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294화: 외전. 아르티나의 최고 또라이 (3)
페르세스가 손속을 두지 않고 일으킨 바람 덕분에 세드릭을 비롯한 아르티나 기사단은 예상보다 사흘 일찍 수도에 도착했다.
“우욱…….”
“다신 안 타…….”
“비, 비켜, 우웨에엑!”
물론, 하늘을 종횡무진 넘나든 결과로 미친개들의 상태 역시 예상보다 훨씬 나빴다.
땅을 짚으며 비틀거리는 기사들을 보며 세드릭이 한심하다는 듯 혀를 찼다.
“쯧쯧. 기사라는 것들이 멀미라니. 약해 빠져가지고.”
“도, 도련님은 페르세스 님이 따로 챙겨주시는 거 다 봤습니다, 우욱…….”
“지금 구역질하는 것들은 죄다 특훈이야.”
“우웁…… 아가씨 뵙고 싶어…….”
“그 꼴로 가면 이브가 진저리를 칠 거다. 형님께 보고드리고 올 테니 다들 속이나 좀 가라앉혀.”
출정을 다녀오면 마땅히 가주에게 보고해야 하는 법. 세드릭은 여동생을 보고 싶은 마음을 억누르고 곧장 아르칸의 집무실로 향했다.
- 콰앙!
“형님. 나 왔다!”
“문 여는 그 무식한 버릇 언제 고칠래.”
“이브가 고치면?”
“불과 두 시간 전에 이브도 같은 대답을 하고 갔다. 네가 고치면 고치겠다고.”
“남 탓과 미루기. 우리 남매의 특징이지.”
세드릭이 장난스럽게 어깨를 으쓱이며 부모님에게로 시선을 돌렸다.
“아버지. 어머니. 안부 여쭐 것도 없이 행복해 보이십니다.”
“일선에서 물러나니 나뭇잎 떨어지는 것만 봐도 웃음이 나는구나. 어디 다친 곳은 없고?”
“그럼요. 고작 산적 나부랭이나 때려잡고 왔는걸요.”
세드릭이 씩 웃으며 탁자에 앉았다. 엘리시아가 따뜻한 차를 따라 건넸다.
“고작 산적 나부랭이라기엔 내 고향에서 제법 대견한 일을 했다던데.”
그렇지 않아도 운을 띄우려 했던 주제가 어머니의 입에서 먼저 나왔다.
머뭇거리며 세드릭이 말을 이었다.
“조금 갑작스럽긴 하지만, 그것과 관련해서 세 분께 드리고 싶은 청이 있습니다.”
“말해 보거라.”
항상 유쾌함으로 본심을 가리던 눈이 진중함을 담고 반짝였다.
“제가 베르타샨을 지킬 수 있도록 해주십시오.”
***
생각할 시간을 주려는 듯 세드릭이 기사들 훈련 핑계를 대고 나가자, 응접실에는 잠시 적막이 감돌았다.
아르칸이 식은 찻잔을 들어올리며 웃었다.
“두 분 말씀이 맞았군요. 세드릭이 베르타샨 백작위를 청할 것을 어떻게 아셨습니까?”
“제 동생들을 끔찍하게 아끼는 아이니까. 그곳에서 어릴 적의 이브와 엔리르 같은 아이들이 어떻게 살아가는지 보고 나면 발걸음이 무겁겠다 싶었지.”
“그렇다면 세드릭의 청에 왜 놀라는 척을 하셨습니까?”
“애 김빠지게 할 이유는 없으니까.”
시선 마주치며 웃은 휴고와 엘리시아가 자리에서 일어섰다.
“어디 가세요?”
“자식이 새로운 세계를 걷겠다 결심했잖니.”
“그렇다면 길을 닦아주는 것이 부모의 역할이지.”
“……꼭 이날만을 기다리셨던 분들 같습니다?”
“몹시.”
“고대했지.”
확고한 목표를 세운 듯 단단했던 아들의 눈과 음성을 떠올리며, 휴고가 드물게 소리 내어 웃었다.
어느덧 누군가에게 너른 그늘을 만들어 줄 수 있는 나무로 자란 그의 아이들은, 아직도 부단히 가지를 넓혀나가고 있었다.
자식의 성장. 부모에겐 더할 나위 없는 기쁨이었다.
***
베르타샨을 아르티나 공작령에서 분리하고 다시금 백작령으로 독립시키는 것.
이제는 일선에서 물러난 선대 공작부부가 난데없이 황궁으로 쳐들어와 던진 안건은 일사천리로 진행됐다.
최근 지오스 왕국의 흉적들이 수시로 국경을 넘나든다는 보고 때문에 골머리를 앓던 루드비히가 강력히 추진한 결과였다.
그로부터 이 주 뒤.
베르타샨 영주성 앞에는 황제의 인장이 찍힌 방 하나가 내걸렸다.
「곧 새로운 영주가 부임하니 맞이에 부족함이 없도록 하라.」
옹기종기 모여 방을 올려다보던 코흘리개들이 말했다.
“로저 형아. 새로운 영주님이 그 형님, 아니, 그분이실까?”
소년이 어린아이의 까까머리를 쓰다듬으며 답했다.
“그랬으면 좋겠다.”
“그러면 우리 기사로 받아달라고 할 거지?”
“당연하지.”
“그런데 혹시 우리가 기사가 되면 우리 머리도 그렇게 빡빡빡 때리시면 어쩌지?”
“그럴 리 없어. 봤잖아, 얼마나 다정한 분인지.”
세드릭의 진가를 모르는 아이들의 얼굴에 순박한 미소가 떠올랐다.
자신들의 앞을 태산처럼 가로막았던 든든한 등이 떠오른 터다.
“로저 형아, 우리 마저 수련하러 가자.”
“좋아! 언덕 위 나무까지 달리기 시합이다! 가장 늦게 도착하는 사람은 새로운 영주님께 가장 늦게 인사 올리기야!”
- 와아아아!
소리지르며 산천을 내달리는 아이들의 손에는 저마다 엉성하게 깎은 목검이 들려 있었다.
***
비슷한 시각, 이곳, 정령계.
페르세스는 연인이 청첩장 위에 세심하게 붙여준 꽃송이를 쓰다듬으며 다소 초조하게 누군가를 기다리고 있었다.
이내 눈앞에 불벼락이 내리꽂히고 물안개가 가득 차더니, 땅이 불쑥 솟아올라 제각기 신형을 빚어냈다.
이프리트가 짝다리를 짚고 불덩어리를 질겅질겅 씹으며 물었다.
“왜 불렀냐, 마녀야!”
“왜 이렇게 삐딱해?”
“네 연인한테 사정없이 밟힌 등짝이 아직도 욱신거리거든?”
“깃털 같은 내 연인에게 밟혔다고 욱신거릴 정도면 나가 뒈져야지. 너 아무래도 소멸할 때가 된 모양이다. 유감이야.”
“이게 지 연인 닮아서 조동아리가 날이 갈수록 사악해지네? 확 그냥!”
한결같은 투닥거림을 한심한 표정으로 바라보던 트로이가 둘 사이에 끼어들었다.
“자. 자. 그만. 이런 쓸데없는 입씨름이나 하자고 부른 건 아닐 거잖아?”
입술을 삐죽이던 페르세스가 등 뒤에 숨겨두었던 빳빳한 봉투 세 개를 투척하듯 내던졌다.
“이거 주려고 불렀어.”
잽싸게 낚아챈 트로이의 입가에 진한 미소가 그려졌다.
“이럴 줄 알았어.”
엘라임 역시 고개를 끄덕였다.
“슬슬 주겠거니 싶었지.”
반면 전혀 눈치채지 못한 이프리트는 상당히 언짢은 표정으로 꽃 달린 봉투를 내려다봤다.
“옳거니, 도전장이로구나! 정령계를 일통하겠다는 뜻이렷다?”
“…….”
“드디어 본색을 드러내네! 덤벼라, 마녀! 불과 바람 중 누가 더 강한지 겨뤄보자!”
“멍청아. 청첩장이다.”
“……?”
“나 혼인한다고.”
“……!”
이프리트가 넋 나간 표정으로 페르세스와 청첩장을 번갈아 바라봤다.
그렇게 여러 번. 입을 달싹이던 불의 왕이 빼액 소리를 질렀다.
“뭐어어어어? 누구랑! 아니, 누구긴 누구야, 내 계약자겠지! 아이고, 내 계약자가 기어코 마녀랑 혼인을 해버리네! 아이고, 내 계약자의 명복 좀 함께 빌어주실 부운-!”
“……죽일까, 진짜.”
페르세스가 크게 한숨을 내쉬었다. 이놈에게 말려들다간 끝이 없다. 정신 차리자.
“아직 내 말 안 끝났으니까 좀 들어. 우리, 혼약식은 작게 하기로 했어.”
주저앉아 발을 동동 구르는 이프리트를 무시한 채, 트로이가 물었다.
“왜? 세드릭 아르티나 정도면 인간계에서 가장 화려한 혼약식을 할 수도 있을 텐데.”
“내가 원했거든. 정말 소중한 존재들만 초대해서 혼약식을 하고 싶다고.”
페르세스가 잠시 망설이다가 시선을 사선으로 피한 채 말을 이었다.
“너희들은 와주면 좋겠어. 와서…… 가족들이 앉는 자리에 앉아주면 좋겠어.”
“…….”
“…….”
지나치게 고요해진 분위기에 민망해진 페르세스가 발을 뺐다.
“무, 물론 너희가 정 불편하다면 거절해도…….”
“흐어어엉!”
“……?”
“너, 이 마음 따뜻한 자식! 찔러도 피 한 방울 안 나올 것처럼 생긴 주제에 심장은 아주 말캉말캉한 자식!”
“우, 우냐, 추프리트?”
“끄흡, 그래, 그래, 우리가 가족이지! 이 오라비한테 안겨라, 페르세스!”
청첩장으로 가린 입매에 부드러운 미소를 띠고 있던 트로이가 한 마디 얹었다.
“굳이 서열을 따지자면 이프리트가 우리 중엔 막내라고 봐야지. 더 따지자면 내가 너희 셋 모두를 키웠다고 봐도 과언이 아니니 첫째고.”
“저놈 둘은 몰라도 나는 아니다, 트로이.”
“엘라임도 마찬가지야. 견습신 시절에 내가 네 과제를 얼마나 도와줬는지 잊었어?”
“태어난 순서로 따지자면 내가 먼저다. 그러니 내가 페르세스 녀석과 가장 가까운 자리에 앉는 것이 합당하지.”
“너 꼰대야? 요즘 누가 태어난 순서를 따져?”
“히끅, 온도가 뜨거운 순으로 앉자!”
자신과 가장 가까운 자리에, 그러니까, 인간으로 치자면 부모님이 앉는 자리를 차지하겠다고 티격태격하는…… 가족들.
이벨리아와 세드릭으로 인해 가족의 의미를 알게 된 페르세스의 눈에 옅게 눈물이 고였다.
“……바보들. 진짜.”
왕의 감정을 그대로 담아내는 바람에는 그 어느 때보다도 달콤한 향내가 흘렀다.
***
둘의 혼약식은 공작저에서 행해졌다.
소문 무성한 행사의 끝자락이라도 보기 위해 많은 이들이 공작저 주변을 맴돌았지만, 출입이 허가된 이는 사전에 세드릭과 페르세스의 청첩장을 받은 극소수뿐이었다.
레드카펫의 처음부터 끝까지 서로 손을 붙잡고 걸은 그들은 화촉 앞에서 서로 눈을 마주치며 이 계절처럼 따스하게 웃었다.
세드릭이 페르세스의 약지에 반지를 끼워주며 속삭였다.
“그대는 지금처럼 바람으로 살아. 나는 네가 내게서 자유를 찾도록 일생 끝까지 그대를 위해 살아갈 테니까.”
일평생 해로하자 서로 얽매는 혼약식에서까지 오롯이 페르세스를 존중하는 언사. 그에 바람은 답했다.
“이브 덕분에 우리의 죄가 사해졌다고 말한 적 있었지. 그게 무슨 뜻인 줄 알아?”
“……?”
“나 역시 너와 함께 시간을 걸을 수 있다는 뜻이야. 발맞추어서.”
“……!”
“그러니 너는 가없이 나를 얽어매도 돼. 나는 일생 끝까지 네 곁에 머물다가 너와 함께 한 줄기 바람이 될 테니까.”
세드릭이 울컥 치받는 눈물을 눌러 삼켰다.
나의 유한함이 너의 무한함에 짙은 상처를 낼까, 그것이 가장 걱정이었는데……
저기서 눈 똥그랗게 뜨고 손을 모으고 있는 동생 덕분에 모두 해결된 모양이다.
연인의 시선을 따라간 페르세스가 웃었다.
“참 복덩이야. 그렇지?”
“태어날 때부터 지금까지, 단 한순간도 빠짐없이.”
세드릭이 환히 웃으며 페르세스의 입술에 화인을 남겼다.
하얗게 핀 수국 사이에서 다정히 숨을 나누는 둘을 보며, 이벨리아가 얼굴을 붉히고 중얼거렸다.
“……예쁘다.”
바람에 날리는 머리칼을 쓸어 넘겨주며 아가레스가 넌지시 물었다.
“조촐한 혼약식이 취향이야?”
“무슨 소리. 난 제국이 떠들썩하게 할 거야!”
바라던 바다. 악마가 입매를 올렸다.
“엇, 언니가 부케 던진다!”
“담장 밖으로 내던지는군. 누가 못 잡게 하려는 의도가 명확히 보여.”
“이럴 줄 알고 내가 미리 비장의 무기를 준비해뒀지!”
“……?”
이벨리아는 혼약식의 초반부터 사자의 모습으로 곁에 웅크려 있던 마르바스의 등 위로 냉큼 올라탔다.
“잔디! 뛰어! 저거 잡아야 해!”
“뛰긴 뛰는데, 저게 뭔데?”
“부케! 잡으면 혼사가 잘 풀린대!”
“꽉 잡아라. 기필코 태워다 주마!”
저걸 못 잡으면 오늘 저녁 주군의 식탁에 사자 고기가 올라가게 생겼다. 바로 나. 마르바스가 크게 도약했다.
“이브가 부케를 잡으러 간다!”
“안 돼!”
“페르세스, 더 멀리 날려!”
조금 더 세차게 부는 바람. 아랑곳하지 않은 마르바스가 아르티나의 높은 담장을 훌쩍 넘어갔다.
동시에 밖에서 뭔가 쿠당탕하는 소리가 들린다.
뭐야. 잡은 건가? 놓친 건가?
모두가 침을 꿀꺽 삼키던 찰나.
담장 위로 하얀 손과 그에 야무지게 잡힌 부케가 쏘옥 올라왔다.
“히히, 잡았지롱!”
***
혼약식 이후 불과 이레 뒤.
세드릭은 황제로부터 명 받은 대로 베르타샨으로 향했다.
“도련님. 꼭 이렇게 야밤에 가시는 이유가 있습니까?”
“누가 보면 도적인 줄 알겠습니다.”
“……부담스럽다.”
“뭐가 부담스럽습니까? 설마 다들 도련님을 막 환대하고 그럴까 봐서요?”
“…….”
“에이, 무슨 그런 걱정을 다 하십니까? 영지민들은 저 구름 위에 앉은 영주가 신선인지 혹부리 영감인지 관심도 없습니다!”
“걱정 푹 놓으시고 그냥 영주성까지 쭈욱 걸어가시면 됩니다. 아마 항구엔 책임자 외엔 아무도 없을…… 응?”
재잘재잘 떠들던 아르티나 기사단이 항구 쪽에서 언뜻 피어오르는 불빛에 고개를 기울였다.
“아무도 없을 건데? 지금 새벽인데?”
“불빛이 왜 저렇게 많아?”
당혹감을 가득 실은 배가 서서히 항구 쪽으로 다가가 정박하자, 익숙한 목소리가 외쳤다.
“봐! 형아가 새로 오시는 영주님일 거랬지! 내가 맞지!”
“진짜네! 형아다!”
“너희 이제 형아라고 부르면 안 돼! 영주님이라고 해야지!”
어른들뿐만 아니라 아이들까지도 눈을 말똥말똥 뜨고 서 있다. 어이가 없어 세드릭이 읊조렸다.
“내가 이 야밤에 올 줄 어떻게 알고…….”
“파란 독수리가 편지를 전해줬어요! 형아가, 아니, 영주님이 밤에 몰래 올 거라고!”
파란 독수리…….
“이브의 실라페.”
세드릭이 몰랐냐는 듯 페르세스를 돌아봤다.
휘하 정령들의 소식을 모두 꿰고 있는 페르세스는 그저 의뭉스럽게 웃으며 어깨를 으쓱였다.
주변에 몰려든 영지민 중 가장 나이 많은 이가 고개를 숙였다.
“잘 오셨습니다, 영주님.”
그러자 뒤에 서 있던 이들이 싱글벙글 웃으며 저마다 외쳤다.
“앞으로 잘 부탁드립니다, 영주님!”
“지오스의 흉신악살놈들 이젠 국경을 넘어올 엄두도 못 낼 거다!”
“영주님, 혹시 시장하진 않으십니까?”
“약소하게나마 식사와 약주를 좀 준비해 보았는데…….”
조금 전 기사들이 말한 것처럼, 보통 영지민들은 영주에게 먼저 다가오지 않는다.
다소 독특한 이 광경은 세드릭이 얼마 전 직접 아이들을 구해준 것 덕분이었다.
그리고 이는 세드릭이 바라는 이상적인 영지이기도 했다. 속한 이들 모두가 내 날개 아래에서 안온함을 느끼는 땅.
하여 세드릭과 페르세스는 커다란 나무 아래 있는 투박한 탁자에 스스럼없이 자리를 잡고 앉았다.
그렇게 나이 지긋한 이들로부터 영지의 현 상황에 대해 들으며 술잔을 기울이던 중.
한 소년이 흘끗 눈치를 보며 주변을 뱅뱅 맴돌았다.
도무지 무시할 수가 없게 간절한 눈빛을 쏘아대는 바람에, 세드릭이 픽 웃으며 말을 건넸다.
“네 이름이…… 로저였던가?”
“네! 로저입니다!”
“내게 할 말이 있는 모양인데.”
그러자 눈을 빛낸 소년이 나무로 만든 검을 바닥에 푹 내리꽂고 세드릭 앞에 무릎을 꿇었다.
제대로 꽂히지 않은 검이 옆으로 스르르 넘어가자 황급히 손으로 잡으며, 소년이 우렁차게 외쳤다.
“영주님의 기사가 되고 싶습니다!”
“기사?”
세드릭이 소년의 몸을 훑었다. 어린 나이치고는 제법 무골(武骨)이다.
깎은 지 얼마 되지 않았을 엉성한 목검은 벌써 이가 다 나가 있었다. 그만큼 열심히 휘둘렀다는 뜻일 터.
영지가 안정될 때까지 당분간은 아르티나 기사단을 빌려 쓴다고 해도, 언젠가는 베르타샨만의 독자적인 기사단을 구축할 필요가 있긴 하다.
세드릭이 씩 웃으며 소년의 머리칼을 헝클어뜨렸다.
“좋다, 로저. 네가 내 첫 기사다.”
“……!”
“좋아할 것 없어. 갈 길이 멀 테니까.”
“열심히 따르겠습니다!”
“너와 나의 목표는 하나다.”
“무엇입니까?”
“지금 내 옆에 있는 아르티나 기사단. 이놈들을 뛰어넘을 기사단을 만드는 것.”
“정진하겠습니다!”
“그러기 위해서는 실력 말고 하나가 더 필요해.”
“……?”
“맛이 좀 가야 돼. 이놈들이 괜히 미친개 기사단이라고 불리는 게 아니거든.”
제국 전역에 소문 자자한 아르티나 기사단을 크게 동경하는 아이가 고개를 끄덕였다.
“네! 맛이 가겠습니다! 영주님께서 단주의 머리를 빡빡빡 내리치셨던 그 광경을 잘 기억하겠습니다!”
“……은근히 멕이는 것이, 꼭 헤롤드 경을 보는 것 같네.”
세드릭이 자신의 검 중 하나를 풀어 소년에게 건네주었다.
소년은 경건히 무릎 꿇고 두 손으로 검을 받아 가슴에 품었다.
십수 년 뒤.
아르티나 기사단과 쌍벽을 이루며 대륙을 종횡무진할 베르타샨 기사단이 창설되는 순간이었다.
***
세드릭을 환영하는 자리는 밤늦도록 계속되었다.
아이들이 나무에 기대 잠들고 영지민들 역시 하나둘씩 코를 골아댈 무렵.
세드릭이 심취한 듯 생선구이를 뜯고 있는 페르세스의 손을 쥐었다.
“페르세스. 더 먹을 거야?”
“다 먹었어!”
“그럼 들어갈까?”
“그러자!”
세드릭은 입가를 닦으며 해사하게 끄덕이는 연인을 빤히 바라봤다. 평소와 다른 시선에 페르세스가 고개를 기울였다.
“왜?”
세드릭이 몸을 기울여 연인을 뒤에서 껴안고 속삭였다.
“노력. 오늘부터 할까 하는데.”
“…….”
“물론 네가 허락한다면.”
“……얼른 들어가자.”
반쯤 지나버린 밤이 아쉽다는 듯 손을 꼭 부여잡은 연인의 뒤를, 바야흐로 비극에서 벗어난 베르타샨의 달빛이 조용히 따라 걸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