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308화: 외전. 지상최대 결혼식! (1)
해가 바뀌어 새해의 봄.
늘 그렇듯 이맘때쯤 교역을 위해 에르카디아 제국으로 들어온 타 왕국 무역상들은 유례없이 느껴지는 활기에 고개를 기울였다.
물품과 돈이 오가는 항구도시 특성상 원체 시끌벅적하다는 점을 감안하더라도 정도가 지나쳤다.
제국 상인들 모두 땅에서 한 뼘은 떠서 걸어 다니는 느낌이었으니까.
향신료를 거래하러 온 거부가 제국 토박이 상인에게 물었다.
정보 값으로 은전 하나를 툭 건네주면서.
“이봐. 제국에 무슨 일이라도 있나? 다들 구름이라도 밟은 것처럼 들떠 보이는데.”
“아암, 있지! 아주 대단한 일이 있고말고!”
“얼마 전 있었던 국혼 때문에들 이러는 건가?”
“국혼? 그건 벌써 한 계절이나 전에 있었던 것 아닌가!”
은전을 받은 이는 변죽만 울리고 말을 할 생각은 없어 보였다. 거부가 은전 하나를 더 건넸다.
제국의 동향은 곧 돈줄이나 다름없으니. 잽싸게 낚아챈 상인이 씩 웃으며 목소리 낮춰 속삭였다.
“루페르트 공작 각하와 아르티나 공녀님께서 드디어 혼인하신다네.”
“뭐어? 혼인?”
“그렇다니까. 우리 상인들에겐 그야말로 호재가 아니겠는가.”
“언제? 언제 거행하시는지도 알고 있나?”
“바로 이번 계절이라지!”
수도 의상실에서 일하는 내 사돈의 팔촌이 전한 것이니 아주 정확한 정보일세.
그가 거들먹거리며 껄껄 웃었다.
상인들이 다들 자기 일처럼 입을 놀리는 것이 이상한 일은 아니었다.
무려 아르티나 공녀와 루페르트 공작의 혼인.
다른 표현으로 인마전쟁을 끝낸 두 영웅의 혼약.
또 다른 표현으로 마계의 새로운 왕과 오랜 지배자의 혼약.
그 모든 수식어를 빼고 간략히 정의하자면…… 그저 부정할 여지 없는 세기의 결혼.
제국민들에게 있어 이 계절에 거행될 혼인은 얼마 전 치러진 국혼보다 더 마음이 쓰이고 눈길이 가는 행사일 수밖에 없었으니까.
“나는 혼약식을 보러 수도에 올라갈 걸세.”
“잡상인 출입 금지일걸?”
“팔러 가는 거 아니고 구경하러 가는 거라고!”
“자네 관상에 잡상인 티가 번지르르해서 문전박대당할 게 뻔하구먼, 뭘.”
혼약식에 대해 밝혀진 것은 아무것도 없었지만, 그렇기에 오히려 추측에 추측이 더해지면서 회자되는 횟수는 날로 늘어만 갔다.
소금 꾸러미를 수레에 얹고 지나던 상인이 왁자한 가운데 덧붙였다.
“이건 비밀인데, 내 자네들에게만 알려줌세.”
“무슨 비밀?”
“내 친우의 장인어른의 절친한 벗께서 베르타샨 백작님의 혼약식에서 술을 나르셨단 말이지. 그때 들으셨다는데 말이야…….”
“오오, 상당히 가까운 이로부터 들은 정보로구먼!”
“감질나게 끊지 말고 속 시원히 얘기 좀 해보게!”
“그때 공녀님께서 루페르트 공작님께 이렇게 말씀하셨다더군. 당신께서는 아주 성대한 혼약식을 하고 싶으시다고.”
그 말에 상인들의 기대감이 최고조로 치솟았다.
“성대한? 공녀님 기준에서 성대하면 대체 얼마나 성대한 건가?”
“감도 안 오는구먼.”
“제국이 아주 떠들썩하겠지?”
“어쩌면 우리도 머리 한 번 들이밀어 볼 수 있을지도 모르겠는데!”
상인들의 입을 타는 순간, 소문은 쏜 화살처럼 순식간에 천 리 밖에 가닿는다.
곧 거행될 지상최대 혼약식!
기대에 기대가 더해지면서 제국은 연일 파도처럼 들썩였다.
***
먼 항구에서 오만가지 추측이 오가던 그 시각.
아르티나 공작저에서는 때아닌 설전이 오가고 있었다.
아르칸은 괴상하게도 머리 위만 파릇파릇한 사자 형상의 악마를 향해 단호히 고개를 저었다.
“혼약식은 당연히 인간계에서 해야 한다.”
“누가 그래? 당연히 인간계에서 해야 한다고?”
“내가. 고로, 네놈이 가져온 이 쓰레기 같은 기획안은 파기다.”
마르바스의 거대한 앞발이 기획안을 부욱 찢어버리려는 아르칸의 손을 텁텁 눌렀다.
“땅콩 폐하는 마계의 왕이야! 당연히 마계에서 해야지!”
“이브는 인간계에서 나고 자랐다.”
“우리 한번 진지하게 콩의 일생에 대해 생각해보자고. 콩이 자란 땅이 중요해, 아니면 콩이 다 자라서 데구루루 굴러 향한 땅이 중요해?”
“……?”
“식자재의 원산지를 적을 때는 콩이 태어나 자란 땅을 적지 않아. 콩이 현재 굴러다니는 땅을 적지.”
“그 반대다. 네놈 말대로 하면 치안대에 잡혀가지.”
“……그래?”
“무엇보다, 이브를 콩 따위의 식자재에 비교하지 마라.”
아르칸이 깔린 손을 빼고자 힘을 주었다.
그러나 쓸데없이 무거운 사자의 앞발은 쉬이 비켜나지 않았다.
“앞발 치워.”
“싫은데?”
“고약한 냄새 난다.”
“너희 가문 놈들은 하나같이 악마 상처받는 말을 그렇게 막 한다?”
그때.
마침 간식을 한 아름 들고 들어오던 이벨리아는 평소 서로 소 닭 보듯 하던 둘이 딱 달라붙어 있자 눈을 깜박이며 물었다.
“둘이 웬일로 손을 꼭 부여잡고 있어? 드디어 친해질 마음이 생긴 거야?”
“내가 손을 짓밟고 있는 거야. 꼬장꼬장한 샌님과 친해지긴 무슨.”
“내가 자비롭게 깔려준 거다. 발 냄새 나는 사자랑 친해지긴 무슨.”
“전혀 친해질 생각 없는 거 잘 알았어. 그럼 대체 무슨 일로 짓밟고 깔려준 건데?”
아르칸과 마르바스의 눈이 마주쳤다.
그래. 당사자에게 물어보면 될 것을.
“혼약식은 어디서 할 예정이지, 이브?”
“당연히 마계지?”
“그랬다간 아버지와 어머니께서 쓰러지실 거다.”
“그러지 않았다간 마계의 만백성이 쓰러질 거야.”
“…….”
둘의 표정이 둘 중 하나는 곧 죽기라도 할 것처럼 심히 결연하다.
혼약식을 어디서 하는 지가 뭐 그렇게 중요하다고 저러는 거야?
이벨리아가 대수롭지 않게 답했다.
“인간계에서 할 거야.”
“역시 내 동생.”
“이건 배신이야!”
“에엥, 무슨 배신씩이나?”
“어떻게 마계의 왕이 인간계에서 혼인할 수가 있어!”
“나는 아르티나의 공녀이기도 하니까.”
“주군께서 아시면 대단히 실망하실걸?”
“아닐걸? 아스는 내가 좋아하는 거라면 다 좋아하니까.”
“건방지고 오만한 땅콩 폐하 같으니라고!”
“왕의 면전에서 바락바락 소리를 지르는 네가 더 건방지고 오만해. 이 못된 잔디. 넌 혼약식 끝나면 감옥행이야.”
마계에서 휘황찬란한 혼약식을 열고야 말겠다는 잔디 집사의 꿈은 왕의 외면 하에 물거품이 되었다.
정성껏 작성한 기획안을 품에 안고 씩씩 콧김을 뿜는 사자에게 아르칸이 말했다.
“숨에서 따뜻한 쓰레기 냄새 난다. 꺼져.”
“……이 사탄도 울고 갈 조동아리들!”
***
이브 혼약식 준비위원회 위원장.
탐하는 이들이 하도 많아 치열한 경쟁이 이뤄졌던 그 자리는 오랜 토의 끝에 결국 렐리안의 차지가 되었다.
“이브와 루페르트 공작님의 연애에 저보다 기여도가 크신 분?”
그 한마디에, 그간 둘의 연애를 가열하게 반대해온 아르티나 일가 모두는 입을 다물 수밖에 없었기 때문이다.
집무실 하나를 통으로 비워 혼약식 준비위원회 사무실을 만든 렐리안이 깃펜 끝을 입에 물고 머리를 하나로 높게 틀어 묶은 채 물었다.
“혼약식 장소는 어디로 할까요, 이브?”
“난 사람만 많이 모이는 곳이면 다 괜찮아. 대충 광장은 어때?”
“안 돼요.”
“절대 안 된다. 그런 운치 없는 곳에서 혼약식이라니.”
나름대로 의견을 내봤건만, 위원장 렐리안과 감사 아르칸이 대쪽같이 반대했다.
“그럼 우리 집은?”
“안 돼요.”
“응. 많은 이들이 모이기엔 어려움이 있어.”
역시 위원장과 총무 엔리르가 고개를 저었다.
“그럼 이바스 저택은?”
“안 돼요.”
“거긴 칙칙해서 탈락이다.”
마찬가지로 위원장과…….
“넌 뭐야, 토끼?”
“부위원장. 임원이지.”
“뭐 이렇게 다들 한 자리씩 차지하고 앉았어? 넌 혼약식 주인공이면서 준비위원회에는 왜 들어가 있고?”
“혼약식의 주인공은 오롯이 너고, 널 위한 준비위원회 임원 자리는 귀하니까.”
최근 이벨리아가 완전히 꽂힌 색색의 마카롱을 건네주며 아가레스가 말했다.
“여기. 메롱카.”
“마카롱이라니까.”
“응. 마라콩. 그럼 위원장, 산맥은 어떻지?”
“산맥이요?”
“수도 인근의 산맥 하나를 전부 식장으로.”
렐리안이 눈을 동그랗게 떴다.
“부위원장님. 그렇게 안 봤는데…….”
“……?”
“상당히 감각이 있으시네요. 여보랑 스승님, 아니, 감사님과 총무님은 어때요?”
“산맥 하나를 전부 우리 이브의 혼인식장으로…… 확실히 나쁘지 않군.”
“찬성이야! 왕 커야 왕 멋있거든!”
“저기, 그건 너무 과한 거 아니야……?”
혼약식의 주인공이 유일하게 문제를 제기했지만.
“좋아요. 그럼 산맥으로 만장일치예요.”
깔끔하게 무시당했다.
“고문님과 이사님께도 여쭤보지. 분명 좋다고 하실 테지만.”
“고문과 이사? 그건 또 누군데?”
“아버지와 어머니.”
“아빠랑 엄마까지 이 괴상한 준비위원회 임원이란 말이야?”
다들 감투 욕심이 이렇게 심했을 줄이야!
“잡일 팀장에게도 알려야겠군. 준비를 도우라 이르지.”
“잠시만요, 부위원장님. 차라리 마계 본부장님을 불러주세요. 잔디님은 별로 도움이 안 될 것 같아서요.”
“합당한 우려로군. 로노베를 보내겠다.”
“그럼 나도 경호위원들에게 알릴게!”
“그러지는 마, 총무. 기사단 놈들은 깽판이나 안 치면 다행이니까.”
위원장. 부위원장. 감사. 총무.
고문. 이사. 마계 본부장. 잡일 팀장. 경호위원.
각자 소꿉놀이처럼 감투 하나씩 갖다 쓰고 일사불란하게 착착 진행되는 회의 속.
유일하게 직위 없는 말단사원 이벨리아가 빼꼼 손을 들었다.
“……저기? 내 말 좀 들어줄 사람이나 악마나 용?”
그러나 발언권은 직급을 따라가는 것이 당연지사.
무직급자 말단사원의 이야기를 귀 기울여 들어주는 위원은 아무도 없었다.
***
며칠 뒤.
이벨리아의 혼약식 드레스 선택을 위해 명실상부 제국 최고의 디자이너 앙제스가 조수들을 잔뜩 거느리고 공작저에 방문했다.
입은 은혜가 있어 오직 아르티나 일가 앞에서만 간드러지는 목소리가 공작저를 쨍하니 울렸다.
“공녀님!”
“오랜만이야, 앙제스.”
“일생 단 한 번뿐인 경사에 저를 찾아주시다니! 너무 설레서 어제는 한숨도 못 잤답니다!”
“그대 아니면 누구에게 내 웨딩드레스를 맡기겠어.”
감동한 표정으로, 앙제스가 두 손을 가지런히 모아 볼에 가져다 댔다.
“꼭 꿈만 같아요. 공녀님께서 어린 소녀셨을 적부터 혼약식 드레스를 하나씩 디자인해두었는데 정말 이런 날이 오다니…… 그럼 일단 드레스 북부터 보실까요?”
따악.
손가락을 맞부딪치자 조수들이 두 손에 드레스 북 하나씩을 얹고 줄줄이 들어왔다.
그런데 그 수가.
열. 스물. 서른. 마흔…….
“……저게 다 드레스 북이야?”
“다소 조촐하지요? 하나하나 심혈을 다해 그려 넣느라 양이 얼마 되지는 못한답니다.”
“……마흔 권인데?”
“성심에 차지 않으신다면 조금 더 만들어 올까요?”
“아니 그런 뜻이 아니라…… 됐어.”
천재 디자이너가 생각하는 적당한 양과 자신의 생각하는 적당한 양 사이에는 상당한 괴리가 있는 것이 분명했다.
한동안 드레스 북을 꼼꼼하게 살피며 넘기던 이벨리아가 문득 눈가를 찌푸렸다.
그러고 보니 문제가 하나 있다.
“저기, 앙제스. 그대도 알다시피 내가 미적 감각이 별로 없어.”
“부정할 수가 없겠네요.”
“그래서 드레스 북을 본다고 해서 뭐가 확 와닿지는 않거든.”
“그러실까 봐 제가 준비했지요!”
짝짝. 앙제스가 두 번 손뼉을 쳤다.
그러자 응접실 밖에서부터 뭔가 끌려오는 소리가 드르르르 땅을 울린다.
“……무슨?”
뭐냐고 묻기도 전에 하나씩 들어오는 것은 수도 없는 마네킹.
그리고 그 위에 하나하나 입혀진 화려한 드레스들. 이벨리아가 입을 떡 벌렸다.
“이걸 다 만들었어?”
“제 기쁨이었답니다! 자아, 그럼 입어보실까요?”
“이, 입어보다니?”
“하나하나 다 입어보셔야 어느 것이 가장 예술적인지 알 수가 있지요!”
“……저걸 다?”
“네!”
“입고 벗는 데만 하루는 걸리겠는데?”
“에이, 하루라니요. 사흘은 잡아야 할걸요?”
“…….”
이벨리아가 끼기긱 고개 돌려 응접실에 앉아 있는 아군들을 바라봤다.
렐리안. 토끼야.
아니, 위원장님. 부위원장님.
나 좀 도와줘. 정도 모르는 저 디자이너가 나보고 저걸 다 입어보래.
아기새의 것처럼 간절한 눈빛을 받은 렐리안이 생긋 웃었다.
“좋네. 역시 드레스는 다 입어봐야 알 수 있지.”
“지당한 말씀입니다, 공작부인!”
빌어먹을 위원장. 저쪽은 글렀다.
이벨리아가 아가레스에게 시선을 돌렸다. 토끼, 도움!
그러자 금방이라도 혼절할 것만 같은 표정으로 악마가 입을 열었다.
“이브가 저걸 다 입어본다고.”
“예, 확실히 입어봐야 태를 알 수 있어서…….”
“더 필요한 것은 없나.”
“예?”
“재료비라든가.”
“어머, 재료비요? 사실 커다란 다이아몬드를 잘게 조각내서 이 드레스 밑단에 별처럼 흩뿌리고 싶기는 했는데…….”
“얼마든지 뿌려라. 청구서는 내게 보내고.”
“……!”
보장된 백지수표에 새로운 영감이 떠올랐는지, 얼굴이 달처럼 환해진 앙제스가 다급히 드레스 북을 펴서 마지막 장에 새로운 드레스를 스케치하기 시작했다.
“토끼 너까지 이러기야?”
“이리로 오시지요, 공녀님.”
답 없어 외로운 메아리 속에서 이벨리아는 반항할 틈도 없이 앙제스의 조수들에게 끌려가 첫 번째 드레스를 입었다.
눈까지 시릴 정도의 순백색 천이 바닥에 길게 끌리고, 쇄골은 물론 가슴의 윗부분까지 살짝 드러나는 디자인. 불편하고 민망하기 그지없다.
망설이다가 붉은 장막 속에서 얼굴만 쏙 내민 이벨리아가 더듬더듬 말했다.
“보, 보고 웃지 마?”
“어서 나와 봐요, 이브. 궁금해요.”
“으으, 아무래도 이상한 것 같은데…….”
앓는 소리를 내며 장막 양 끝에 선 하녀들에게 눈짓하자, 얼굴 붉힌 하녀들이 장막을 걷어냈다.
그리고 그와 동시.
앙제스의 드레스 북을 넘기던 악마의 손이 허공에서 그대로 굳어버렸다.
고요하다.
바늘 떨어지는 소리조차 천둥처럼 들릴 정도로.
침을 꼴깍 삼킨 이벨리아가 물었다.
“……저기, 그렇게 이상해?”
“…….”
“아무래도 좀 어색하긴 하지?”
“…….”
물었으나 돌아오는 답이 없다.
이벨리아의 시선이 넋을 놓아버린 연인을 훑었다.
“토끼야? 왜 말이 없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