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293화 외전. 아르티나의 최고 또라이 (2)
친구들을 지키려는 듯 가장 앞에서 눈을 부릅뜨고 있던 사내아이가 세드릭을 바라보며 멍하니 읊조렸다.
“황금색…… 아르티나……?”
작은 목소리에 확신 없는 의문형이었지만 반향은 컸다.
조금 전 배를 얻어맞았던 아이가 엉금엉금 바닥을 짚고 세드릭의 옷자락을 쥐었다.
“……아르티나야?”
“그래.”
“바다 건너서 우리 구하러 온 거야……?”
“응.”
아이의 얼굴이 왈칵 일그러졌다.
이 제국에선 세 살배기 어린아이도 아르티나를 안다.
아주 무서운 호랑이도, 삿된 악마도, 아르티나의 핏줄 앞에서는 죄다 꼬랑지 말고 도망친다는 이야기를 부모들로부터 수도 없이 들었으니까.
수십의 장정 사이 구원자는 단둘이었지만, 아이들의 얼굴엔 의심할 여지 없는 희망이 들어찼다.
이들에게 아르티나란 그런 의미였다.
“형아…… 아니, 공자님…… 집에 가고 싶어요…… 히끅, 엄마 보고 싶어…….”
세드릭이 아이의 보드라운 볼을 조심스럽게 쓸었다.
“형아라고 불러.”
“……형아.”
“그래. 형아가 데려다줄게. 금방.”
예의 여유로운 웃음을 지은 세드릭이 일어섰다.
베르타샨의 아이들은 앞을 태산처럼 가로막은 든든한 등을 올려다봤다.
“악당 여러분. 들었지? 배 돌려.”
당당한 요구에 단주가 헛웃음을 치며 일갈했다.
“누구 마음대로!”
“아가들 마음대로.”
“머리에 피도 안 마른 것들이……!”
“머리에 피 마르면 뒈져.”
“호패에 잉크도 안 마른 것들이……!”
“잉크는 한 식경이면 마르지.”
“입만 살았구나!”
“입 말고도 살아 있는 거 안 보여?”
“……이놈을 쳐라!”
나름 한 단의 단주이니만큼 호기롭게 외쳤건만, 벼락처럼 달려가야 할 부하들이 서로 눈치만 보며 머뭇거리고 있다.
정신 차리라는 듯 단주가 발을 굴렀다.
“사자도 떼를 지어야 비로소 초원의 왕이 되는 법! 아무리 아르티나라도 고작 혼자서 우리 전부를 상대할 수 있을 성싶으냐! 이래도 물러서는 것들은 내 친히 목을 베어주마!”
그 말에 단원들이 검을 고쳐 쥐었다. 배 전체가 마치 고슴도치라도 된 것처럼 뾰족한 날붙이로 가득찬다.
태평하게 바라보던 세드릭이 천천히 입을 열었다. 그리고, 지금껏 수도 없는 무뢰배들을 무참히 퇴치했던 질문을 뱉었다.
“세상이 참 말세야. 그치?”
“죽여라!”
“대답도 안 하는 놈은 또 처음일세. 신선한걸.”
“죽여서 고기밥을 만들란 말이다!”
“나 지금 누구랑 대화하니?”
세드릭이 특유의 세검(細劍)을 들어 올렸다.
“웃통 벗은 저 변태도 함께 죽여 빠트려라!”
“푸핫-!”
“……뒈졌다, 너희는.”
시원한 웃음을 터뜨리는 세드릭의 곁에서 이프리트가 불길을 피워올렸다.
“부, 불이다!”
“마법사다!”
“변태가 마법사였다!”
아르티나의 둘째 공자가 불의 정령왕과 계약을 맺었다는 사실이 이 오지까지 널리 알려지지는 않은 모양이었다.
덕분에 살면서 들을 변태 소리를 다 듣고 눈이 뒤집혀버린 이프리트가 단주를 제외한 단원들에게 신나게 불덩어리를 날려댔다.
삽시간에 정리된 선상. 세드릭은 다리를 덜덜 떨고 있는 단주에게 다가갔다.
“이제 너만 남았네?”
“……괴, 괴물…….”
“어디를 때릴지 미리 말해줄 테니까 잘 피해 봐.”
“……뭐?”
“간다?”
세드릭이 마치 꿀을 노리는 벌처럼 쇄도했다.
“머리. 머리. 머리. 머리. 머리. 머리. 머리.”
“으악! 아악! 악! 악! 컥! 왜 머리만……!”
“나쁜 생각만 가득한 머리는 깨져도 싸다. 머리. 머리. 머리.”
단주의 머리를 부술 것처럼 내리치며, 세드릭이 아이들을 향해 싱긋 웃음을 지었다.
자. 어때, 얘들아? 너희들 눈에 눈물 나게 한 값을 톡톡히 받아주마.
그러자 조금 전까지만 해도 아르티나가 나타났다는 사실에 감격의 눈물을 글썽이던 아이들이 벽에 딱 붙어 서로 부둥켜안았다.
“나 머리를 저렇게 찰지게 때리는 사람은 처음 봐…….”
“빡빡빡 소리가 나.”
“수박이 깨지기 전에 저런 소리가 나는데…….”
***
아동을 대상으로 한 인신매매범은 제국법상 즉결처형이 가능하다.
그러나 아이들에게 좋지 않은 광경을 보여주고 싶지는 않았기에, 세드릭은 이들 모두를 밧줄로 칭칭 묶은 다음 배를 몰게 했다.
“베르타샨 치안대에 넘겨야겠군.”
“어린 인간들은 어쩌고?”
“조용히 데려다 놓고 바로 뜰 거야.”
굳이 신원을 밝혀 시끄럽게 만들 필요는 없다.
잘나도 너무 잘난 형과 동생의 그림자에 늘 가려 지냈던 세드릭은 자신의 공을 드러내는 것에 익숙하지 않았다.
“항구에 닿자마자 잽싸게…… 응?”
채 말을 마치지 못하고, 세드릭이 눈을 크게 떴다.
“……항구가…….”
항구에는 베르타샨의 모든 영지민이 모였다고 해도 과언이 아닐 정도로 수많은 인파가 몰려 있었다.
잠깐. 이러면 조용히 왔다 가겠다는 계획이 틀어지는데?
설상가상으로 누군가 배를 가리키며 크게 소리쳤다.
“아이들이다! 아이들이 타고 있다!”
“뱃머리에 공자님이야!”
“공자님께서 아이들을 구해오셨어!”
제각기 보태는 말로 술렁이던 항구에서 우레같은 함성이 터져 나왔다.
- 와아아아아!
산적과 인신매매단 앞에서도 흐트러짐 없었던 세드릭이 표정이 살짝 달아올랐다.
“……이런 거 어색한데.”
환대나 환호성은 형님과 이브나 익숙하지.
쭈뼛쭈뼛 항구에 내려 아이들을 인계한 세드릭은 애써 차분하게 돌아서며 기사들에게 명했다.
“수도로 돌아간다.”
도망이라도 치는 것처럼 다시 배에 오르려던 그때.
미약한 힘이 옷자락을 잡아당겼다.
내려다보니 어릴 적의 이브를 떠올리게 하는 맑은 눈의 여자아이 하나가 입술을 달싹이고 있다.
“감사합니다, 오라버니.”
동시에 누군가 손가락 하나를 쥐어오는 것도 느껴진다.
“조금만 더 있다가 가면 안 돼요……?”
배에서 엄마를 찾으며 울던 사내아이가 머뭇거리다가 말을 이었다.
“……형아.”
“…….”
세드릭은 자신도 모르게 고개를 끄덕였다.
두 동생을 끔찍이도 아끼는 그에게, 오라버니와 형아라는 호칭은 차마 냉랭하게 뿌리치고 돌아설 수가 없는 것이었다.
***
그리고 불과 30분 뒤. 세드릭은 후회했다.
‘그냥 돌아갔어야 했어…….’
아이들은 마치 세드릭이 자신들의 수호천사라도 되는 것처럼 곁에 딱 달라붙어 있었다.
심지어 개중 어떤 아이들은 세드릭이 인신매매단을 물리쳤던 것을 생생하게 보여주겠다며 막대기를 들고 머리! 머리! 외치고 있었고.
‘내가 지금 죽는다면 사인은 분명 수치사…….’
첩첩산중으로, 부모들은 세드릭 앞에서 몇 번이고 절을 해댔다.
이러지 말라고 말렸으나 도무지 듣지를 않아 세드릭은 반쯤 체념한 상태로 한숨을 내쉬었다.
‘형님이었으면 의젓하게 이들을 다독였을 텐데. 이브였으면 가장 높은 돌 위에 올라가서 칭송 좀 더 해보라며 부추겼을 테고.’
도무지 형제들처럼 할 수가 없는 세드릭은 민망함에 시선을 주변으로 돌렸다.
둘러보니 건물도 의복도 확실히 수도와는 비교할 수 없을 정도로 허름하다.
‘베르타샨 백작가가 영주로 있을 때만 해도 손에 꼽을 정도로 부유한 영지였다고 들었는데.’
아르티나가 베르타샨을 대책 없이 방치한 것은 아니었다.
외려 엘리시아의 가문이 터를 잡았던 곳이니만큼 신경을 더 썼으면 썼지.
그래도 지재(至材)로 이름 높았던 영주가 떡하니 버티고 있던 시절과는 차이가 발생하지 않을 수가 없었다.
세드릭이 씁쓸하게 주변을 살피는 와중. 영지민들이 바치는 공물은 점점 늘어갔다.
신선한 야채, 갓 따온 과일, 방금 구운 빵.
높으신 공자님께서 드시기에는 다소 초라한 것들이라 바치고도 눈치를 보는 이들 앞에서, 세드릭은 보란 듯이 그것들을 모두 베어 물었다.
“맛있네.”
고작 그 말이 뭐라고 또 인사를 올리는 사람들을 보며 세드릭의 눈이 어두워졌다.
이들의 마음을 알 것 같아서였다.
그저 감사해서가 아니었다. 앞으로도 부디 잘 살펴달라는, 차마 말로는 할 수 없어 이렇게라도 표현하는 마음이었다.
“……좋은 대접 받고 간다.”
세드릭이 일어섰다.
그러자 배에서 매와 같은 눈으로 친구들 앞을 가로막고 있던 사내아이가 황급히 옷자락을 쥐었다.
“형아.”
“로저! 공자님께 그게 무슨 말버릇이냐!”
“내가 허락했다. 그냥 둬.”
잠시 어른들의 눈치를 보던 꼬마가 말을 이었다.
“아주 옛날에 이곳을 다스렸던 백작님은 굉장히 강하고 훌륭한 분이었대요.”
“…….”
“그런데 지금은 백작님이 안 계셔서 가끔 도적들이 날뛰기도 하고, 이번처럼 지오스 왕국에서 못된 놈들이 넘어오기도 해요.”
“…….”
“형아처럼 강해지려면 어떻게 해야 해요?”
“……왜 강해지고 싶지?”
“백작님은 돌아오지 않으시겠지만, 누군가는 그때처럼 이곳을 지켜야 하니까요.”
세드릭은 어린아이의 결기 서린 눈을 가만히 내려다봤다. 꼭 무언가를 읽어내려는 것처럼.
제법 오랜 시간이 지난 뒤. 답은 간결했다.
“체력이나 키워둬.”
“……그게 다예요?”
“나머지는 내가 와서 가르쳐줄 테니까.”
“……!”
그 말을 끝으로 세드릭은 항구를 향해 걸음을 옮겼다.
무엇에도 얽매이지 않고 풍류 공자의 삶을 즐긴다던 아르티나의 천덕꾸러기 둘째.
그 명성이 참으로 헛되게도, 무언가 진득하게 달라붙은 것처럼 발이 무거웠다.
***
베르타샨에서 수도까지는 육로보단 수로가 빠르다.
인신매매단으로부터 강탈한 배에 기사들과 함께 올라탄 세드릭이 명했다.
“복귀하자.”
그런데 기사들이 모두 멀뚱멀뚱 세드릭을 바라보고만 있다.
“뭣들 해?”
“……도련님. 배 몰 줄 아십니까?”
“내가 몰 줄 아는 거라곤 말밖에 없는데.”
잠시 정적이 흘렀다.
“……설마 너희 아무도 배 몰 줄 몰라?”
아니 여기 지금 사람이 몇인데!
잔뜩 질책하는 표정에 기사들이 억울하다는 듯 항변했다.
“저희는 말 타고 싸우는 기사입니다!”
“배를 몰려면 조타수와 항해사가 있어야지요!”
“……또 엉덩이 배기면서 말을 타고 가야 하는 건가.”
세드릭이 망연자실한 한숨을 뱉던 찰나.
이미 배에서 가장 풍광 좋은 곳에 떡하니 자리 잡고 앉아 다리를 까딱까딱 흔들던 이프리트가 말했다.
“야. 뭐가 걱정이냐?”
“왜. 네가 바닷속으로 들어가서 배 밀고 가게?”
“무슨 그런 야만적인 소릴. 네 연인 부르면 되잖아.”
“……?”
“배가 나아가는 데는 파도와 바람 둘 중 하나만 있으면 족하지. 페르세스 불러서 바람 좀 일으키라고 해. 아마 하루면 수도에 닿을걸?”
좋은 대안이다.
늘 그렇듯, 세드릭은 지나는 바람에 조심스럽게 연인의 이름을 흘렸다.
그러자 남실바람과 함께 은빛 실타래가 시야를 가득 메운다.
세드릭의 품에 와락 안긴 페르세스가 웅얼거렸다.
“불렀어? 보고 싶었어!”
몹시 언짢은 표정으로 바라보던 이프리트가 기가 찬다는 듯 말투를 흉내 냈다.
“불러떠? 보고디퍼쪄!”
“…….”
슬쩍 눈썹을 올린 페르세스가 손을 휘저었다. 동시에 난데없는 강풍이 이프리트를 싣고 망망대해 위로 솟아올라 뚝 떨어뜨렸다.
“어푸푸-! 야! 너희 쌍으로 내가 불의 정령왕인 걸 깜빡하나 본데, 날 이렇게 물에 막 담갔다가 내가 죽기라도 하면 어떡할 거야!”
“경사네.”
“잔치를 벌여야지.”
“……망할 것들.”
둘은 종족을 뛰어넘는 강고한 사랑을 하고 있었지만, 이프리트가 보기엔 그저 닭털 날리는 한 쌍의 꼴불견에 불과했다.
“근데 웬 배야?”
“아. 수도로 돌아가야 하는데 배를 몰 수 있는 사람이 없어서. 도움 좀 받을 수 있을까?”
“그러면 내가 선장인 건가?”
“응. 네가 선장이야.”
“나 이런 거 꼭 해보고 싶었어!”
늘 인간의 역동적인 삶을 동경하던 얼굴이 붉게 상기됐다.
페르세스는 갑판 위에 척척 올라간 다음, 바람으로 검 하나를 빚어 하늘을 향해 높이 치켜들었다.
“무지몽매한 선원들아!”
“……?”
“보이는 무엇이든 꽉 붙들어라!”
“……잠깐. 뭔가 불길한…….”
“출항이다!”
호방한 구령과 동시에, 배가 말 그대로 돛을 찢어버릴 것만 같은 속도로 전진하기 시작했다.
“으아아아악!”
“배가 미쳐 날뛴다-!”
“하, 하늘로 점점 떠오르는 것 같은 건 내 기분 탓이야?”
누군가의 외침처럼, 거대한 배는 신나게 앞으로 달리다 못해 떠오르고 있었다.
점점 더. 점점 더.
그러자 저 아래, 바다를 누비던 다른 범선들에서 경악성이 들린다.
어느새 까마득해진 아래를 내려다보며 세드릭이 웃었다.
“……하하. 페르세스. 아주 화끈하네.”
“하늘을 나는 배! 예전에 우리 병아리랑 얘기한 적 있지!”
“……원흉이 거기였구나.”
그렇게 페르세스가 임시 선장을 맡은 범선은 창공을 떠돈다는 전설 속 어느 배처럼 구름 위를 타고 넘으며 수도로 향했다.
***
바람의 왕이 직접 하늘로 진수한 배의 항해를 방해할 수 있는 것은 없다.
하여 페르세스는 편안히 갑판에 앉아 생각에 잠긴 연인의 곁에 털썩 주저앉았다.
“고민 있어?”
“그래 보여?”
“응. 무지.”
제멋대로지만 눈치 빠르고 상냥한 바람의 왕은 금방 원인을 찾아냈다.
“두고 온 게 걸리는 표정인데.”
“…….”
세드릭이 한숨과 함께 페르세스의 어깨에 머리를 기댔다. 그러자 다정한 연인이 금빛 머리칼을 쓸어내렸다.
“우리 영지 중에 부르고뉴(Bourgone)라는 곳이 있어.”
“응.”
“악마를 토벌하러 갔다가 죄도 없이 학살당한 영지민들의 시체를 마주했을 때, 내가 가장 먼저 했던 생각이 뭔 줄 알아?”
“뭐였는데?”
“혐오스럽다.”
“……!”
“이런 일이 벌어지고 있는 줄도 모르고. 형님의 그늘에 숨어서. 동생의 명성에 숨어서. 밥을 목구멍으로 처넣고 있던 내가 혐오스럽다.”
“세드릭…….”
“형보다 못하다는 것을 받아들이지 못해서, 동생보다 부족하다는 걸 인정하기 힘들어서, 항상 욕심 없는 척 나태를 여유로 포장했던 내가 역겹다.”
세드릭이 조소했다.
“그래서였어. 인마전쟁이 끝난 뒤 이렇게 제국을 휘젓고 다니는 건. 속죄할 대상은 이미 죽었는데도 나 홀로 마음 편하려고 하는 속죄.”
날 때부터 왕이었던 페르세스는 연인이 진 무게를 다 이해하진 못했다.
그래도 하나는 알 수 있었다.
연인이 지금, 커다란 걸음 하나를 내디디려 한다는 것을.
하여 페르세스는 가만히 귀를 기울였다.
“……나. 베르타샨의 영주가 되고 싶어.”
“…….”
“내 조부님이 다스리셨을 때처럼, 그 땅을 풍요롭고 안전한 곳으로 만들고 싶어.”
그곳엔 어릴 적의 이브를 닮은 아이가 있었고, 어릴 적의 나처럼 숨을 곳을 찾는 아이도 있었고, 어릴 적의 형님처럼 소중한 이들을 지키려는 아이도 있었고, 과거의 용처럼 조심스럽게 형아라고 부르는 아이도 있었어.
“누군가는 지켜줘야지.”
우리 남매에게 부모님이 울타리가 되어주셨던 것처럼.
이젠 내가 누군가의 방패가 되어줘야지.
오래도록 갇혀 있던 알을 깨고 나오려는 연인에게 페르세스가 답했다.
“힘없는 이들은 다스리는 이의 숨결 한 번에 격랑을 맞이하기도 하고, 손끝 하나에 안식을 찾기도 하지.”
“…….”
“누군가에게 안식처가 되어주려는 그대가 자랑스러워.”
그러자 잠시 머뭇거리던 세드릭이 페르세스와 눈을 맞추고 결심한 듯 말을 이었다.
“네가 곁에 있어 준다면…… 감히 네게도 쉬어갈 안식처가 되어줄 수 있을 것 같은데.”
함께 걸음을 내디뎌달라는 간청. 페르세스의 고운 얼굴에 짙은 환희가 들어찼다.
주변을 휘도는 바람이 왕의 기분을 따라 달콤한 향을 내뿜는다.
“세드릭. 나는 바람이야. 세계 그 무엇보다 자유로운.”
“……알아. 감히 내 곁에 묶어두겠다는 생각 따윈 안 해.”
“자유가 있는 곳은 저마다 다르지. 누군가는 통치에서 자유를 찾고, 누군가는 칼끝에서 자유를 찾고. 또 누군가는 한 평짜리 침대 위에서 자유를 찾기도 해.”
페르세스가 연인의 뺨을 쓸어내렸다.
“내 자유는 여기에 있어. 세드릭. 바로 그대에게.”
“……!”
페르세스가 세드릭에게 가볍게 입을 맞췄다.
감히 바람을 욕심내는 사내는 조금 더 강하게 얽어맸다.
그렇게 한참 뒤. 겹쳤던 입술을 떼어낸 페르세스가 속삭였다.
“그럼 우리…….”
“응.”
“혼인은 언제 할까? 어디서 하지? 집은 베르타샨에 구하는 게 좋겠지? 인간들은 혼인할 때 부케를 던진다며? 그건 누구에게 주지? 하객은 누구를 초대할까? 청첩장엔 꽃을 다는 건 어때? 아차, 드레스는 뭘 입지? 아이는 몇이나 낳을까?”
“최대한 빨리. 그대가 원하는 곳에서. 베르타샨에 본가, 수도에 별장. 이브에게만 주지 않으면 돼. 하객은 천천히 추려보자. 청첩장에 달 꽃은 내가 준비하지. 드레스는 함께 보러 가자. 그리고 아이는…….”
세드릭이 여우처럼 눈을 휘며 웃었다.
“네가 바라는 만큼 내가 밤낮으로 노력할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