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305화: 외전. 외사랑의 끝 (2)
비밀기지에서는 태연히 식사를 마치고 이야기를 하던 루드비히는, 자신의 침실로 들어서자마자 그대로 문에 등을 대고 주저앉았다.
“……뭐가 이렇게 아파.”
다들 이런 사랑을 하나.
루드비히는 알 수 없었다. 온갖 험한 일을 겪으며 자란 황제라 하더라도 첫사랑은 그 말뜻 그대로 전에 없이 겪는 것.
오래도록 제 마음 가장 큰 비중을 차지했던 것을 제 손으로 부러뜨려 내쳤음에야, 그저 그러려니 담담할 수 없음은 물론이다.
루드비히는 커다란 손으로 얼굴을 덮어 가렸다.
여전히 너를 은애한다는 사실을 하늘이 알아챌까 봐.
스스로 가려 만들어낸 어둠 속에서, 루드비히는 이벨리아를 단층으로 보냈던 그날만큼 울었다.
***
마찬가지로 비밀기지에서 그저 해사하게 웃던 이벨리아는 공작저로 돌아와 방으로 들어서자마자 문을 걸어 잠그고 주저앉아 무릎을 감쌌다.
“……바보.”
내가 모를 리가. 억지로 잘라내는 네 그 마음을 내가 모를 리가.
우리가 얼마나 오랜 시간 서로의 가장 가까운 친구였는데.
얼마나 많은 일을 함께 겪어 이겨냈는데.
기쁨도, 슬픔도, 역경도, 끝내 승리까지, 얼마나 치열하게 마주하며 같이 여기까지 걸어왔는데.
이벨리아는 몸을 동그랗게 구부려 무릎 위에 머리를 포갰다. 몸으로 만든 작은 공간 속에서 물기 어린 목소리로 웅얼거렸다.
“속일 사람을 속여야지…….”
심장을 갈라내는 것 같은 표정을 짓고서 연정이 남지 않았다고 말하면 내가 홀랑 믿어 넘어갈 줄 알고. 바보 같은 루드비히.
그럼에도 나는 너에게 그 어떤 말도 해줄 수가 없었다.
섣부른 위로는 네게 헛된 희망이 될 테니까.
외려 네가 나를 놓는 시간을 더욱 지난하게 만들 뿐이니까.
가장 소중한 벗의 가장 슬픈 날.
그 원인이 된 것도 모자라 눈물조차 닦아줄 수 없는 이벨리아는, 그저 나로 인해 조각난 네 마음이 아파 함께 울었다.
***
다음날.
이크리안은 루드비히의 침실 앞에서 불안한 듯 서성거렸다.
“이상하다? 해가 중천에 떴는데 왜 기침하지 않으시지? 혹시 도망이라도 가셨나?”
안에서 나는 미약한 소리라도 들으려는 것처럼 귀를 쫑긋 세우던 이크리안은 얼마 전 가주직과 백작위를 이어받은 카밀라에게 시선 돌려 물었다.
“이봐, 델포이 백작. 폐하의 보좌관으로서 뭐 아는 거 없어?”
귤색 단발머리에 눈 밑 눈물점을 가진 여인이 단호하게 고개를 저었다.
“없습니다.”
“그대는 얼마 전까지 폐하의 직속 정보부 소속이었잖아.”
“그랬지요.”
“정보부 소속이 뭐 이런 정보도 몰라?”
“지금 일 늘어나게 생겨서 제게 심술부리시는 겁니까?”
“똑똑하긴.”
폐하께서 도망이라도 가셨어 봐. 일전에 내가 도주한 바람에 다들 고생했던 것처럼, 이번엔 그 희생양이 내가 될 수도 있잖아.
“오늘 프시케랑 저녁 데이트 약속 있는데…….”
제발요, 폐하.
어서 벌떡 기침하셔서 만수무강하게 업무하시고 부디 이 신하의 연애에 길이 도움을 주시는 성군이 되시기를…….
속으로 기도 올린 이크리안이 다시 한번 루드비히의 침실에 슬쩍 귀를 댔다.
“아무 소리도 안 나네.”
평소 이 시간, 루드비히는 그 누구보다도 먼저 일어나 새벽 수련을 끝마치고 정갈한 자세로 집무실에 앉아 서류를 넘기고 있곤 했다.
즉, 황제의 이런 게으름은 상당히 이례적이라는 소리.
“진짜 무슨 일이 있으신 건 아니겠지?”
“그랬으면 폐하의 방 주변에 쳐둔 마법이 소리를 질러댔겠지요. 무려 수호룡께서 직접 걸어두셨는데.”
“그건 그래. 그럼 대체 뭐지?”
“피곤하신 모양이지요. 폐하도 사람이니까요.”
“피고온? 사라암? 그건 백작 그대가 폐하 어릴 적을 못 봐서 그래. 폐하는 항상 이렇게 사셨다고.”
“항상 그렇게 사시다가 못 견디겠다며 뛰쳐나가신 분도 제 앞에 있는데요, 뭐.”
“……크흠.”
이크리안이 멋쩍게 시선을 돌렸다.
“폐하를 깨워볼까? 오늘 업무가 강 범람하듯 넘치는데.”
“저희가 처리하면 되겠네요. 그 범람하는 업무.”
“둘보단 셋이 낫잖아. 폐하 깨우자.”
“성심이 어지러울 때 보좌하는 것이 후작님과 제 역할 아니겠습니까.”
“……델포이 백작. 왜 이렇게 차분해? 폐하께서 한 손 거들어주시지 않으면 오늘 퇴근은 요단강 건넌다고! 그대는 이 살인적인 업무량에 화도 안 나?”
“고작 이런 일로 동요하기엔, 세상 밖엔 더욱 기막힌 일들이 많답니다.”
가문의 명맥을 유지하고자 소녀 가장으로서 거지소굴, 정보조직, 도박장 등 온갖 험지를 혈혈단신 누볐던 카밀라에게…….
“황궁 내에서 터지는 일들 정도야 그저 뽀송뽀송한 이벤트죠.”
웬만한 풍파 따위는 간지럽지도 않았다.
***
“아이고, 내 데이트. 프시케에-. 프시케에-.”
“영애가 천천히 일 보고 오라고 했잖아요. 우는소리 그만하시지요.”
그렇게 황제의 집무실 옆방으로 이크리안을 끌고 들어가 업무를 처리하던 카밀라는 마지막 남은 서류 하나를 팔랑 흔들었다.
“마지막 하나는 우리가 처리할 수 없겠네요.”
“뭔데 그래?”
프시케를 부르짖던 이크리안이 불퉁한 표정으로 고개를 디밀었다.
“황후든 황비든 들이라고 다들 난리예요. 하루이틀도 아니고. 이 상소문 돌돌 말아 대가리를 다 깨버릴까.”
“……진정해 백작.”
황제의 나이가 약관을 넘어 어느덧 이립을 향하고 있음에도 황후는 고사하고 연인조차 없다는 것은 제국의 안정에 부정적인 영향을 미칠 수밖에 없다.
그러니 날이면 날마다 반려를 들이라는 귀족들의 청을 덮어두고 내치기도 어려운 실정이다.
진실로 원하는 것은 제각기 따로 있겠으나, 그들 모두는 입을 모아 제국의 부흥을 빌미로 삼았으니까.
“아직 황후 될 분을 찾지 못했으면 황비부터 먼저 들이라는 개소리를 하네요.”
“그 황비 자리에 자기 소생을 앉히려는 속셈이겠지.”
“폐하께서는 황비를 들이실 생각이 전혀 없으신 것 같던데요.”
“그럴 법도 해.”
선대 황후 폐하와 황비 사이에 있었던 불화. 그리고 그로 인해 험난했던 루드비히의 어린 시절을 모르는 이는 없다.
선대 황실은 역대 황실을 그대로 답습하여 수라장이었고, 그 피해는 난장을 만든 어른들이 아닌 어린 시절의 루드비히가 고스란히 감내해야 했으니까.
여하간 이크리안과 카밀라가 정당한 명분을 내세운 이 상소문을 어떻게 처리할지 골머리를 앓던 무렵.
- 끼이익.
공용 집무실 문이 열리더니 루드비히가 들어섰다.
“폐하!”
“설마 달이 뜬 지금에서야 기침하신…… 어어?”
터벅터벅 들어온 루드비히의 얼굴이 등잔에 환히 비치자, 카밀라와 이크리안의 입이 떡 벌어졌다.
“폐하, 눈이……?”
“금붕어처럼 부으셨습니다.”
“앞이 보이기는 하십니까? 감으로 걸으시는 것 같은데요.”
“……크흠.”
“왜 옥루를 흘리셨습니까?”
“눈이 그리되실 정도면 아주 펑펑 우신 것 같은데요.”
“안 울었다. 눈이 부은 건…… 어제 야식을 먹고 자서 그래.”
제 입으로 내다 버린 마음이 못내 서러워 울다 잠들었던 루드비히는 민망하다는 듯 퉁퉁 부은 눈가를 매만졌다.
***
빛의 속도로 업무를 마무리한 이크리안이 프시케와 데이트를 해야 한다며 쏜살같이 달려나간 이후.
늦은 밤, 황제의 집무실.
내일 살펴야 하는 서류를 정갈하게 정리하여 분류해 두던 카밀라가 넌지시 운을 띄웠다.
“외람되오나, 폐하.”
“…….”
“괜찮으십니까?”
“괜찮지 않을 건 또 뭐야.”
“공녀님과 관련된 문제라면 폐하께선 늘 안 괜찮으셨잖습니까.”
“……이브 문제인 건 어떻게 알았지?”
“옥루를 흘리실 일이 그 외에 더 있을 리 없지요.”
탁. 탁. 카밀라는 다 정리된 서류를 무심히 정리했다.
외려 그 담백한 말투에 속내를 털어놓을 마음이 생겼는지도 모르겠다.
의자 등받이에 기댄 루드비히가 말했다.
“그대도 곧 알게 되겠지만, 루페르트 공작이 이브에게 청혼했다.”
“……!”
루드비히가 허탈하다는 듯 웃었다.
“어제 비밀기지에서 둘을 만났는데, 내 앞이라 기쁜 내색도 못 하더군.”
“……공녀님께서는 다정하시니까요.”
“그러게 말이야. 그래서 말해버렸어.”
“…….”
“이제 더는 널 좋아하지 않는다고. 나의 연모는 오래전에 끝났다고.”
“……폐하.”
“그래야 친구로서의 자리라도 쥘 수 있을 것 같아서.”
자조적으로 웃은 루드비히는 하루속히 황비를 들이라는 신하들의 탄원서를 가볍게 구겨 옆으로 던져버렸다.
“사람 심정도 모르고. 이놈들은 참.”
“다 자기 가문을 위한 정치적 이유 아니겠습니까.”
“자기 여식을 지옥에 들여보내는 짓인 건 아나 모르겠군.”
“폐하의 곁이 지옥이라고 생각하십니까.”
“황궁 자체가 지옥도일진대 거기에 부군 될 이마저 외사랑에 까맣게 타버린 마음을 가졌으니, 반려될 이에게 이보다 나락이 어디 있겠나.”
구겨져 던져진 탄원서를 주워 쓰레기통에 넣으며, 카밀라가 특유의 담담한 말투로 답했다.
“글쎄요.”
“……?”
“이 정치판에서 신료들을 휘어잡아 균형을 지키는 것이 천직인 이도 있지 않겠습니까.”
“그런 미친 이가 세상 어디에 있어.”
“세상이 이리도 넓은데 그런 괴상한 취향을 가진 이 하나 없을까요.”
고양이 눈매로 살포시 웃으며, 카밀라가 유리잔 두 개에 독한 술을 가득 따랐다.
“짠, 하고 푹 주무시지요, 폐하.”
“이거 제법 독한데.”
“독한 인생을 물처럼 마시며 살아와서 이 정도는 거뜬합니다.”
“그건 나와 같군.”
적색 포도주를 찰랑거리게 담은 잔이 허공에서 맞부딪친다.
불을 담아낸 듯 뜨거운 술이 목을 타고 깊이 내려갔다.
술기운에 저항하지 않아 금세 나른해진 눈으로, 루드비히는 생각했다.
어쩌면 오늘은, 어제보다 아주 조금은 덜 울 수 있을 것 같다고.
***
카밀라가 물러가고 나서도 기어이 독한 술 몇 잔을 더 넘긴 루드비히는 가장 큰 통신구가 들어 있는 수납장을 더듬더듬 열었다.
삐빅. 삐빅. 연결이 가는 소리가 들리더니…….
이내 과로에 시달리고 있는 하르벤타의 황제, 이샤트가 눈을 비비며 통신구에 떠오른다.
[뭐냐. 이 시간에 무슨 일이야.]
“흐…… 오랜만이다?”
[취했냐?]
“아닌뒈?”
[아닌뒈? 이러고 있는데 안 취하긴 무슨. 술주정하려고 연락한 거면 이만 끊겠다.]
“잠깐.”
고개를 털어 다소 정신을 차린 루드비히가 물었다.
“그대, 혼인했나?”
[국서는 아직 안 뒀다. 후궁만 여럿 뒀지.]
“후궁 여럿? 너 바람둥이냐?”
[다 정치적인 거래 아니겠나. 그들은 내 곁에서 누릴 수 있는 호화를 원하고, 나는 그들과 혼인함으로써 견고해질 황권을 원하고.]
“……그럼 사랑은?”
통신구 속 이샤트가 푸핫 웃음을 터뜨렸다. 배를 잡고 웃는 모양인지, 붉은 머리칼이 통신구 위로 흘러내려 살랑 흔들린다.
[사랑? 뭐 이렇게 순진해? 우리 황실에는 이런 말이 있다. 진정 연모하는 이는 황실 담장을 넘지 말게 하라는.]
“…….”
[그대도 알다시피, 황실에 몸담은 이들은 높은 확률로 불행해지니까. 욕심부려 사랑하는 이를 앉히기보다는, 이 자리를 잘 견딜 정치적 파트너가 될 이를 앉히라는 거지.]
“……그렇군.”
[그러니 그대도 그만 공녀를 놓아. 자유롭게 누리며 살던 공녀가 구중궁궐에 갇혀 행복할 리가 없잖아. 뭐, 이미 대차게 차인 모양이긴 하다만.]
“티 나나.”
[냅다 연락해서 술주정하는 걸 보면 척이지. 고견을 내어주었으니 맛 좋은 술이라도 한 병 보내고. 참고로 나는 200년 이상 묵은 술이 아니면 안 마신다. 그럼 이만.]
뚝.
통신구가 검게 변하고 또다시 적막이 들어찬다.
루드비히는 반쯤 남은 술을 따르려다가 그냥 술병째로 들고 입에 털어 넣었다.
그래. 황제의 혼인을 국혼(國婚)이라 부르는 이유가 있다.
일신의 혼인이 아니라, 말 그대로 나라의 혼인이라는 뜻.
반려를 정하는 잣대는 개인의 행복이 아니라 나라의 행복이 되어야 한다.
지닌 감정 모두 제국의 부강을 위해 바꾸고 숨기고 가려야 하는 것이 바로 이 황관의 무게.
오늘 역시 지독하게 무거워 루드비히는 단단한 팔을 올려 눈가를 가렸다.
***
다음날.
루드비히는 집무실 책상 위에 한가득 쌓인 양피지를 보며 고개를 기울였다.
“이게 다 뭐지?”
서류 더미 사이에 머리를 넣은 채 뭔가 바삐 읽고 쓰던 이크리안이 답했다.
“아. 델포이 백작이 써둔 겁니다.”
“뭘 이렇게나 많이?”
“반려를 들이라는 귀족들의 청을 막을 방법이요.”
“그걸 왜 델포이 백작이.”
“충심 하나는 끝내주니까요. 밤새우면서 쓰던데요. 무려 열다섯 가지 방법을 써뒀으니 성심에 차는 것으로 골라 신료들을 다그치라고 했습니다.”
“……백작은 어디 있지?”
“싸우러 갔습니다.”
“또? 이번엔 누구랑.”
“오늘 남부 지역 귀족들의 회합이 있다고 합니다. 거기서 제국이 영주들에게 부과하는 세율이 과하다는 불평이 나오는 모양이라, 델포이 백작이 개소리하지 말라고 경고하고 온답니다.”
“……델포이 백작에겐 황궁 생활이 제법 잘 맞는 모양이로군.”
“같은 생각입니다. 귀족들하고 한바탕하러 갈 때 가장 즐거워 보이더군요.”
“유례없는 미친 자인가…….”
그리고 조금 뒤.
뿌듯한 낯으로 들어온 카밀라가 위풍당당하게 전리품을 자랑했다.
“이것 좀 보십시오.”
“그게 뭔가.”
“남부 귀족들에게서 받아낸 연명장입니다. 다시는 세율 운운하면서 입도 뻥긋 못 하게.”
“……협박했나.”
“아니요.”
사람 움직이는 것에는 따라올 자 없이 능한 카밀라가 어깨를 으쓱였다.
“원만하게 잘 달랬습니다. 세율이 높다고 투정을 부리니 제가 폐하께 세금 감면을 주청드리겠다고요. 다만.”
수려한 입매에 악동 같은 미소가 그려졌다.
“각 영지가 제국에 납부하는 세금은 일종의 보호료인데, 세율을 낮춤으로써 제국이 남부 영지를 보호할 돈과 명분을 모두 잃었으니 안전을 위해 주둔하던 황실 기사들은 모두 물림이 합당하고, 제국의 보호 아래 있는 다른 영지와의 교역 역시 끊을 수밖에 없다는, 그런 상식적인 안내도 함께 드렸지요.”
카밀라가 차를 한 모금 삼키고 쐐기를 박았다.
“그러다가 누군가 영주를 끌어내리기라도 하면, 그것참 안타까운 일입니다만, 그럼에도 제국의 보호를 받을 수는 없다는 점도 첨언했고요.”
루드비히가 이크리안을 바라보며 눈빛으로 물었다.
‘저게 어딜 봐서 원만한 대화인가. 대놓고 협박을 하고 왔는데.’
‘백작 성정이 본디 그렇습니다. 저런 식으로 귀족들을 죄다 휘어잡는 중이거든요. 그런 연유로, 최근 폐하의 새로운 보좌관이 악마나 다름없다는 소문이 퍼지고 있습니다.’
둘이 나누는 눈짓을 미처 눈치채지 못한 카밀라가 한술 더 떠서 두루마리 하나를 흔들었다.
“아. 그리고 이것도 받아왔습니다.”
“그건 또 어느 귀족의 피눈물이야.”
“피눈물이라니, 무슨 말씀을. 단지 제가 폐하께 남부 귀족들의 답도 없는 불만 사항을 아주 자알 전달드리겠다고 했더니 글쎄 이런 걸 다 주지 뭡니까.”
카밀라가 촤악 펼친 두루마리에는 남부의 각 귀족 가문이 카밀라의 입을 막는 대가로 건넨 물품 목록이 길게 적혀 있었다.
돈깨나 될 것 같은 물건들을 주르르 훑어보던 루드비히가 기가 찬 듯 헛웃음을 지었다.
“그대 입 다물라고 이 귀물들을 준다고 한 것 같은데. 그대는 이미 내게 말을 해버렸잖나.”
“저는 입을 다물겠다고 한 적이 없습니다.”
“그럼 이건 왜 홀랑 받아온 거지?”
“개소리 박살 내러 무려 남부까지 직접 다녀오지 않았습니까. 수고비지요.”
“…….”
루드비히가 다시 한번 이크리안을 바라봤다.
얘 뭐야. 무서워.
그러자 이크리안이 으레 있는 일이라는 듯 어깨를 으쓱였다.
“백작이 귀족들을 아주 가지고 논다니까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