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301화: 외전. 악마의 청혼 준비 (3)
때로 감정은 말보다 행동을 통해 적나라하게 표현되기도 한다.
지금이 그랬다.
- 콰과과과과.
누가 부자(父子) 아니랄까 봐 빌어먹게도 비슷하게 생긴 소드마스터 둘.
용처럼 솟구치는 검기에서 눈앞의 악마를 기어코 도륙 내고야 말겠다는 분노가 여실히 느껴졌다.
열 뻗치는 심정을 대변하듯 형태 없이 줄기줄기 뻗어나간 사나운 기운이 집무실을 사정없이 난도질했다.
아가레스는 당황했다.
아무리 그래도 이 정도로 눈이 돌아버릴 줄은 몰랐는데.
“잠깐. 지금 네놈의 집무실이 죄다 부서지고 있다. 연무장으로 나가서…….”
“도둑 새끼…….”
“강도 새끼…….”
“내 말은 개 짖는 소리로도 안 들리는 모양이군.”
“개잡놈…….”
금빛 검기 맺힌 휴고의 검이 공간을 세로로 찢어발기던 찰나. 아가레스는 집무실 창문을 깨고 밖으로 몸을 날렸다.
흘끗 뒤를 돌아보니 두 황금 머리통이 마찬가지로 훌쩍 뛰어내리고 있다.
“옳지. 따라와라.”
연무장 방향으로 앞서 달리는 악마와 그 뒤를 죽일 듯 쫓는 이 가문의 두 주인.
사방을 집어삼키는 돌개바람에 지나던 사용인들이 짧은 비명을 지르며 벽으로 달라붙었다.
그렇게 세 존재의 신형이 연무장을 밟음과 동시.
아가레스는 회피를 멈추고 그대로 몸을 돌려 검기를 맞받아쳤다.
- 콰아앙!
날카로운 기운이 파편처럼 사방으로 튀어 땅과 벽에 상흔을 새긴다.
“진정 좀 하지?”
“…….”
“…….”
“그럴 생각 따윈 추호도 없는 모양이군.”
검의 끝에 다다랐다는 두 고수의 칼날이 어지럽게 쏟아져 내린다.
파괴적인 형을 띄는 아르티나 가문의 고유 검법이 아가레스의 주변을 집어삼켰다.
가히 압도적인 기운을 두른 검 세 개가 어우러지면서 굉음이 연이어 울렸다.
- 쾅. 콰앙. 쾅.
땅이 떨리고 하늘이 우짖는다. 말 그대로 천지가 진동하는 소리.
방에서 푸딩을 한 입 크게 떠먹던 이벨리아가 화들짝 놀라 창문을 열어젖혔다.
“뭐야! 이게 무슨 일이야! 인마전쟁이 다시 시작된 건가?”
그러자 옆에서 푸딩 그릇을 싹싹 핥던 엔리르가 말랑한 앞발로 창문을 닫아걸었다.
“누나. 저 싸움에는 누나가 모르는 지극히 합당한 사유가 있어.”
“무슨 사유가 있길래 하늘이 두 쪽 나게 난리를 피워? 토끼가 뭐 우리 집안 가보라도 훔쳤대?”
“정확해.”
“훔쳤다고?”
“훔치려고 해. 그러니까 말리지 마, 누나. 저놈은 맞아 뒈져도 싸.”
“……?”
“저렇게 무식한 방법으로라도 어차피 한 번은 결론이 나야 하는 일이야.”
이벨리아의 그릇에 반쯤 남은 푸딩을 소리소문없이 날름 삼켜버리며, 엔리르가 가르릉 흡족하게 목을 울렸다.
더 맞아라. 더!
더 때려라. 더!
저 악마 놈 머리에 아주 크고 동그란 땜통이 생길 때까지!
***
아가레스는 둘의 분노를 담담하게 받아냈다.
이벨리아를 아끼는 그 마음은 충분히 이해하고도 남았기에, 악마의 검은 철저하게 공격 아닌 방어에 치중되어 있었다.
찔러 들어오는 검격은 가능하면 흘려냈고, 정 어렵다면 쳐내는 정도에 그쳤다.
그렇게 무려 한나절.
기세가 전혀 무뎌지지 않은 휴고가 짓씹듯 중얼거렸다.
“감히 네놈이 내 딸을…… 눈에 넣어도 아프지 않을 내 딸을…….”
“얼마나 소중한지 잘 알고 있다.”
“네놈이 뭘 알아. 내가 어떤 마음으로 이브를 키웠는지, 네놈이 무엇을……!”
“그대의 부정(父情)을 내가 헤아릴 수는 없지만, 감히 말하건대, 내 마음 역시 그대의 마음보다 얕지는 않을 거다.”
맞부딪쳐 막아내고 있는 휴고의 검 외에, 옆에서도 검날이 쇄도한다. 아르칸이다.
“기어코 네놈이 혼인을 입에 담아?”
“더 행복하게 해주고 싶어서.”
콰앙. 다시 한번 휴고의 검이 부딪쳤다.
“네놈과 혼인하면 이브가 지금보다 행복할 거라고 어떻게 장담하지?”
“나와 있으면 매시간 웃는다. 이브는.”
휴고가 만든 검의 궤적을 따라 아르칸의 검신도 따라붙었다.
“걔는 원래-.”
“원래가 아니야. 이브가 얼마나 많은 것을 지고 살아왔는지는 나보다 그대가 더 잘 알 텐데.”
“…….”
정확히 목덜미를 노리고 날아들던 검이 살짝 궤도를 비껴갔다.
검이 섞이며 대화가 계속될수록, 휴고와 아르칸의 공격은 점차 예리함을 잃었다.
지쳤기 때문은 아니었다. 그저 검을 휘두르는 이유가 하나씩 흐려져서.
한나절이 더 흘러, 해가 저물고 달이 뜬다.
악마가 단단한 목소리로 말했다.
“그대들이 지금껏 지켰던 그 자리.”
“…….”
“이젠 나도 함께 서게 해줘.”
“…….”
“빼앗겠다는 말이 아니다. 그대들이 이브를 사랑하는 마음에 나 역시 같은 크기의 감정 하나 얹고자 할 뿐이야.”
한낮부터 이 밤까지.
악마의 진심이라면 질리도록 들었다.
오래도록 일방적인 공격을 받으면서도 인상 한 번 찌푸리지 않고 그저 온 마음 다해 담담히 전하는 마음은…… 인정하고 싶지 않게 깊고 절절했다.
“하…….”
짧은 한숨과 함께 휴고가 신경질적으로 검을 내던졌다.
악마의 심장을 노리던 아르칸의 검도 힘을 잃고 그 끝이 땅을 향했다.
아무리 소드마스터라고 한들 신격을 상대로 종일 검을 휘둘렀는데 지치지 않을 리가 없다.
휴고는 젊었을 적의 그 어느 날처럼 연무장 바닥에 벌렁 드러누웠다. 시큰거리는 손목을 부여잡은 아르칸도 마찬가지.
슬쩍 눈치를 보던 아가레스는 그들 곁에 다리를 뻗고 앉아 손을 땅에 짚어 기댔다.
검게 물든 하늘 위. 선명한 존재감을 발하는 별빛이 그들을 굽어보고 있다.
꼭 딸을 처음 만났던 그 시간 같다고, 휴고는 생각했다.
“……감히 그 어떤 것에도 비견할 수 없을 만큼 귀한 아이다.”
“…….”
“태어나 처음 눈을 떠 나를 바라봤을 때 맹세했었지. 비가 내린다면 우산이 되어주겠다고. 험한 길을 마주한다면 세상 모든 꽃을 꺾어서라도 그 발아래 뿌려주겠다고.”
“…….”
“그대와 검을 섞는데 문득 그런 생각이 들더군. 내가 그 오만했던 맹세를…… 잘 지켜왔나, 하는.”
마찬가지로 시선을 하늘로 돌리며 아가레스가 답했다.
“잘 지켰다.”
“……?”
“늘 우산이 되어준 그대를 보면서 이브는 누군가의 비를 막아주는 법을 배웠겠지.”
“…….”
“항상 꽃을 꺾어 놓아준 그대 덕에, 이브는 수없는 칼날 위에서도 무너지지 않고 저리 꼿꼿하게 걸어왔겠지.”
“…….”
“그러니 그대는 잘 지켰다. 첫 맹세를.”
거짓 없이 담담한 악마의 말이 휴고의 심장에 가닿았다.
매일 조마조마한 마음으로 딸 곁을 맴돌았던 아버지의 얼굴이 울 것처럼 일그러졌다.
그랬나. 내가, 잘 지켜왔었나.
나는, 우리 딸. 나는 너에게 괜찮은 아비였었나.
“……그리고 나 역시 그대의 맹세를 그대로 이어가겠다.”
흘끗 바라본 악마의 옆얼굴은 결연하다.
휴고는 깨닫지 않을 수가 없었다.
사실, 자신은 제법 오래전부터 언젠가 다가올 이날을 조금씩 받아들이고 있었다는 것을.
그 옛날의 맹세를 함께 이어가기에 이놈만큼의 적임자가 없다는 것 또한.
휴고가 고요히 말했다.
“조만간 술 한잔하지.”
“좋은 술을 들고 찾아가겠다.”
“웬만하면 말도 높이고.”
“그러지요, 장인어른.”
“……취소. 평소대로 해라. 징그럽다.”
그 옆, 기진맥진하여 드러누운 아르칸이 연무장 모래를 한 움큼 쥐어 아가레스의 다리에 힘없이 뿌렸다.
“잘해라…… 이브한테.”
“지켜봐라. 흡족할 테니까.”
그 거만하면서도 당찬 답에, 휴고와 아르칸은 동시에 짧은 웃음을 흘렸다.
***
양피지에는 차근차근 실선이 그어졌다.
가장 윗줄에 적혀 있던 아르티나 일가 모두로부터 승낙을 받아냈으니 다음은…….
‘미친개 기사단.’
이번에도 단단히 칼부림이 날 것이 분명하다.
하여 아가레스는 애초에 묵색 검을 쥔 채로 덩치 큰 멍멍이들에게 선포했다.
“이브와 혼약할 거다.”
그런데 당장 검을 들고 달려들 거라는 예상과 달리, 의외로 멍멍이들은 침착하게 앉아 코웃음을 쳤다.
“눼에, 눼에, 헛된 꿈 실컷 꾸시고요.”
“눼에, 눼에, 열심히 해보시고요.”
“눼에, 눼에, 어차피 주군과 마님께 승낙을 받지 않으면 어림도 없고요.”
한 대 때려주고 싶은 말투로 기사단이 아가레스를 농락했다.
그에 악마는 득의양양하게 답했다.
“승낙받았다.”
“헹. 거짓말하네.”
“망상증 있는 듯.”
“못 믿겠으면 당장 확인해 보든가.”
킥킥대던 기사들이 그 말에 표정을 굳혔다.
저 악마 놈 왜 저렇게 당당하지? 진짜 주군 일가 중 어느 분께 허락을 받은 건가?
헤롤드가 당황스러움을 애써 감추고 물었다.
“어, 어느 분이 허락을 하셨는데?”
“휴고 아르티나.”
“뭐어어어어? 주군께서? 아니, 왜? 주군께서? 우리 주군이?”
“당황할 것 없다, 헤롤드. 어차피 다른 분들의 승낙까지 받지 못하면-.”
“그리고 엘리시아 아르티나, 아르칸 아르티나, 세드릭 아르티나, 엔리르 아르티나.”
“…….”
줄줄이 나오는 이름들에 기사들이 떡하니 입을 벌렸다.
비틀비틀 걸어온 알렉이 아가레스의 어깨를 턱 부여잡았다.
“……거짓말이지?”
“진짜다.”
“……아니야. 거짓말이야. 거짓말이라고 말해.”
“거짓말할 이유가 없는데.”
불과 조금 전만 해도 눼에, 눼에, 이상한 소리를 내던 기사들 사이에 싸한 침묵이 감돈다.
아가레스는 검 손잡이를 조금 더 세게 쥐었다. 저 미친개들의 돌진에 효과적으로 대응하기 위해서.
그런데.
- 털썩.
“흐어어어어엉-!”
“으어어어어엉-!”
“허락을 하셨대애-! 다들 허락을 하셨대애-!”
이 미친놈들이?
아가레스는 자신도 모르게 한 걸음 물러섰다.
“……우냐.”
“아이고, 아이고오-!”
“우리 아가씨가 악마에게 잡혀간다아-!”
“……검을 들고 달려들 줄 알았는데.”
아르티나 성을 가진 이들이 모두 승낙하였다고 하니 이놈들도 더 강짜를 놓을 수는 없는 모양이다.
누구보다 위아래 없이 사는 것처럼 보여도 사실 충성심 하나는 발군인 이들이니까.
“나무 열매를 쥐여주셨을 때가 엊그제 같은데에-!”
“넌 우리가 이렇게 우는데 눈 하나 깜짝 안 하냐아-!”
어흐흑 눈물 흘리며 알렉이 아가레스의 바짓자락을 붙잡았다.
“으.”
무진장 싫다는 표정으로 탁 털어낸 아가레스가 빠르게 걸음을 놀려 혼돈의 도가니에서 빠져나갔다.
덩치 거대한 미친개들이 주저앉아 꺼이꺼이 우는 광경은 실로 괴이하여 다시는 보고 싶지 않은 것이었다.
***
이제 양피지에는 단 넷의 이름만이 남아 있었다.
바로 정령왕들.
이들도 하나같이 만만치 않은 놈들이다.
하긴, 신계에서 떨어진 이후 자기들끼리 정령계에 모여 물이요 불이요 하며 살아왔으니, 사회성 잃고 미쳐버리는 것도 당연하긴 하다.
“일단 불러서 말이 안 통하면 조져버리는 수밖에.”
정령왕들은 이벨리아의 가족들과는 다르다.
인간 문화로 치자면 아르티나 일가는 아가레스의 새로운 가족이 됨과 동시에 손윗사람이 되지만, 정령왕들은 그저 이벨리아의 친구 정도에 불과하니까.
엄밀히 말하자면 승낙을 받아야 하는 대상이라기보다는 원만하게 통보하면 족한 대상이다.
하여 아가레스는 한결 편안한 마음으로 바들바들 떨며 곁을 지나는 하급정령에게 말했다.
“왕들에게 전해라. 시급을 다투는 일이 있으니 얼굴 좀 보자고.”
그러나 아무도 오지 않는다. 이럴 줄 알았다.
아가레스는 전하는 말을 바꿨다.
“왕들에게 다시 전해라. 모든 이들이 이브와의 혼약을 승낙했다고.”
말을 맺음과 동시. 이번에는 제대로 반응이 온다.
가장 먼저 소소리바람이 몰아쳤다.
“뭐? 누가 뭘 승낙해? 내 남편도 승낙했어, 그걸?”
“세드릭 아르티나는 그나마 쉬운 편이었다.”
“어떻게 그럴 수가 있어!”
분개하는 페르세스의 뒤로 거대한 불덩어리가 숲을 죄다 태워버릴 것처럼 화르르 솟아올랐다.
“그놈이 허락했다고? 이 봐라, 이 봐! 내가 그딴 놈을 계약자랍시고 믿고 있었던 게 잘못이지! 계약 파기야! 하여간 강단 없고 물렁물렁해가지고는!”
“너 지금 내 남편 욕하냐? 뒈질래?”
뒤이어 나타난 트로이가 흙으로 벽을 세워 페르세스와 이프리트 사이를 갈라두며 혀를 찼다.
“진짜 싫다. 혼약이라니. 이브가 훨씬 아까워.”
가만히 아가레스를 노려보던 엘라임도 중얼거렸다.
“내가 이러려고 이브를 환생시켰나 자괴감이 드는군.”
씩씩대며 트로이가 만든 흙의 벽을 부숴버린 이프리트가 드잡이라도 할 것처럼 다가와 으르렁 목을 울렸다.
“내 눈에 흙이 들어갈 때까지는 절대 안 돼.”
그 말에 아가레스가 진흙을 손으로 퍼 이프리트의 눈에 쓱싹 문질렀다.
“아악! 내 눈! 개자식아!”
“흙 들어갔으니 이제 승낙해 주는 건가.”
“미친놈이냐고, 진짜!”
눈을 비비면서 팔짝팔짝 뛰는 동료를 바라보며 엘라임이 혀를 찼다.
“……이브가 네놈의 이런 본성을 알아야 할 텐데.”
“이브에겐 평생 보여줄 일 없는 모습이다.”
“우리 말랑이 사기 결혼하게 생겼어!”
“진짜 이브가 훨씬 아까워. 정말로.”
재잘대는 정령왕들에게 아가레스가 말했다.
“그럼 충분히 전달된 듯하니, 나는 이만 가보지.”
그러자 왕들의 눈빛이 일제히 변했다.
“가긴 어딜 가?”
“어차피 이 혼인을 막지 못할 거라면…….”
“열 뻗쳐서 네놈을 몇 대 때리기라도 해야겠다.”
“그러고 보니 어느 인간 나라에서는 혼인하는 신랑 등을 때린대.”
“방금 지어낸 것 같은데, 트로이.”
“배였나? 아아, 머리였던 것 같다. 아니다, 죽인댔나? 어쨌든 그렇대.”
아니. 혼인하는 신랑 머리를 때려서 죽이는 나라가 있을 리 없잖아.
목끝까지 차오른 말을 아가레스는 굳이 내뱉지 않았다.
정령왕들의 심사가 얼마나 뒤틀렸는지는 주변만 봐도 여실히 드러나기에.
하늘에서는 폭풍이 몰아치고, 난데없는 빗줄기가 세상을 집어삼키며, 대지는 금방이라도 터질 것처럼 경련하고, 주위의 온도는 기하급수적으로 치솟았다.
아가레스가 작게 한숨을 내쉬며 한탄했다.
“마음 열고 얌전히 좀 넘어갈 정령왕.”
“…….”
“…….”
“없군.”
꼬인 매듭을 말로 풀 수 없을 땐 힘으로라도 잘라야 하는 법.
악마가 검을 까닥 흔들었다.
“들어와.”
그 말이 신호탄이라도 된 것처럼, 하늘에서 땅으로 우레가 내리꽂혔다.
***
먼 훗날 역사서에는 원인 모를 자연의 분노로 기록될 싸움은 제법 오랜 시간 계속됐다.
하루가 꼬박 흘러 늦은 밤.
한때는 신격으로서 함께 하늘을 거닐고, 한때는 타락한 신으로서 함께 굴레를 지고, 이제는 그들이 아껴 마지않는 이의 희생으로 죄업을 벗은 초월적 존재들은 패잔병처럼 나무에 기대 씩씩댔다.
“진짜 확 죽여버릴 수도 없고, 저걸!”
“그러게. 힘만 무식하게 세서는. 근데 진짜 이브가 아까워.”
“우리 말랑이. 안쓰러운 말랑이.”
“……나 역시 연모했었는데. 내 계약자를.”
엘라임의 마지막 말에 아가레스를 비롯한 정령왕들의 시선이 천천히 돌아갔다.
“……뭐?”
“너 지금 뭐랬냐, 엘라임?”
“이야, 미친놈이 여기 하나 더 있었네?”
“2차전 시작해! 이번 타깃은 이 물 덩어리 놈이다!”
힘 빠진 그들이 투닥투닥 주먹을 날렸다.
언젠가 다 함께 세상을 오시하던 아득한 그때처럼 밤은 깊어갔다.
맥 풀린 목소리로 나무둥치를 끌어안으며 트로이가 중얼거렸다.
“뭐, 여하간 다들 허락했다니까 우리가 뭘 어쩌겠어.”
“우리 말랑이…… 진짜 귀한 말랑이인데.”
“속 시원하게 네놈 등 몇 대 때렸으니 됐다.”
“잘해라, 내 계약자에게. 항상 지켜볼 테니.”
저 먼 창공에는 말간 새벽별이 웃고 있었다.
아주 오래전 그들 모두가 친애했던 어린 천사 같기도.
지금 그들 모두가 사랑하는 다정한 인간 같기도.
샛별. 고대어로 가로되, 이벨리아.
연모해 마지않는 연인과 같은 이름의 별이 뜬 그 시간.
사랑에 눈이 먼 악마는 기어코 모두의 승낙을 받아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