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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녀님의 꽃밭에는 그들이 산다-311화 (311/323)

##  311화: 외전. 드디어 부부

혼례식 시작까지 어느덧 한 시간도 채 남지 않았다.

벌써 지쳐 축 늘어진 이벨리아가 초콜릿 하나를 더 꺼내 입에 물었다.

‘내가 아는 사람이 이렇게 많았을 줄이야.’

개인적 친분을 가지고 대기실로 찾아오는 이들의 인사를 일일이 받느라 입꼬리는 쥐가 나서 바들바들 떨릴 지경이었다.

물론, 들어온 하객들의 입매도 부들부들 떨리고 있었다.

고운 신부 뵙고 인사 올리고자 대기실에 찾아왔건만, 바로 앞에서 수문장처럼 떡하니 지키고 있는 신랑의 눈매가 예사롭지 않았기 때문이다.

참으로 아름다우시다는 것을 입 밖에 내면 감히 네가 내 연인에게 흑심을 품었냐며 때리실 것 같고.

그렇다고 덕담을 건네지 않으면 감히 네가 내 반려를 무시하냐며 죽이실 것 같고.

하여 하객들은 마치 짜기라도 한 것처럼 ‘하하하, 참 아름다우십…… 아니, 참 좋아 보이십니다!’라는 애매한 인사를 건네고 돌아갔다.

연인이 특유의 그 싸늘한 눈매로 본의 아니게 하객들을 겁주고 있다는 사정을 알 리 없는 이벨리아는 자리에서 벌떡 일어나 말했다.

“나 잠깐 나갔다 올게!”

“드레스까지 다 갖춰 입으시고 어딜 가셔요!”

“답답해서 그래. 요기 밖에만 슬쩍 보고 올게. 아주 조심조심!”

“그러면 공작 각하께 잠시 자리를 좀 비켜주십사 말씀 올리겠습니다.”

“…….”

“공작 각하를 뵙고 싶어 꾀를 쓰셨군요.”

“……피도 눈물도 없는 테사.”

“피와 눈물만 없는 줄 아십니까. 어림도 없습니다.”

“……쳇.”

이깟 관례 누가 만들어선.

우리 토끼 밖에서 혼자 심심할 텐데. 내가 얌전히 기다리라고 했으니까 진짜 돌이나 나무처럼 착하게 기다리고 있을 텐데.

입이 댓 발 나온 이벨리아가 툴툴대던 찰나였다. 천막이 휙 열리며 익숙한 목소리가 들려왔다.

“어휴. 주군 표정 봤어? 어마어마해.”

“혼례가 아니라 장례 치르러 오신 분이라 해도 믿겠더군.”

“로노베가 한사코 땅콩 폐하를 못 뵙게 막았다잖아.”

심지어 주군 빼고 모두가 이 대기실을 들락거리는데, 애가 타실 만도 하지.

곧 터져버릴 것 같던 주군의 눈빛을 떠올리며 바르르 몸을 떤 마르바스가 큰소리로 외쳤다.

“땅콩 폐하! 뭘 그렇게 준비하고 있어! 호박에 줄 긋는다고 수박 되는 거 아니…… 아니, 이게 되네?”

“건방진 잔디 조동아리를 콱 그냥.”

“평소에도 수박이셨지만 오늘은 더더욱 수박이십니다, 왕이시여.”

“들었어? 바르바토스 보고 좀 배워. 이게 올바른 수하의 모습이라고.”

그러자 마르바스가 헹, 콧방귀를 뀌고선 바르바토스에게 삿대질했다.

“지록위마(指鹿爲馬). 사슴을 가리켜 말이라 하면 간신이라지. 네놈은 호박을 보고 수박이라고 했으니 역사에 길이 남을 간신이다.”

“잔디야말로 역사에 길이 남을 불충한 신하야.”

그러다 잠깐 멈칫. 이 말 어디서 많이 듣던 말인데.

……우리 가문을 보는 황실의 기분이 이랬을까?

“하옥할까요, 왕이시여.”

“일단 잡일 팀장인지 뭔지 맡고 있다고 하니까 혼약식 끝난 후에.”

“명 받들겠습니다.”

쿵짝 잘 맞는 대화에 마르바스가 입을 삐죽였다.

“땅콩 폐하. 내가 땅콩 폐하 아가 폐하였을 적부터 등에도 태우고 머리도 뽑게 해주고 온몸 바쳐 놀아드렸는데 정작 총애는 저놈에게 주기 있어?”

“잔디는 불경하잖아. 불경한 악마에게는 총애 없어. 차가운 쇠창살과 딱딱한 빵만 있지.”

“허, 폭군이야?”

“삿된 신하 벌주는 건 성군이야.”

푸른 눈이 엄하다. 땅콩 폐하는 말랑말랑한 것처럼 보여도, 의외로 자기 권위를 갉아먹는 수하에겐 단호했다.

도르르 눈 굴려 눈치를 보던 마르바스가 헛기침하며 돌연 목소리를 깔았다.

“땅콩 폐하.”

“왜.”

“그간 꼭 하고 싶은 말이 있었어.”

“뭔데.”

마르바스는 어울리지 않게 머뭇거리다가 어렵사리 입을 열어 던지듯 내뱉었다.

“고마워.”

“……?”

“주군이 이 세계에 발 딛고 살아가게 해줘서.”

진지한 표정으로 고개 숙이는 잔디 악마를 바라보며, 이벨리아가 답했다.

“감옥 가기 싫어서 용 쓰는 거라면 이미 늦었어.”

마르바스가 인상을 팍 찌푸렸다. 감동도 없고 낭만도 없는 땅콩 폐하 같으니라고.

“가서 이거나 렐리안한테 좀 전해주고 와. 식장에 있을 거야.”

대충 휘갈겨 쓴 쪽지에는 배가 고파. 졸려. 시간을 좀 앞당겨서 식을 진행하면 안 될까? 등등의 호소가 적혀 있었다.

으르렁 울리는 소리와 함께 거대한 사자로 변한 마르바스가 쪽지를 입에 물고 훌쩍 도약해 사라졌다.

그 뒷모습을 바라보던 이벨리아가 문득 궁금하다는 듯 고개를 기울였다.

“근데 사자로 변한 마르바스 머리 위만 잔디색인 건 어떻게 안 되는 거야?”

“저놈 임의대로 바꿀 수 있습니다.”

“엥? 근데 왜 안 바꾸고 한결같이 고집 중이야? 우스꽝스러운데.”

“왕께서 웃으셨으니까요.”

“응?”

“처음 만나셨던 날, 사자로 변한 저놈의 머리 위를 보며 웃으셨다고 들었습니다.”

“그러……긴 했던 것 같아.”

“자기 머리 위가 푸릇푸릇하다는 건 그때 자각했지만, 왕께서 기꺼워하시기에 굳이 바꾸지 않는다고 하였습니다.”

“…….”

내가 그동안 그렇게 놀렸는데도?

뭐야, 잔디. 꽤 기특한 악마였잖아.

“땅콩 폐하! 전하고 왔다!”

삽시간에 쪽지를 전하고 다시 천막 안으로 뛰어 들어온 사자. 이벨리아가 까닥 손짓했다.

“이리 와, 잔디.”

“왜. 뭐. 때리려고?”

“아니. 예뻐해 주려고.”

“그럼 난 주군께 죽어 가죽만 남을 건데도?”

“……감옥 보내기로 했던 거라도 취소해줄게.”

“갑자기?”

영문을 알 수 없이 내려진 총애.

그러나 늘 바라던 일이기에 사자는 푸릉 콧김을 뿜으며 왕의 발치에 몸을 웅크렸다.

이바스 저택에서 처음 만나 이벨리아가 배를 잡고 놀려댔던 그날처럼, 머리 위 털 몇 가닥은 여전히 꽃이라도 열릴 것처럼 파릇파릇했다.

***

곧이어 드넓은 천막이 꽉 차 보이게 꾸역꾸역 밀고 들어온 건 아르티나 기사단이었다.

아르칸이 가주직을 이어받은 뒤 새로운 기사들이 선발되면서 기사단에도 새로운 바람이 불었지만, 그럼에도 여전히 달라지지 않은 것 하나.

“으디 악마 놈들이 우리 아가씨의 대기실에!”

“허어, 말세로다. 막내야, 소금 가져와라!”

“막내야, 성수도 가져와라!”

바로 그들의 공공연한 명칭은 변함없이 ‘미친개 기사단’이라는 것.

헤롤드와 알렉이 마르바스와 바르바토스의 머리를 냅다 검집으로 내리쳤다.

나름 고위 악마인 둘은 어렵지 않게 몸을 돌려 피하면서 코웃음을 쳤다.

그렇게 이벨리아를 가리던 악마들이 잠시 비켜나자, 곰 같은 덩치의 기사들이 우어엉 소리를 내며 일제히 달려들었다.

“아이고, 우리 아가씨-!”

“세상에. 우리 꼬질꼬질 아가씨가 이렇게 아름다우시다니.”

“아가씨께선 원래 아름다우셨습니다, 알렉 경.”

“나무 열매 줍고 다니시던 때는 꼬질꼬질하셨지. 그 이후에도 대부분은 꼬질꼬질하셨어.”

“누가 저놈 입 좀 막아라.”

단장 에딘의 명에 헤롤드와 드웬이 신속 정확하게 알렉의 입을 틀어막았다. 요 조동아리. 사악한 조동아리.

알렉이 읍읍 소리 내며 구석으로 끌려가자 삽시간에 조용해진 대기실 안.

오래도록 함께한 기사들을 느리게 훑어보던 이벨리아의 눈이 검집에 달려 빛을 내는 꽃잎에 가닿았다.

“그 꽃잎 내가 아주 어릴 때 줬던 건데.”

“맞습니다. 아가씨께서 네 살 축복제 때 잡아 나눠주셨던 꽃잎이지요.”

“근데 최근 입단한 기사들 검에도 다 달려 있네?”

“명운을 달리한 기사들의 검에서 빌렸습니다.”

입단한 기사들만큼 전사한 기사들도 많다는 뜻이다. 카론이 말을 이었다.

“아가씨께서 꽃잎을 주셨던 날 다들 맹세했습니다.”

“……무엇을?”

“한 놈도 죽지 말고 아가씨께서 장성하시는 모습을 지켜보자고.”

“…….”

“대부분 지켜지지 못했지만, 이 꽃잎에는 가장 앞장서 전장을 누비면서도 끝내 반드시 아가씨 곁으로 돌아오자는 결기가 그대로 담겨 있습니다.”

카론이 검집에 달린 꽃잎을 톡 건드렸다. 세상 험난함 모르던 그 시절 봄날처럼, 꽃잎이 허공에서 하늘하늘 흔들린다.

“그래서 죽은 기사들의 것을 신입들에게 달아주었습니다. 죽은 이들도, 산 이들도, 같은 마음일 테니까요.”

“…….”

설명드리다 보니 분위기가 조금 가라앉았다. 머쓱하여 카론이 다소 가볍게 말했다.

“아가씨. 밖에는 온통 웃음이 가득합니다.”

“그러게. 태평성대야.”

“아가씨께서 만드셨지요.”

“아니.”

스러진 검날 위에 다시 말을 달리며.

떨어진 꽃잎을 다시 쥐어 올리며.

찢어진 황금 용의 깃발을 또다시 하늘 높이 휘날리며.

“우리가 함께 만들었지.”

이곳에 있는 나와 너희가 만든 태평이자.

이곳에 없는 많은 이들이 목숨 바쳐 만든 성세.

딛고 선 이곳은 그대들의 무덤 위에 피운 꽃밭이다.

“……다들 있으면 더 좋았을 텐데.”

기사들은 고사리손으로 열매를 건네주던 그들의 아기씨를, 아니, 이제는 창칼 난무하는 전장 최전선에서 달리는 그들의 주군을 바라봤다.

담담히 읊조리는 저 표정 아래, 수도 없는 이들의 죽음이 하나하나 무겁게 침전해 있는 것을 모르지 않는다.

“아가씨.”

“응, 카론.”

“이제 그저, 행복만 하십시오.”

칼도, 창도, 비명도, 무덤도 죄다 뒤에 두시고.

그 고운 손 부르트도록 만들어낸 이 태평성대에서-.

부디 행복만 하십시오.

***

흘러가는 구름 한 조각 없이 하늘은 청명하다.

귀족이고 상인이고 웃음이 끊이질 않는 이 산맥. 유일하게 초조한 이가 하나 있었으니- 바로 혼례식 사회를 맡기로 한 이크리안 카시스였다.

“……떨리는데.”

“오라버니가 긴장할 때도 있어?”

“오늘이 오기까진 나도 몰랐던 사실이야.”

“그만 좀 떨어. 물을 입에 넣는 거야 옷에 뿌리는 거야!”

“까딱 실수라도 했다간 날 잡아먹을 이들이 여럿이잖아.”

공녀님께서 물으셨을 때 안 한다고 할걸. 쉽사리 그러겠다 대답했던 자신의 입을 몽둥이로 치고만 싶었다.

“공녀님 어리실 적엔 동화책 공장 공장장이었고, 전쟁 다니실 적엔 편리한 마법 공장 공장장이었고, 이젠 혼례식 사회 공장 공장장까지…….”

오라버니의 투정 따위 귓등으로도 듣지 않은 채, 렐리안이 이크리안의 옆구리를 콕콕 찔러댔다.

“시작해, 시작!”

“잠깐. 마음 좀 가다듬고.”

“가다듬을 시간 없어! 각하가 로드 위로 올라오셨잖아!”

“아, 아직 입장하라고 안 했는데?”

“아침부터 내내 공녀님을 못 뵙게 하는 바람에 뵈는 게 없으셔, 지금.”

“아무리 뵈는 게 없어도 그렇지…… 어어! 신랑 입장!”

사회자의 호령은 듣지도 않고 제멋대로 발을 옮겨버린 아가레스는 로드 위에서 찬찬히 주변을 둘러봤다.

양옆. 아래. 저 멀리까지. 사방천지 자리 잡은 악마와 인간 모두 귀가 먹먹해지도록 환호성을 지르고 있다.

“…….”

누가 상상이나 했을까.

일생 세계의 배척을 받던 내가, 맑은 날 이토록 큰 축하 속에 이 길을 걷게 될 거라고.

매 순간 강한 파도처럼 밀어내던 세계 속 발 딛고 서게 해준 유일한 닻.

가슴이 뻐근하게 벅차오른다.

네가 보고 싶어서 죽을 것만 같았다.

악마는 그대로 발을 멈추었다.

“신랑, 계속 입장하셔야 하는데……?”

사회자의 당황한 음성. 그리고 제국민들의 의아한 눈빛.

아랑곳하지 않은 채, 아가레스는 망설임 없이 몸을 돌려 로드의 처음으로 돌아갔다.

***

이벨리아를 태운 꽃마차는 주변을 한 바퀴 유유히 돌고 혼례식이 치러지는 공터 앞에 멈춰 섰다.

거동이 쉽지만은 않은 드레스 때문에 하녀들의 도움을 받아 식장 안으로 들어가자.

“응?”

당연히 로드의 끝에서 기다리고 있을 줄 알았던 토끼가 시작점에 서 있다.

통상적인 절차와는 다른 상황에 이벨리아가 아가레스의 팔을 잡으며 조용히 물었다.

“아스. 왜 아직 여기 있어?”

“…….”

“아스?”

그러자 퍼뜩 정신 차린 아가레스가 살짝 고개를 흔들었다.

“……뭐라고 했지? 눈이 멀어서 못 들었다.”

“왜 아직 여기 있었냐구. 신랑은 먼저 로드 끝에 가 있는 게 관례인데.”

“내 앞길은 단 한 걸음도 너 없이는 걷지 않아.”

그깟 관례 따위 다 무슨 소용이야. 관례를 만들어낸 오랜 시간과 역사 그 위에 우리의 연(緣)이 있는데.

“함께 걷자. 처음부터 끝까지.”

청하는 말에, 이벨리아는 방긋 웃으며 연인의 팔에 손을 올렸다.

“익숙하네.”

비밀기지. 연회장. 전쟁터. 저 하늘 위. 심지어 얽히고설킨 전생까지.

그 모든 길을, 우리는 지금처럼 서로 나란히 손잡고 걸었으니까.

앞이 아닌 서로를 보고 천천히 나아가는 둘의 위. 화동을 자처한 엔리르가 폴폴 날아다니며 색색의 꽃잎을 흩뿌렸다.

- 와아아아아!

산맥을 가득 메운 하객들의 함성에 이벨리아가 활짝 웃음 지었다.

딱 내가 바랐던 혼례식이야. 모두의 축제와도 같은.

춤을 추듯 가벼운 걸음으로 로드 끝에 다다른 둘에게 이크리안이 엄숙하게 물었다.

“크흠. 질문드리나 마나일 것 같기는 하지만…… 신부는 신랑을 생의 끝까지 사랑하겠습니까?”

“물론. 그 너머까지.”

“신랑은 영원토록 신부를 존경하고 받들 것을 신께 맹세하겠습니까?”

“……신께?”

마뜩잖다는 듯 읊조린 아가레스가 답했다.

“맹세하지. 신이 아닌, 나의 이브에게.”

“아니, 신께…….”

“신은 집어치워.”

성스러운 혼례식은 신랑과 신부의 지위고하 막론하고 신이 주관한다는 것이 통념이다. 그런데 무려 신랑의 입에서 나온 ‘신은 집어치워’.

하객들이 눈을 휘둥그레 떴다. 신에 대한 한결같은 반감에 이벨리아가 키득 웃으며 속삭였다.

“신 섭섭하겠다.”

“내 신은 너 하나야. 그에 반하는 신을 모두 저 하늘에서 떨어뜨리더라도.”

큰 목소리는 아니었지만, 페르세스가 일으킨 바람이 신랑과 신부의 말을 구석구석 전했기에 듣지 못한 이는 없었다.

“와아아아아-!”

다시금 이는 커다란 함성 속.

성큼 다가선 아가레스가 이벨리아에게 입을 맞췄다.

영혼 끝자락까지 경배하는 이에게 닿듯 누가 보아도 조심스러운 입맞춤.

마치 이곳에 모인 모든 이들에게, 또 세계에게 선포하는 듯했다.

나의 반려이자 유일한 신이라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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