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공녀님의 꽃밭에는 그들이 산다-296화 (296/323)

##  296화: 외전. 카시스 삼 남매 (2)

가출 한 번으로 제국의 수뇌부들을 온통 뒤집어놓은 여우는 그저 행복했다.

“이 꽃은 꼭 우리 렐리안을 닮았네. 쉴 새 없이 재잘거리는 저 산새는 공녀님을 닮았고.”

바깥세상이 이토록 아름다운지 미처 모르고 살았던 지난날이 원통하기까지 하다.

“이래서 사람 능력이 너무 좋아도 못 써. 애초에 공녀님의 동화책 공장 공장장이 되지만 않았어도 폐하의 측근이 되는 건 피해갈 수 있었을 텐데.”

공녀님께서 날 오라버니라고 부르시는 바람에 질투의 화신이 된 폐하께서 도끼눈을 뜨셨던 그때만 생각하면 눈에 눈물이…….

말로 다 할 수 없을 정도로 험난했던 지난날을 뒤로하고 산맥을 넘다 보니, 어느새 수도 중심부와는 다소 다른 분위기의 번화가가 보인다.

저녁 장사를 앞둔 시간. 바삐 움직이는 상인들로 인해 대로변은 활기로 가득 차 있었다.

“흐음…… 이 모습으로 즐기는 데는 한계가 있을 테니 폴리모프를 해야겠네.”

5계급 변형마법.

폴리모프(polymorph).

무려 5계급의 마법을 오래 유지하는 것은 상당한 마나를 요하지만, 다행히도 이크리안은 마나의 총애를 받았다고 해도 과언이 아닌 대마법사였다.

짧은 읊조림 끝에 발을 구르자 삽시간에 외형이 바뀐다.

제국에선 꽤 흔한 색인 다갈색 머리칼과 그와 같은 색의 눈, 그리고 상당히 평범해 보이는 인상으로.

간단히 말하자면, 여우 같은 꽃미남에서 성실한 약초꾼의 모습으로.

“좋아. 이 정도면 아무도 날 못 찾겠지.”

물웅덩이에 자신의 모습을 비춰 본 이크리안은 흡족한 표정으로 발을 내디뎠다.

“일개미 인생은 이제 끝이다!”

***

거리엔 생전 처음 보는 것들투성이였다.

연신 두리번거리며 걷던 이크리안은 붕어를 구워대는 노점 앞에서 걸음을 멈췄다.

“…….”

“이봐. 뭘 그렇게 쳐다 봐?”

“궁금해서. 이게 대체 무엇인가?”

그러자 이크리안의 행색을 위아래로 살피던 노점상 주인이 한쪽 눈을 찌푸리며 보란 듯 소매를 걷었다.

왕년에 꽤 험한 일을 하며 살았는지, 나무처럼 두꺼운 팔뚝에는 ‘착하게 살자’라는 글귀가 적혀 있었다.

“어린놈의 새끼가…… 반말?”

맞다. 나 지금 후작 아니지.

“실수. 이게 무엇입니까?”

이크리안이 순순히 꼬리를 말자 소매를 내린 덩치 큰 사내가 답했다.

“어디 먼 곳에서 온 모양이로군. 이거 요즘 꽤 인기몰이하는 간식인데.”

“반말?”

“뭐. 어쩌라고. 존댓말을 듣고 싶으면 주먹이라도 한 번 섞어보든가.”

“…….”

사내의 덩치가 아무리 커도 정식으로 기사 훈련까지 받았던 이크리안의 상대가 될 수는 없다.

하지만 소란을 일으켜서 좋을 건 없기에, 이크리안은 그저 말을 돌렸다.

“……빵에 붕어를 넣고 굽는 이유는 무엇입니까? 비릴 것 같은데.”

“무슨 소리야?”

“이거 말입니다. 붕어에 밀을 얇게 입혀 구운 것 아닙니까.”

그 말에 자신이 굽고 있는 붕어빵을 내려다보던 노점상이 입술 끝을 씰룩이다 크게 웃음을 터뜨렸다.

“푸핫-! 크하하하하하-!”

“왜 웃습니까?”

“자네 어디 구중궁궐에라도 갇혀 살다 왔나? 크하하하!”

“…….”

큭큭 웃으며 붕어빵을 뒤집은 사내가 하나를 집어 건넸다.

“자. 서비스다. 진짜 붕어가 들었는지 맛이나 보라고.”

얼떨결에 뜨끈한 붕어빵을 쥔 이크리안이 인상을 한껏 찌푸리고 조심스럽게 귀퉁이를 베어 물었다.

“……!”

“어때. 맛있지?”

“붕어가 없습니다.”

원래 없는 거라며, 노점상은 또다시 웃음을 터뜨렸다.

“……맛있군요.”

안을 가득 채운 달콤한 속을 먹으며 연신 감탄하자, 그새 마음을 연 사내가 화통하게 웃으며 이크리안의 어깨에 팔을 척 걸쳤다.

“귀여운 동생일세! 자, 자, 이거 좀 더 먹고!”

“……?”

“저쪽으로 쭈욱 걷다 보면 대로변 따라 맛있는 것들이 참 많거든. 붕어빵 가게 한스가 보냈다고 하고 이것저것 얻어먹으라고!”

“……그래도 됩니까?”

“보아하니 돈도 없어 보이고 행색도 남루한 데다가 영 배가 고팠는지 뼈대도 앙상한데. 돈은 내가 가서 낼 테니까 마음껏 먹고 가!”

이크리안은 당황했다. 태어나서 돈 없고, 행색 남루하고, 뼈대 앙상하다는 말 따위를 들은 것은 처음이다.

그러나 노점상 주인은 아무래도 이크리안이 대단한 감동이라도 받았다고 착각한 모양이었다.

동정이 가득 담긴 표정으로, 사내가 말을 얹었다.

“아. 저 길의 끝까지 가면 소원을 들어준다는 분수가 있어. 그것도 꼭 보고!”

조금 전만 해도 반말을 하냐며 으르렁대던 사내가 참 쉽게도 호의를 내비친다.

묘한 표정으로 바라보며 이 제국의 유일한 후작은 가볍게 고개를 숙였다.

손에 쥔 붕어빵의 무게만큼, 아주 조금은 알 것 같았다.

공녀님께서 그렇게도 말씀하셨던 제국민들의 소소하고도 큰 다정함을.

***

길의 끝까지 걸어가니 사내의 말대로 커다란 분수 하나가 보였다.

그런데 이상하게도, 시원하게 솟구치는 분수 아래에는 가장 낮은 화폐 단위인 크론이 수도 없이 들어가 자갈처럼 깔려 있다.

“……?”

영문을 알 수 없어 이크리안이 고개를 기울이자, 분수대에 앉아 더위를 식히던 이들이 큰 목소리로 말했다.

“거기, 청년도 도전해 보지 그래?”

“도전? 무엇을?”

“어린놈의 새끼가…… 반말?”

“…….”

아무래도 이 영지 사람들은 존댓말에 예민한 모양이다. 정작 자기들은 죄다 반말을 찍찍하는 주제에.

“실수. 무슨 도전을 말씀하시는 겁니까?”

“하여간 요즘 애들은 버릇이 원…… 거, 동전 좀 가지고 있나?”

“가지고 있습니다.”

“동전을 던져서 분수대 가운데 천사상의 손에 정확히 떨어뜨리면 소원이 이뤄진다지!”

“천사상의 손이 지나치게 작은데요.”

비율이 안 맞잖아요, 비율이.

“무슨 소릴! 원래 천사님들은 손이 작으셔!”

이래서 눈치 빠른 젊은이들은 곤란하다니까.

한마음 한뜻으로 사기를 치는 영지민들을 바라보던 이크리안이 고개를 저었다.

아무래도 이건 이 마을 사람들이 부가적인 이익을 얻는 상술인 모양이다.

관광객들이 오가며 던진 동전은 영지의 발전 기금으로 사용되거나, 굶주린 아이들의 호주머니로 들어가게 될 터다.

그걸 모를 이크리안이 아니었지만…….

‘붕어빵값으로 거하게 속아준다.’

이크리안은 금화인 리브르를 꺼내 사람들에게 보이기 전에 한 번 쥐었다가 폈다.

마력을 덧씌워 지금은 감쪽같이 크론으로 보이지만, 내일쯤이면 환영을 벗고 리브르가 될 터다.

“자, 자, 던져보라고, 청년!”

“참고로 근래에는 성공한 사람이 없어!”

성공 못 할 법도 하지. 폭포처럼 쏟아져 내리는 분수 사이에 저리 양심도 없는 크기로 만들어 놓았으니.

좋은 구경거리에 옹기종기 몰려든 군중들 사이.

불과 얼마 전만 해도 마탑의 왕이었던 이크리안이 씩 웃으며 동전을 던졌다.

- 핑그르르르.

하늘 높이 솟구친 동전이 정확히 분수대의 물을 가르고 천사의 손 위에 내려앉는다. 마치 제물을 바치기라도 한 것처럼.

“우와아아아아-!”

“제법인데!”

“약초꾼처럼 생겨선 한 수를 숨기고 있었구먼!”

“무슨 소원을 빌 건가?”

“뭐든 다 들어준다고! 부자가 되게 해달라고 빌어! 팔자 펴게 해달라고!”

제각기 소리높여 말하는 이들을 둘러보며, 이크리안은 경건하게 두 손을 모았다.

평생 일에 치여 살던 가련한 대마법사가 조용히 읊조렸다.

“짚신도 짝이 있다던데…… 저만 짝이 없습니다.”

왁자지껄 떠들던 이들이 모두 숙연해졌다.

누군가 ‘아이고, 불쌍해서 어째’ 속삭이는 소리가 들려온다.

“혼자 늙어 죽지 않게 해주세요…….”

제발요, 신님.

예?

***

도망친 여우가 새로운 인연을 염원하던 그때, 늦은 저녁의 카시스 후작저.

급한 업무를 쳐내고 비척비척 방으로 돌아오던 렐리안과 네피르는 복도에서 마주쳤다.

평소와 다른 시선이 배다른 자매를 향한다. 흡사 전우를 보는 것만 같은 표정이 미약하게나마 깃들어 있었다.

렐리안이 바싹 마른 입술을 열어 물었다.

“……괜찮아?”

“너야말로.”

“난 안 괜찮아.”

“나도.”

네 맘이 곧 내 맘이다.

“각하는 대체 어떤 삶을 살고 계셨던 거야? 지금 우리가 하고 있는 업무에다가 황제 폐하 측근으로서의 업무까지 혼자 다 했다는 거잖아.”

“……새삼 반성하게 되네.”

“네가 좀 나눠서 하지 그랬어.”

“내가 카시스에 있을 때는 종종 그랬는데, 혼인하고 나니 공작부인으로서의 업무도 만만치 않아서 엄두가 안 났어.”

“이러니 각하께서 아직도 짝이 없으시지.”

“…….”

민망해진 렐리안은 휘영청 뜬 달로 시선을 돌렸다.

동그란 보름달 속, 자유를 만끽하는 오라버니의 해맑은 표정이 어렴풋하게 보이는 듯하다.

티끌 하나 숨길 수 없도록 밝게 내리꽂히는 달빛. 머쓱한 표정으로 이번엔 네피르가 먼저 입을 열었다.

“밥은 먹었어?”

“아니. 언니는?”

“나도 아니. 마법사 영감들 성질이 만만치 않은 모양이네.”

“아까 뭐 터지는 소리 안 들렸어?”

“들렸어. 설마…….”

“맞아. 예산 증액해달라고 마법사 영감들이 마법 난사한 거야.”

“……미친. 어떻게 돌려보냈어?”

렐리안이 사뭇 뿌듯한 표정으로 답했다.

“스승님을 팔았어.”

“수호룡님을?”

“정확히 말하자면, 스승님의 날숨을 담아둔 플라스크를 주겠다고 하니까 그렇다면 오늘은 물러간다면서 돌아갔어.”

“……진짜 담아뒀어?”

“아니? 공기를 무슨 수로?”

“그럼 사기 친 거야?”

“응. 아르티나에서 배운 게 이런 거라.”

픽. 둘의 입에서 동시에 맥빠진 웃음이 흘렀다.

누가 자매 아니랄까 봐, 예상외로 둘은 웃음 포인트가 비슷했다.

세상에서 가장 어색했던 관계는 때로 세상에서 가장 작은 웃음 하나에 풀어지기도 한다.

한결 편해진 음성으로 네피르가 물었다.

“각하 어디 가셨을까?”

“글쎄. 근데 이왕 도망친 거 좋은 사람 데리고 오면 좋겠다.”

“그러게. 혼인하실 나이가 훌쩍 지나긴 했지.”

곰곰이 생각하던 렐리안이 머뭇거리며 말했다.

“저기, 네피르.”

“응?”

“그, 우리…… 오라버니 조금 늦게 찾을까?”

“늦게?”

“응. 얘기하다 보니까 안쓰러워서. 생각해보면 오라버니는 제대로 논 적도, 쉰 적도 없어. 이게 오라버니 인생의 첫 일탈이라는 게…… 조금 속상해.”

“…….”

“언니가 푼 상단원들을 다시 불러들여주면 좋겠어. 가주 대리가 길어지는 게 상단에 피해가 된다면, 그 일도 내가 맡아서 할게.”

네피르는 한때 그리도 미웠던 동생을 가만히 바라봤다.

아무리 바라봐도 이제 미움은 없다. 남은 것은 외려 부러움뿐.

‘너희 둘은 참 좋겠다. 진짜 남매라서.’

나는 아마 죽어도 그 울타리 안에 들어갈 수는 없겠지만, 그래도…….

“……철수시킬게. 그리고, 각하께서 돌아오실 때까지 가주 대리도 내가 해.”

“……!”

“그냥 호의 아니야. 각하 돌아오시면 값은 마땅히 받아낼 거야.”

“……고마워, 언니.”

어린 시절 종종 함께 머물렀던 후작저는 둘 모두에게 늘 지옥이었다.

서로 가지지 못한 것에 대한 열등감은 유년기의 둘을 갉아먹었으니까.

길고 긴 시간을 지나 각자의 분야에서 성취를 이룬 둘은, 바야흐로 생각했다.

우리가 조금만 더 마음이 깊었더라면.

우리에게 조금만 더 여유가 있었더라면.

어쩌면 우리는…….

정말 좋은 자매가 되었을지도 모른다고.

***

한편, 분수대 앞에서 경건히 소원을 빈 이크리안은 또 다른 영지로 넘어가는 산길 입구에 다다랐다.

금방이라도 산짐승이 튀어나올 것처럼 어두웠지만, 이 제국 최고를 다투는 대마법사에게 웬만한 것들은 장애가 되질 않는다.

곧바로 발을 내디디려던 찰나.

산길 바로 앞 노점에 앉아 있던 노파가 말을 걸었다.

“그 산길을 넘으시려고?”

“그렇…… 아니, 네.”

“그러지 않는 게 좋을 텐데.”

“산에 무슨 일이라도 있습니까?”

노파가 입을 꾹 다물었다. 더 듣고 싶다면 성의를 보이라는 뜻. 이크리안이 동전 하나를 꺼내 노파에게 던졌다.

“얼마 전에 산채를 만든 놈들이 있거든. 채주가 제법 실력 있는 모양인지 넘으려던 이들이 짐은 물론이고 옷까지 빼앗겨 알몸으로 넘어간다는 소문이 파다해.”

“넘어간다면…… 인명을 빼앗지는 않는군요.”

“뭐, 그놈들도 생계가 어려워 산으로 기어 올라간 것들이니까.”

“덕분에 목숨은 건지겠습니다.”

이크리안을 위아래로 훑어보다가 굳은살 배긴 손에 시선을 둔 노파가 끌끌 웃었다.

“자세히 보아하니 자네 목숨이 아니라 그놈들 목숨을 말하는 것이로군.”

역시 연륜은 무시할 게 못 된다.

마법을 연마하면서도 게을리하지 않았던 검술.

그 흔적이 고스란히 남은 오른손을 감아쥐며, 이크리안은 망설임 없이 산길로 들어섰다.

***

어둠에 하등 방해받지 않는 눈으로 산길을 걷길 몇 식경.

대마법사의 밝은 시야에 몽둥이를 든 산적 떼, 그리고 그 앞에 무릎을 꿇고 무엇인가를 애원하는 사람들이 보인다.

조금 더 다가가니 소리도 또렷하게 들렸다.

“사, 살려주십시오. 집에 아이가 기다리고 있습니다.”

“거 참, 몇 번을 말해! 가진 것만 다 내놓으면 고이 살려서 보내주겠다니까?”

“아이고, 이걸 다 드리면 저희 가족은 꼼짝없이 굶어 죽어야 합니다!”

“그럼 별수 있나. 여기서 네놈을 죽여 네 가족의 입을 덜어주어야지.”

나무 뒤에 숨어 실랑이를 듣던 이크리안이 고개를 저었다.

“휴가 중이니 웬만하면 조용히 지나가려고 했는데.”

그냥 가자니 꿈자리가 뒤숭숭할 것 같고.

“쯧쯧, 편안한 잠자리를 위해 어쩔 수 없이 나서야겠네.”

마법사라는 것이 탄로 나면 곤란했기에 이크리안은 검집에 손을 가져다 대고 숨을 크게 들이쉬었다.

“멈…… 엉?”

호령을 미처 다 끝내기도 전, 검을 든 누군가가 이크리안을 지나 빠른 속도로 쇄도한다.

“……!”

산적 나부랭이들은 감히 눈으로 좇을 수조차 없을 정도의 경공.

겨눈 검은 분명히 살초다.

바람처럼 달려간 이크리안이 산적들의 앞을 막아섰다.

- 채애애앵!

정체 모를 이의 검과 이크리안의 검이 맞부딪치며 불꽃을 튀겼다.

그제야 목이 떨어질 뻔했다는 것을 깨달은 산적들이 뒤에서 혼비백산하는 소리가 들려온다.

예리한 눈으로, 이크리안은 후드를 깊게 눌러쓴 이의 외형을 살폈다.

‘여인……?’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