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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녀님의 꽃밭에는 그들이 산다-300화 (300/323)

##  300화: 외전. 악마의 청혼 준비 (2)

방향을 정한 이상 망설일 이유는 없다.

아가레스는 길게 늘어진 양피지를 돌돌 말아 결연하게 쥐고서 곧바로 1번 목표물이 기거하는 별채로 향했다.

비교적 고즈넉한 저택 앞에 도둑처럼 착 달라붙은 악마는 기민한 감각을 펼쳐 내부를 염탐했다.

‘휴고 아르티나는…… 없군.’

가장 큰 방해물이 집을 비운 모양이다.

그놈은 대화 따위 할 생각도 없이 검부터 뽑아 황소처럼 달려들 테니, 다른 이들을 차례차례 공략하기 전까지는 마주치지 않는 것이 상책이다.

‘엘리시아 아르티나만 잘 설득하면 이 집안의 70%는 넘어온 것이나 마찬가지.’

적진 한복판에서도 긴장한 적 없던 악마는 날뛰는 심장을 깊은 심호흡으로 내리눌렀다.

***

공작부인 자리에서 물러나 유유자적 취미생활을 즐기는 일상은 엘리시아를 제법 유하게 만들었다.

늘 날카롭게 벼려낸 칼날 위를 걷다가 모든 정치적 이해관계에서 해방되니 신경 또한 전성기 때보다는 무뎌질 만도 했다.

이벨리아가 어디선가 사다 준 쿠션에 편안하게 기댄 자세로, 엘리시아는 전쟁 서적 속 인물에게 혼잣말로 훈수를 두고 있었다.

“멍청하긴. 배수진은 이럴 때 치는 게 아니지.”

한 장 넘긴 제국 제일의 전략가가 이럴 줄 알았다는 듯 혀를 찼다.

“쯧쯧, 거 봐. 내가 이놈의 지휘관이었으면 아주 대가리를 깨버리는 건데.”

그렇게 한참.

책에 하염없이 빠져 있던 엘리시아는 문득 느껴지는 강대한 기운에 고개를 들었다.

갈무리했음에도 넘쳐흐르는 패도적인 기운.

이런 위압적인 힘의 주인은 단 하나다.

“루페르트 공작.”

……그런데 왜 안 들어오고 저렇게 기웃대고만 있지?

한 식경. 두 식경.

기운은 가까이 다가왔다가 물러나기를 몇 번이고 반복했다.

의자 팔걸이를 톡톡 두드리던 엘리시아가 픽 웃었다.

“세상만사에 거칠 것 없는 사내가 저리도 망설일 땐 그만한 사유가 있는 법이지.”

아무래도 이브와의 혼인에 대해 할 이야기가 있는 모양인데.

그렇게 무려 두 식경이 더 흐르고.

- 똑. 똑.

엘리시아는 평소와 달리 정중하게 노크하고 들어선 악마를 향해 의뭉스럽게 물었다.

“그대가 내게 무슨 볼일이지?”

“……부탁이 있다.”

“그 오만한 입에서 부탁이라는 단어가 나오다니. 오래 살고 볼 일이네.”

아가레스는 눈치채지 못할 만큼, 엘리시아의 입매가 아주 약간 올라갔다가 이내 제자리를 찾았다.

“무슨 부탁일지 궁금한걸.”

“…….”

망설이는 일이 잦지 않은 악마가 차마 입을 떼지 못한다.

이 어려운 침묵 또한 딸 둔 어머니에겐 기꺼움이라, 엘리시아는 재촉하지 않았다.

잠시의 시간이 지나고.

아가레스가 두 주먹을 꽉 쥐고 한 자 한 자 찍어내듯 말했다.

“이브와. 혼인하고 싶다.”

“능력껏 해보면 될 것을?”

“그대의 승낙이 필요해.”

“나의 승낙 따위 필요 없는 것처럼 청혼 준비를 하더니?”

“……내 오판이었다.”

“오판?”

“이브가 소중히 여기는 이들에게 허락을 받는 게 먼저였어.”

변명 없이, 자존심 따위 세우지 않고, 냉큼 잘못을 인정하는 악마.

엘리시아의 얼굴에 숨길 수 없는 잔잔한 미소가 맺혔다.

“흐음…….”

부러 애매한 콧소리를 내며 슬쩍 올려다 보자, 눈앞의 악마는 다시 없을 난제라도 마주한 것처럼 입술을 꾹 깨물고 있었다.

아아. 저 표정. 엘리시아는 잘 알고 있다.

휴고가 자신에게 애가 달아 어쩔 줄을 모를 때도 종종 마주한 표정이니까.

“승낙하기에 앞서, 내 사위 될 존재를 알아가는 게 먼저인 것 같은데.”

“……!”

“아직 허락했다는 뜻은 아니니 진정하고.”

“내가 뭘 어떻게 하면 되지?”

엘리시아가 슬슬 지루해진 서적을 탁 덮으며 씩 웃었다.

“앞으로 열흘. 매일 오전 9시. 나와 논검(論劍)하자.”

논검.

일신의 무학이 경지에 다다른 이들끼리 말로써 비무 또는 전쟁을 치르는 것.

명성이 온 세상을 떨어 울리는 대단한 악마와 전쟁과 전략에 대해 논하는 것은 이깟 전쟁 서적보다 훨씬 큰 흥밋거리가 되어줄 터였다.

“그것으로 족한가?”

“그 과정에서 사사로운 이야기도 나누고.”

“좋다.”

엘리시아는 당장이라도 사적인 이야기를 한 뭉텅이 꺼내 들 것처럼 구는 악마를 향해 고갯짓을 했다.

“자. 그럼 이만 가 봐.”

“오늘부터 안 하고?”

“급한 건 알겠는데, 휴고가 복귀할 시간이 다 돼서.”

“……내일 찾아오지.”

이벨리아를 노리는 한 마리 늑대는 사냥꾼의 복귀 소식에 냉큼 자취를 감췄다.

***

그 후로 열흘.

둘은 비단 전투뿐만 아니라 각종 주제에 대해 담소를 나눴다.

종종 이런 대화도 포함이었다.

“그래서. 우리 딸 어디가 그렇게 좋아?”

“하나만 말해야 하나?”

“여러 개 말해도 되지.”

“다행이군. 말하자면 꽤 길어질 것 같아서. 우선…….”

“아니, 잠깐. 안 듣고 싶어졌어.”

흐읍 크게 숨을 들이마시는 것이, 멋대로 말하게 내버려 뒀다가는 내일 이 시간까지 돌아가지 않고 줄줄 읊을 것이 훤했다.

또 어느 날은 이런 대화를 나누기도 했다.

“자녀 계획은?”

“이브가 원하는 대로.”

“이브가 계획이 없다고 한다면?”

“그러면 나 역시 계획이 없다.”

그렇게 대화를 나누면 나눌수록, 악마를 가늠하는 엘리시아의 눈이 차츰 가늘어졌다.

‘뭐야. 이 악마.’

이건 부정할 여지가 없다.

‘보기 드물게 괜찮은 사내였잖아.’

우리 딸. 보는 눈 있다.

그렇게 열흘의 끝 무렵.

엘리시아는 악마를 부르는 호칭을 바꿨다.

“이봐. 사위.”

“……!”

“각오 단단히 해. 아무리 내가 승낙했다고 하더라도 우리 집안 남자들은 만만치 않을 테니까. 특히 휴고와 아르칸은 더더욱.”

그날. 엘리시아는 처음으로 보았다.

늘 감정 없이 끄덕이던 악마의 얼굴이 복사꽃처럼 화사하게 피어나는 것을.

***

엘리시아라는 가장 큰 우군을 얻은 아가레스는 곧바로 두 번째 목표물에게 향했다.

바로 베르타샨.

세드릭의 부임 이후 다시 지어 웅혼한 대저택 문을 박차고 들어가는데, 삐딱하게 올라간 목소리가 들려왔다.

“어디 내 신성한 영지에 악마가 발을 들여?”

“허억. 아, 악마입니까, 영주님?”

“그래. 악마다. 내 여동생을 노리는 솔개 같은 놈이지.”

마침 베르타샨 기사단의 훈련을 돕고 돌아오던 세드릭이 차갑게 식은 눈으로 아가레스를 노려보았다.

그러나 악마는 그 또렷한 적의에도 아랑곳하지 않고 꼿꼿하게 제 할 말을 했다.

“부탁이 있다.”

“응. 안 돼. 돌아가.”

“무엇인지 아직 말하지 않았는데.”

“뭐든 안 돼. 돌아가.”

이럴 줄 알았다.

문전박대당할 것을 진작 짐작했던 아가레스가 비장의 카드를 꺼내 들었다.

“견습신 시절의 페르세스.”

“……?”

조금 전까지만 해도 강경한 태도로 ‘안 돼’를 연발하던 황금 머리통의 입이 꼭 다물린다. 아가레스가 쐐기를 박았다.

“궁금하지 않나?”

“하, 참 나.”

불청객을 쌩하니 지나쳐 저택의 중문으로 걸어간 세드릭이 문을 발로 쾅 차서 열었다.

그리고.

“……환영한다. 빌어먹을 놈아.”

예상대로 흘러가는 시나리오에 아가레스가 옅게 웃었다.

***

세드릭을 따라 응접실로 들어간 아가레스는 의자에 나른하게 기대앉았다.

도무지 입을 열 기미가 없는 악마를 향해, 세드릭이 물었다.

“그래서. 원하는 게 뭔데.”

“혼인하고 싶다. 이브와.”

“진짜 넌 개자식이야.”

“……갑자기?”

“예전부터 생각했던 거야.”

세드릭이 분통 터진다는 듯 말을 이었다.

“이브가 태어나고 얼마 지나지 않았을 때, 나중에 우리 이브한테 연인이 생기면 허리를 막 꺾어버리겠다고 다짐했었거든?”

“…….”

“근데 홀랑 데려온 놈팡이가 허리를 역으로 꺾어도 죽지 않을 괴물이라니. 오라버니 된 입장에서 내 여동생 울리면 죽여버리겠다고 휘어잡을 수 없는 매부가 얼마나 짜증 나는지 넌 모를 거다.”

“형님이라고 불러줘?”

“집어치워. 소름 끼치니까.”

세드릭이 낮게 한숨을 쉬며 등받이에 몸을 파묻었다.

“사실 어머니께서 미리 연통하셨어. 곧 네놈이 찾아올 거고, 어머니는 승낙하셨다고.”

“그랬군.”

“그거 알아? 네놈과 이브가 기어코 혼인할 거라는 건 우리 모두 알고 있는 사실이라는 거.”

“그런 것 치고는 기를 쓰고 반대하던데. 다들.”

“심술이야.”

“……?”

“보통 인간들이 혼인할 때는 서로의 집안에 승낙을 먼저 받지. 그런데 인간으로서의 예의라고는 쥐똥만큼도 없는 악마가 절차 따위 싹 다 밥 말아 먹고 냅다 청혼을 하려고 하네?”

“……내 실수였다.”

“그래. 네 실수였어. 그래서 다들 심사가 뒤틀린 거고.”

악마의 깔끔한 인정에, 그제야 세드릭이 차 한 잔을 따라주며 말을 이었다.

“너도 알다시피, 이브는 우리 모두에게 세계보다 소중한 아이잖아.”

아가레스는 세드릭의 날 선 훈계를 들으면서도 그저 고개를 끄덕였다.

세상을 발아래 두고 살아온 고고한 신격이, 여동생과 관련된 일이라면 고개 숙이기를 저어하지 않는다.

빤히 바라보던 세드릭은 속으로 중얼거렸다.

‘개자식. 이 태도만으로도 합격이다.’

그러나 머리와는 달리 마음은 조금 더 골려주자고 속삭인다.

하여 세드릭은 책장에서 두꺼운 책 하나를 꺼내 탁상 위에 턱 내려두었다.

“안은 비었어. 완전히 백지. 페르세스의 견습신 시절을 알려준다고 했지?”

“……설마.”

“여기다가 페르세스의 이야기를 써줘.”

“……다 채워?”

“당연한 걸 뭘 물어.”

세드릭이 바늘처럼 얇은 세필(細筆)을 건네며 사악하게 웃었다.

“이걸로.”

“미친.”

***

아가레스는 다소 결리는 손목을 돌리며 아르티나 공작저로 향했다.

아르티나의 최고 또라이가 내준 임무는 실로 만만치 않았다.

잠시 지배력을 이용하여 글자를 새길까 고민하기도 했지만, 연인과 혼인 승낙을 받고자 하는 일에 꼼수를 부리고 싶지는 않았다.

그렇게 먹지도 자지도 않고 무려 열흘 간 글자를 새기고 나서야 책 한 권 분량을 다 채우고 해방될 수 있었다.

‘다음은…… 빨간 털 뭉치.’

이 녀석은 난이도 최하다.

동그란 머릿속에 별것이 들어 있지 않은 놈이니까.

아가레스는 화단 한가운데서 엉덩이를 꿍실대며 붉은 꽃을 한입 가득 뜯고 있는 용을 거꾸로 들어올렸다.

흡사 산삼이 뽑히듯 쑤욱 딸려나온 용의 몰골이…….

“더럽군.”

“우우우우웅우웅!”

“삼키고 말해라.”

“퉤! 오늘은 또 무슨 용건이야!”

삼키고 말하라니까 냅다 뱉어버리네.

더러운 것을 들 듯 팔을 쭈욱 뻗어 엔리르와의 간격을 벌린 아가레스가 말했다.

“부탁이 있다.”

“염치도 없지.”

“이브와 혼인하고 싶다.”

“양심도 없고.”

난이도 최하가 생각보다 단호하다.

아가레스가 침착하게 입을 열었다.

“서로 은애하는 이들끼리 백년가약을 맺으면 일생이 안온하다.”

“나도 알아.”

“이브와 나는 서로 연모하는 사이지.”

“자랑하네. 죽여버리고 싶게.”

아가레스가 용의 눈을 똑바로 바라보며 말했다.

“나는 이브를 행복하게 해줄 수 있다.”

“…….”

“네놈이 살아가는 이유가 이브의 행복이라면, 나와 이브의 혼약을 반대할 이유가 없어.”

짧게 혀 차는 소리와 함께 용이 눈을 감았다. 꼭 생각을 정리하는 것처럼.

제법 오랜 시간이 지나 뜬 눈에는 지상 최고의 종족이라는 수식어가 헛되지 않게, 현기(賢氣)가 가득 담겨 있었다.

담담한 말이 인간은 모르는 진리를 읊는다.

“하늘을 열고 천명을 바꾸며 세계를 넘나드는 마법에서도 단 하나. 건드리지 못하는 것이 있어.”

“…….”

“인연. 특히 가약을 맺는 이들의 약지에 매인 붉은 실은 마법으로 엮을 수도, 끊을 수도 없지.”

아마 천지를 오시하는 마법이 갖는 유일한 한계일 거야. 용이 중얼거렸다.

“둘 사이에 이미 매인 인연을 내가 어쩌겠어.”

“…….”

“무엇보다, 끝까지 반대하면 우리 누나가 속상해할 게 뻔한데.”

“의외로군.”

“뭐가?”

“가장 감정적일 줄 알았는데.”

“누나의 행복을 위해서라면 난 얼마든지 이성적인 용이 될 수 있어. 다만.”

단서를 붙임과 동시.

아가레스의 손에 잡혀 있던 엔리르가 인간형으로 화했다.

말끔하게 정돈되지 않은 붉은 머리칼이 흡사 사자의 갈기처럼 제멋대로 휘날린다.

이젠 악마와 엇비슷해진 시야의 높이로, 완전한 성체가 된 이 세계 마지막 용이 송곳니를 드러내며 경고했다.

“만일 이 혼약으로 인해 누나가 불행해진다면, 아가레스.”

처음으로 악마의 진명을 입에 담으며, 용이 맹세했다.

“내가 반드시 너를 찢어 죽일 거야.”

활활 타오르는 붉은 용의 눈을 보며, 아가레스가 답했다.

“그럴 필요 없다. 만일 그런 일이 생긴다면, 이미 내 스스로 심장을 갈라버린 후일 테니.”

***

세드릭과 엔리르까지.

엘리시아가 조언했던 대로, 아르티나 일가 중 셋을 설득하는 것은 비교적 어렵지 않았다.

시간은 꽤 오래 걸렸지만 그래도 끝까지 안 된다며 반대를 하거나 다짜고짜 무력으로 맞부딪치는 일은 없었으니까.

‘이제 남은 건…… 휴고 아르티나와 아르칸 아르티나.’

아가레스의 잇새에서 작은 한숨이 흘렀다.

둘 다 성질머리로는 마왕 자리를 먹어도 부족하지 않은 이들이다.

‘반드시 따로 떼어 놓고 설득을 해야 한다.’

둘이 붙여놓으면 그 시너지 효과는 상상을 초월할 테니까.

하여 아가레스는 먼저 아르칸에게 가기로 했다.

그나마 봐 온 정이 있으니 다짜고짜 때려죽이려 들진 않겠지, 하는 마음으로.

- 똑. 똑.

“안 어울리게 노크하지 말고 들어와라.”

집무실 안으로 들어간 아가레스는 서류 더미에 얼굴을 파묻고 있는 아르칸에게 말했다.

“청할 것이 있다.”

“용건만 간단히.”

“이브와 혼인하고 싶다.”

“……너 지금 뭐랬냐?”

“이브와 혼인하고 싶다.”

용건만 간단히 하래서 용건만 간단히 했더니, 넓은 집무실에 때아닌 북풍한설이 몰아친다.

슬쩍 눈치를 본 아가레스가 입을 열었다.

“혼인을 청하는 이유라도 장황하게 늘어둘까?”

그리고 마침 그때.

아르칸과 논의할 것이 있어 문을 열고 들어온 휴고가 사신과 같은 표정으로 되물었다.

“……지금 뭐라고 했지? 혼인?”

앞에는 아르칸.

뒤에는 휴고.

눈이 돌아버린 두 부자(父子) 사이에 끼인 아가레스가 물었다.

“마음 열고 내 말을 들어볼 사람.”

“…….”

“…….”

“없군.”

문답무용.

휴고와 아르칸이 망설임 없이 검을 빼들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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