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297화: 외전. 카시스 삼 남매 (3)
상대의 소매 밖으로 보이는 얇은 손목에 이크리안이 당황하던 찰나.
후드 아래 붉은 입술이 열리더니 제법 사나운 말투가 쏟아졌다.
“너도 이들과 한패냐?”
“음? 어떻게 이 잘생긴 얼굴을 산적 따위로…….”
여인의 입매가 무슨 말도 안 되는 소리를 하냐는 듯 V를 뒤집은 모양으로 내려갔다.
아. 맞다. 나 지금 폴리모프 중이지.
“……여하간 한패 아니야.”
“그럼 이들 편에 서서 내게 검을 겨누는 이유가?”
“귀하가 이들을 죽이려 하는 것 같아서.”
“죽어도 싼 이들이다.”
“죽을 정도의 죄를 짓지는 않았음에도?”
“어떤 근거로?”
“재물은 앗았지만, 사람의 목숨을 앗지는 않은 자들이니까.”
벌벌 떨던 산적들이 저마다 몽둥이를 내던지고 뒤로 물러선다.
누가 봐도 오합지졸이다. 독기도 살기도 없는.
“인마전쟁이 끝나고 많은 이들의 생계가 어려워졌지. 몸 성한 사내들은 징집됐고, 성실히 농사짓던 이들은 수탈을 당했으며, 수도 없는 이들이 터전을 잃었어.”
여전히 검을 맞댄 채, 이크리안이 그들을 향해 까닥 턱짓했다.
“그런 이들이 모여 꾸린 것이 산채야.”
“…….”
“그러니 죄의 판가름 없이 덮어놓고 죽이는 것은 과해.”
여인의 시선이 저 뒤, 채 약관도 지나지 않아 보이는 사내아이에게 가닿았다.
“……그렇다고 그냥 넘어갈 수는 없는 거 아닌가? 이 산을 지나는 이들은 빈번히 이런 고초를 겪고 있는데?”
“그래서 보통 이럴 땐, 죽기 직전까지 패서 관(官)에 넘기지. 그러면 관에서 법에 따라 처벌의 수위를 달리하고.”
대안을 제시하자 바짝 치켜세웠던 검이 아래로 내려간다.
잠시 이크리안을 빤히 바라보던 여인이 옅게 고개를 숙였다.
“내 생각이 짧았네.”
“……!”
“멋대로 검을 겨눠서 미안.”
간결하면서도 정중한 사과. 아집도, 변명도 없는 깔끔한 대처다.
이크리안의 눈이 살짝 커졌다가 여우처럼 곱게 접혔다.
“인정이 빠르네?”
“맞는 말에 고집을 부릴 이유가 없지. 어려운 이들의 사정을 잘 모르고 의협심만 앞섰던 것이니, 너그러이 이해해줘.”
그 말에 이크리안의 눈썹이 슬쩍 위로 올라갔다. 뭔가 탐색할 때의 버릇이다.
자신보다 우위에 있는 것으로 보이는 검술 실력.
하대가 익숙한 말투.
어려운 이들의 사정을 잘 모른다는 말.
종합하자면…….
“가출한 귀족이구나.”
“……어떻게 알았지!”
말 몇 마디에 홀랑 정체를 들켜버린 여인의 동공이 사정없이 흔들렸다.
***
이크리안과 여인은 함께 산적들을 소탕했다.
험하고 번거로운 일이었으나, 여인은 연신 신이 난 표정이었다.
“나 이런 건 처음 해 봐. 혼자 산길을 돌아다닌 적은 별로 없었거든.”
“다른 곳은 제법 돌아다녀 봤다는 뜻으로 들리는데.”
“꽤 많이. 제국에 풍광 좋다는 곳은 거의 다 돌았을걸?”
“……그건 좀 부럽다.”
“귀하는 별로 못 가봤어?”
“어쩌다 보니.”
사방으로 흩어진 이들을 다 잡으려면 날을 꼬박 새워야 할 줄만 알았는데, 둘의 합은 생각보다 잘 맞아 달이 기울어질 무렵에는 인계까지 마무리할 수 있었다.
관에서 받은 현상금 중 반을 여인에게 건넨 이크리안이 씩 웃으며 손을 털었다.
“자. 그럼 난 이만. 성공적인 가출 생활하시길.”
“귀하도.”
군더더기 없이 인사를 나눈 이크리안은 돌아서서 밤길을 거닐었다.
구름에 가린 달도 운치 있고, 새벽을 맞이하는 바람 특유의 향도 마음에 들고, 뒤에서 희미하게 들려오는 사박사박 소리도…… 응? 사박사박?
조금 더 귀를 기울이니 자신의 보폭에 맞추어 무언가 따라오는 소리가 들린다.
고개를 갸웃한 이크리안이 걸음을 뚝 멈췄다.
그러자 뒤따르는 소리도 정확히 동시에 멈춘다.
“…….”
터벅터벅.
사박사박.
터벅터벅.
사박사박.
다시 걸음을 멈춘 이크리안이 고개 돌리지 않은 채로 말했다.
“어미 잃은 오리처럼 자꾸 그렇게 따라올 셈인가?”
뒤에선 아무 답도 들리지 않는다. 이크리안이 말을 이었다.
“따라오는 거 다 알고 있으니 나오지 그래.”
“……내 은신술은 제법 훌륭한데. 어떻게 알았지.”
가출한 귀족이라는 것을 맞췄을 때와 같은 대답.
뭔가 열심히 숨기려 하지만 죄다 드러나는 엉성함에 이크리안이 픽 웃었다.
“어떻게 알았지. 이거 귀하가 애용하는 말인가 봐?”
“놀리지 말고.”
“귀하는 뭔가를 감추는 데 서투른 편이야.”
“내가?”
말도 안 된다는 듯 자신을 가리키며 고개를 갸웃하는 여인. 이크리안이 고개를 끄덕였다.
“지금 민망하지?”
“그건 또 어떻게 알았지…….”
“땅을 툭툭 차는 발. 자꾸 꼼지락거리는 손. 빈번히 깨무는 입술. 온몸으로 보여주고 있잖아. 나 지금 민망하다고.”
“……그럼 지금은 내가 무슨 생각을 하고 있는지 맞춰 봐.”
“와. 저놈 참 대단하다.”
“……!”
뻥긋 벌어진 입을 황급히 다무는 것이, 또 ‘어떻게 알았지’라고 말하려다가 멈춘 모양새다.
아까 붕어빵 가게 주인이 꼭 이런 기분이었을까.
자신이 익숙한 것에 미숙한 사람을 보는 생경함.
이크리안은 후작저 밖 세상엔 미숙하지만, 사람을 다루는 데는 능숙하다.
입장 다른 귀족들과 수 싸움을 하는 것이 일상이었으니까.
반면 여인은 후드와 행낭 등이 헤진 것으로 보아 세상엔 익숙하지만, 스스로를 숨기는 데는 미숙한 것으로 보였다.
호기심 강한 마법사의 특성상 약간의 흥미가 일긴 하지만…… 모처럼 밖으로 나온 만큼 사소한 궁금증으로 걸음을 늦출 생각은 없었다.
“그래서. 자꾸 따라오는 이유는?”
“귀하와 동행하면 재미있을 것 같아서. 못 해본 경험도 할 수 있을 것 같고. 새로운 재미와 경험은 내 낙이거든.”
“세상엔 이렇게 쫄래쫄래 따라와서는 안 되는 못된 사내들도 있기 마련이야.”
“귀하는 그런 부류로 보이진 않는걸.”
달빛 아래, 이크리안이 웃었다.
순한 인상으로 외형을 바꾸기는 하였으나, 미소를 지으니 눈은 본모습과 다를 바 없이 곱게 접힌다. 여인은 잠시 말을 잃었다.
“내가 그런 부류가 아니라는 걸 어떻게 확신하지?”
“감.”
“감 같은 소리 하네. 이 아가씨가 세상 험한 줄 모르고.”
어이가 없다는 듯 낮게 웃는 소리. 물씬 위험한 분위기가 풍긴다.
흉악한 이가 가지는 그런 것은 아니었다. 굳이 따지자면, 일평생 누군가를 압도하며 살아온 지배자의 기세였다.
꼴깍 침을 삼키면서도, 여인은 아무래도 상관없다는 듯 어깨를 으쓱였다.
될 대로 되라는 만용이 아니라 어디 떨어져도 제 한 몸 건사할 수 있는 실력에서 나온 자신감으로.
“그럼 며칠만 동행하자.”
“그렇게 해서 내가 얻는 것은?”
“딱 보아하니 이곳이 초행길인 것 같은데, 나는 꽤 좋은 안내 책자가 되어줄 수 있어.”
“…….”
“풍경 좋은 곳, 맛집, 편안한 잠자리, 재밌는 볼거리까지 다 꿰고 있다니까?”
“흐음…….”
“그, 그리고 귀하도 보았다시피 나는 검술에 조예가 깊어.”
“나를 지켜주겠다?”
“흠집 하나 없이.”
여인이 결의에 찬 눈으로 고개를 크게 끄덕였다.
이크리안은 또 웃었다. 하룻강아지가 범 앞에서 객기 부리는 꼴이 퍽 신선하다.
‘내가 전 마탑주라는 걸 알면 까무러치겠군.’
당분간은 장단을 맞춰줄 생각이었다.
안위는 둘째치고, 솔직히 안내 책자로서는 꽤 탐나니까.
“좋아. 귀하에게 내 안위를 맡기도록 하지.”
“현명한 결정이야! 대신 아까 산적 소탕처럼 재밌는 게 있으면 나도 끼워줘야 해!”
“협상 완료. 모처럼 동행을 하게 되었으니 서로를 부르는 호칭부터 정리해야 할 듯한데.”
“프…… 아니, 으음…… 나비라고 불러.”
“나비?”
“응. 나비. 나는 뭐라고 부르면 돼?”
“귀하가 나비라 하였으니…… 나는 여우로 하지.”
형식적인 통성명 끝에 여인이 손을 척 내밀었다.
행여 실례가 될까, 이크리안은 손끝을 살짝 잡았다 놓았다.
“며칠간 잘 부탁해.”
“나야말로.”
그렇게 가출 이틀 차.
이크리안에겐 계획에 없던 동행인이 생겼다.
***
여우의 가출 사흘 차 아침.
아르티나 공작저 응접실 쿠션 위에 올라앉은 엔리르는 소파에 축 늘어진 형과 누나를 바라보며 커다란 눈을 슴벅였다.
자주 볼 수 없는 광경에 동그란 머리가 옆으로 기울어진다.
“누나, 왜 그렇게 시무룩해?”
“놀이 상대가 사라졌어…… 체스판을 뒤집어엎던 내 천사…….”
“……집주인 형아는 왜 그렇게 다 죽어가?”
“부인이 사라졌다…… 체스판 뒤집어엎었다고 등을 후려치던 내 천사…….”
아하. 지금 보라 인간 사라졌다고들 저러는 거구나.
꼴깍 침을 삼킨 용은 앞발로 눈을 가리고 쿠션으로 파고들었다.
나는 아무것도 몰라.
아는 게 없는 순박한 용이야.
“근데 용.”
“으응? 응? 왜애? 난 아는 게 없어!”
“……누가 뭐래? 그 보석 처음 보는 건데, 어디서 났지?”
“몰라아?”
거짓말엔 소질 없는 용의 꼬리가 정신없이 휙휙 흔들렸다.
그 수상한 몸동작을 놓칠 리 없는 아르칸이 눈을 가늘게 뜨고 추궁했다.
“그러고 보니 너 며칠 전부터 그 쿠션 위에서 안 움직인다?”
“아닌데? 나 움직이는데?”
엔리르가 엉덩이를 살짝 떼었다가 다시 쿠션 위에 폭 주저앉았다.
“자세히 보니 쿠션이 조금 볼록한 것도 같고?”
“아닌데? 내가 앞발로 휘저어서 솜이 뭉친 것뿐인데?”
엔리르가 짧은 앞발을 휘적휘적 움직였다.
아르칸의 의심이 극에 달했다.
“너 일어서 봐.”
“……아야. 허리 아파서 못 일어나겠어.”
“네가 허리가 어딨어. 머리, 배, 꼬리 삼등분으로 이뤄진 게.”
성큼성큼 걸어간 아르칸이 용의 꼬리를 휙 들어올렸다.
몸이 번쩍 들리면서도 엔리르는 앞발로 쿠션을 꽉 움켜쥐었다. 마치 생명줄이라도 되는 것처럼. 그 바람에 발톱이 쿠션 귀퉁이에 걸리고…….
- 부우욱.
“아, 안 돼!”
- 와르르르.
찢어진 쿠션 사이, 휘황찬란한 보석들이 비처럼 떨어져 응접실 바닥 사방으로 데구루루 굴렀다.
“…….”
“…….”
“……일단 마음을 활짝 열고 내 말을 들어 봐, 형아.”
“…….”
“이거 뇌물 아니야. 절대 아니야.”
“그럼.”
“그냥 작고 소소한 성의 표시라고 했어.”
“뭐에 대한.”
“아주 잠시만 큰 보라 인간을 찾지 말아 달라고 했어. 그러면 이 보석 전부 준다고.”
“……네놈이 그 여우 놈의 공범이었구나!”
스르르 시선 돌리는 막내를 바라보며, 아르칸이 속 터진다는 듯 눈을 질끈 감았다.
공작저고 후작저고 황궁이고 온통 발칵 뒤집혔는데 요놈만 유유자적 쿠션을 끌어안고 있던 이유가 바로 이거였다.
“당장 가서 그놈 잡아 와.”
“안 돼. 용은 약속을 지켜야 해. 약속의 종족이란 말이야.”
“그 보석 고스란히 돌려주고 약속 파기해.”
“못 해.”
“오늘부터 정원에서 비바람 맞고 잘래?”
“……형아는 순 제멋대로야!”
엔리르가 부당하다는 듯 앞발로 아르칸의 어깨를 탕탕 내리찍었으나, 졸지에 부인을 잃은 애처가의 눈에는 뵈는 게 없었다.
심지어 이크리안보다 더하면 더했지 절대 한가하지 않은 공작으로서, 자리를 비운 공작부인의 업무까지 얹어서 하려니 눈알이 빠질 지경이기도 했다.
“가서 전해. 순순히 돌아오면 폐하께 인력 충원을 건의함과 동시에, 마탑주 업무를 렐리안에게 넘기는 것도 동의하겠다고.”
이번 기회에 그놈이 맡고 있던 업무가 얼마나 과중한 것이었는지 잘 알았다.
그 여우 놈이 또 튀어버리기 전에 업무를 적절히 분담하여 이번과 같은 불상사가 일어나지 않게 방지해야 한다.
“어서. 안 가고 뭐 해.”
집주인의 폭거에 납작 엎드린 용이 투덜댔다.
“진짜 서러워서 내가…… 집 없는 용이라고 이렇게 막 대하는 건 정말 못된 짓이야…… 인간이라면 그래선 안 돼…….”
“스읍.”
“잡아 올게…… 보석 돌려주고 잡아 오면 되잖아…… 딱 열흘만 버티면 이 보석 다 가질 수 있었는데…….”
용으로부터 답을 들은 아르칸이 쌩하니 돌아섰다.
그 역시 서류 지옥에 살고 있기에, 오래 실랑이하고 있을 시간이 없었다.
한편, 아르칸의 뒷모습을 눈으로 좇던 이벨리아는 슬슬 기어 집 밖으로 나가고 있는 엔리르에게 실프를 보내 속삭임을 전했다.
- 살살해, 엔리르.
살살?
- 공장장에게도 휴식이 필요하니까.
그럼 찾지 마?
- 찾긴 찾아야지. 다만, 덜 열심히. 느리게. 충분한 시간을 주고.
시간, 얼마나?
- 열흘. 그동안 오라버니는 내가 잘 붙잡고 있을게.
좋아! 알았어!
- 대신 그 보석은 나랑 반으로 나누기다?
……날강도.
***
둘에게 이건 단지 일탈이었다.
담장 속의 여우가 잠시 바깥의 포도를 맛보는.
줄에 묶인 나비가 잠시 바깥의 꽃을 맴도는.
그래서 둘은 서로의 신분에 대해 깊게 묻지 않았다.
그렇게 동행 시작일로부터 닷새.
투박한 아이스크림 하나를 쥔 이크리안은 옆에서 같은 아이스크림을 쥐고 팔랑팔랑 걷는 동행인을 슬쩍 바라봤다.
‘……좋은 선택이었어.’
여인은 발 닿는 곳마다 맛집을 소개해주고, 절경을 볼 수 있는 장소에 데려다주고, 혼자 있을 수 있는 시간을 주기도 했다.
시장에서 흥정하는 것도, 값비싸지 않은 음식을 익숙하게 입에 넣는 것도, 작은 춤판이 벌어지면 냅다 달려가 상품을 얻어오는 것도.
어설프게나마 여인을 따라 하며 이크리안은 셀 수 없이 많은 웃음을 흘렸다.
그때. 여인이 휙 고개를 돌렸다.
지레 놀란 이크리안이 재빨리 시선을 하늘로 올렸다.
“뭐야, 하늘에 뭐 있어?”
“나비가 지나가서.”
“싱겁긴. 그보다, 무슨 냄새 안 나?”
물음에 이크리안이 코를 킁킁댔다.
청명한 바람에 코를 찡긋하게 하는 짠 냄새가 묻어 있다.
“……바다?”
“맞아! 여기서 오르카스 해가 제법 가깝거든.”
마치 바다를 찾으려는 것처럼 이크리안이 주변을 둘러봤다. 그 모습에 여인이 푸핫 웃음을 터뜨렸다.
“여기선 안 보이지! 저쪽 풀숲을 헤치고 조금 걸어야 해! 그리고…….”
여인이 이크리안의 소매를 잡았다.
“거기서 보는 일몰이 진짜 아름답거든. 그건 꼭 보고 가야지.”
“일몰은 여기 아니더라도 어디서나 볼 수 있는데?”
“잔말 말고 따라와.”
반신반의한 표정으로 따라가길 몇십 분.
거친 풀숲을 헤치며 나아가자 파도 소리가 점점 크게 들려온다.
시야를 가진 마지막 풀을 젖히기 전에, 여인이 뒤돌아 장난스럽게 웃었다.
“준비됐어?”
그리고 미처 답하기도 전에 활짝 트인 시야.
“……!”
“어때, 멋있지?”
여인은 자신만만하게 웃으며 백사장을 밟았다.
그런데, 이 며칠 늘 뒤를 졸졸 따라오던 발소리가 들리지 않는다.
“안 오고 뭐…….”
뭐 하냐고 물으려던 여인은 말을 삼켰다.
바다와 노을을 바라보는 사내의 눈에서 형언할 수 없는 경탄을 보았기 때문이다.
그렇게 한참.
삼킬 듯 세차게 밀려왔다가 비운 듯 가볍게 물러가는 파도를 바라보던 이크리안이 입을 달싹였다.
“……손, 담가 봐도 될까?”
“……얼마든지.”
썰물을 따라 백사장 위를 걸어간 이크리안이 허리 숙여 손을 담갔다.
그리고 곧바로 밀물.
미처 피하지 못해 다리가 젖어버렸으나, 이크리안은 그것마저 달갑다는 듯 아예 그 자리에 털썩 주저앉아버렸다.
어디가 하늘과 바다의 경계인지도 모르게 온통 반짝이는 세상.
토벌을 위해 달려나갔던 피보라 치는 해안 말고, 이토록 푸르고 시린 바다는 처음이다.
수평선 어딘가를 하염없이 바라보며, 비로소 넓은 세상을 맞이한 여우가 읊조렸다.
“아름답다…….”
렐리안의 건강을 위해 의원과 신전을 떠돌았던 어린 시절도.
황태자 전하를 보필하여 인마전쟁을 승리로 이끌었던 소년 시절도.
후작가의 가주로서 드넓은 영지를 책임지는 것도.
마탑주로서 마법의 발전에 이바지하는 것도.
폐하의 측근으로서 이 제국의 동량이 되는 것도.
……불행한 것은 아니었다.
그러나 되짚어보자면, 행복하지도 않았다.
적어도 지금 이 감정을 단 한 번도 느껴본 적 없으니까.
반쯤 물에 잠겨 앉은 채로 다리를 쭉 펴자 부드러운 모래가 일렁이며 발에 와 닿는다.
고개 드니 낙조(落照)의 붉은 빛이 마치 이불처럼 바다를 내리덮고 있었다.
하늘엔, 이번엔 정말로, 어여쁜 나비 하나가 맴돌았다.
“……이게, 세상이구나.”
모든 것들과 사투하느라 미처 보지 못했던 세상은 이토록 아름다웠다.
그가 구현했던 그 어느 마법보다 더 마법 같은 광경으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