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309화: 외전. 지상최대 결혼식 (2)
“…….”
물속에 내동댕이쳐진 것처럼 귀가 먹먹하다.
“아스?”
부르는 연인의 목소리가 뒤늦게 귀에 들려온다.
시각적으로 과한 충격을 받으면 다른 오감이 마비된다더니, 그 어이없는 말이 진짜였나.
멍하니 자리에서 일어난 악마가 홀린 듯 연인에게 손을 뻗었다.
머리부터 시작하여 얼굴선을 따라 천천히 내려가던 손길은, 차마 가닿지는 못하고 물러난다.
의아하다는 눈빛으로 올려다보며 이벨리아가 물었다.
“뭐야? 왜 안 쓰다듬어 줘?”
“너무…….”
형편없이 갈라지는 목소리. 가다듬은 악마가 말을 이었다.
“……아름다워서.”
섣불리 손댔다가 작은 더러움이라도 묻을까 두려워.
가진 모든 것을 가져다 바치는 것으로는 모자라다. 심장까지 갈라 내어줘도 부족할 것처럼 애틋하고 소중하다.
“예뻐? 정말?”
활짝 핀 연인의 웃음꽃이 세상 그 어느 꽃보다 아름다워, 악마는 얽힌 듯 죄어드는 심장의 고통을 달게 즐겼다.
“응. 천사였던 이브보다 더 천사 같아.”
“그럼 안아줘. 말로만 하지 말고 몸으로도 표현을 해줘야지.”
몸으로.
그건 자신 있지.
“잠깐만요. 멈추세요, 각하.”
성큼 다가가 냅다 안으려는 악마를 말린 건 렐리안이었다.
“……?”
“웨딩드레스는 소재가 특별하여 쉽게 망가진답니다. 안으시면 안 돼요.”
그러자 차마 말은 못 한 채 옆에서 소매를 물어뜯고 있던 앙제스와 조수들이 격하게 고개를 끄덕였다.
바다같이 널찍한 연인의 품을 아쉽다는 듯 바라보던 이벨리아가 속삭였다.
“못 한 건 적립해둬. 이따 하자.”
“적립하면 이자가 붙지.”
“부디 이율이 높았으면 좋겠네.”
기대해도 좋아. 귓가에 속삭인 악마가 킥킥 웃는 연인을 다시 드레스룸으로 들여보냈다.
그리고 그 이후부터.
아가레스는 이벨리아가 드레스를 갈아입고 나올 때마다 실로 아낌없는 찬사를 뿌렸다.
“눈이 멀 것 같아.”
“예술이 따로 없군.”
“지금 그 모습을 조각해서 이바스 저택에 둬야겠어.”
평소 감정 표출이 적은 연인이 남들 듣기엔 다소 오그라들 정도의 격한 반응을 가감 없이 드러낸다.
오롯이 자신으로 인해 바뀐 그 모습이 못내 사랑스럽다.
덕분에 이벨리아는 지긋지긋할 줄만 알았던 드레스 시착(試着)을 예상외로 즐겁게 마무리했다.
그렇게 꼬박 하루.
이벨리아가 연인에게 물었다.
“어떤 거로 할까? 지금까지 입은 것 중에 뭐가 가장 예뻤어?”
“오늘 입은 드레스가 서른 벌이었나.”
“응.”
“디자이너가 만든 드레스는 백 오십 벌이고.”
“그쯤 될 걸?”
아가레스가 연인에게 시선을 고정한 채 앙제스에게 말했다.
“전부 두고 가도록. 값은 바로 치르지.”
“저, 저, 전부요?”
드레스 백 오십 벌이면 가격이…….
이게 참 어마어마한데…….
감당할 수 있으시겠습니까? 묻는 표정으로 바라봤으나, 이 대륙 최고 부호께서는 무슨 당연한 것을 묻느냐는 듯 담담하시다.
“허어…….”
순식간에 돈방석에 앉았다. 개인이 운영하는 의상실이 하루아침에 제국 10대 상단에도 밀리지 않는 자금력을 갖게 된 것이나 다름없었다.
쏟아지는 돈벼락에 정신이 혼미해진 앙제스와 조수들에게는 눈길조차 주지 않은 채, 악마가 연인에게 속삭였다.
“드레스를 입은 네가 한결같이 아름다워서 고를 수가 없었어. 그러니까-.”
음료를 마셔 차가운 입술에 불이라도 붙은 듯 뜨거운 화인이 내려앉는다.
“혼약식, 매년 하자. 전부 하나씩 입어보면서.”
그 로맨틱한 말에 앙제스와 조수들이 얼굴을 붉히고 어머, 어머, 탄성을 질렀다.
그리고, 토끼 언어 해석 부문 세계 최고 권위자인 이벨리아는 답했다.
“너 드레스 기억 하나도 안 나지.”
“……!”
“이놈이?”
***
혼약식을 위해 준비해야 할 것은 아주 많았다.
식장과 드레스 선택은 시작이었을 뿐, 그 외에 음식, 청첩장 등등…… 형식을 중요치 않게 생각하는 이벨리아에게는 오만가지 귀찮은 일의 향연이었다.
하여 대부분의 일은 괴상한 준비위원회에 맡긴 채, 혼약식이 불과 나흘 앞으로 다가온 오늘.
이벨리아는 마지막 일을 끝마치기 위해 커다란 양피지를 바닥에 깔아두었다.
“으음…… 뭐라고 쓰지?”
그러자 초콜릿 두 알을 들고 뽈뽈 날아다니던 엔리르가 고개를 갸웃했다.
“누나, 그건 또 뭐야? 또 반성문 써?”
“내가 이제 그런 거 쓸 나이는 아니지.”
“예전에 쓰던 반성문 아직도 다 못 썼잖아. 벌써 몇 년이나 지났는데. 혹시 어디 있는지 잊어버렸을까 봐 말해주자면, 누나가 침대 밑에 숨겼어.”
“……엄마도 그건 이제 잊으셨을 거야. 그나저나, 이리 좀 와 봐.”
“왜?”
물으면서도 붉은 용은 착실하게 고도를 낮추어 양피지 옆에 착지했다.
그러자 이벨리아가 용의 앞발에 곱게 쥐여 있는 초콜릿 두 알을 빼앗아 입에 휙 털어 넣었다.
“앗! 내 초콜릿!”
그러고서는 엔리르가 항의할 틈도 없이 몸통을 불쑥 들더니, 꼬리를 코코아 잔에 푸욱 담갔다.
“앗! 내 꼬리!”
“옛날에 벽보 썼을 때처럼 붓 대용 좀 해줘.”
“뭘 쓰려고?”
“청첩장.”
“그건 이미 다 돌렸잖아. 나도 침대 위에 하나 걸어뒀는데?”
“그 청첩장 말고, 이건 제국민들에게 보내는 청첩장이야.”
“제국민들?”
“응. 모처럼 산맥 전체를 식장으로 바꿨는데, 보내는 청첩장이 없으면 서운하잖아.”
이벨리아가 엔리르의 몸통을 잡고 꼬리를 붓처럼 사용해 글씨를 써 내려갔다.
「청첩장」
다들 알다시피, 나 결혼해.
가장 친한 친구이자, 등을 믿고 맡길 수 있는 전우이며, 언제든 기댈 수 있는 버팀목이고, 일생을 내어줘도 아깝지 않을 토끼, 그러니까…… 루페르트 공작이랑.
시간이 된다면 모두 참석해서 축하해줘.
축의금은 사절이야. 마음만 받을게.
와서 맛있는 거 많이 먹고 가!
“좋아. 이 정도면 됐어.”
“누나. 축의금은 사절이야 부분은 잘못 적힌 것 같아. 축의금은 환영이야로 바꿀까?”
“벼룩의 간을 빼 먹어라, 이 악룡아.”
“치, 아쉽다. 한탕 거하게 땡길 기회였는데.”
“너 그런 말은 또 어디서 배웠어?”
“예전에 내 용구멍 털다 걸린 멍멍이 기사단이 그랬어.”
“하여간 그놈들은…….”
이벨리아가 낮게 한숨 쉬며 고개를 저었다.
“가서 이 벽보나 전해줘. 꼼꼼히 붙이라고 해.”
“응!”
그렇게, 제국민 모두를 하객으로 초청하는 전례 없는 혼약식.
이른 새벽 길목 곳곳에 방이 나붙자 수도부터 항구까지 제국 전역이 또 한바탕 들썩인 것은 당연지사였다.
***
바야흐로 혼약식 당일, 아직 어두운 새벽.
혼인식이 치러질 산맥의 본래 지명은 ‘델타’였으나, 얼마 전 그 소유주가 바뀌면서 지명 역시 바뀌었다.
소유주는 아레스 루페르트 공작으로.
지명은 아이테르 아모르(aeter amor)로.
무슨 뜻이냐고 묻는 이벨리아에게, 악마는 답했었다.
아이테르(aeter), 영원한.
아모르(amor), 추앙.
혼약식 장소 지명이 마음에 들지 않는다는 이유로 산맥을 통째로 사들여 입맛대로 바꿔버린 그 추진력에는 아르티나 일가도 고개를 저었더랬다.
여하간, 하루아침에 명칭이 바뀌어버린 산맥 입구에는 아직 해 뜨지 않은 이른 시간임에도 불구하고 인파가 가득했다.
“거 밀지 좀 맙시다!”
“난 어젯밤부터 여기서 기다렸다고!”
“어젯밤? 여기 어제 오후에 온 사람도 있어! 저리 비켜!”
“조심 좀 해요! 애가 부딪히잖아요!”
몇몇 사람들이 큰 소리를 내기 시작하자, 혹시 모를 불상사를 막기 위해 자리를 지키던 아르티나 기사단이 몸을 일으켰다.
어느덧 중년의 나이에 접어들면서 더욱 압도적인 기백을 품게 된 헤롤드가 발을 쿵 굴렀다.
제국민들에게 아르티나 기사단은 우상이나 다름없기에, 여기저기서 ‘기사단이다!’ 외치는 소리가 들려왔다.
관심종자 헤롤드가 크흠 헛기침하며 말했다.
“다들 진정하시오! 혼인식장은 이 산맥 전체이니 못 들어갈 리는 없소!”
모두 수용할 수 있다는 말에 서로 밀치던 힘이 조금씩 줄어들었다.
누군가 손을 번쩍 들고 물었다.
“기사님. 혹시 음식을 팔아도 괜찮습니까?”
“그건 자유요.”
그러자 이 대대적인 축제를 이용해 한몫 단단히 잡으려는 상인들이 주섬주섬 좌판을 깔기 시작했다. 바라보던 헤롤드가 말을 이었다.
“다만, 구매하는 이들은 대금을 치를 필요가 없소.”
“예?”
“그럼 공짜로 나누라는……?”
“판매된 음식과 물건의 값은 모두 아르티나와 루페르트, 두 가문에서 지불할 거요.”
“……!”
“……!”
제국민들의 머리가 재빨리 돌아갔다.
그러니까, 판매자는 두 공작가에서 값을 받고, 구매자는 공짜로 살 수 있다고?
두 가문이 값을 대신 치른다면 구매율 역시 훨씬 높아질 터. 그렇다면 상인들에게도 호재다.
작정하고 팔러 온 이들과 작정하고 즐기러 온 이들의 얼굴이 모두 밝아졌다.
뭐라도 하나 얻어먹을 수 있을까 하여 산맥으로 올라온 굶주린 아이들은 이미 자리를 꾸리던 점포에서 꼬치 몇 개를 순식간에 해치웠다.
활기가 들어찬 노점을 바라보며 헤롤드는 만족스러운 표정으로 고개를 끄덕였다.
“오늘만큼은 이 제국 그 누구도 굶주려선 안 되지. 우리 아가씨의 경삿날인데.”
이미 산맥 밖에도 수도와 변방 가릴 것 없이 구휼미를 풀어둔 터다.
“혼약식은 산맥 중턱의 공터요. 보고 싶은 이들은 오후에 그곳으로 오시오!”
안내 후 돌아서는 헤롤드에게 누군가 조심스레 물었다.
“기사님, 가져온 선물은 어디에 두면 될지요?”
“선물?”
“그, 축의금은 받지 않으신다고 하여 약소하나마 선물이라도 준비를 해보았는데…….”
그러자 헤롤드 옆에서 태평하게 양꼬치를 뜯고 있던 알렉이 심드렁하게 입을 열었다.
“그런 건 안…… 으읍!”
뒤에 무슨 악랄한 말이 나올지 익히 짐작한 헤롤드가 풀을 뜯어 알렉의 입에 쑤셔 넣고 대신 답했다.
“공녀님께서 기꺼워하시겠군. 가져온 선물들이 있다면 저쪽 군청색 대가리, 아니, 군청색 머리의 기사가 안내하는 곳에 놓으시오.”
카론이 늘 그렇듯 차가운 표정으로 제국민들에게 까닥 손짓했다.
“…….”
“……저 기사님을 따라가면 되는 겁니까?”
따라가면 아무래도 저승으로 가게 될 것 같은데요. 저승사자의 손짓이 딱 저럴 것 같은데요. 제국민들의 머뭇거림을 읽은 헤롤드가 쯧쯧 혀를 차며 카론에게 속삭였다.
“웃어, 카론 경, 웃어.”
“…….”
“아가씨 혼약식이다. 망칠 거야?”
“……그럴 순 없습니다.”
웃어본 적이 손에 꼽는 충직한 호위기사는 모시는 아가씨의 혼약식에 도움이 되겠다는 일념으로 굳어버린 입꼬리를 빼죽 올렸다. 그러자.
“으아아아아앙!”
“엄마…… 저 기사님 이상하게 웃어…….”
악랄해 보이는 웃음에 경악한 제국민들과 박장대소하는 아르티나 기사단.
항상 고요했던 산맥은 아주 오랜만에 시끌벅적한 새벽을 맞았다.
***
신부의 휴식과 단장을 위한 대기실은 울창한 나무로 가려져 한적한 곳에 준비되었다.
연인의 것과 세트로 맞춘 예복을 입은 아가레스는 초조한 표정으로 대기실 근처를 기웃거렸다.
신랑보다 신부의 단장이 복잡하다는 것을 듣기는 했다만, 아무리 그래도 이건 너무 오래 걸리는 것 같은데.
‘혹시 이브에게 무슨 일이 생긴 건가?’
배가 너무 고프다거나, 아니면 너무 졸리다거나.
한참 배회하던 악마는 참다못해 신부대기실로 향했다.
그리고.
“못 들어가셔요.”
대기실 앞을 지키고 있던 로노베에게 단번에 저지당했다.
“내가 내 신부를 보러 가겠다는데 왜.”
“신랑과 신부는 예식 때까지 서로 얼굴을 보지 않는 것이 관례입니다.”
“그깟 관례…….”
“휴고 아르티나와 엘리시아 아르티나가 단단히 일러두고 갔지요.”
“……그럼 연인을 보러 가는 것으로 하지.”
“같은 말씀 아닙니까.”
“그렇다면 왕을 알현하러 가는 것으로.”
로노베의 눈이 엄해졌다. 말장난 안 통해요, 주군.
“벌써 해가 뜨고 있으니 몇 식경만 더 기다리시지요.”
“……이브의 아침은 제대로 챙겼나?”
“그럼요. 밥풀 폐하는 아침 거르면 이불을 물어뜯어요.”
“잠은 잘 재웠고?”
“그럼요. 밥풀 폐하는 잠이 부족하면 베개를 물어뜯어요.”
“어디 아픈 곳은 없다던가.”
“조금 전에 식사 한 그릇을 싹 비우셨어요. 산에서 호랑이가 내려온 줄 알았습니다.”
읊어드렸는데도 주군께선 도무지 돌아갈 기미가 없으시다.
여실히 보이는 마음에 로노베가 작게 웃었다. 주군의 이런 모습은 수하들에겐 항상 달가웠으니.
“평생 보고 사실 건데 그새를 못 참고 왜 이러셔요.”
“……그래도.”
시간을 몇 겹으로 잘라 나눈 그 모든 찰나 보고 싶다고.
아가레스는 다소 처량한 표정으로 대기실 근처 돌 위에 자리를 잡았다.
“주군, 여기 계속 앉아 계시게요?”
로노베가 어이없다는 표정으로 묻던 그때.
“공녀! 공녀는 어디에 있나!”
“공녀…… 나도 공녀 볼래.”
푸르른 산맥에 어울리지 않는 화염 둘이 풀숲 사이로 고개를 들이밀었다.
봉황이 그려진 옷소매를 펄럭이며 걸어오던 이샤트와 아드니엘은 돌 위에 앉아 있는 아가레스를 보고 흠칫 발을 멈췄다.
“어어?”
그들이 이 악마를 마주했던 건 대부분 전쟁터.
볼 때마다 파천(破天)에 이르는 무위를 펼치던 대악마와 지금 이 돌에 시무룩하게 주저앉은 대악마 사이엔 괴리가 커도 너무 컸다.
“그, 악마님……?”
신부대기실 입구를 뚫어지게 바라보던 아가레스가 느릿한 음성으로 답했다.
“하르벤타의 쌍둥이로군.”
“황제라고 불러주시면 감사하겠습니다만…….”
“…….”
“쌍둥이라고 불리는 게 더 좋습니다! 그보다, 여기서 왜 이러고 계십니까?”
“수하가 내 신부를 보지 못하게 막고 있다.”
흡사 이르기라도 하는 것처럼 밑도 끝도 없는 매도. 로노베가 억울하다는 듯 소리쳤다.
“관례입니다, 관례!”
“그렇다는군. 고루하긴.”
평소처럼 위엄 가득한 목소리기는 하나, 표정에는 불만이 가득하다.
이제는 꼭 인간 같으시네. 넓은 소매로 입가를 가리고 웃던 이샤트가 고개 돌려 로노베에게 물었다.
“나도 그 관례의 적용을 받는가?”
“관례는 혼인 당사자에게만 적용된다.”
“그럼 나 들어갈 수 있어?”
“물론. 주군을 제외하고는 다 가능하다.”
이샤트가 다소 뻐기듯 헛기침을 하며 아가레스를 바라봤다.
“아이고, 이를 어째. 저희는 들어가서 공녀를 만나고 오겠습니다!”
“…….”
걷다가 슬쩍 뒤돌아보니, 연인을 보고 싶어 애가 닳은 악마님이 한껏 부러운 표정으로 그들을 바라보고 있다. 이샤트가 아드니엘에게 속삭였다.
“저런 표정도 지을 줄 아시네.”
“그러게.”
“공녀는 참 재주도 좋아. 인간도 아닌 신을 잡아서 혼례까지 치르고.”
“폭군이나 다름없는 누나도 홀렸잖아. 난 그게 더 신기해.”
슬쩍 눈썹을 올린 이샤트가 손날로 동생의 머리를 내리쳤다.
- 퍼억.
그와 동시. 대기실 안쪽에서 맑은 목소리가 들려왔다.
“어라? 수박 쪼개지는 소리가 났어. 누가 수박 가져왔어?”
***
오늘만을 위해 만들어진 대기실이 맞나 의심이 될 정도로 웅장한 천막.
이샤트는 하녀들에게 둘러싸인 친구를 보고 활짝 웃으며 손을 붕붕 흔들었다.
“공녀! 나 왔다!”
“나도 왔어.”
한창 머리를 매만지고 있는 하녀들 사이로 빼꼼 얼굴을 내민 이벨리아의 입이 반가움으로 크게 벌어졌다.
“이샤트! 아드니엘! 어떻게 여기까지 왔어!”
“공녀가 혼인한다는데 안 오면 평생 후회하지.”
“둘이 같이 자리를 비워도 괜찮은 거야?”
“그래서 나만 오려고 했다. 근데 이놈이 몰래 수레에 숨어들었지. 어릴 적 사절단으로 왔을 때 하던 짓을 다 커서도 하고 있어.”
제국이 다른 데다 지위까지 남다르기에 전쟁 등의 큰일이 나지 않는 이상 만나기 힘든 친구들.
그렇기에 더욱 기꺼워 이벨리아는 크게 웃음을 터뜨렸다.
이샤트 역시 다르지 않았다. 특유의 호방한 걸음으로 터벅터벅 다가온 이샤트가 이벨리아의 손을 덥석 부여잡았다.
“공녀. 정말 아름답다.”
“고마워.”
“악마님 말고 나와 혼인할래?”
그러자 천막 밖에서 무시무시한 마기가 흘러들었다. 경고라도 하는 것처럼. 그 익숙한 기운에 이벨리아가 고개를 기울였다.
“뭐야? 토끼 지금 밖에 있어?”
“응. 처량하게 돌 위에 주저앉아 계시더라.”
“왜?”
“그 예쁜 악마가 그러던데. 못 들어가는 게 관례라고.”
맞다. 생각해보니 오라버니 혼인식 때도 그랬지.
어쩐지, 산개한 마기에서 시무룩함이 느껴진다.
이벨리아가 옅게 웃으며 속삭였다. 이렇게 작게 말해도, 내 악마, 너는 항상 내게 귀 기울이고 있을 테지.
“착하지, 내 토끼. 얌전히 기다리고 있어.”
바깥 돌 위에 앉은 악마는 마주 속삭였다. 인간인 너는 들을 수 없겠지만, 그래도 성심을 다하여.
“응. 착하게 기다리고 있을게.”
들릴 리 없음에도 마치 듣기라도 한 것처럼 속삭임이 이어 들려온다.
“조금 뒤에 만나면 그때부터는 평생 함께 있을 테니까.”
“……평생.”
악마가 목을 울리며 웃었다.
“그거로는 부족하지, 나의 왕.”
이번 생과 다음 생.
어느 날엔가 생을 모두 끝낸다면 그 이후의 세계까지.
네가 나를 밀어내지 않는 이상-.
“나는 그 모든 시간 너를 숭배할 텐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