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306화: 외전. 외사랑의 끝 (3)
“델포이 백작, 요즘 아주 건방이 하늘을 찌르지 않습니까?”
“어린 나이에 일가의 주인이 되니 뵈는 게 없는 모양이지요!”
“허, 참. 몇 년 전만 해도 어딘지도 모르는 시골구석에 처박혀 있던 가문 아닌가! 수도 생태도 모르고 제멋대로 휘젓고 다니는 꼴이란!”
정기 귀족 회의가 열리는 날.
회의장으로 들어가던 귀족들은 삼삼오오 모여 장안의 화두인 젊은 백작을 신나게 씹어댔다.
황제와 공녀의 지지를 등에 업은 데다가 전쟁 영웅까지 되어 급부상한 그 젊은 것이 어찌나 치밀하게 귀족들을 선동해 여론을 조성하는지!
“우리처럼 정치 바닥에 오래 굴러먹은 치들 아니면 죄다 고것의 혀에 홀랑 넘어가 고개를 끄덕이고 있단 말입니다!”
어린 백작은 교묘하게 판을 깔아 황제에게 날개를 달아주는 격인 정책을 수도 없이 통과시켰다.
“오늘 회의 안건도 좀 보십시오. 부민고소(部民告訴) 금지법 폐지라니요!”
“영지민이 영주를 고소할 수 있도록 제도를 바꾼다니, 이런 해괴한 생각이 대체 어디서 나오는 겁니까? 예?”
“크리오스 백작, 뭐라고 말 좀 해보십시오.”
“……커험. 뭐, 그런 면이 없지 않아 있지요.”
카밀라가 특유의 능란함으로 많은 귀족을 휘어잡고 다닌다고는 하나, 수도에는 오래 묵은 거목들도 있는 법이다.
세상은 경험이 장땡.
온갖 정치적 경험으로 단단히 무장한 그들은 아무리 카밀라라고 해도 쉽게 설득해 넘길 수가 없었고, 하여 카밀라는 사사건건 그들과 부딪치고 있었다.
오늘 역시 다르지 않았다.
“첫 안건은 부민고소 금지법의 폐지요.”
루드비히가 화두를 던져 회의의 시작을 알리자마자, 크리오스 백작을 필두로 한 수도의 거목들이 일제히 반대 의견을 펼치기 시작했다.
당연한 일이었다. 그들은 수도의 귀족이기 전에, 수많은 영지의 영주니까.
“폐하. 영주는 영지민의 어버이입니다. 자식이 어버이를 고소하게 한다는 건 천륜을 거스르는 것이나 다름없습니다.”
“부민고소 금지는 제국 설립 당시의 법전에도 자리한 유서 깊은 법입니다.”
반대가 거세자 중간 즈음 앉아 있던 카밀라가 손을 들고 발언했다.
“제국 초기에는 다소 권위적이더라도 체제를 견고히 하는 법이 필요했기 때문이지요. 지금은 아니지 않습니까.”
“하오나 이를 폐지할 경우, 수도 없이 많은 영지민들이 대수롭지도 않은 일로 영주를 법정에 세울 것입니다. 귀족의 권위가 땅에 떨어지게 됨은 물론이지요.”
“우리 제국법전 서문은 위민의 사상을 근간으로 하고 있습니다. 백성이 곧 나라의 근본이라면서, 정작 영주로부터 고통받는 백성은 외면한다고요?”
고요히 지켜보던 크리오스 백작이 입을 열었다. 지긋하게 나이를 먹어 주름진 입가가 여유롭게 움직였다.
“일응 합당합니다만…… 델포이 백작께선 그 이후의 일은 생각해보셨나 모르겠습니다.”
“어떤 일을 말씀하시는지요?”
“영지민들이 문제 삼는 수천수만 개의 사건을 모두 재판으로 끌고 온다고 가정합시다. 그 일 처리는 누가 다 하게 됩니까?”
“인력이 다소 낭비될 수 있다는 점은 인정합니다. 그러나 처리가 늦어지더라도 억울한 이가 없도록 하는 것이 우선이지요.”
“아니요. 아니지요.”
노련한 백작이 껄껄 웃으며 말을 이었다.
“그 과정에서 진정 억울한 이들은 재판을 기다리다 말라 죽을 겁니다.”
“전쟁 이후에 직장과 터전을 잃은 이들이 적지 않습니다. 부족한 인력은 키워 채우면 그만입니다.”
“사법을 담당할 수 있도록 키워내려면 많은 돈이 들지요. 그 돈은 누가 감당하고요?”
둘의 공방이 팽팽하다.
상석에 앉은 루드비히는 찻잔으로 입가를 가리고 웃었다.
‘꽤 하는군. 델포이 백작.’
합의점 안 보이는 이 극단적인 논쟁은 사실 카밀라가 일부러 만드는 판이다.
극과 극의 다툼에서 절충안을 내놓으면 이는 보다 힘을 얻게 되는 법이니.
“그만. 두 백작의 의견이 모두 합당하니 절충안을 세우도록 하지.”
루드비히의 홍안이 아래 고개 숙인 귀족들을 느리게 훑었다.
“영지민이 영주를 고소할 수 없도록 하는 것은 악법이다. 하여 폐지하되, 크리오스 백작의 말대로 심한 인력난이 우려되는 것도 사실이니 무고(誣告)한 자에 대해서는 무고한 그 죄만큼의 처벌을 과하도록 하겠다.”
원하던 안이다. 카밀라가 냉큼 답했다.
“예, 폐하.”
크리오스 백작은 유유히 웃었다. 마치 젊은 황제와 그 보좌관이 서로 짜고 이 판을 만들었다는 것을 알면서 넘어가 준다는 듯.
“받잡겠습니다, 폐하.”
그렇게 늘 하던 방식으로, 황제와 충직한 보좌관은 귀족들의 거센 반발에 부딪혔던 정책 하나를 더 통과시켰다.
***
길고 지루했던 회의 이후 집무실로 돌아온 루드비히는 소파에 털썩 주저앉아 투덜댔다.
“크리오스 백작. 사사건건 방해로군.”
졸졸 따라 들어온 보라색 여우가 옳다구나 맞장구를 쳤다.
“워낙 고지식하기로 이름 높은 인사 아닙니까.”
“선황께서 그자 때문에 골머리 썩으시는 것을 익히 보았는데, 당해보니 더해.”
황제의 재위 기간, 황권은 본디 포물선 모양을 그린다.
즉위 초기부터 중기까지 서서히 올라가다가 후계자가 생기면 권력 일부가 분산되어 내려가는 식이다.
즉, 루드비히의 황권은 지금 한창 강화되는 시기를 겪고 있었다.
그런 시기에 반대편에서 뭐든 안 된다며 목소리 높이는 신하가 좋게 보일 리 없는 건 당연했다.
입만 열면 그냥 아니 되옵니다, 큰일이 나옵니다, 아이고 폐하 제국이 망합니다…….
“어떻게, 좋은 방법이 좀 없겠는가.”
“납치. 망명. 살해. 명령만 내려주십시오.”
마탑주 자리를 걷어차고 나온 대마법사가 씨익 웃으며 허리를 숙였다.
그러자 회의 때 오간 서류를 정리하던 카밀라가 담담하게 말했다.
“품으십시오. 폐하.”
“품으라니. 목을 졸라 죽이라는 말인가.”
“……어미 새가 새끼 새 품듯 품으라는 말이었습니다.”
“내 품이 무슨 오르카스 해라도 되는 줄 아는가? 사사건건 불평만 짹짹대는 새도 품게?”
“태양의 품은 바다의 품보다 넓지요.”
“그대가 미처 몰랐나 본데, 나는 좀생이다.”
옆에서 이크리안이 작게 중얼거렸다. 다들 압니다, 폐하.
능청스러운 여우의 머리를 향해 두루마리를 휙 던지며 루드비히가 말을 이었다.
“크리오스 백작은 귀족파의 수장이다. 그런 이를 품는 건 적을 심장 밑에 두고 정치하는 것과 같고.”
“폐하. 귀족파는 반 제국파입니까?”
“……?”
“귀족파는 반 황제파일 뿐, 반 제국파가 아닙니다.”
“그게 무슨 말이지?”
“인마전쟁 이후 대대적인 숙청으로 인해 제국에 해를 도모하는 귀족들은 모두 목이 날아갔습니다. 지금 남은 이들은 황제파든 귀족파든 모두 제국의 부강을 꾀하는 이들이지요.”
카밀라가 깊이 고개를 숙였다.
“그러니 폐하. 의견이 다르다 하여 함부로 내치지 마십시오. 사사건건 반대를 하는 이가 존재해야 문제점 또한 눈에 보이는 법입니다.”
“…….”
짧게 시선 마주친 루드비히와 이크리안이 묘한 눈으로 카밀라를 응시했다.
둘은 태어날 때부터 지배자의 위치에 있던 자들. 마음에 들지 않는 것을 없애고 치우는 데에 죄책감도 머뭇거림도 없다.
그러나 카밀라는 달랐다.
위부터 아래까지 다양한 사람과 맞부딪치며 많은 것을 경험한 카밀라는 둘과는 다른 시각으로 그른 것을 다잡을 줄 알았다.
흐음, 소리를 내며 테이블을 검지로 두드리던 루드비히가 고개를 끄덕였다.
“……틀린 말은 아니로군. 품어보도록 하지. 내 품에 들어올지는 모르겠지만.”
“황송합니다, 폐하.”
루드비히의 입매에 옅은 미소가 자리했다가 사라졌다.
정보단체 따위에 있을 때보다 정치판에 뛰어든 지금, 그의 보좌관은 아주 제대로 진가를 발휘하고 있었다.
***
“맞다, 카밀라.”
“예, 공녀님.”
“나 토끼랑 혼인하기로 했어. 너한테는 따로 말한 적이 없는 것 같아서.”
오랜만에 아르티나 공작저에 방문해 이벨리아와 담소를 나누던 카밀라가 놀랍다는 듯 눈을 크게 떴다.
기실 일전에 폐하를 통해 얼핏 들었으나 당사자 입에서는 처음 들으니 몰랐던 척을 하면서.
“경하드립니다, 공녀님. 혼약식은 언제쯤으로 예정하시는지요?”
“내년 봄. 그때가 되면 카밀라가 나를 부르는 호칭도 바뀌겠네.”
카밀라가 정갈한 손길로 차를 따라주며 답했다.
“공녀님께 호칭 따위 뭐가 중요하겠습니까. 무려 한 세계를 다스리는 왕이신걸요.”
이제는 이리 깍듯할 필요 없음에도 처음 만났을 때부터 지금까지 늘 한결같이 정중한 태도다.
허례허식을 싫어하는 이벨리아가 으으 질색하며 물었다.
“그보다, 황궁 생활은 좀 어때?”
“재밌습니다.”
“……재밌다고? 카밀라 취향 진짜 독특하다.”
“폐하께서도 비슷한 말씀을 하셨습니다.”
“그치. 걔가 봐도 이상할 만하지. 대체 뭐가 재밌어, 그 칙칙한 곳이?”
“폐하 용안이…….”
“…….”
“……실언입니다.”
아니? 누가 봐도 진심이었는데?
이벨리아는 일단 넘어가기로 했다. 내 친구 얼굴이 수려하여 보기만 해도 흥미로운 건 만인이 느끼는 감정일 테니까.
“그 외엔?”
“제가 귀족들을 마구 때려잡아 재산을 뜯어오면 폐하께서 심히 놀란 표정을 지으시며 칭찬해주시는 게 재밌습니다.”
“너 혹시 변태니?”
“…….”
이벨리아는 가늘게 뜬 눈으로 카밀라를 샅샅이 살폈다.
귀와 볼이 조금 붉고, 손끝은 어쩔 줄 모르고 꼼지락꼼지락 움직이네.
“이상한 취향을 가진 카밀라야.”
“네.”
“카밀라는 연인 없어?”
“폐하의 재위 초기니 한창 일을 하기도 바쁩니다. 게다가 저 같은 왈가닥을 좋아할 사내가 세상천지 어디에 있겠습니까.”
“왜. 나 같은 왈가닥을 좋아하는 사내도 있는걸?”
“공녀님께서는 아름다우시잖아요. 마음도 따뜻하시고, 능력도 출중하시고. 저에게는 그저 아득바득 살아온 독기만 있으니 공녀님과는 다르지요.”
그 말에 이벨리아가 입을 삐죽이며 고개를 기울였다.
이 주황 머리 친구는 다 좋은데 가끔 이렇게 이상한 데서 자존감 낮은 것이 문제다.
“카밀라.”
“예, 공녀님.”
“내가 왜 너를 내 곁에 뒀는지 알아?”
“음모, 선동, 권모술수, 여론조성에 능해서요.”
“아니. 아니야.”
“……?”
자리에서 일어선 이벨리아가 카밀라 앞의 테이블 가장자리에 걸터앉았다.
그러고선 주홍빛 머리칼을 한 움큼 손에 쥐어 손가락 사이로 사르르 흘려보냈다.
“네 머리카락 색이 오렌지를 닮았기 때문이야.”
“에?”
“참 맛있어 보였지.”
“네에?”
“넌 예뻐. 나만큼.”
“……!”
“넌 마음이 따뜻해. 나처럼.”
“…….”
“넌 능력도 출중해. 나보다.”
“……공녀님.”
이벨리아는 카밀라의 눈을 보며 한동안 가만히 말을 골랐다. 아주 신중하게.
“그러니까, 카밀라.”
“……네, 공녀님.”
“나는 있지, 네 외사랑이 꼭 보답받았으면 좋겠어.”
“……!”
“내가 가장 사랑하는 친우의 행복을 위해서.”
카밀라의 눈빛이 격하게 흔들렸다. 소매로 가린 손이 작은 경련을 만들어 낸다. 오래도록 꼭꼭 숨기고 숨긴 것을 들켜서는 안 될 이에게 들켜버린 느낌이다.
“……알고, 계셨습니까.”
“외사랑 하는 이를 오래도록 봤어. 그 익숙한 것이 네 눈에, 손에, 몸짓에 가득 담겨 있는데 내가 모를 리가.”
탓하는 게 아니야. 작게 안심시키며 이벨리아가 몸을 숙여 카밀라의 손등을 토닥였다.
“이기적인 부탁이지만, 카밀라.”
“주제넘으니 폐하의 곁에서 물러나라는…….”
“루이의 곁에 있어 줘.”
“……!”
“루이가 내게 주었던 그 맑고 온전한 사랑을 루이도 받았으면 좋겠어.”
“…….”
“내 입으로 말하긴 좀 그렇지만, 걔는 그럴 만큼 멋진 사내거든.”
그 말에 푹 고개 숙인 카밀라가 더듬더듬 말했다.
공녀님, 그 온전하고 맑은 연정이요.
“제 것은 아주 오래전부터 이미 폐하께 가닿아 있었어요.”
처음 드러내는 마음. 공녀님께서는 활짝 웃으셨다.
여인인 자신에게조차 세상 가장 아름다워 보이는 미소에 카밀라는 생각했다.
이리도 고운 당신께서 폐하의 마음을 받아주시지 않아서…… 조금은, 아주 조금은 다행이라고.
***
내가 도와줄 수는 없지만, 잘 되었으면 좋겠어.
이벨리아의 그 응원은 카밀라에게 다시 없을 용기를 불어넣었다.
“그래. 사랑은 쟁취하는 거랬어.”
두 주먹 불끈 쥐고 결연한 표정으로 공작저를 나서던 카밀라는 마침 마카롱을 한 아름 들고 들어오던 아가레스를 보고 발을 멈췄다.
“각하.”
“……?”
“그렇게 누군지 생판 모르신다는 표정으로 바라보시면 상처받습니다. 저 공녀님께서 총애하시는 카밀라 델포이입니다.”
“이브는 너 총애 안 해. 날 총애한다.”
아차. 이 악마님의 끝 모를 질투심을 잠시 잊었다. 카밀라가 재빨리 답했다.
“공녀님께서 각하께 내리시는 것은 총애라기보다는 은애지요.”
“……아. 똑똑한 그 백작이로군.”
“그리 기억해주시니 영광입니다.”
“머리가 짧아져서 못 알아봤다.”
카밀라의 머리는 예로부터 지금까지 그대로다.
그러나 카밀라는 굳이 언급하지 않았다.
이 악마님은 공녀님 외에 세상 그 어느 것에도 관심 없으시니까.
“그래서. 내게 말을 건 연유는?”
“다름이 아니오라, 각하께서는 공녀님의 마음을 얻기 위해 오래도록 부단히 노력하시지 않으셨습니까.”
“그랬지.”
“저 역시 누군가의 마음을 얻고 싶어, 이미 성공하신 분께 고견을 구하고자 합니다.”
그야 내 전문이지. 아가레스의 표정에 미세한 뿌듯함이 들어찼다.
“비법을 다 알려주자면 하루는 필요한데. 시간은 넉넉한가?”
“황궁으로 돌아가는 길이라…… 그렇다면 이것만 알려주십시오. 각하께서 무엇을 해드릴 때 공녀님께서 가장 기꺼워하셨는지요?”
질문에 아가레스가 고개를 기울였다.
그가 무엇을 하든, 그의 연인이자 주인은 대부분 흡족한 얼굴로 고개를 끄덕여 주신다.
짙은 포옹을 하거나 숨이 가득 얽히는 입맞춤을 하면 볼을 발갛게 붉히기도 하시고.
그러나 역시 가장 환하게 웃으실 때는…….
“먹을 거.”
“네?”
“먹을 거 주면 가장 좋아한다.”
카밀라가 한쪽 눈썹을 올렸다. 공녀님이 무슨 강아지입니까.
그 불신 가득한 표정에 아가레스가 덧붙였다.
“내 손에 들린 메롱카를 봐라.”
“그건 마카롱이라고 합니다.”
“뭐든 간에. 이브 가라사대, 먹을 것을 주는 것보다 마음을 더 잘 전달하는 방법은 없다고 했지.”
“……진짜입니까?”
“얼마 전에 내가 요리를 해주었을 때도 뛸 듯이 기뻐했다.”
확신에 가득 찬 악마님의 음성. 틀림없다는 듯한 표정. 화룡점정으로 굳건한 손에 가득 들린 귀엽고 아기자기한 마카롱.
카밀라가 천천히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 내가 뭘 알겠어. 나는 연애도 안 해봤는걸.
뭘 모를 때는 성공한 자의 조언을 따르는 것이 진리다.
“감사합니다, 각하.”
뭔가에 임할 때는 기어코 끝을 보고야 마는 카밀라의 주홍빛 눈이 활활 불타올랐다.
기다리십시오, 주군.
제 마음이 갑니다.
***
다음날.
황궁으로 출근하던 카밀라는 수도에서 가장 맛있다는 빵집에 들렀다.
이른 아침이지만 줄은 이미 가게를 한 바퀴 빙 둘러선 상태.
카밀라는 가장 끄트머리에 서서 얌전히 차례를 기다린 다음 빵을 한 아름 손에 넣고 황궁으로 향했다.
“좋은 아침입니다.”
“안 좋은 아침이야, 백작. 그대는 지각이거든.”
“아직 출근 시간은 안 지난 것으로 압니다만.”
“상사보다 늦으면 지각인 거야.”
높게 쌓인 서류 더미에서 머리를 빼지 않고 타박하던 이크리안이 코를 킁킁댔다.
“빵?”
“예.”
“나 주려고?”
“아니요.”
“나 안 줘?”
“주인이 있는 빵입니다.”
자신의 것은 없다는 말에 잔뜩 심통 난 대마법사가 그제야 서류 더미에서 머리를 빼고 카밀라를 향해 삿대질했다.
“이봐, 백작. 나 때는 말이야, 감히 상사보다 늦게 출근하는 날에는 집무실 한구석에서 머리를 땅에 처박고 일을 했어.”
상사보다 늦게 출근하고 일찍 퇴근하는 일을 예사로 하는 바람에 수시로 에르트 백작의 혈압을 오르게 했던 보라색 여우가 뻔뻔하게 으름장을 놓았다.
“근데 고작 빵 사겠다고 상사보다 늦게 출근을 해?”
꼰대. 카밀라가 작게 중얼거렸다.
“반성문 써서 제출해!”
“제국 노동청에 고발하겠습니다. 악덕 상사가 여기에 있다고.”
“나 때는 말이야, 감히 상사 앞에서 노동청 얘기는 꺼내지도 못했어!”
“각하가 노동청에 에르트 백작님을 고발한 탄원서 다 봤습니다.”
이크리안을 지나쳐 걸어간 카밀라가 루드비히의 책상 위에 빵을 와르르 쏟아부었다.
그리고 마침 그때.
집무실 문을 열고 들어온 루드비히는 책상 위에서 고소한 냄새를 폴폴 풍기고 있는 갈색 덩어리들을 빤히 내려다보았다.
“이건 다 뭐야.”
“빵입니다, 폐하.”
“갑자기 웬 빵.”
“그냥 빵입니다. 드십시오.”
“뭐냐고. 그러니까.”
“맛있는 빵입니다.”
“……?”
“빵.”
먹지 않으면 사달을 낼 것만 같은 보좌관의 눈빛.
미각을 잃어 먹을 것을 즐기지 않는 루드비히는 수년 만에 아침으로 빵을 먹었다.
‘목 막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