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299화: 외전. 악마의 청혼 준비 (1)
이성 보기를 돌같이 하던 이크리안 카시스가 여인을 데리고 돌아왔다!
그 놀라운 소식은 아르티나 공작저와 황궁에까지 날개 달린 듯 퍼져나갔다.
실라페를 타고 날아온 이벨리아는 며칠 만에 다시 한번 카시스 후작저의 문을 박찼다.
- 콰앙!
“공장장! 가련한 여인을 납치해왔다고!”
“어쩌다 소문이 그렇게 퍼졌습니까?”
“오라버니가 그러던데?”
“개자식이.”
“저 여인이구나!”
이벨리아는 이크리안을 본체만체 지나쳐 소파에 눈을 휘둥그레 뜨고 앉은 프시케에게 척척 다가가 물었다.
“자발적으로 따라왔어? 아니면 납치야?”
조금 전까지만 해도 고요하던 후작저가 갑자기 우당탕탕하는 느낌.
그에 놀라 멍하니 눈을 깜박이던 프시케가 아, 하는 소리와 함께 황급히 일어서서 고개를 숙였다.
“고명하신 아르티나의 공녀님을 뵙습니다. 저는 테티스 백작가의 프시케라고 합니다.”
흠잡을 데 없는 격조 있는 인사.
천방지축으로 날뛰던 이벨리아의 기운이 삽시간에 누그러들었다.
“……세상에. 이렇게 예의가 바른 사람은 오랜만이야.”
“……?”
“내 주변엔 죄다 예의 밥 말아 먹은 것들밖엔 없어서.”
악마나, 용이나, 정령왕이나, 황제나.
아무도 나한테 이런 정중한 인사를 건네지는 않는단 말이지.
첫인상이 제법 마음에 들어, 이벨리아는 씩 웃으며 손을 내밀었다.
“반가워. 난 이벨리아야.”
“제가 어떻게 감히 공녀님의 존체에 손을…….”
“에잉. 고지식해라.”
이벨리아가 프시케의 손을 잡고 위아래로 붕붕 흔들며 다시 물었다.
“그래서. 납치야?”
“아, 아니요. 그, 자발적으로 따라왔습니다.”
“그럼 공장장 연인이야?”
“아직은 아닙니다.”
“아직은? 그럼 언젠가 연인이 될 생각이긴 한가 보네?”
“주제넘게도 제가 각하께 연심을 품어…… 노력해보려고 합니다.”
그 말에 이크리안이 싱긋 웃으며 끼어들었다.
“우리 이미 연애하는 거 아니었나? 손도 잡아놓고 이리 박대하시면 나 서운한데.”
“으. 공장장 느끼해.”
“공녀님의 연인께선 더하십니다.”
“우리 토끼는 닭가슴살처럼 담백하기만 한걸.”
“기름에 튀긴 닭가슴살이겠지요.”
연인을 매도하는 이크리안에게 찌릿 눈빛으로 경고한 뒤, 이벨리아가 말을 이었다.
“여하간, 프시케는 우리 공장장이 마음에 든단 말이지?”
“네.”
망설임 없이 답하며 프시케가 고개를 푹 숙였다.
‘공녀님께는 내 배경이 지나치게 한미해 보일 거야.’
큰 테두리에서는 가족으로 엮이게 되는 건데, 분명 언짢게 여기시겠지.
‘불호령이 떨어지면 납작 엎드리자. 진심을 보여드리면 조금쯤 이해를 해주실지도 몰라.’
속으로 각오를 다지던 찰나.
예상과는 전혀 다른 반응이 돌아왔다.
“마음에 든다. 그 태도.”
“네?”
“잘 왔어! 우리 공장장 좀 잘 부탁해!”
“이렇게 쉽게…… 승낙을 해주시는 건가요?”
“승낙을 하고 말고 할 게 뭐가 있어. 둘이 좋으면 그만이지.”
순탄한 흐름에 프시케가 얼떨떨하게 눈을 깜박이던 와중.
다른 이들도 속속들이 들이닥쳤다.
“이크리안 너 이 자식. 일을 또 팽개치고 연회를 가?”
먼저 분노한 아르티나 공작이 실실 눈웃음 짓고 있는 여우의 멱살을 잡아챘고.
“우와. 이안 형님 그렇게 안 봤는데 사나이네, 사나이야.”
능청스럽게 웃으며 들어온 베르타샨 백작이 엄지를 치켜들었으며.
“오, 오라버니에게 애인이…… 맙소사…… 안녕하세요? 저는 찬성이에요.”
아르티나 공작부인은 입을 틀어막고 눈물을 글썽였고.
“마탑주에게 애인이 생겼다!”
“마법사라면 마땅히 마법과 혼인해야 하거늘! 배신자다!”
“끌어내려라!”
“근데 이미 끌어내리지 않았어?”
“그럼 부러우니까 죽여라!”
올망졸망 몰려든 로브 입은 마법사들이 지팡이를 영차영차 흔들며 전 마탑주의 연애를 강력히 규탄했다.
평생 가도 보기 힘든 제국의 실세들이 모두 모인 광경에 프시케의 눈이 빙글빙글 돌던 그때.
카시스 후작가의 집사가 소란을 뚫고 잰걸음으로 달려왔다.
“저, 주인님.”
“무슨 일이지?”
집사의 시선이 난감하다는 듯 프시케를 향했다.
“그게, 테티스 백작가에서 백작부인과 영애가 왔는데…….”
“왔는데?”
“프시케 영애를 데려가려면 마땅히 가족인 본인들에게 허락을 받고, 그…… 지참금을 내놓으라고…….”
외면하고 싶은 가족들의 난입에 프시케의 얼굴이 토마토처럼 붉어졌다.
그에 이크리안의 미간이 못마땅하다는 듯 옅게 좁혀졌다.
프시케의 가족들이 어떤지는 그 역시 잘 알고 있다.
듣기도 했었고, 보고서도 받았으며, 심지어 연회에서는 그 저열한 낯을 직접 보기까지 했으니까.
“남부에서 힘 좀 쓰니 내게도 어떻게 비벼볼 수 있다고 착각한 모양인데…….”
이크리안이 고개 숙인 프시케의 어깨에 손을 올리고 집사를 향해 턱짓했다.
“들여보내.”
“아, 안 돼. 그러지 마요.”
“왜?”
“새어머니랑 언니 성격이 좀…… 고상하지 못해요. 괜히 상대할 필요도 없어. 응?”
“주위 좀 봐, 나비야.”
“……?”
“아르티나 공작. 루페르트 공작. 베르타샨 백작. 그리고 화룡점정으로 공녀님까지.”
이크리안이 씩 웃었다. 장난기 짙은 미소였다.
“여기 성질 더럽기로는 제국 제일을 다투는 성격파탄자들만 모였거든.”
저 봐. 저 봐.
공녀님 이미 목 돌리고 계시는 거 봐.
이크리안의 그 불경한 말에 다소 겁을 먹은 프시케가 어깨를 움츠렸다.
어떻게 두 공작 각하와 공녀님께 성격파탄자라는 말을 할 수 있어?
그런데 기분 나빠하실 거라는 우려와는 달리, 공녀님께서는 정말 악동처럼 사악하게 눈을 빛내며 말씀하셨다.
“프시케는 당과 좀 먹고 있어. 이런 잡스러운 일은 우리가 처리할 테니까.”
***
후작저로 들어온 백작부인과 젤로스는 고개를 한껏 빳빳하게 세웠다.
마치 그것이 가문의 격을 높여주기라도 하는 것처럼.
그러나 표정에서 드러나는 분노와 조급함은 숨기지 못했다.
백작부인은 우아한 척 차를 머금으면서도 다짜고짜 지참금 이야기를 꺼냈고, 젤로스는 은근슬쩍 이크리안에게 눈짓하며 향낭을 짤랑짤랑 흔들었다.
그러나 이크리안이 눈도 깜짝하지 않자, 신분 상승에 눈이 먼 젤로스는 대범하게도 방향을 바꿔…….
“저, 공작 각하. 제 가문이 비록 남부의 한적한 곳에 터를 잡고 있지만, 각하의 위용은 익히 들었답니다.”
무려 루페르트 공작에게 깜박깜박 눈짓을 보내기 시작했다.
‘겁도 없이 저게. 미쳤나?’
프시케가 경악한 표정으로 고개 돌려 이벨리아를 바라봤다.
‘헉…… 공녀님 표정이…….’
아니나 다를까. 난데없이 굴러온 돌멩이가 연인에게 엄한 시선을 보내고 있으니 이벨리아의 눈에서 불꽃이 터진 것은 당연한 수순이었다.
이벨리아는 곧바로 실라페를 불러 파라반트에 전서를 보냈다.
「테티스 백작가. 프시케를 제외하고 탈탈 털어. 30분 준다.」
그리고 정확히 30분 뒤.
느긋한 걸음으로 설렁설렁 후작저에 들어온 대륙 최고의 정보길드 마스터는 커다란 상자 두 개를 백작부인의 발치에 휙 던졌다.
“이게 무슨 무례냐!”
“영지 자금 횡령. 영지민 납치. 살해. 강간까지…… 가지가지 하셨던데?”
백작부인의 코앞에서 허리 숙여 눈을 맞춘 마스터가 뒷골목 특유의 삐딱한 표정으로 웃었다.
“참교육 시간이야, 귀족 나으리들. 우리 공녀님 단단히 화나셨거든.”
***
작위는 통상 가주가 지명한 후계자에게 세습되나, 특별한 사정이 있는 경우 예외적으로 황제가 지정할 수 있다.
백작부인과 그 자식들이 저지른 범죄 행위를 싹 긁어 루드비히에게 보낸 이벨리아는 한 식경 뒤 답을 받아냈다.
「전 백작 사후(死後) 아직 백작위는 공석이더군. 네 명대로 프시케 테티스를 그 자리에 앉히지. 오늘 내로 교지가 내려질 거다. - 휴가 가고 싶은 루이.」
붉으락푸르락 한 얼굴로 파라반트의 정보는 터무니없는 모함이라고 강짜를 놓고 있던 불청객 둘을 향해, 이벨리아가 루드비히의 전서를 살랑 흔들었다.
“이제 프시케가 가주야.”
“뭐, 뭐라고요?”
“황제 폐하께서 명하셨어. 프시케가 백작이라고.”
“그게, 무, 슨…….”
“무슨 말이긴.”
넋이라도 빠진 것처럼 눈을 홉뜬 백작부인과 영애를 향해 이벨리아가 생긋 웃었다.
“너희는 끝났다는 말이지.”
“마, 말도 안 돼! 거짓말이야!”
어떻게 쌓아온 지위인데! 그게 어떻게 이렇게 한순간에 무너져!
도무지 믿을 수가 없다. 백작부인은 창백해진 얼굴로 전서를 낚아챘다.
유려한 필체 아래, 부정할 수 없이 찍힌 붉은 사자의 직인.
“…….”
전서를 쥐고 덜덜 떨던 백작부인이 털썩 주저앉았다.
그들은 꿈에도 몰랐다.
헛기침 한 번으로 제국을 좌지우지하는 대귀족들에게, 저 먼 지방 귀족 가문의 주인 하나 바꾸는 건 손바닥 뒤집는 일보다 쉽다는 것을.
***
백작부인과 영애가 호되게 당하고 쫓겨난 후.
연인의 활약을 사랑스럽다는 표정으로 바라보던 아가레스가 이크리안에게 슬쩍 다가가 물었다.
“청혼했나.”
“아직 안 했습니다.”
“그럼 내가 한 다음에 해라.”
“너무 지체하시면 기다려드리기 곤란합니다.”
“……금방 할 거다.”
“그러기엔 넘어야 할 장애물들이 너무 많은데요?”
“이번 계절 안에는 어떻게든 할 거야.”
“이번 계절 안에 못 하시면 제가 먼저 합니다?”
“……다음 계절까지로 하자.”
답지 않게 말을 바꾸는 모습에 이크리안의 잇새에서 바람 빠지는 소리가 났다.
아르칸과 세드릭이 모두 혼인을 하고 나니 아무래도 마음이 급해지신 모양이다.
심지어 최근에는 젊은 치기에 겁도 없이 공녀님께 연서를 보내는 이들도 종종 있다고 하니까.
이크리안은 과거엔 상상도 하지 못했던 대악마의 다양한 모습들을 알게 되었다.
때로는 누군가를 위로할 줄도 알고, 투정을 부릴 줄도 알며, 질투도 많고, 욕심도 많은 데다가…… 종종 이렇게 귀엽기까지 한.
여우가 눈을 곱게 휘며 웃었다.
“좋습니다. 다음 계절까지. 그리고, 아시지요?”
“무엇을?”
“저와 렐리안은 각하와 공녀님의 혼인을 지지하는 쪽이라는 것을.”
그 말에 아가레스가 이크리안의 어깨에 손을 턱 얹었다.
“……고맙다, 공장장.”
지금은 한 명의 아군이라도 간절한 시점이었다.
***
그렇게 한 달이 흘러 가을의 중간 즈음.
아르티나 공작저 분수대에 털썩 주저앉은 아가레스가 깊은 한숨을 내쉬었다.
“어렵군.”
지난 한 달간 청혼하고자 갖은 애를 썼으나, 방해하는 이들의 면면이 하나같이 만만치 않았다.
무려 아르티나 일가에 미친개 기사단, 거기에 용과 정령왕까지.
각양각색의 능력을 갖춘 이들이다 보니 방해하는 방법도 가지가지였다.
예를 들어, 며칠 전 늦은 밤.
아가레스는 곰치를 닮은 곰돌이 모양의 초를 정원에 빙 둘러 세웠더랬다.
어릴 적부터 곰치를 끼고 돌던 연인이라면 곰치들이 올망졸망 선 모양을 보고 웃어주겠지, 싶어서.
정성스레 세워두고 마기를 이용해 한 번에 불을 붙임과 동시.
- 촤아아악!
2층 발코니에서 난데없는 물벼락이 떨어졌다. 그것도 세 번 연달아.
기껏 붙인 불이 전부 꺼져버렸다. 귀여웠던 곰돌이들은 간데없고 신체 일부가 떨어진 좀비 곰돌이들만이 음산하게 서 있다.
“…….”
황당하여 위를 올려다보자, 얄미운 황금 머리통이 삐죽 솟아 있는 것이 아닌가.
“이런, 미안하군. 미친 악마가 이 야밤에 촛불놀이를 하고 있을 줄은 미처 모르고 그만 물을 버렸어.”
“……너 일부러 그랬지.”
눈은 서늘하게 굳은 채, 아르칸이 입매만 비뚤게 올려 웃었다.
“그래. 일부러 그랬다, 이 요망한 새끼야.”
“이 개자식이.”
제국의 두 공작이 으르렁대던 그때.
아가레스가 부른 시간에 맞춰 담요를 두르고 나온 이벨리아는 연기가 푸시시 일고 있는 정원을 보며 고개를 기울였다.
“정원에 웬 연기가 이렇게 가득해?”
“그게, 이브. 실은…….”
“알았다! 나 배고플까 봐 바비큐 준비했구나!”
“……어?”
“마침 잘됐다, 야식 먹고 싶었는데.”
신이 나서 가벼운 발걸음으로 걸어오는 연인을 바라보며, 아가레스가 황망히 답했다.
“……막 불 피우던 중이었어. 잠시만 거기 앉아서 기다려.”
“돼지는 있어?”
“……막 잡으러 가려던 중이었어. 조금만 더 기다려.”
***
장렬히 실패한 아가레스는 그 원인을 분석했다.
‘일단 공작저를 벗어나는 게 좋겠군.’
성격 더러운 황금 머리통들, 그리고 뭔가 할 낌새만 보이면 눈을 뒤집고 달려드는 미친개 기사단을 떨쳐내야 승산이 보인다.
‘이브와 처음 데이트했던 장소…… 종탑.’
그래. 그곳이 낫겠다.
과거 그날처럼 화려한 불꽃놀이를 보여주며 청하면 너는 또 햇살처럼 웃어주겠지.
충직한 수하 마르바스와 만반의 계획을 세운 아가레스는 이벨리아를 종탑으로 에스코트했다.
그런데…….
- 피유우우웅!
- 푸쉬쉬쉬쉬.
마르바스가 종탑 저 아래에서 야심 차게 쏘아 올린 불꽃은 하늘로 솟구치기도 전에 어디선가 날아온 돌풍에 맥없이 꺼져버렸다.
“…….”
아가레스가 테이블 밑에서 다시 한번 더 손가락을 튕겼다.
저 아래에서 마르바스가 불꽃을 한 번 더 쏘아 올렸다.
- 피유우우웅!
- 푸쉬쉬쉬쉬.
그러나 결과는 마찬가지.
하늘은 잠잠했다.
그리고 아가레스는 보았다.
종탑 최상층 창문 바깥쪽. 돌개바람이 자신만 알아볼 수 있도록 작은 글자를 뽀득뽀득 창문에 써 내려가는 것을.
- 어림도 없지.
분명 페르세스의 짓이다.
‘……망할.’
한편, 청혼을 하려는 자와 청혼을 막으려는 자 사이의 치열한 뒷공작을 전혀 눈치채지 못한 이벨리아는 그저 해사하게 웃었다.
“불꽃놀이도 있으면 좋았을 텐데. 아쉽다!”
있었어, 이브. 있었는데, 없어.
“그래도 불꽃놀이가 없으니까 별이 더 잘 보이는 건 좋아. 별 보여주려고 데려온 거지?”
아니. 불꽃놀이 보여주고 청혼하려고 했어.
근데 있었던 불꽃놀이가 없어, 이브.
그러나 곧이곧대로 말할 수가 없어, 아가레스는 그저 침통하게 고개를 끄덕였다.
“……응. 별 보자…….”
***
현명한 대악마는 또다시 실패 원인을 분석했다.
‘공작저뿐만 아니라 물과 바람, 불을 사용한 것도 안 돼.’
그놈들도 나의 연인에게 질척대는 떨거지들이니까.
‘그나마 땅을 이용하는 게 낫겠군.’
다른 정령왕들과 달리, 트로이는 그가 견습신이던 시절부터 제법 신사답고 깔끔했다.
청혼을 방해하는 유치한 짓 따위 할 성격이 아니다.
드디어 해결책을 찾은 아가레스는 비밀기지 주변을 둘러 수백 송이의 아스포델을 심고 이벨리아를 불러냈다.
지상낙원이라 표현해도 부족함 없을 정도로 화려하게 피어 만발해 있는 수천 송이의 흰 꽃.
“토끼야!”
그것들은 이벨리아의 목소리가 들리자마자 마치 짜기라도 한 듯 일제히 봉오리를 다물어버렸다.
뭐야. 이게 왜 이래.
당황한 아가레스가 발을 쿵 굴러보았으나 꽃들은 미동도 없다.
그러다 이벨리아의 시선이 잠시 다른 곳을 향하면 다시 화려하게 피어난다.
이벨리아가 이쪽으로 고개 돌리면 재차 봉오리를 합 다물고.
수천 송이의 꽃이 한 몸처럼 피었다 졌다 하는 기괴한 광경.
분노한 아가레스가 읊조렸다.
“이것들이 진짜…….”
그러자 땅에 작게 새겨지는 글씨.
- 나는 순순히 도와줄 줄 알았어? 어림도 없어.
***
그렇게 현재.
잔뜩 실망한 아가레스는 공작저 분수대에 앉아 머리를 싸매기에 이른 것이다.
‘이대로는 평생이 가도 청혼 못 한다.’
아르티나 일가와 미친 멍멍이들의 눈이야 아르티나 밖으로 멀리 벗어나면 어느 정도 떨쳐낼 수 있다 쳐도, 물과 바람, 불과 땅의 시야에서 벗어날 수 있는 곳은 없다.
‘어디로 가서 해야…….’
그때. 마침 풀숲을 지나던 하녀들이 재잘거리는 소리가 희미하게 들려왔다.
- 그래서 부모님께 혼인 허락은 받았어?”
- 아니. 어림도 없었어.”
- 그러면 어쩌려고? 그냥 혼인할 거야?”
- 끝까지 설득해야지. 소중한 사람들에게 축복받지 못하는 혼인만큼 불행한 건 없으니까.”
“……!”
무언가 머리를 때리고 지나간 것처럼 멍해진다.
……그렇지.
나와 달리, 이브에게는 소중한 이들이 많지.
그들 모두가 축복하지 않는 혼인이 이브에게 행복할 리가.
“……방해를 뚫고 청혼할 생각을 해야 하는 게 아니었어.”
애초부터 방향 설정이 틀렸다.
아르티나 일가부터 정령왕들까지. 모두가 진심으로 이 혼인을 축복하도록 그들을 설득하는 것이 우선이었다.
연인으로 인해 차츰 세상과 마음, 배려를 배워가는 악마는 결심했다.
“……허락을 받아야겠군.”
몇 날 며칠이 걸리든. 그들이 무엇을 요구하든.
진심을 꺼내 보여주고 또 보여주어서, 그들이 우리의 혼약을 마음 깊이 축하하게 만들어야겠다.
아가레스는 양피지를 꺼내 들고 목록을 만들기 시작했다.
우선순위를 고려하여 제법 길게 작성된 목록.
그 첫 목표물로 가장 윗줄에 적힌 자는-.
- 엘리시아 아르티나.
바로 아르티나 가문의 변함없는 실세였다.
참으로 영악한 선택.
“연모에 눈먼 이의 집념을 보여주지.”
그렇게 혼인 승낙을 받기 위한 악마의 고군분투가 시작됐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