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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녀님의 꽃밭에는 그들이 산다-298화 (298/323)

##  298화: 외전. 카시스 삼 남매 (4)

이크리안이 낙조로 물든 바다에서 하염없이 경탄한 이후.

뭔가 큰 결심이라도 한 모양인지, 여인은 지난 며칠보다 더욱 가열하게 이크리안을 끌고 돌아다녔다.

온갖 맛있는 것을 입에 넣어주고 모든 아름다운 것을 눈앞에 펼쳐주면서.

그렇게 동행 아흐레 차.

나비의 여우 우쭈쭈는 극에 달했다.

“자, 이것 좀 먹어 봐.”

“배부른데.”

“하지만 이건 진짜 맛있는 건데? 딱 한 입만 먹자, 응?”

이크리안이 순순히 입을 벌리자, 호두 모양의 과자 하나가 입에 쏙 들어왔다.

“오구, 잘 먹는다.”

“또 어린애 취급.”

“나한텐 그렇게 보이는걸. 이번엔 저기 구경하러 가자!”

작게 투덜대면서도 이크리안은 저항 없이 발을 옮겼다.

그렇게 함께 들어선 산길.

다소 가파른 경사를 오르며 여인이 흘끗 뒤돌아 말했다.

“힘들면 말해. 짐 들어줄게.”

태어나 처음 들어보는 말에 잠시 굳어 있던 이크리안은 익숙하지 않은 투정 한 자락을 조심스레 내비쳤다.

“힘들어.”

“진작 말하지 그랬어. 짐 이리 줘. 난 아직 말짱하거든.”

도와주겠다 내리뻗는 손길이 참으로 생경하다.

이크리안은 태양을 등지고 선 여인을 가만히 올려다보았다.

“뭐 해, 짐 달라니까?”

“……아니, 짐은 됐어. 짐보다 이 나무 막대기 끝을 잡고 끌어주면 수월하게 오를 수 있을 것 같은데.”

이크리안은 여태 땅을 짚던 쪽을 자신이 쥐고 반대쪽을 여인에게 내밀었다.

그러자 여인이 고개를 기울이며 되묻는다.

“굳이?”

“……?”

“그냥 손잡고 끌어주는 게 낫지 않겠어?”

“……!”

“뭐, 네가 정 수줍다면 막대기를 잡고.”

장난스레 웃는 모습에 이크리안은 망설임 없이 나무 막대기를 던져버렸다.

굳은살 배긴 커다란 손이, 꼭 그의 것만큼 거친 삶의 흔적이 남은 여인의 손을 조심스럽게 잡아챘다.

“허락해 준다면야 나도 이쪽이 좋지.”

“영 눈치 없는 맹탕은 아니었네?”

“그렇게 보였다면 조금 더 분발하도록 하지.”

둘 모두 감정을 표하는 데 있어 빙 둘러 가는 성정은 아니었다.

제법 높은 산을 끝까지 오르자, 위로는 별빛이, 아래로는 영지에서 발하는 불빛이 눈을 현혹하는 절경이 펼쳐졌다.

바위 위에 털썩 주저앉으며, 여인이 가방에서 병 두 개를 꺼내 슬쩍 흔들었다.

“짜잔!”

“웬 병이야?”

“이 영지에서만 파는 술이라길래 냉큼 사 왔지!”

“……나비. 술버릇이 어떻게 돼?”

“걱정 마, 걱정 마! 취해서 우리 여우 고생시킬 일은 없을 테니까. 어서 앉아!”

공터는 넓었으나 이크리안은 굳이 여인과 같은 바위에, 다소 좁은 감이 있게 자리를 잡고 앉았다.

엄지로 술병을 열자 잔잔하게 흐르는 주향. 다소 낯설지만 그가 맡아본 그 어느 향보다 마음에 들었다.

본디 술은 분위기로 마시는 것이라 하지 않던가.

싸구려 술을 달게 넘기며 이크리안이 물었다.

“왜 가출했는지 물어도 될까?”

“말하자면 긴데.”

“밤도 길지.”

어깨를 으쓱인 여인이 가볍게 입을 열었다.

“어머니가 돌아가셨다. 아버지가 재혼하셨다. 아버지가 죽었다. 새엄마와 오빠, 언니에겐 내가 눈엣가시다. 나만 어디다 지참금을 받고 팔아넘기면 모두가 행복해진다.”

이크리안이 돌아보자 여인이 산뜻하게 웃었다. 별거 아니라는 듯.

“고루한 이야기지. 그래서 낌새가 보일 때마다 집을 나와 떠돌았어.”

“내 도주 사유는 너에 비하면 너무 약소하네.”

“그렇게 생각하지 마. 내가 더 불행하다고 해서 네가 짊어진 짐의 무게가 가벼워지는 건 아니니까.”

여인이 술병을 내밀었다. 건배하자는 듯.

어둠이 깊어져 간다.

밤을 맞이한 풀벌레들이 찌륵찌륵 울어댔다.

난생처음 누군가에게 위로를 받으며, 이크리안은 가면과 격식을 모두 내려두었다.

그리고 몇 식경 뒤.

“헤헤, 개미가 지나간다아…… 너도 일개미니? 나처럼?”

“아까 나한테 술버릇 뭐냐고 물어볼 때는 언제고…….”

“저기, 저 별 보여, 나비야?”

“지가 홀랑 취해버렸네…….”

“어어? 근데 원래 별이 빙글빙글 도나? 나비야, 그래?”

“……그래, 너만 좋다면 됐다. 마셔, 마셔, 더 마셔!”

홀딱 취해버린 대마법사는 비틀비틀 일어나 별을 가리키며 가장 환하게 웃어댔다.

***

한편, 수도의 카시스 후작저.

- 콰앙!

“나 왔다!”

무려 후작저 문을 박찰 수 있는 유일한 인간. 마계의 왕이자 아르티나의 공녀.

카시스 후작가의 집사는 헐레벌떡 뛰어나와 이벨리아를 맞이했다.

“아이고, 공녀님. 참으로 잘 오셨습니다.”

“오랜만이야, 집사. 내 친구들이 말라 죽어가고 있다는 소식이 들리던데?”

“말도 못 합니다, 공녀님. 아르티나는 좀 어떻습니까? 공작부인께서 하시던 업무에 손이 빌 텐데요.”

“내가 임시로 맡고 있지.”

“공녀님께서요?”

“응. 방금도 마치고 왔는걸.”

“그런데 어찌 이리 안색이 좋으십니까?”

하녀가 건네준 오렌지 주스를 쪼르륵 빨아들이며 이벨리아가 어깨를 으쓱였다.

“그야 난 일 처리가 빠르니까.”

“……예?”

“난 똑똑해. 읽는 속도가 빠르고 파악 능력이 뛰어나며 해결책도 신속하게 찾아내지.”

웬만한 정신으론 엄두도 못 낼 뻔뻔한 자기 자랑이었으나, 집사는 차마 부정할 수 없었다.

제국에 난제가 생기면 황제 폐하부터 대소신료들까지 죄다 공녀님을 찾아 고견을 구한다는 것은 이미 파다하게 퍼진 소문이었으니까.

다 마신 오렌지 주스 컵을 탕 내려두며 이벨리아가 소파에 앉아 다리를 꼬았다.

“그런 고로, 내가 불쌍한 두 중생을 구원하러 왔지!”

그리고 그때.

저 위 2층에서 다 죽어가는 음성이 들려왔다.

“구, 구세주…….”

“렐리안, 내 눈앞에 빛이 보여…….”

차마 말로 표현할 수 없는 둘의 몰골을 보자, 당당했던 이벨리아의 이마에 살짝 식은땀이 배였다.

나 아무래도 잘못 걸린 것 같아.

렐리안과 네피르 눈이 완전 맛이 갔는데.

“이브. 아르티나는 하나다, 맞지요……?”

“나 루페르트 할래.”

“아직 혼인 안 하셨으니 어림도 없고요.”

“…….”

깔짝 도와주고 아가레스와 야시장에 놀러 갈 예정이었던 이벨리아는 그렇게 발이 묶여버렸다.

***

다음 날 아침.

그간 아르칸의 눈을 피해 침대 밑에 조용히 숨어 있던 엔리르는 기지개를 켜고 날개를 파닥였다.

손가락이라 부를 게 없는 말랑한 앞발이 꿈틀거리며 숫자를 세었다.

“오늘이 딱 열흘째다. 큰 보라 인간 찾으러 가야…… 하는데 왜 집에서 악마 놈 기운이 느껴지지?”

오늘은 또 무슨 수작을 부리러 온 거야.

동그란 눈을 잔뜩 부라리며 발코니 밖으로 고개를 내밀자, 정원을 가로지르는 악마가 보인다. 엔리르가 빽 소리 질렀다.

“왜 왔어!”

“내 연인 집에 내가 못 올 이유가?”

“오늘은 누나가 없으니까 너도 못 들어와! 출입 금지야!”

“그래서 왔다. 이브가 없어서.”

“……?”

“보아하니 공장장 잡으러 가는 모양인데.”

“응. 누나가 열흘 되면 잡아 오라고 했어.”

“나도 간다.”

“무진장 싫어. 대체 왜?”

용의 물음에 아가레스가 저 멀리 카시스 후작저 방향을 흘끗 돌아보며 답했다.

“……어젯밤, 이브와의 데이트가 무산됐다.”

버려진 강아지처럼 처량한 모습에 엔리르가 앞발로 삿대질을 하며 깔깔 웃어댔다.

“누나가 일하러 가는 바람에? 그거참 쌤통이다!”

“네 머리에 땜통을 새겨버리기 전에 닥치고 안내나 해.”

마력을 이용해 숨어다니고 있는 이를 찾으려면 용의 눈보다 빠른 것은 없다.

발코니로 뛰어오른 아가레스의 손에 달랑 잡혀버린 엔리르가 거들먹거렸다.

“엣헴, 좋아. 능력 없고 가련한 악마에게 하해와 같은 은혜를 내리도록 하지. 잔뜩 감읍해 하도록!”

“자꾸 깐족대면 정수리 털 뜯어버린다.”

“어어? 보라 인간 안 찾고 싶은가 보네? 그럼 누나가 돌아오는 시기도 늦어질 텐데?”

“…….”

이브와 관련된 일이라면 평생의 약자.

아가레스는 이 밤톨만 한 용의 조롱을 참아 넘겼다.

만족스럽게 웃은 엔리르가 말랑한 앞발을 동글동글 휘저었다.

"흐음…… 마력이…… 큰 보라 인간의 진득한 마력이…….”

용이 당당하게 앞발을 뻗었다.

“저쪽이다.”

그렇게 용에게는 마치 이정표처럼 보이는 옅은 마력의 흔적을 따라 날기를 몇 시간.

둘은 까마득한 아래 흔하디흔한 갈색 머리칼을 발견했다.

“찾았다, 잠시 갈색이 된 보라 인간!”

“깎은 사과처럼 색이 변했군.”

“폴리모프 실력이 제법인걸.”

칭찬과 함께 창공에서 땅으로 쇄도한 엔리르가 이크리안의 머리 위에 찰싹 달라붙어 외쳤다.

“잡았다, 요놈!”

***

막 꼬치를 한 입 베어 물려던 이크리안이 입술을 깨물었다.

그러고 보니 벌써 용님에게 약조했던 열흘이 지났나.

‘아무리 그래도 이렇게 곧장 걸릴 줄이야.’

지나온 길에 남은 마력까지 깨끗하게 지웠다고 생각했건만, 지상 최고의 마법 종족이라는 용의 눈을 속이기에는 역부족이었나 보다.

‘용님 혼자라면 어떻게든 구워 삶아보려고 했는데…….’

포위망을 좁히듯 걸어오는 루페르트 공작의 표정이 참으로 살벌하다.

엔리르를 보고 들고 있던 꼬치를 툭 떨어뜨린 여인이 흔들리는 동공으로 물었다.

“아, 아, 아는 분이야?”

“모르는 짐승이야.”

“저, 저분은?”

“모르는 낭인이야.”

“나, 나한테, 지, 짐승…….”

충격받은 엔리르가 비틀거리자, 여인이 이크리안의 등을 내리치며 일갈했다.

“미쳤어! 수호룡님이잖아! 그 옆엔…… 왠지 초상화로 보았던 루페르트 공작 각하와 닮은 것 같기도 하고…… 하하, 그건 착각이겠지?”

“…….”

“너 대체…… 정체가…….”

삽시간에 입맛이 씁쓸해져 이크리안은 들고 있던 꼬치를 힘없이 내렸다.

그런데 그때.

“……아니지. 네가 누군지가 뭐 중요하겠어.”

“……!”

“여우는 그냥 여우야. 내 여행 동료 여우. 함께 바다를 보고, 산을 오르고, 술에 취하고, 아이스크림과 꼬치를 나누어 먹던…… 친구.”

여인이 환히 웃었다. 지난 며칠과 한 치 다르지 않은 표정으로.

“그러니 울상 짓지 말고 있어야 할 곳으로 돌아가. 저리 높은 분들께서 직접 찾으러 오셨는데.”

“…….”

“그러다 또 견딜 수 없이 답답해지면, 우리가 처음 만난 산길 가장 큰 나무 뒤에 쪽지를 남겨줘.”

여인이 까치발을 들어 이크리안의 귓가에 밀어를 속삭였다.

“바다 보러 가자, 나비야, 라고.”

“……그러면?”

“그러면, 만날 수 있는 시간과 장소를 남겨둘게.”

그때, 우리 또 함께 세상을 보자.

작게 덧붙인 말에 이크리안이 꽉 주먹을 쥐었다.

본모습은 끝까지 드러내지 않았다.

진실한 이름의 통성명 또한, 없었다.

여우와 나비의 여행에 후작이고 마탑주고 그런 지긋지긋한 현실을 끌어들이고 싶지 않은…… 조잡한 마음이었다.

하여 작별도 짧았다.

그저 그러마 고개 끄덕인 것이 전부.

느리게 고개 돌려 엔리르를 바라봄과 동시에, 이크리안은 용의 강대한 마력에 의해 카시스 후작저로 강제 송환됐다.

그 찰나의 순간.

이크리안은 위로하듯 어깨에 짧게 와닿는 손길을 느꼈다.

아주 의외로, 루페르트 공작이었다.

“돌아가면 상황이 좀 나아질 거다.”

“……그렇습니까?”

“황제 놈을 거꾸로 매달아서라도 그렇게 만들어주지.”

“그렇게까지요?”

“이브가 카시스 후작가의 일을 도우러 가는 바람에 어젯밤 데이트가 무산됐다.”

“이런. 괜히 죄송스럽습니다.”

“한 달에 딱 한 번 열리는 야시장이었는데.”

“더 죄송스럽군요.”

“꼭 사주고 싶은 꼬치가 있었는데.”

“몸 둘 바를 모르겠습니다.”

간밤에 이 차갑고 단단한 악마가 얼마나 안절부절못했을지가 눈에 훤히 그려졌다.

그에 픽 웃음과 동시.

눈앞엔 익숙한 후작저가 펼쳐졌다.

작은 일탈의 끝이었다.

***

공백이 무색하게, 카시스 후작가의 업무는 부족함 없이 잘 처리되어 있었다.

반드시 챙겨보아야 한다고 따로 메모지를 붙인 서류를 살피던 이크리안은 감탄했다.

“제국 제일의 상단을 만든 게 우연은 아니었군.”

죽인다 살린다, 우리 부인 내놔라, 온갖 험한 말 가득한 아르칸의 편지를 한쪽으로 스윽 밀어 치우며, 이크리안은 새로운 편지지 하나를 펴 정성스럽게 글씨를 써 내려갔다.

「네피르. 인사도 안 하고 뒷문으로 도망을 가버리다니 섭섭하구나. 고맙다고 꼭 전하고 싶었는데. 아직 나와 마주하는 것이 불편하겠지만, 조만간 시간 내서 후작저에 한번 들려주길 기다리고 있으마.」

마침표를 찍고 한참을 고민하던 이크리안이 어렵사리 한 단어를 덧붙였다.

「……오라버니가.」

***

그로부터 석 달 뒤.

델포이 소백작, 카밀라는 얇은 서류를 이크리안 앞에 툭 떨어뜨렸다.

“요청하셨던 자료요.”

“역시 소백작. 거의 파라반트만큼 빠르다니까?”

“후작님께서 매일 똥 마려운 강아지처럼 끙끙대시니 빨리 처리하지 않고 배길 수가요.”

“여우와 나비는 사는 곳이 서로 다르니, 인연을 맺고 싶다면 먼저 다가가야지.”

“얌전한 고양이가 부뚜막에 먼저 올라간다는 말은 이럴 때 쓰는 건가 보네요.”

씩 웃으며 겉표지를 넘기자 작은 사진과 함께 이름이 적혀 있다.

프시케 테티스.

이크리안이 고개를 기울였다.

“테티스 백작가?”

“의외죠? 테티스 가문에 이런 영애가 있는지 저도 몰랐어요.”

카밀라가 한 장 넘기라는 신호를 주며 말을 이었다.

“왜 몰랐나 했더니, 웬만한 연회엔 얼굴조차 비춘 적이 없더라고요. 전대 백작이 급사한 이후 백작부인과 그 자식들이 참석조차 하지 못하게 했대요.”

“어째서?”

“큰 연회에 참석했다가 덜커덕 좋은 혼처를 만나버리기라도 하면 배가 아프잖아요? 게다가 든든한 뒷배가 생기면 백작가의 후계 경쟁에 본격적으로 뛰어들 수도 있고요.”

“……역겹군.”

“그마저도 이제는 팔아치워야겠다고 생각했는지 연회에 보내기는 하려는 모양인데…….”

카밀라가 마지막 장을 펼쳐 이크리안에게 보였다.

“좋은 혼처를 만날 수는 없도록 뮐러 자작가에서 열리는 질 낮은 연회에나 보낸대요. 뮐러 자작 여성 편력은 아주 유명한데 말이죠.”

거친 손길로 보고서를 덮은 이크리안이 물었다.

“뮐러 자작가 연회. 초대장 구할 수 있어?”

그러자 카밀라가 품속에서 흰 봉투를 꺼내 팔랑 흔들었다.

“이러실 것 같아서 제 이름으로 미리 구해뒀죠.”

“하여간 더럽게 유능해.”

“더럽게 많이 듣는 말이라 감흥이 없네요.”

***

며칠 뒤, 뮐러 자작가의 연회.

테티스 백작가의 영애, 젤로스는 쥘부채를 흔들며 이복동생인 프시케를 흘겨봤다.

“내쫓아도 모자랄 판국에 연회까지 데려와 신랑감을 찾아주고 있는데, 어째 고맙다는 말 한마디가 없다?”

“팔러 온 거겠지.”

“뭐?”

“지금 나라는 상품을 전시하고 있는 거잖아. 가장 높은 가격을 제시한 놈에게 팔아넘기려고.”

“말이 심하네, 프시케.”

“신랑감 따위 언니나 골라. 나는 죽어도 생각 없으니까.”

그러자 젤로스가 무슨 말도 안 되는 소리를 하냐는 듯 부채로 입가를 가리고 웃었다.

“내 신랑감은 이딴 곳엔 없어. 나는 수도에 기반을 둔 부유한 귀족과 혼약을 맺을 거니까.”

“그 귀족 눈이 땅에 달렸길 바라야겠네.”

한 마디도 안 지는 강한 성정. 정말 마음에 들지 않는다.

젤로스는 속으로 이를 갈았다.

확 망나니 눈에나 띄어 팔려가라지.

“그거 알아? 얼마 후면 카시스 가문에서 연회가 열리거든?”

“그런데?”

“나 거기 초대받았어.”

젤로스가 마치 자랑하듯 어깨를 쭉 내밀고 턱을 치켜들었다.

후작가 연회에 초대를 받았다는 건, 영애들에겐 그 자체만으로도 자랑할 거리가 되곤 했다.

제국의 최고위 귀족 중 혼인하지 않은 이는 단 셋.

루페르트 공작, 아르티나 공녀, 그리고 카시스 후작.

루페르트 공작과 아르티나 공녀의 절절한 사이를 모르는 이는 없으니, 계층 사다리로 노릴 수 있는 건 오로지 카시스 후작뿐이다.

“가서 후작 각하 눈에 쏙 들 거야.”

허영심 가득한 젤로스의 눈이 꿈결처럼 혼몽해졌다.

“후작 각하 눈에만 들어 후작 부인이라도 되면…….”

“…….”

더 들어주고 싶지 않아, 프시케는 등을 돌려 연회장 구석으로 가서 섰다.

가문에서 내놓은 영애.

대놓고 훑어보는 사내놈들의 시선이 불쾌했으나, 여차하면 유리잔으로 그어버릴 태세로 노려보자 시선은 하나둘씩 떨어져 나갔다.

그리고 그때.

“카, 카, 카시스 후작 각하 드십니다-!”

“……!”

“……!”

이 촌구석에선 울려 퍼질 리 없는 고명한 지위.

이 제국 단 하나뿐인 후작이자 황제 폐하의 최측근이며 인마전쟁의 영웅이기까지 한 대마법사.

이 연회의 주최자인 뮐러 자작은 그야말로 시퍼레진 안색으로 신발조차 벗어 던진 채 이크리안을 맞이하고자 뛰쳐나갔다.

“비, 비켜! 비켜! 내가 맞이해야 한다! 비켜!”

조금 전까지만 해도 난잡하게 놀던 영애들은 세상 둘도 없는 요조숙녀처럼 치마를 내리고 머리를 빗으며 난리를 쳐댔다.

그 소란함 속.

고고한 걸음으로 들어서는 이크리안은 마치 고위 귀족이 무엇인지를 온몸으로 보여주는 것만 같았다.

손을 휘저어 뮐러 자작의 호들갑을 막아버린 이크리안은 연회장 가운데 서서 주변을 둘러봤다.

그 보랏빛 시선이 자신을 스치자, 젤로스는 금방이라도 혼절할 것만 같은 표정으로 이크리안에게 다가갔다.

좋은 향낭도 찼겠다, 가까이에서 향기를 흩뿌리며 자신을 소개할 계획이었다.

“저, 후작 각하…….”

그러나 제대로 입을 떼기도 전.

이크리안의 시선이 다른 곳으로 돌아갔다.

그러다 어느 한 지점에 붙박여 곱게 휘어진다.

여전히 연회장 구석에서 대귀족의 시선을 마주한 프시케는 생각했다.

‘왠지 익숙한 눈웃음.’

그리고 그 대귀족이 자신을 향해 걸음을 옮길 때는 커다란 눈을 깜박였다.

‘왜, 왜? 내가 뭐 잘못했나? 빤히 쳐다봐서 기분이 상했나?’

연회장의 인원이 모두 홍해처럼 갈라져 길을 만들고.

그 사이로 느긋하게 걸어간 이크리안이 프시케의 앞에 서서 손을 내밀었다.

“……?”

“바다 보러 가자, 나비야.”

예상치도 못했던 말에, 프시케가 숨을 크게 들이켰다.

“다, 당신이…….”

“응. 내가 여우야. 보고 싶어서 찾으러 왔어.”

“……바다가, 아니면, 내가……?”

“너와 함께 보는 바다가.”

둘 모두에게 꿈결 같았던 열흘이 비로소 현실에 녹아든다.

얼떨떨한 표정으로, 프시케가 홀린 듯 이크리안의 손을 마주 잡았다.

바야흐로 쉴 곳을 곁에 둔 여우의 일탈이 완전히 막을 내리는 순간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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