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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녀님의 꽃밭에는 그들이 산다-304화 (304/323)

##  304화: 외전. 외사랑의 끝 (1)

“…….”

악마가 떠난 방이 적막하다.

귀가 먹먹해졌기 때문인가. 아니면 심장 고동이 뚝 멈추었기 때문인가.

루드비히는 너른 책상 위에 놓인 전서들을 물끄러미 바라봤다.

전시라도 해두듯 늘어둔 양피지 말미에는 모두 너의 이름이 적혀 있다.

조언을 구할 황실 어른이 부재하기에 난제가 생기면 자연히 네게 보냈던 고민. 매번 함께 고뇌하여 성심성의껏 답변을 눌러 써준 너.

어른이 되었음에도 어릴 적과 크게 다르지 않게 제멋대로 날아가는 필체. 하여 볼 때마다 웃음을 짓게 했던…….

“……이브.”

오랜 과거부터 영혼 한가운데 콱 틀어박혀 있던 이름을 부르니 심장이 어서 그 곁으로 가서 숨을 쉬라고 재촉한다.

루드비히가 억누르듯 가슴 위를 부여잡았다.

‘혼인이라니…….’

내게는 더 다가갈 기회조차 주지 않고.

그렇게 그 악마만이 네 곁에 있을 자격이 있는 것처럼 오롯이 그놈만을 바라보고. 기어코 혼인이라니.

- 루드비히. 이제 너도 그만 앞으로 나아가라.

환청처럼 악마의 목소리가 들린다.

- 나는, 네가 우리의 뒤에서 홀로 불행하길 원치 않는다.

루드비히가 헛웃음을 지었다.

네놈은 몰라. 절대로 모른다.

영혼 깊이 뿌리 내린 외사랑이 그 말 한마디에 쉬이 뽑힐 리가 없다는 걸…… 끝내 이벨리아의 연정을 차지한 네놈은 죽어도 모를 터다.

루드비히는 어두운 방에 죽은 듯 앉아 새벽별을 응시했다.

볼을 빠르게 가로지르는 물기는 보란 듯 그대로 버려둔 채.

***

근래 국정으로 바빠 자주 찾지 못했던 비밀기지.

- 사박.

루드비히의 발이 나뭇잎을 밟음과 동시에, 가지 위에 앉아 깃털을 고르던 사냥용 매 라르고가 길게 울었다.

조금의 시간 차를 두고, 오두막 문이 퍽 소리를 내며 거칠게 열린다.

“라르고 울음소리다! 루이 왔구나!”

어두웠던 마음이 삽시간에 따뜻해진다. 외부 기온은 다르지 않으니, 이건 그저 연정에 빠진 사내만 느낄 수 있는 훈풍일 터다.

“……있었네?”

“내가 갈 곳이 어디 있겠어. 우리 집. 이바스 저택. 마계의 내 성. 아니면 여기지!”

그놈의 영역은 자연스레 들어가 있지만, 나의 영역은 배제되어 있다.

그 커다란 차이에 지끈 옥죄는 심장을 무시하고 루드비히는 평소처럼 담담히 말했다.

“뭐 하고 있었어. 그 앞치마랑 국자는 또 뭐고.”

흰 앞치마와 국자, 그리고 뺨에 온통 붉은 것이 묻어 있는 게, 꼭 괴담에서 나올 법한 살인 요정 같다.

흉흉한 분위기를 자아내던 비밀기지의 주인이 활짝 웃으며 국자를 치켜들었다.

“요리!”

“……라기보다는 그 국자로 누구 하나 때려잡은 것 같은데.”

“복분자 요리!”

“아. 명운을 달리 한 것이 복분자였군. 안타깝게도.”

“자꾸 조잘대면 명운을 달리해서 요리에 투입되는 게 네가 되는 수가 있어.”

위협적으로 국자를 휘두르는 친우를 보며 루드비히가 입을 다물었다.

감히 황제에게 온갖 불경한 말을 모아 서슴없이 내뱉는데도 사내의 입매엔 짙은 웃음이 자리했다.

역시, 그가 쉴 곳은 여기뿐이다. 황태자 시절이나, 황제 시절이나 한결같이.

루드비히가 겉옷을 벗어 나무 아래 던져두며 숨을 들이마셨다.

오두막 안에서 뭔가 괴상한 냄새가 나는 것이, 벌써 재료 몇을 골로 보낸 모양이다.

“갑자기 요리는 왜 하는데?”

“아스 만들어 주려…… 아…….”

물 흐르듯 답하던 이벨리아가 일순 말을 멈추고 루드비히의 눈치를 살폈다.

이를 기민하게 눈치챈 루드비히가 애써 태연하게 말을 받았다.

“그 악마 놈이야 뭐. 네가 쓰레기를 만들어 던져줘도 좋다고 먹겠지.”

그때. 바로 뒤에서 낮은 목소리가 들려온다.

“잘 알고 있군.”

늘 무감하나, 오로지 루드비히의 외사랑을 향할 때만 색과 고저를 품는 음성.

신물을 되돌려 세계에 편입되는 바람에 조금씩 나이를 먹기 시작하는 몸은 이전보다 훤칠해져 있었다.

루드비히는 어느새 자신보다 시야가 조금 높아진 악마를 보며 못마땅하다는 듯 눈살을 찌푸렸다.

“날 위해 만들었다고, 이브?”

“으응. 그게…….”

“저놈 눈치는 보지 말고.”

“……우리 아빠랑 엄마 신혼 때 세토가 많이 만들어줬던 거래. 전복과 문어, 부추를 복분자에 졸여서 만드는 거랬어. 그래서 나도 토끼한테 먹여주고 싶어서…….”

“전복과 문어, 부추와 복분자?”

“응.”

아가레스가 다소 당황한 표정으로 되물었다.

그가 식재료에 통달하진 않았지만, 그것들은…….

“그 재료들, 뭐에 좋은지는 알고 있는 거야?”

“응. 세토가 말하기를, 몸에 좋대. 특히 사내 몸에.”

“…….”

이런 방면으로는 지식이 풍족하지 않은 연인에게 가르칠 것이 한가득하다.

다만 지금 이 자리에서 할 이야기는 아니라, 악마는 그저 연인의 허리를 뒤에서 감싸 안으며 속삭였다.

“아주 바람직한 주방장이로군. 훗날 우리 혼인해서 같이 살면 그때 자주 해줘.”

“그래!”

그리고 둘만 들을 수 있는 낮은 속삭임.

“그러면 아마 금방…….”

귓가에 뜨겁게 내리는 숨결에 이벨리아가 몸을 바르르 떨었다.

“금방?”

“둘이 셋이 될 거야.”

“……?”

“…….”

“……!”

유혹 가득한 연인의 말을 뒤늦게 이해한 이벨리아의 얼굴이 화르르 붉어졌다.

“그, 그, 그럼 세토가, 이 요리를 자주 했다는 게…….”

이 요리가 바로 오라버니들과 내가 태어난 생명의 원천이었어?

당황하여 마구 휘두르던 국자가 까앙, 악마의 어깨에 부딪혔다.

목까지 새빨개진 채 호다닥 달려 오두막으로 쾅 들어가 버리는 연인을 보며 아가레스가 낮은 웃음을 흘렸다.

그리고 그런 둘의 모습을 한 발짝 뒤에서 가만히 바라보던 루드비히는 절감했다.

‘친구. 아니면 이방인.’

자신은…… 둘 중 하나를 선택할 수밖에 없다는 것을.

***

터엉.

“마, 마, 맛있게 먹어……!”

여전히 붉은 얼굴로 이벨리아가 내동댕이치듯 내려둔 냄비.

흘끗 그 안을 바라본 아가레스와 루드비히가 고개를 기울였다.

“전복과 문어, 부추와 복분자는 다 어디로 가고?”

“이건 죽이잖아.”

“……몰라.”

이벨리아는 차마 말하지 못했다.

이 요리의 의미를 알고 나서 너무 부끄러운 나머지 죄다 후드리찹찹 다져서 넣어버렸다고.

정말 모르고 만든 건데, 받는 연인 입장에서는 ‘아, 내가 힘을 좀 내야겠구나’하고 오해하기 딱 좋은 상황 아니던가.

이벨리아는 한 국자씩 덜어 연인과 친구의 앞에 놓아주었다.

그리고 다소 기대하는 눈빛으로 턱을 괴고는 숟가락을 입에 넣는 둘을 빤히 바라본다.

“어때?”

“크읍. 맛있다.”

“루이는 왜 말이 없어?”

“……너무 맛있어서 혼백이 잠깐 저승에 다녀온 모양이로군. 맛있다.”

“진짜? 나도 먹어봐야지!”

냉큼 숟가락을 들던 이벨리아의 손을 악마가 와락 부여잡았다.

“잠깐.”

이거 먹으면 네 미각 죽어.

“내가 다른 거 해줄게.”

“에엥. 왜?”

“너는 맛있는 거…… 아니, 이게 너무 맛있어서 내가 다 먹고 싶어.”

“정말? 그렇게 마음에 들어?”

“엄청.”

“좋아. 그럼 이건 토끼 다 먹고, 나는 토끼가 만들어 주는 거 먹을래.”

“좋은 생각이야. 양보해줘서 고마워.”

옆에서 루드비히가 진한 동정이 서린 눈으로 아가레스를 바라봤다.

사랑에 눈먼 사내여. 알아서 지옥으로 걸어 들어가는구나.

‘너 이대로 소멸하는 거 아니냐. 이 괴상한 게 냄비 가득 들었는데.’

‘혹시 내가 소멸하거든 이브에게 잘 전해줘라. 여하튼 이 음식 때문은 아니었다고.’

가득 찬 냄비를 결연한 표정으로 바라보던 악마는 연인에게서 앞치마를 벗겨내 입고서 제법 능숙하게 재료를 손질하기 시작했다.

“토끼 원래 요리할 줄 알았어?”

“전혀.”

“그런 거치고는 익숙해 보이는데?”

“연습했다.”

“언제?”

“네게 청혼하고자 마음먹었을 때부터.”

탁탁탁탁. 경쾌한 칼질이 소고기를 보기 좋게 잘라낸다.

“때로는 네게 손수 음식을 해주고 싶어서.”

여러 재료를 배합해 골고루 뿌린 다음 불 위에 올리자 금세 맛있는 냄새가 퍼져나간다.

이벨리아가 홀린 듯 연인의 뒷모습을 바라봤다.

자신에겐 길기만 했던 앞치마가 연인에게는 딱 허리까지 오는 것도, 손에 쥐기엔 다소 크던 식칼이 저 손에서는 장난감처럼 보이는 것도, 몸을 움직일 때마다 팔과 등의 근육이 존재를 알리는 것도.

사내의 특징들이 이벨리아를 설레게 했다.

평생 시중을 받고 살아온 데다가 식칼보다는 검을 들고 전장을 누볐던 악마.

그런 연인의 손에, 오롯이 자신만을 위한 작은 칼이 들려 있다는 건 생각보다 간지러운 기분이었다.

붕붕 떠오르는 마음에 이벨리아는 조르르 아가레스에게 달려갔다.

“예뻐. 내 악마.”

자주 그러하듯 까치발을 들고 볼에 입을 쪽 맞추려던 이벨리아는 문득 이곳에 두 눈 시퍼렇게 뜬 친구가 있다는 것을 상기하고선 멋쩍은 표정으로 발을 내렸다.

흡사 불청객이라도 된 기분에 루드비히가 숟가락을 내려놓고 자리에서 일어섰다.

“난 바람이 쐬고 싶어서. 잠시 나갔다 오지.”

“……아.”

이벨리아가 석상처럼 굳었다.

청혼을 받은 것이 너무도 기뻐 제대로 감추지를 못한 모양이다. 하여 본의 아니게 친우에게 상처를 주었나 보다.

하지만 네 앞에서 이 감정을 평생 숨기고 살 수는 없는걸.

네 앞에서 내 연인을 사랑하지 못한다면, 그건 외려 아스에게 실례이기도 하고.

‘어쩌지…….’

적막한 오두막.

이벨리아는 혼란한 마음으로 입술을 깨물었다.

***

밖으로 나온 루드비히는 그들이 어릴 적부터 애용하던 돌 위에 털썩 주저앉았다.

“후우…….”

너른 제국을 다스린다는 황제가 자신의 마음 하나 다스리지 못해 깊은 한숨을 내쉰다.

하긴. 제국의 넓이보다 마음의 넓이가 더욱 넓으니 당연한 일인지도.

그 악마 놈 옆에서 짓던 너의 웃음은 내게 보여주는 것과는 결이 달랐다.

어디 웃음뿐이랴.

숨소리도, 표정도, 몸짓도, 음성도. 모든 것이 달랐다.

“왜…… 몰랐을까.”

아니. 알았겠지. 모른 척했던 거겠지.

와닿아 알게 되는 순간 지금처럼 심장이 천 갈래로 찢기듯 아플 것이 뻔하니까, 애써 모른 척했던 거겠지.

그놈과 나를 대하는 너의 마음에 큰 차이가 없을 거라고.

내가 더 노력하면 너도 나를 같은 마음으로 봐주는 날이 올지도 모른다고. 그렇게 애써 위안했던 거겠지.

루드비히가 깊이 침잠한 눈으로 오두막 창문을 바라봤다.

안절부절 오가는 금빛 머리칼이 언뜻 비쳤다가 사라지길 반복한다.

사내의 입매에 허탈한 조소가 매달렸다.

“네가 내 눈치를 보는 날이 다 오네.”

너는 빌어먹게도 다정하니까.

그래서 청혼을 받아 행복한 그 마음조차 내리누르고 내 걱정을 하는 거겠지.

“…….”

일순 못된 마음이 들었다.

내 아픈 모습을 네게 보여주고 또 보여주어, 네가 끝내 나를 돌아보지 않고서는 못 배기게 할까, 그런 못된 마음이.

네가 행복한 그만큼 나에 대한 죄책감이 커지도록 만들까, 그런 삿된 생각이.

“네가 나처럼 아프길…….”

인간이기에 어쩔 수 없는 그 음습한 마음은, 고개 들어 네가 처음 솔방울을 던진 그 자리를 눈에 담자마자 순식간에 증발했다.

“……내가 감히 어떻게 바라.”

네 행복을 염원해 내 모든 것을 던지지는 않을망정, 어떻게 너를 이 진창으로 끌어 내릴 수 있겠나.

가벼운 웃음만 가득 담아도 모자랄 네 마음에, 어떻게 내가 족쇄가 될 수 있겠나.

루드비히는 잘 알고 있었다.

결국 자신이 조각조각 부서진다고 하더라도, 끝내 그는 이벨리아의 기쁨을 자신의 행복보다 앞에 놓을 수밖에 없다는 것을.

***

몇 식경 뒤.

기다리다 못한 이벨리아가 오두막 문틈 사이로 얼굴을 내밀고 물었다.

“루이. 왜 안 와……?”

그 표정에 언뜻 비치는 초조함과 어색함을 모를 내가 아니다.

하여 루드비히는 더 미루지 않기로 했다.

“잠시 얘기 좀 하자. 이브.”

과거라면 아무것도 아니었을 그 청에, 친우는 이제 연인의 눈치를 살핀다.

아가레스가 뜻대로 하라는 듯 고개를 끄덕이자 그제야 이벨리아는 도도도 달려 루드비히의 앞에 섰다.

“저기…….”

“무거운 얘기 하려는 거 아니니까 긴장 풀고.”

“…….”

“묻지도 않았는데 내가 먼저 입 밖으로 내면 모양이 영 이상해질 것 같아서 그간 그냥 뒀었는데, 아무래도 네가 불편해하는 것 같아서 말하려고.”

“……뭔데?”

작게 심호흡한 루드비히가 환한 미소를 만들었다.

어쩌면 그가 지금껏 친우에게 보여주었던 것 중 가장 밝을.

“나. 이제 더는 너를 연모하지 않아.”

“…….”

“내가 네게 고백을 한 게 언젠데. 벌써 몇 년이나 흘렀잖아.”

“…….”

“한때의 치기였어. 내 주변에 여인이라곤 너밖에 없었으니까. 내 연정이 자연히 네게 잠시 머물렀던 거야.”

친우의 붉은 눈동자를 빤히 올려보며 이벨리아가 물었다.

“그럼 지금 내게 머문 감정은 뭐야?”

“우정.”

“…….”

“너는 내게 둘도 없이 소중한 벗이야. 그게 다야.”

어디선가 들었다.

진정한 사랑은 스스로 죽이기를 저어하지 않는다고.

내 연정은 그마저 온통 불살라 재로 만들 수 있도록 깊고 넓다는 것을, 너는 알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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