진 이벨리아가 잠옷을 집어 들고 주춤주춤 게걸음을 쳤다.

“씨, 씻어야지. 트롤을 그렇게 잡아댔는데. 그럼! 씻어야지! 깨끗이! 청결히!”

흡사 생명줄이라도 되는 것처럼 잠옷을 꼬옥 껴안고 호다닥 달려간 이벨리아가 욕실로 들어가 문을 쾅 걸어 잠갔다.

잠시 뒤, 문 너머로 시원하게 흐르는 물소리.

“후…….”

그냥 물소리일 뿐인데 왠지 모르게 입이 바짝 말라, 악마는 커다란 손으로 얼굴을 쓸어내렸다.

“……물러가라, 음란 마귀.”

효과가 검증되지 않은 주문을 육성으로 외면서.

***

시원하게 떨어지는 물줄기 한가운데에서 이벨리아는 두 손으로 얼굴을 가렸다.

“……뭐야. 나 왜 이래.”

왜 이렇게 기름칠 안 된 목각인형처럼 굴어. 우리가 하루 이틀 본 사이야?

진명(眞名)을 받고 서로 연이 얽힌 게 언젠데. 그저 혼례식 한 번 했다고 이렇게 심장이 뛰고 머리가 어지러울 일이냐고.

“정작 떡 줄 토끼는 생각도 안 하는 것 같은데…….”

아까도 봐. 씻고 나오라는 그 표정이 얼마나 담백했어? 기름기 쪽 뺀 닭가슴살도 그보단 덜 퍽퍽할 거다.

“그래. 혼례식 치렀다고 토끼가 삽시간에 음란 토끼로 변해서 막, 어? 막, 그러지는 않겠지. 걔가 얼마나 점잖은 토끼인데.”

……아니, 그건 또 그거대로 문제네.

“그러면 뽀뽀 이상으로 나아가려면 내가 유혹을 해야 하는 건가?”

목욕을 마치고 김 서린 거울에 자신을 이리저리 비춰보던 이벨리아는 결심했다.

“……그래. 아무리 그래도 명색이 신혼여행인데 비밀기지에서 하던 것처럼 뽀뽀만 하고 끝내기엔 좀 아쉽지.”

관능미라고는 일절 찾아볼 수 없는 그저 원피스형 잠옷. 왼쪽 어깨 부분을 주욱 끌어내려 보았다. ……옷이 망가진 것처럼 이상하다.

아예 물을 이용해 작은 단검을 만들어 목부터 가슴 윗부분까지 깔끔하게 잘라버리니 조금 나은 것 같다. 나 조금 섹시한 것도 같고?

“후. 좋아. 이 정도면 됐어.”

우리 토끼, 이래도 아무것도 못 알아채는 바보 토끼는 아니리라 믿어요.

두 눈 크게 뜨고 관찰하지 않으면 알 방도 없는 새신부의 소심한 시도.

따뜻한 물의 훈기 때문인지, 속에서 치받는 열기 때문인지, 발갛게 얼굴 붉힌 이벨리아가 욕실 밖으로 나왔다.

***

달칵.

문 열리는 소리가 천둥처럼 들린다.

틈새로 좋은 향이 물씬 풍긴다. 향유 따위 없음에도 평소와 다름없이 달콤하고 깊은 향. 아마 네 본연의 향이었던 모양이다.

악마는 입 밖으로 튀어나올 것처럼 뛰어대는 심장을 내리눌렀다.

숨이라도 참으면 멈출까 싶어 호흡조차 내뱉지 못한 채로. 정신 차려, 망할 심장.

“개운하다-!”

“…….”

“너도 씻고 와, 토끼.”

“……너 옷이 왜…….”

“뭐? 왜? 워, 원래 이런 옷인데?”

“원래 그렇게 천이 모자라게 쓰였어? 잠옷이?”

“요즘 수도엔 이게 그, 뭐야, 어, 트렌드야!”

이벨리아는 뻔뻔하게 고개를 치켜들었다. 널 유혹하려고 내가 잘랐어, 하면 없어 보이잖아.

그저 담담히 고개를 끄덕인 악마는 부인의 뺨에 느릿하게 입을 맞추고 웃옷을 위로 올려 벗었다.

“……!”

“쉬고 있어.”

왠지 모르게 낮게 갈라진 목소리다.

욕실로 들어가는 뒷모습, 전장에서 늘 맞대던 든든한 등의 민낯을 바라보던 이벨리아는 자신도 모르게 꿀꺽 침을 삼켰다.

‘……광배근 만만세.’

***

도를 닦듯 가장 차가운 물을 뒤집어써도 솟구치는 열기를 가라앉히기에는 턱도 없다.

악마의 눈앞에는 자꾸 엄한 것이 아른거렸다.

- 쏴아아아아.

가열하게 쏟아지며 등을 쳐대는 물줄기가 그를 다그치는 것만 같다. 정신 차리라고. 음란 마귀 훠이 훠이 물러가라고.

“미쳤나, 진짜.”

악마란 모름지기 얌전하고 조신한 맛이 있어야 하는데. 눈이 돌아 네게 짐승처럼 달려들면 안 되는데.

마음을 다잡다가도 부자연스럽게 찢겨 있던 잠옷의 목 부분이 꼭 네가 전하는 어떤 메시지인 것만 같아 자꾸 머리끝에서 발끝까지 어색한 열기가 내달린다.

‘진정하고. 와인 마시면서 얘기부터 하자.’

뭐든 순리대로. 이브 눈치 잘 보고.

한참 마음을 다잡은 아가레스가 욕실 문을 열었다. 그리고-.

“고로롱-.”

작은 동물처럼 이불을 돌돌 말고 잠든 부인을 보고.

“……하.”

허탈한 웃음을 흘렸다.

“애태우는 데는 뭐 있지, 진짜.”

***

오늘 밤은 만월이다. 네가 좋아하는.

테이블 위에는 네 선호에 맞춘 달콤한 와인도, 네가 즐기는 케이크와 과일도 있는데.

……무엇보다, 모처럼 단둘만 있는 신혼여행인데.

“…….”

이대로 잠들기는 아무래도 아쉽다.

하여, 악마는 조금 욕심을 내보기로 했다. 색색 숨을 내쉬는 부인의 머리칼, 이마, 코, 뺨, 그리고 입술에 차례로 입술을 지분댔다.

“……이브.”

새액, 새액, 입술 사이 새는 숨결이 달다. 한 번 더 머금으며, 달을 등지고 어둠 위로 내려앉은 악마가 속삭였다.

“나랑 놀자.”

“……우으응.”

“잠은 내일 실컷 자게 해줄게.”

“으으…… 뭐야아…….”

새가 쪼듯 계속되는 입맞춤에 이벨리아가 부스스 눈을 떴다.

서서히 드러나는 푸른 눈동자는 어김없이 악마의 영혼 밑바닥까지 속박했다. 심장이 죄어드는 통증이 기껍다.

자신을 빈틈없이 덮고 놀아달라 보채는 덩치 큰 악마를 보며 이벨리아는 졸린 눈으로 픽 웃고 말았다.

“뭐 하고 놀 건데.”

“…….”

“나를 이렇게 깨웠으면 재밌는 거 해야지.”

“……와인 마시면서 얘기할까?”

이벨리아가 키득 웃었다. 이 바보. 우리 숙맥. 하여간 왕께서 꼭 이끌어줘야 따라오지.

가는 팔이 악마의 목을 감싸 가까이 내렸다.

코와 코가 맞닿는다. 숨결과 숨결이 섞이고. 시선과 시선이 얽힌다.

“아니. 그거 말고.”

누가 악마인지. 요요한 눈을 곱게 접어 웃으며, 이벨리아가 속삭였다.

“다른 거.”

“…….”

“지금 네가 생각하는 그거.”

허락해준다면 망설일 이유가 없다.

우리는 이제 부부니까.

찰나 본능이 이성과 같은 높이로 치솟는다.

입술에 가닿던 화인이 목으로, 그 아래로, 또 그 아래로, 조금씩 떨어진다. 희게 쌓인 눈에 틈 없이 발자국 남기고 싶은 욕망으로.

새로운 곳에 온기가 새겨질 때마다 이벨리아는 덫에 걸린 참새처럼 몸을 떨었다.

“흐으…….”

달뜬 소리를 삼켜주는 창밖의 파도가.

달아오른 표정을 숨겨주는 커튼 뒤 흐린 달빛이.

혼몽하게 부유하는 정신으로 다행이야, 생각하며 이벨리아는 자신의 양옆을 짚은 연인의 팔을 꽉 붙잡았다. 그러지 않고서는 견딜 수가 없었다.

지난 많은 날 밤을 조각조각 그러모아 이 밤에 모조리 덧붙인 것처럼-.

밤은 길었고, 새벽은 아직 멀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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