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295화: 외전. 카시스 삼 남매 (1)
“이브. 한 수만 물려줘요.”
“안 돼.”
“저는 아까 물려드렸잖아요.”
“누가 순순히 물려주래?”
“……이렇게 냉정하게 구실 거예요?”
“렐리안, 세상은 눈 똑바로 뜨고 살아야 해. 그렇지 않으면 이렇게 눈탱이 맞기 십상이야.”
얼마 전 순진한 용 하나 등쳐먹었을 때 했던 말을 그대로 읊으며, 이벨리아가 백색 퀸을 대각선으로 옮겼다.
“체크메이트.”
렐리안이 고운 이마를 찌푸렸다. 도무지 이길 방도가 없다.
전쟁이 끝난 이후 전략판에 그리던 그림을 체스판에 그리기 시작하니, 지금은 그 실력이 대륙 제일이라고 해도 과언이 아닐 정도였다.
어쩔 수 없지, 뭐.
포옥 한숨을 내쉰 렐리안이 자연스럽게 몸을 일으켰다.
“어디 가, 렐리안? 항복하는 거야?”
“이브 잔에 차가 다 떨어져서요. 잠시만요.”
그러더니 하필 체스판 위로 부자연스럽게 허리를 숙인다.
“잠깐, 너 설마……!”
퍽. 우당탕.
“어머, 세상에! 차를 따르려다가 실수로 체스판을 쳐서 죄다 엎어버렸네!”
“…….”
이벨리아가 바닥을 데구루루 구르는 체스 말을 망연자실 내려다보며 중얼거렸다.
“이거 어디서 많이 보던 수법인데…….”
쿠션 위에 앉아 특이한 색의 보석을 물고 빨던 엔리르가 키득키득 웃으며 말했다.
“나 알아. 저거 집주인이 맨날 하던 짓이야.”
“렐리안, 오라버니한테 이런 얍삽한 짓까지 배워왔어?”
“사실 저도 어젯밤에 똑같은 짓을 당했거든요. 제가 다 이긴 판이었는데 차를 따라주는 척하면서 확 엎어버리시더라고요.”
이벨리아가 생글생글 웃고 있는 단짝 친구를 바라보며 고개를 저었다.
“세상에서 제일 착하고 순진했던 우리 렐리안은 어디로 사라지고…… 뒤구르기 하면서 봐도 아르티나인 성격파탄자 하나가 앉아 있네.”
“이브, 세상은 눈 똑바로 뜨고 살아야 해요. 그렇지 않으면 이렇게 눈탱이 맞기 십상이랍니다.”
조금 전 들었던 말을 그대로 되돌려주며 렐리안이 득의양양 팔짱을 꼈다.
“내가 어디 가서 호구 잡히는 성격은 아닌데…… 뭐 됐어. 그럼 이번 게임은 비긴 거로 하고 내일 다시 해!”
“좋아요!”
아마 다음 게임은 체스 실력 이외에도 마법과 정령술이 난무하는 판이 될 터다.
코흘리개 시절과 험난한 전쟁터를 모두 함께 걷고 이젠 공작부인과 마계의 왕이 된 두 소꿉친구가 마주 웃었다.
“렐리안, 우리 그거 보자. 네피르가 준 기행록!”
“요즘 자주 찾으시는 걸 보니 꽤 마음에 드신 모양이네요.”
“응. 역시 세상은 넓어. 저번에 저기 밀림에서 줄에 매달려 아아아- 소리를 내는 부족까지 읽었어!”
그러자 엔리르도 물고 빨던 보석을 품에 꼭 안고 뒤뚱뒤뚱 걸어와 턱을 괴었다.
“나도 같이 볼래. 물 빠진 보라 인간 아주 제법이야.”
아르티나 두 남매의 반짝반짝한 시선을 받으며, 렐리안이 조심스러운 손길로 두꺼운 기행록을 펼쳤다.
공들인 삽화와 재치 있는 설명에 셋이 머리를 맞대고 하염없이 빠져들던 그때.
- 똑똑똑.
정중한 노크와 함께 하델이 방문 밖에서 고했다.
“마님. 아가씨. 카시스 후작저에서 사람이 왔습니다.”
“카시스에서? 무슨 일이래?”
“그게…….”
집사가 답지 않게 뜸을 들이자 이벨리아가 벌컥 문을 열고 물었다.
“심각한 일이야?”
“……후작 각하께서 사라지셨다고 합니다.”
“동화책 공장 공장장이?”
“오라버니께서? 어디로?”
“아무도 모른다고 합니다. 감쪽같이 사라지셨다고…….”
이벨리아와 렐리안이 동시에 고개를 기울였다.
이상하다? 맡은 일로 따지자면 황제 버금가게 바쁜 인간이 갑자기 사라질 리가 없는데?
눈을 도르르 굴리던 렐리안이 이벨리아에게 물었다.
“설마 납치일까요?”
“후작가 가주에 마탑주를 겸하고 있는 사람을?”
“아니면 유괴일지도 몰라요. 오라버니가 은근 맹하거든요.”
“유괴를 당하면 유괴범 소굴을 전리품으로 들고 올 사람이야, 그 양반은.”
“그건 그렇네요. 그럼 대체 뭐지?”
한창 현직을 뛰고 있는 대귀족이 하루아침에 깔끔하게 증발해버리는 일은 흔치 않다.
하여 이벨리아는 애써 합당한 이유를 찾아 붙였다.
“마탑에 굉장히 급한 일이 생긴 거 아닐까?”
“그럴듯해요. 그렇지 않아도 얼마 전에 마탑의 마법사들이 폭탄처럼 터지는 개구리알을 만들었다고 했었거든요.”
“……거긴 대체 뭐 하는 곳이야?”
그때였다. 엔리르가 지금 생각났다는 듯 꼬리로 바닥을 탕탕 내리치며 이벨리아의 옷자락을 잡아당겼다.
“맞다. 누나, 나 얼마 전에 황궁에서 보라색 좀비 봤다?”
“좀비?”
“응. 다 죽어가는 큰 보라 인간이 내 피를 쪽쪽 빨아먹으려고 했어. 그리고 곧 다 때려치울 예정이라고도 했어.”
“……다 죽어가는 공장장?”
“……다 때려치울 예정?”
이벨리아와 렐리안이 느리게 고개 돌려 시선을 마주쳤다.
그리고 동시에 말했다.
“여우가 튀었구나!”
***
전대미문의 사건이 발생했다.
현시점에선 제국 유일한 후작가의 가주이자 마탑의 주인인 이크리안 카시스가 어둠을 틈타 도주해 버린 것.
뒤늦게 발견된, 마력으로 더듬어야만 읽을 수 있는 쪽지에는 다음과 같이 쓰여 있었다.
「안녕, 여러분. 나는 이 세상의 모든 굴레와 속박을 벗어던지고 행복을 찾아 떠난다. 당분간 가문과 마탑의 일은 렐리안에게, 아니, 두 동생에게 맡긴다.」
여기까지 읽은 렐리안이 손으로 이마를 짚었다.
쪽지를 발견하고 전달한 카시스의 마법사가 뒤편을 가리켰다.
“아가씨. 뒤에도 뭔가 적혀 있는 것 같습니다.”
「아, 맞다. 마탑의 마법사 영감들이 내 마나가 간장종지만 하다고 모욕을 주어 도저히 참을 수가 없으니, 마탑주 자리는 영영 렐리안에게 넘긴다. 적어도 너라면 이 수염 난 늙은이들에게 간장종지 따위의 소리를 듣지는 않겠지. 그 영감들이 정 번거롭게 하면 수호룡님을 던져주거라. 그러면 용님을 씹고 뜯고 맛보느라 조금 잠잠해질 테니까.」
가주 대리에다가 마탑주 자리까지…….
“이 오라버니가 나한테 똥을 던지고 도망을 쳐버려?”
그렇지 않아도 전쟁으로 피해를 본 영지들을 살피느라 정신이 없는데!
순한 얼굴에 드물게 노기를 띠며, 렐리안이 카시스의 마법사에게 물었다.
“네피르는 어디 있어?”
“네피르…… 님이요?”
되묻는 가신의 표정이 영 떨떠름하다.
‘마법사라는 것들은 자존심 하나로 먹고산다는 오라버니의 말이 틀리지 않았네.’
아무래도 사생아인 언니가 가주 대리를 맡을 수도 있다는 게 못마땅한 모양이지.
렐리안은 일부러 호칭을 바꿔 못을 박았다.
“그래. 내 언니.”
“……그, 마침 오늘 오전에 아우룸 상단이 수도로 들어왔다는 것을 들었습니다.”
“잘됐네. 데리고 와.”
“그분을요?”
렐리안은 엄할 때의 이벨리아를 흉내 내 표정을 차게 굳히고 말했다.
“문제 있어? 분명 오라버니도 두 동생에게 맡기겠다고 했는데?”
“……없습니다.”
“후작저로 돌아가서 다들 태도 똑바로 하라고 전해. 네피르는 현 가주의 동생이고, 나에겐 언니야.”
“예, 아가씨.”
쪽지를 전해주러 온 마법사는 따끔하게 질책을 당하고 기가 팍 죽어 물러났다.
후다닥 뛰어가는 마법사의 뒤꽁무니를 바라보며, 렐리안이 중얼거렸다.
“나 혼자 똥물을 뒤집어쓸 수야 없지.”
제국 제일의 상단을 만든 상단주 깜냥이면 오라버니가 돌아올 때까지 후작가도 어찌어찌 잘 운영할 거 아니겠어?
이참에 가문 재산 좀 불려주면 더 좋고.
***
보라색 좀비 하나가 자취를 감추자 난감해진 것은 루드비히 역시 마찬가지였다.
이른 오전.
고작 두 시간 눈을 붙이고 다시 집무실에 들어선 루드비히는 평소보다 훨씬 많은 서류의 양에 눈가를 찌푸렸다.
“뭐야. 오늘 서류가 왜 이렇게 많아?”
“후작 각하께서 파업하셨습니다.”
“파업은 무슨 파업. 어디 또 구석에 숨어서 돈이나 세고 있겠지. 잡아 와.”
“그게, 찾을 수가 없습니다. 작정하고 도망을 친 모양입니다.”
“……도망을 쳤다고?”
“국사(國事)뿐만 아니라 가주직과 마탑주 자리까지 전부 내던지고 사라졌다고 하니, 아마 쉽게 찾기는 어려울 듯합니다.”
그제야 상황의 심각성을 깨달은 루드비히의 낯빛이 검게 죽었다.
“……그럼 이 일은 누가 다 하고?”
에르트 백작이 들고 있던 서류를 루드비히의 책상에 쿵 내려두며 답했다.
“폐하께서 하셔야지요?”
“백작이랑 나눠서?”
“제가 이미 반을 나누고 가져온 것이 이것입니다.”
“……그 돈 귀신 수배지라도 붙여. 당장.”
***
그 시각.
루드비히 못지않게 머리에 열이 오른 이가 하나 더 있었으니, 바로 아르칸이었다.
“그래서 후작저로 가겠다고?”
“당분간은 어쩔 도리가 없지요. 가주 자리고 마탑주 자리고 다 공석이 되어버렸는걸요.”
“……그럼 나는?”
“당신은 이곳에서 공작저를 지켜야죠. 가주이신데.”
“지금 벼, 별거를 하자는 소리야?”
아르칸이 답지 않게 말을 더듬었다. 너무 황당해서 절로 입술이 떨렸다.
“오라버니가 돌아오실 때까지는요.”
“잠깐만, 렐리안. 그대는 이곳에서 마탑주 업무를 처리하고, 상단주가 후작저에서 가주 업무를 처리하면 되잖아. 응?”
“후작저에 네피르만 둘 순 없어요. 가신들 기강이 잡힐 때까진 제가 함께 있어야 해요.”
“하지만……!”
“다녀올게요, 여보.”
쪽.
렐리안은 아르칸에게 가볍게 입을 맞추고 깔끔하게 돌아서서 마차에 올랐다.
빠르게 멀어지는 마차 꽁무니를 넋 놓고 바라보던 아르칸이 중얼거렸다.
“이건 재앙이다.”
별거라니. 별거라니!
꼭 하늘이 와장창 무너지는 것과 같은 충격이었다.
아르칸은 곧바로 아르티나 기사단을 소집했다.
우르르 몰려온 미친개들이 저마다 왕왕 떠들었다.
“전쟁입니까, 주군?”
“안 그래도 몸이 근질근질했는데!”
“이번에 걸리는 것들은 다 죽었다!”
“토벌할 대상을 말씀해주시지요, 주군.”
아르칸이 싸늘한 얼굴로 명했다.
“……여우 사냥이다. 제국을 싹 뒤져. 당장.”
***
한편, 애절한 눈빛의 아르칸을 떼어내고 후작저로 돌아온 렐리안은 대문 앞에서 네피르와 딱 마주쳤다.
“…….”
“…….”
항상 그렇듯 불편한 공기가 둘을 휘감았다.
렐리안의 어색한 손이 꼼지락댔고, 네피르의 시선은 괜히 정원에 핀 꽃을 훑었다.
먼저 입을 연 것은 렐리안이었다.
“기행록. 잘 읽고 있어.”
“…….”
“신기한 게 많아서 공녀님도 아주 좋아하셔.”
“……다행이네.”
“잘 지내는 거, 맞지?”
“풍문만 들어도 알 텐데.”
“풍문은 늘 네가 이룬 것들만 귀 따갑게 나르니까.”
렐리안은 모두가 다 아는 이야기 외에 혹 다른 사정이 있는지를 묻고 있었다.
지난번보다 조금 좁혀진 그 거리감이 마냥 편하지만은 않아, 네피르가 말을 돌렸다.
“가문에 급한 일이 생겼다는 전보를 받았는데.”
“응. 이크리안 카시스가 세상의 모든 굴레와 속박을 벗어던지고 자유를 찾아 떠났어.”
“……죽었다는 뜻이야?”
“……어떻게 그렇게 해석이 돼? 죽은 건 아니고, 튀었어. 그것도 밤에 몰래.”
렐리안이 주머니에 넣고 있던 쪽지를 마력으로 더듬어 네피르에게 건넸다.
그러자 흐리게 떠오른 글씨.
네피르의 시선은 ‘두 동생에게 맡긴다.’ 부분에서 한참을 머물렀다.
이내 네피르가 쪽지를 다시 돌려주며 애써 태연하게 말했다.
“각하께 이런 면도 있는진 몰랐네.”
“이런 면이 사실 본모습이야.”
“어디로 가셨는지는 모르고?”
“전혀. 감도 안 잡혀.”
“도주에 마법을 사용하셨을 텐데…… 너 마법 잘하잖아. 못 찾아?”
“흔적에 가까이 가면 낌새가 있긴 할 텐데, 그러려면 나까지 같이 떠돌아야 해.”
“그럼 수호룡님께 도움을 청하면?”
“아까 보니까 수호룡님이 특이한 색의 보석 하나를 물고 빨고 계셨어.”
“그런데?”
“뒤늦게 생각났는데, 그 보석, 예전에 오라버니가 생일선물로 받았던 거거든.”
“……이미 매수하셨구나.”
“응. 부탁을 드려도 스승님은 아무것도 모른다며 잡아떼실 거야.”
비록 이크리안의 실종으로 말미암은 것이었지만, 둘은 아주 오랜만에 긴 대화를 나누며 후작저를 거닐었다.
“각하께서 돌아오실 때까지 네가 고생 좀 하겠네.”
“내가?”
“응. 네가.”
“아니지.”
“……?”
뭐가 아니냐는 듯 어리둥절한 표정의 네피르에게, 렐리안이 반지 하나를 냅다 쥐여주었다.
“이게 뭐…….”
“언니가 가주 대리해.”
“뭐?”
“나는 싫어.”
“나도 싫어!”
“나는 바쁘단 말이야.”
“나도 바빠! 상단 이끄는 게 어디 보통 일인 줄 알아?”
“나는 마탑의 마법사 영감들을 상대해야 해.”
“나도 고객들 관리해야 하거든?”
“고객들은 적어도 무력을 앞세워 협박하진 않잖아. 마탑의 마법사 영감들은 툭하면 개구리알을 뿌리겠다면서 시위한다고.”
“개구리알?”
“그런 게 있어. 쓸데없는 발명품.”
한 마디도 지지 않는 배다른 동생.
빤히 바라보던 네피르가 허, 숨을 내뱉으며 고개를 기울였다.
“너 나한테 똥 던지려고 불렀어?”
“똥 나눠 먹으려고 불렀어.”
“어릴 때처럼 대판 해볼래?”
“이제 언니라고 멀쩡히 걸어 나가진 못할걸?”
씨익, 씨익, 둘은 마치 어릴 적 그 어느 날로 돌아간 것처럼 서로를 노려봤다.
그때였다.
카시스의 집사가 조심스럽게 다가와 고했다.
“저, 오늘 급하게 결재를 받을 서류들이 있사온데…… 두 분 중 어느 분께 드리면 될지…….”
마침 잘 되었다는 듯, 마법사도 살짝 끼어들었다.
“저, 마탑에서 예산안 확정은 대체 언제쯤 되는 거냐고…… 오늘 내로 해주지 않으면 후작저 주변에 개구리알을 뿌려버리겠다고 합니다.”
“…….”
“…….”
렐리안과 네피르가 시선을 마주쳤다.
아무래도 지금 둘이 싸우고 있을 때가 아닌 모양이다.
누가 피 섞인 자매 아니랄까 봐, 둘은 동시에 분노했다.
“이게 다 오라버니 때문이야!”
“이게 다 후작 각하 때문이야!”
휙 돌아선 렐리안이 카시스의 마법사에게 명했다.
“가주 사냥이다. 마법사들 풀어서 제국을 싹 뒤져. 당장.”
네피르 역시 바짝 긴장하고 서 있는 행수에게 명했다.
“단원들 풀어. 후작 각하를 산 채로 잡아 오는 단원에게는 특별 포상금을 지급한다.”
“특별 포상금이요?”
“50만 리브르.”
“……허억!”
부리나케 달려나가는 행수를 바라보며 렐리안이 입술을 삐죽였다.
“돈 많아서 좋겠네.”
“필요하면 말해. 특별히 무이자로 빌려줄 테니까.”
***
그렇게 졸지에 황실 기사단, 아르티나 기사단, 카시스의 마법사들, 대상단의 상인들에게 쫓기게 된 보라색 여우 한 마리.
마법으로 모습을 숨기고 한적한 산길을 걷고 있던 이크리안이 간질거리는 귀를 후볐다.
“하핫, 누가 내 욕을 하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