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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녀님의 꽃밭에는 그들이 산다-310화 (310/323)

##  310화: 외전. 지상최대 결혼식 (3)

현 시각, 혼약식장에서 가장 바쁜 이들을 꼽자면 단연 정령왕들이었다.

세상 모든 일을 인력(人力)으로 해낼 수는 없었고, 인력이 닿지 못하는 일에는 부득이 그들이 나서야 했으니까.

예를 들어, 날씨, 습도, 하늘, 바람, 기온, 뭐 그런 것들.

주변을 휘휘 둘러보던 이프리트와 페르세스가 눈살 찌푸리고 툴툴댔다.

“야, 엘라임. 대기가 왜 이렇게 축축해?”

“그래, 콧구멍이 눅눅해진다. 습기 좀 빨아들여 봐, 하마처럼!”

“……하마…….”

교양 따위 눈 씻고 찾아도 없는 동료들의 표현에 고개를 저으며 엘라임이 손을 맞부딪쳤다.

그러자 끈적하게 대기를 짓누르던 습기가 삽시간에 증발한다.

코를 킁킁대던 페르세스가 만족스럽다는 듯 웃었다.

“좋아, 콧구멍이 뽀송뽀송해졌으니 이제 내 차례!”

하늘을 일별하는 것만으로도 해를 가리던 구름이 일제히 산개한다. 숨결 한 번 불어넣으니 춘풍에는 꽃향기가 가득 담겼다.

“그 녀석은 병아리 주제에 추위도 많이 타는 편이지. 기온도 좀 바꿔야겠군.”

이프리트가 가볍게 발을 구르자 다소 서늘했던 초봄이 적당한 훈기를 품었다.

동료들의 실력 행사를 바라보던 트로이가 물었다.

“엘라임의 아가 계약자가 동물을 좋아했던가?”

“좋아한다. 맛있다고.”

“……보는 걸 말한 거였어.”

“……보는 것도 좋아한다.”

아마도? 엘라임이 불신 가득한 끝말을 삼켰다. 이를 눈치챈 트로이가 미간을 팔자로 모았다.

“지금 부르는 아이들은 먹지 말아주면 좋겠는데.”

땅의 왕이 흙을 토닥이며 알아들을 수 없는 말을 속삭였다. 그러자 정순한 기운 몇 개가 먼 곳에서 요동치더니, 이곳 산맥으로 하나둘 몰려들기 시작했다.

이윽고 풀숲 여기저기서 머리를 들이미는 것들은-.

“오, 영물?”

“이렇게 많은 영물은 오랜만에 보네.”

푸르게 빛나는 뿔이 높이 솟은 사슴. 분홍빛 털이 탐스러운 토끼.

곧 승천한다고 해도 이상하지 않을 정도로 윤기가 흐르는 뱀……. 트로이가 우려 섞인 표정으로 말했다.

“뱀. 너는 몸집 좀 키워. 여기 있는 인간 중 누가 어릴 적부터 뱀 모가지 잡기를 예사로 했거든. 몸에 좋고 맛도 좋다나.”

- ……!

꼬리를 떨며 혀를 날름대던 뱀이 숨을 크게 들이쉬어 몸과 가슴을 빵빵하게 불렸다.

제각기 영험하고 신비로운 자태를 바라보던 페르세스가 물었다.

“근데 웬 영물을 이렇게 많이 불렀어?”

“영물이 많은 곳에는 신령한 기운이 깃든다고 하잖아. 둘이 가장 터 좋은 곳에서 혼인했으면 해서.”

“너무 신령하면 그 악마 놈 퇴치되는 거 아니야? 가루가 되어 파스스.”

“……그건 생각을 못 했는데. 본질은 신이니 괜찮지 않을까?”

그렇게 왕들은 까마득한 과거부터 돌고 돌아 연을 맺어온 두 친우를 위해 세계를 다듬고 또 다듬었다.

번거로운 작업이었지만 귀찮지는 않았다.

겉으로 내뱉는 말은 하나같이 퉁명스러워도, 안으로 숨긴 마음은 모두 둘의 행복을 바라고 있었으니까.

***

왕들이 혼약식장을 세심히 살피던 그 무렵.

엔리르는 평소 쫑긋하던 귀를 맥없이 축 늘어뜨리고 터덜터덜 걷고 있었다.

“쫓겨났어…….”

늘 살랑거리던 꼬리 역시 빗자루처럼 땅에 질질 끌렸다.

“너무해. 누나의 동생인 나를 쫓아내다니…….”

이유라도 이해가 되면 또 몰라.

“내 털이 빠지면 얼마나 빠진다고…….”

털 날린다는 소리는 생전 들어본 적이 없다. 사뭇 억울하여 엔리르는 앞발 발톱을 세운 다음 뒷발로 일어나 자신의 배를 삭삭 긁어보았다.

우수수. 털이 민들레 씨처럼 흩날린다.

“……!”

머리 위에 머리카락이 죄 없어진 아르티나 기사단 대머리 기사 위고르처럼 빠지네.

이쯤 되면 할 말이 없다. 누나의 웨딩드레스가 까딱하면 붉은색이 될 뻔했다.

추방에 이유가 있음을 깨달은 엔리르는 시무룩 어깨를 내린 채 맛있는 냄새가 나는 곳으로 걸음을 옮겼다.

혼잡한 거리, 엉덩이를 꿍실대며 걸어가던 엔리르를 용케 알아본 제국민들이 외쳤다.

“수호룡님이다!”

“용님!”

환대하는 목소리에 엔리르의 귀가 쫑긋 세워졌다. 꼬리도 다시 힘을 얻어 살랑거린다.

수호룡이 된 이후 추앙과 숭배의 맛을 단단히 알아버린 용의 입가가 씰룩 움직였다.

“엣헴.”

엔리르가 가슴 털을 빳빳하게 부풀리고 고개를 탁 치켜들었다.

대단하시다, 멋있으시다, 한껏 치켜세우는 말들이 귀를 스치자 기분이 좋아진 용은 아예 커다란 나무 아래 자리를 잡고 앞발에 턱을 괴었다.

주변을 빙 둘러보던 엔리르가 자신을 유독 빤히 바라보고 있는 열예닐곱 살가량의 소녀를 향해 까닥 앞발을 흔들었다.

“거기, 너.”

“네?”

지목받은 소녀가 흠칫했다.

“날 빤히 바라보는 것을 보아하니 내가 아주 귀여운 모양이지?”

“……?”

“이리 와서 쓰다듬어봐도 좋아.”

“네에?”

과거 눈먼 검에 맞을 뻔한 자신을 구해주셨기에 감사하여 바라본 것뿐인데, 난데없이 존체를 쓰다듬으라니.

주춤대다가 주변 어른들의 성화에 떠밀려 나온 소녀가 나무 아래 앉아 용의 털을 쓰다듬었다.

긴장했는지 달달 떨리기는 하지만 누나의 것처럼 조심스럽고 부드러운 손길. 꽤 마음에 든다. 슬쩍 한쪽 눈을 뜬 엔리르가 물었다.

“이름이 뭐야?”

“아프릴리스입니다.”

“4월. 좋은 이름이네.”

동그란 머리를 살살 긁는 손길에 흡족해진 용은 가르릉 목을 울리며 눈을 감았다.

***

“침 떨어지는 거 봐라, 저 쉬운 자식.”

루드비히는 낯선 이의 손길을 받으며 잠들어버린 엔리르를 향해 혀를 찼다.

곁에서 산맥을 둘러보던 카밀라가 옅게 웃으며 말했다.

“국혼보다 성대한 혼례식을 치를 수 있는 분은 공녀님밖에 없을 겁니다.”

“아직도 이브에게 존칭을 쓰는 모양이군.”

“편히 말하라 하셨는데 입에 영 안 붙어서요. 다른 이들이 있을 때는 조심하겠습니다.”

“딱히. 엄밀히 따지자면 이브 역시 한 세계를 다스리는 왕이니, 나와 그대 모두 말을 높여도 이상하지 않지.”

산책이라도 하듯 천천히 거닐던 둘은 마침 신부대기실에서 나오는 길인 이샤트와 아드니엘을 마주쳤다.

호방한 성격의 이샤트가 손을 번쩍 들어 올리며 외쳤다.

“어이, 황제! 오랜만이야!”

“오랜만이다. 먼 걸음을 해주었군.”

“공녀의 혼례식에 안 올 수야 있나.”

“내 혼례식엔 안 왔던 것으로 기억하는데.”

“그대와 공녀가 같아? 공녀는 하르벤타의 은인이자 친우라고.”

하긴. 과거에 혈혈단신으로 달려가 하르벤타를 구한 것이 이브였지.

미처 갈무리하지 못한 미련은 종종 통증이 되어 심장을 할퀴고 지나간다.

만일 그때 내가 다른 선택을 했다면. 악마 놈처럼 네게 달려갔더라면…….

루드비히가 잠시 멍하니 서 있자, 카밀라가 주제를 환기하고자 이샤트에게 고개를 숙였다.

“하르벤타의 영원한 홍염을 뵙습니다.”

“오. 그 소문 자자한 황후신가.”

“제 소문이 자자합니까?”

“파다하지. 적나라하게 말하자면, 더러운 성질만큼 능력은 발군이라던데.”

“…….”

“나쁜 뜻은 아니니 부디 오해는 마시고. 우리 정도 자리에 앉은 이가 온화하면 사람들은 손뼉을 쳐주지 않거든.”

“외려 손을 자르려 들겠지요.”

“역시 뭘 좀 아시는군. 아, 신부대기실은 저쪽.”

공녀 진짜 아름다우니 꼭 보고 오시길. 말을 맺으며 이샤트가 팔랑 손을 흔들고 멀어졌다.

얼마 지나지 않아 가닿은 이벨리아의 대기실 앞.

천막을 걷으려는 루드비히의 손이 머뭇거렸다.

어지러운 성심을 눈치챘음에도 모르는 척하며, 카밀라는 아무렇지도 않게 생긋 웃었다.

“폐하. 먼저 들어가 있을 테니 천천히 들어오십시오.”

안으로 들어서니 드넓은 대기실 저 안쪽, 공녀님께서는 벌써 지치셨는지 달콤한 초콜릿을 물고 계셨다.

“공녀님.”

“카밀라!”

“매번 황후 폐하 같은 딱딱한 호칭만 듣다가 이름을 들으니 참 좋습니다.”

“너도 호칭 좀 바꿔. 렐리안도 날 이브라고 부르는데 네가 못 부를 건 뭐야.”

잠시 머뭇거리던 카밀라가 어렵사리 읊조렸다.

“오늘 정말 아름답습니다…… 이브.”

“옳지. 매번 공녀님 같은 딱딱한 호칭만 듣다가 이름을 들으니 참 좋네.”

두 친구가 동시에 옅은 웃음을 터뜨렸다.

그리고 그때.

마치 가면이라도 쓴 것처럼 표정을 갈무리한 루드비히가 들어왔다.

그러나 애써 힘을 준 눈매는 꼿꼿하게 앉은 친우를 보자마자 맥없이 풀려버린다.

그의 오랜 구원은 지독히도 아름다웠다. 마치 닿지 못하는 별이 더욱 고결해 보이듯.

고약한 외사랑은 아직 끝나지 않았기에, 오늘 너를 마주하는 것은 심장을 찢어발기듯 고통스럽기만 했다.

“식량 도둑! 어서 와!”

그러나 루드비히는 선황이 반려를 두고 한눈판 대가를 똑똑히 알고 있었다.

동시에 오랜 친우인 이벨리아와 이제는 동반자가 된 카밀라의 행복을 진심으로 바라기도 했다.

그러니까…… 그래.

너는 내게, ‘나의 이브’로 남지 않아도 좋다.

그저 같은 추억을 잔뜩 공유한 ‘땅 도둑’으로나마 남아주면, 나는 좋다.

아프다 우짖는 속을 외면한 채, 루드비히는 담담히 웃었다.

“솔방울이나 던져대던 그 천방지축이 언제 이렇게 커선.”

“고추냉이 넣은 빵을 속아서 홀랑 먹어버렸던 너도 이렇게 컸잖아.”

오가는 이야기 모두 다채롭게 찬란하여 어느 찰나도 잊을 수 없는 과거다. 잠시 말을 멈추고 친우를 바라보던 루드비히가 물었다.

“……행복하지?”

“응. 행복해.”

그렇다면, 이브. 나도 행복해.

너의 평안은 늘 나의 목표이자 바람이었으니까.

루드비히는 끝내 닿지 못한 첫사랑을 향해 진심으로 축복을 건넸다.

“혼인 축하해. 이벨리아.”

***

혼주(婚主)인 휴고와 엘리시아는 하객들을 맞이하느라 정신이 없었다.

겨우 한숨 돌리고 딸의 대기실에 찾아가려던 그들의 귀에, 정령왕들이 나누는 대화가 어렴풋하게 들려왔다.

“새삼 신기하네. 그때 그 인간이 이브로 다시 태어나서 혼례식을 치른다니.”

“전생이 꽤 기구하다고 했던 거 같은데. 그치, 엘라임?”

“내가 알기론 그러했다.”

딸의 전생. 그리고 기구하다는 말. 부모로서 그냥 지나치기는 어려웠다. 가까이 다가간 휴고가 엘라임에게 물었다.

“지금 그 말, 자세히 들을 수 있겠나.”

“……전생일 뿐이다. 지금의 이브와는 관계없는.”

“다른 시간, 다른 세계에 머물렀다고 해서 내 아이가 아닌 것은 아니다.”

“…….”

계약자의 전생은 어떻게 포장을 해도 듣기 좋은 이야기는 아닐 터.

엘라임이 난감하다는 듯 시선을 돌렸다. 어쩔 수 없지. 미안하다, 악마.

“나도 잘 알지는 못한다. 아마 단층에서 모든 것을 보고 온 악마 놈이 더 잘 알 거야.”

엘라임이 골치 아픈 설명을 자신에게 홀랑 떠넘겼다는 사실은 꿈에도 모른 채, 아가레스는 여전히 신부대기실 앞 바위에 주저앉아 있었다.

휴고가 하염없이 대기실 천막만 바라보는 악마의 시야를 가렸다.

“묻고 싶은 것이 있다.”

“나도 묻고 싶은 것이 있다. 이딴 관례는 대체 누가 만든 거지?”

“우연히 들었다. 내 딸의 전생에 대해.”

“…….”

“그대가 가장 잘 알고 있을 거라던데.”

“……듣기 좋은 이야기는 아니다.”

돌려 거절했으나 휴고와 엘리시아의 시선은 떨어지지 않는다.

낮은 한숨과 함께 아가레스가 입을 열었다.

“아주 어릴 적, 사고로 부모를 잃었다고 했다. 해서 친족의 집에 얹혀살았지.”

“그들은 어떤 이들이었지?”

질문을 받은 아가레스의 손에 힘이 들어갔다.

짚고 있던 바위의 일부가 그대로 부서져 모래로 화했다. 석연치 않은 반응을 바라보던 휴고가 읊조렸다.

“설마…….”

“전생의 이브는 늘 배가 고프다고 했다. 팔과 다리에 커다랗게 남은 상처를 애써 가리기도 했고.”

일순 숨이 잘 쉬어지지 않았다. 휴고의 눈앞이 핑 돌았다.

“또래의 다른 아이들은 학업에 집중했지만, 이브는 매일 늦은 시간까지 돈을 벌어야 했다. 밤이면 홀로 웅크려 울다 잠이 들었지.”

휴고는 손바닥에 진한 손톱자국이 남을 정도로 세게 주먹을 쥐었다.

그러지 않으면 눈에 보이는 뭐라도 때려 부술 것만 같아서.

“어린아이였을 때부터 계속된 학대였다. 삶을 끝낼 때까지 멈추지 않은.”

“…….”

“…….”

헐떡 숨을 몰아쉰 엘리시아가 심장께를 부여잡았다.

참담하여 뭐라 말을 할 수가 없었다.

함께 겪지는 않은 일이나, 눈에 훤히 보였다.

눈에 넣어도 아프지 않은 딸이 인간의 탈을 쓴 금수들에게 매질을 당하는 모습이.

다른 또래들을 부러운 눈으로 바라보며 일터로 떠밀리는 모습이.

아빠와 엄마를 그리워하며 소리 죽여 우는 모습도.

……내 딸.

우리가 품기 전, 그 모진 시간을 홀로 견뎌냈을 내 아가.

도무지 욱여넣을 수 없게 치받는 감정에 휴고의 기운이 어지러이 산개했다.

그와 동시.

대기실 안에서 청명한 목소리가 들려왔다.

“어? 아빠랑 엄마 왔나 보다!”

“어떻게 아셔요, 공녀님?”

“기운. 아빠 기운은 포근하고 따뜻하거든. 아무래도 또 토끼랑 한바탕하려는 모양이야.”

저렇게 맑게 재잘댈 수 있는 아이를. 소중해서 안고 어르지 않고서는 배길 수가 없는 아이를. 대체 어떻게…….

아가레스가 휴고의 어깨를 붙잡았다. 정신 차리라는 듯.

형편없이 일그러진 표정을 애써 바로잡은 휴고와 엘리시아가 천막을 열고 안으로 들어섰다.

준비를 거의 끝마친 이벨리아가 소파에 앉아 환히 웃고 있었다.

“봐. 아빠랑 엄마 맞지?”

심장을 내리치고 싶은 심정으로, 부모는 천천히 딸에게 다가갔다.

왠지 평소와 다른 부모님을 바라보며 이벨리아가 고개를 기울였다.

“아빠? 엄마?”

어느덧 혼례를 치를 만큼 자랐으나 부모에겐 일생의 끝에 가닿아도 그저 보듬어야 하는 어린아이. 휴고가 몸을 낮춰 딸을 꼭 끌어안았다.

“……아빠?”

물기를 가득 머금은 음성으로 휴고가 고요히 물었다.

“아빠가, 우리 딸에게 든든한 우산이 되어주었느냐.”

“…….”

“딛는 발이 아프지 않도록 길을 잘 닦아주었느냐.”

“…….”

“내가 네게, 부족함 없는 아빠였느냐.”

우리 아빠. 내가 혼례를 치른다고 하니 생각이 많아지셨나 봐.

배시시 웃으며, 이벨리아가 휴고의 목을 끌어안았다.

“한결같이 세상 최고의 아빠였어.”

어깨가 젖어 드는 것이 느껴졌다. 고개 들어 엄마를 바라보니 엄마의 표정도 하염없이 무너져 있다.

두 분이서 무슨 이야기를 나누셨길래, 혹은 무슨 이야기를 들으셨길래.

“아빠, 엄마, 나 좀 봐 봐요.”

이벨리아가 휴고와 엘리시아의 손을 잡고 살짝 흔들었다.

“나는 사랑을 받을 줄 알고, 사랑을 줄 줄도 알아요.”

“…….”

“의무를 지킬 줄도 알고, 지킬 힘도 있어요.”

내가 아빠와 엄마로부터 받은 건 지위와 재력 따위가 아니야.

결기와 기치. 드높은 그것을 그대로 이어받은 나는…….

“내가 봐도 참 잘 자랐어.”

“…….”

“당연한 일이지. 세상에서 가장 완벽한 부모의 등을 보고 컸으니까.”

장난스러운 확언에 휴고와 엘리시아가 짙게 웃었다.

그래, 우리 딸.

정말 잘 자랐다.

네가 세상에 나온 그날 우리가 염원했던 대로.

네 이름을 짓던 그날 우리가 바랐던 대로.

어두운 밤하늘 홀로 밝히는 샛별- 그 이름처럼 눈부시게도 자랐다.

휴고가 딸의 볼을 쓸며 말했다.

“우리 아가, 우리 딸.”

22년 전, 딸을 처음 만났을 때 건넸던 그 말이었다.

“그 모든 세계와 시간을 건너 우리에게 와줘서 정말 고맙다.”

22년 전, 그때는 돌아오지 않던 답이 이번에는 들려왔다.

“그 모든 세계와 시간 끝에 내 아빠와 엄마가 되어줘서, 나도 정말 고마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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