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공녀님의 꽃밭에는 그들이 산다-291화 (291/323)

##  291화: 외전. 수호룡 엔리르

인마전쟁이 끝나고 이벨리아가 단층에서 돌아온 뒤.

이 세계 유일한 용의 일과는 제법 단조로웠다.

“흐아암- 누나한테 비밀기지 가서 간식 먹자고 해야지.”

오늘도 해가 중천에 뜰 때 즈음 느지막이 일어난 엔리르는 비척비척 이벨리아의 방으로 향했다.

따사로운 햇볕에 눈을 거의 감은 채 회랑을 반쯤 걸었을까.

“아야!”

누군가의 다리에 머리를 쿵 부딪쳤다.

자신이야 눈을 감고 있으니 그렇다 치고, 마주 오는 이는 빤히 보고서도 피하지 않았음이 분명하다.

용이 동그란 눈을 위협적으로 부라렸다.

“누구야! 누가 감히 용의 앞길을 막아!”

“나다. 집주인.”

“……합.”

엔리르의 입이 조개처럼 다물렸다.

새로운 집주인이 된 형아는 이전 집주인만큼 너그럽진 않았다.

유리를 깨거나 방을 엉망으로 만들 때면 엉덩이를 때리겠다고 으름장을 놓았으니까.

이전 집주인은 보석도 막 떼서 데구루루 굴려주곤 했는데. 나보고 가끔 아들이라고도 불러줬는데.

“……이게 바로 부모와 형제의 차이라는 건가.”

“뭐?”

“몰라! 흥!”

괜히 심술이 난 엔리르는 앞발을 들어 아르칸의 다리를 팡팡 때리고는 옆으로 비켜 갔다.

꿍실대는 엉덩이를 가만히 내려다보던 아르칸이 용의 꼬리를 휙 잡아 올렸다.

삽시간에 몸이 들린 엔리르가 몸부림치며 이를 드러냈다.

“아무리 집주인이라도 용을 그렇게 쓰레기 들듯 드는 건 못 참아!”

“못 참으면 뭐. 내쫓을까?”

“참을성이 갑자기 생겼어.”

재빠른 태세 전환에 픽 웃으며 아르칸이 물었다.

“근데 너 연구실 안 써? 만들어만 주면 아주 평생 연구만 할 것처럼 굴더니?”

“이제 안 해. 누나가 돌아왔으니까.”

“일회용이었어?”

“응.”

“그거 만드는 데 돈이 얼마나 들었는지 알기는 해?”

“몰라. 형아 돈 많잖아. 부자잖아. 집주인이잖아.”

마주 닿아오는 순박한 눈동자에 아르칸이 침묵했다.

‘어느 날 동생이랍시고 떡하니 생겨선…….’

한 지붕 아래에서 지지고 볶고 10년 이상을 함께 살다 보니 이 눈이 귀여워 보이는 날이 다 오네.

“……연구 안 할 거면 밖에 나가서 좀 놀고 그래. 친구도 없냐.”

“친구 있지. 황제랑 악마.”

“친구 잘못 사귀었군.”

“왜 내 친구들 욕해? 재수 없고 개념 없고 생각 없고 싹바가지 없는 것 빼고는 나름 괜찮은 애들인데.”

“그렇게 없는 게 많은 것들을 모자란다고 하는 거야. 이제 다른 친구도 좀 만들어 보는 건 어때?”

“싫어. 난 여전히 인간들이 싫어. 증오스러워.”

용의 표정이 형편없이 일그러진다.

붉은 눈에서 보이는 건 증오보단 외려 상처.

아르칸은 망설임 없이 사과했다.

“……미안. 괜찮아졌을 거라고 멋대로 생각했다.”

“평생 안 괜찮아질걸. 형아는 상상도 못 해. 그곳이 얼마나 끔찍했는지.”

위로해달라는 것처럼, 엔리르는 아르칸의 너른 어깨에 복슬복슬한 머리를 툭 기댔다.

이럴 때 보면 영락없는 어린아이라 아르칸은 막내의 등을 부드럽게 토닥이며 회랑을 걸었다.

시원하게 쏟아지는 빗소리가 두 형제의 낮은 한숨을 가려주었다. 한동안 가만히 손길을 느끼던 엔리르가 빼꼼 고개 들고 말했다.

“근데 형아. 나 돈 벌고 싶은데.”

“네 동굴에 보석 많다며.”

“하지만 보석을 그냥 둔다고 해서 보석이 저절로 자라진 않잖아.”

“그야 그렇지.”

“형아는 어떻게 돈 벌어?”

“우리 가문이 굴리는 사업체들도 있고, 영지에서 벌어들이는 세금도 있고, 무엇보다 전쟁에서 승리하면 전리품을…….”

아르칸이 멈칫했다.

“잠깐. 그러고 보니까 너 이번 논공행상 때 뭐 받았던가?”

“응. 나 수호룡 시켜준댔어.”

“그게 끝?”

“응.”

“이런…….”

아르칸이 이마를 짚었다.

황제 폐하가 세상 물정 어두운 용을 제대로 등쳐 먹으셨다.

“잘 생각해 봐. 뭔가 이상하지 않아?”

“뭐가?”

“다른 인간들은 돈이고 땅이고 받았는데 넌 그냥 이제부터 네가 수호룡이다, 하고 끝난 게.”

동그란 머리가 갸웃 기울어졌다. 용이 말랑한 두 앞발을 들어 가만히 바라보다가 답했다.

“……생각해보니까 조금 이상해. 내 손엔, 아니, 내 앞발엔 남은 게 없어.”

“그렇지? 그걸 바로 호구 잡혔다고 하는 거야.”

“……!”

“따라 해봐. 호구.”

“……호, 호…….”

“호구.”

종족 특성상 재물이라면 껌뻑 죽는 용의 눈이 분노로 불타올랐다.

“감히…… 감히 용을…….”

“쯧쯧.”

“가만 안 둬…… 황궁 위에 메테오로 불꽃놀이를 벌여줄 거야…….”

용의 날개가 세차게 떨렸다.

품에서 놓아주며, 아르칸이 말했다.

“다녀와라. 아르티나는 손해 보며 살지 않는다.”

“다녀올게. 엔리르 아르티나로서 제대로 받아내고 올게.”

엔리르 아르티나…….

그거 좋군.

아르칸이 드물게 활짝 웃으며 용의 머리를 쓰다듬었다.

“옳지. 기특하다. 우리 막내.”

***

황궁 정문.

철통같이 경비를 서던 기사들이 고개를 기울였다.

“방금 뭐가 지나간 것 같은데……?”

“그래? 난 못 봤는데?”

엔리르는 실로 가공할 속도로 황제의 집무실을 향해 날아갔다.

- 쨍그랑!

창문을 몸으로 깨고 안으로 들어서니…….

“……용님?”

“뭐야. 큰 보라 인간? 황제는?”

“폐하의 집무실은 옆방입니다. 그리고 저는 폐하의 집무실 옆방에 붙어 지박령처럼 살고 있지요.”

“……보, 보라 인간. 괜찮아?”

“후후후…… 괜찮습니다…… 곧 다 때려치울 예정이니까…… 그나저나 어디서 봤는데 용의 피를 마시면 힘이 불끈 난다고…… 잠시 이리 좀…….”

“……실례했어. 난 그만 옆방으로 가볼게.”

누나. 나 황궁에서 보라색 좀비를 봤어.

이따가 말해줘야겠다고 생각하면서, 주춤주춤 엉덩이를 뒤로 뺀 엔리르는 냅다 옆방의 창문을 깨고 들어갔다.

“황제. 알현을 청한다.”

산더미 같은 서류에 파묻혀 있던 루드비히가 와장창 깨져 흩어진 유리창의 잔해를 가만히 내려다봤다.

“……결투 신청을 잘못 들었나, 내가?”

“그것도 좋네. 알현을 결투로 바꾼다.”

“버릇없긴.”

“버릇은 네가 더 없어.”

“갑자기 쳐들어와서 그게 무슨 망언이야.”

“나는 왜 상 안 줬어.”

“……?”

“내가 얼마나 잘 싸웠는데. 생각해보니까 나는 아무것도 못 받았어.”

“너 수호룡 만들어줬잖아. 그게 얼마나 대단한 칭호인 줄 알기나 해?”

대단하다는 말에 잠시 멈칫하던 엔리르의 귀에 환청처럼 ‘호구’가 들려온다. 고개를 푸르르 턴 용이 앞발을 책상 위에 쿵 내리찍었다.

“나 호구 아니야!”

“아니었나. 의외로군.”

이글이글 불타는 눈을 바라보던 루드비히가 곤란하다는 듯 혀를 찼다.

이거 참. 순진한 용 하나 등쳐 먹나 싶었는데.

전쟁 피해 수복 때문에 사비까지 탈탈 터는 바람에 자금 사정도 썩 좋지 않은데 말이야.

“그럼 이건 어때.”

“나 안 속아.”

“들어나 봐.”

루드비히가 흡사 세상에서 제일가는 귀물을 논하는 것처럼 목소리를 낮췄다. 그러자 엔리르도 덩달아 몸을 낮추고 귀를 쫑긋 세웠다.

“네 동상을 세워주는 거야.”

“동상?”

“황금으로. 보석도 많이 박아서.”

“……황금으로? 보석도 많이 박아서?”

“가장 볕이 잘 드는 곳에 멋지게 세워주는 거지.”

“……멋지게?”

“너 돌아다니면서 동상 본 적 있어, 없어.”

“없어.”

“봐. 우리 제국에서 동상이 세워진다는 건 진짜 대단한 거거든.”

“그래애?”

“그럼. 그게 다른 인간들이 받은 금은보화나 땅보다 훨씬 대단한 거야. 딱 하나뿐인 거니까. 어때?”

“그래애!”

황금. 보석. 딱 하나뿐. 대단.

좋아하는 단어들의 조합에 냉큼 기분이 좋아진 용은 황제의 책상에서 발을 떼고 창문으로 휘익 날아가며 콧노래를 불렀다.

“나 이제 호구 아니야. 가서 누나한테 자랑해야지.”

***

그리고 정확히 두 시간 뒤.

“우리 아가 용 호구 잡은 놈이 너냐!”

“……걔 이제 아가 아니거든. 너 그거 과보호야.”

불경하게도 황제의 집무실 문을 쾅 열어젖힌 이벨리아가 성큼성큼 들어와 루드비히의 책상을 손으로 내리쳤다.

“걔가 세운 전공이 얼만데 뭐? 도옹사앙?”

“그놈도 좋다고 했어.”

“네가 그 매끄러운 혀로 살살 속여넘겼겠지!”

“들어봐. 황금 동상에다가 보석을 가득 박아 이 세상에 단 하나밖에 없는 것으로-.”

“나는 못 속인다, 이 사기꾼.”

“쯧. 어릴 때는 잘만 속아 넘어갔는데.”

음식 남기면 대머리독수리로 태어난다는 말도 홀랑 믿었던 애가 언제 이렇게 커선.

“난 그때의 이브가 아니야. 마땅한 상을 내놔!”

사실 전공으로 따지자면 엔리르 역시 이크리안과 함께 제1공을 하사받을 만하긴 했다.

루드비히가 구석에 그림자처럼 서 있던 시종장에게 눈짓했다.

곧이어 시종들이 넷이나 붙어 끙끙 들고 온 것은 보석 궤짝 하나.

“자. 그놈 몫의 포상.”

슬쩍 궤짝을 열어본 이벨리아가 고개를 기울였다.

“논공행상 때 아스가 받았던 거랑 비슷한데?”

“그거 맞아.”

“토끼가 받았던 게 어떻게 너한테 다시 와있어?”

“그놈이 다시 돌려줬다.”

“엥? 왜? 우리 토끼 그런 토끼 아닌데?”

입을 달싹이던 루드비히가 고개 돌리고 중얼거렸다.

“……뭘 잘못 먹었나 보지.”

네가 안온할 제국을 만들기 위해서라면 포상 따위 없어도 몇 번이고 전장에 서겠다던 네 연인의 그 마음을, 굳이 내가 나서서 밝히고 싶지는 않았다.

***

이벨리아는 실프를 불러 궤짝을 집으로 날랐다.

응접실에 엎드려 기다리고 있던 엔리르가 벌떡 일어나 눈을 빛냈다.

“누나! 이 커다란 게 다 내 거야?”

“그랬었지. 그런데 잠시만.”

무거운 뚜껑을 연 이벨리아가 그 안에서 보석 두 개를 꺼내 건넸다.

“자. 여기.”

“그 궤짝은 다 어쩌고 고작 이것만 줘?”

“이건 내 수수료.”

“……누나? 고블린도 남의 재물을 그렇게 강탈하진 않아.”

“엔리르. 세상은 눈 똑바로 뜨고 살아야 해. 그렇지 않으면 이렇게 눈탱이 맞기 십상이야.”

그걸 지금 궤짝 주섬주섬 챙기는 장본인이 할 말은 아닐 텐데.

“세상에 믿을 인간 하나 없다더니…….”

“기특하다, 내 동생. 중요한 걸 배웠구나.”

“…….”

털썩 주저앉은 가련한 용은 자신의 전리품이 집 잃은 영지민들의 구호를 위해 실려가는 것을 멍하니 바라봤다.

***

며칠 뒤.

엔리르는 혼자서 광장으로 향했다.

‘동상이 잘 세워지고 있는지는 내 눈으로 똑똑히 확인해야지. 그렇지 않으면 또 호구가 될 수도 있어. 세상은 아주 험난한 거야.’

물론 굳이 인간들을 마주치고 싶진 않았기에 엔리르는 아름드리나무 위에 쏙 숨어들어 나뭇잎 틈새로 아래를 바라봤다.

잠시 뒤, 꼴도 보기 싫은 인간들이 우글우글 모여 잡담을 나누기 시작했다.

“이게 뭔가? 제법 크게 터를 팠구먼.”

“자네 아직 못 본 모양이로군. 여기 수호룡님의 동상을 세운다는 방이 붙었어!”

“수호룡님의 동상을?”

자기 얘기가 나오자 엔리르가 쫑긋 귀를 기울였다.

인간도 아닌 용의 동상을 세우는 거니까 싫다고 하겠지?

인간들이 으레 그렇듯 저 입으로 못된 말만 줄줄이 내뱉을 거야.

차라리 귀를 막아버리려고 앞발을 들던 찰나. 들려오는 말은 예상과 전혀 달랐다.

“늦게도 세우는구먼. 전쟁 끝나고 바로 세웠어야지.”

“그보다 터가 너무 작은 거 아닌가? 용님의 위상을 생각하면 더 크게 만들어야 할 것 같은데.”

“세상천지에 수호룡이 계신 나라는 우리 제국밖에 없으니 동상을 산처럼 세워 자랑해야 마땅하지!”

……뭐야. 인간들 입에서 바람직한 말이 나오네?

집중해서 듣는 바람에 엔리르의 꼬리가 나뭇잎 사이로 삐죽 내려와 살랑살랑 흔들렸다.

위를 바라보던 제국민들이 눈을 휘둥그레 떴다. 그중 한 사내가 손으로 나무 위를 가리켰다.

“어, 저기…… 읍!”

옆에 있던 청년이 사내의 입을 틀어막았다.

용님이 굳이 모습을 드러내지 않으신 데에는 다 이유가 있으실 테지.

어쩌면 우리 때문에 동상 터를 제대로 보지 못하고 계실지도 모른다.

서로 눈짓을 나눈 제국민들은 각자의 집이며 가게로 재빨리 달려가 빵과 감자, 과일 등을 손수건에 가지런히 싸서 나무 아래 쌓아두었다.

울창한 나뭇잎을 뚫고 솔솔 올라오는 맛있는 냄새에 엔리르가 코를 씰룩일 때 즈음.

“감히 저희가 수호룡님의 휴식을 방해하였습니다.”

“……!”

“작은 정성이오니 부디 노여워 말고 받아주시기를.”

뭐지? 내가 여기 있는 걸 어떻게 알았지?

엔리르가 앞발로 나뭇잎을 헤치고 아래를 내려다봤다.

방해하지 않으려는 모양인지 인간들은 그새 흩어진 뒤였다.

빵 하나를 내려두고 달려가는 소녀의 뒷모습을 바라보던 엔리르가 나무 위에서 훌쩍 뛰어내렸다.

“…….”

나무 밑동을 다 덮을 정도로 쌓인 것들. 하나같이 보잘것없는 것들임에도…… 누군가 보물과 바꾸자고 하면 고개를 저을 것 같다.

참 이상한 일이다.

싫어하는 인간들이 싫어하는 것들을 두고 갔을 뿐인데.

엔리르는 손수건 위에 곱게 놓인 빵 하나를 집어 입에 물었다.

“……따뜻하네.”

***

이벨리아는 늘 엔리르에게 사람과 용은 밥값을 하며 살아야 한다고 가르쳤다.

물론 똥을 생성하는 것도 밥값이라고 말하긴 했다만…….

여하간 먹을 것을 잔뜩 받았던 엔리르는 그날 이후 종종 모습을 숨긴 채 광장 위를 날아다녔다.

“아니, 하늘에서 웬 음식이……!”

배를 곯는 이가 보이면 빵을 떨어뜨려 주기도 하고.

“허허, 오늘따라 수레가 가볍구먼.”

힘겹게 우유 수레를 끄는 노인을 보면 마나로 슬쩍 밀어주기도 하고.

“엄마아! 연이 나무에…… 어?”

나무 위에 연이 걸리면 앞발로 툭 쳐서 내려보내기도 했다.

그럴 때마다 제국민들은 허공을 향해 인사했다.

꼭 엔리르가 거기 있는 걸 아는 것처럼.

“……밥값이야. 그냥 밥값.”

툴툴대면서도 엔리르가 광장 위에 머무는 시간은 조금씩 길어졌다.

***

바야흐로 수도 내 유일한 동상이 세워지는 날.

아침부터 기대에 차서 동동거리던 엔리르는 이벨리아의 후드 속에 몸을 숨기고 함께 동상을 보러 갔다.

“위엄 넘쳐! 반짝거려! 마음에 들어!”

“나도 마음에 들어. 그런데 여우 모습이네?”

“응. 내가 그렇게 해달라고 했어.”

“왜 본체 모습으로 안 하고?”

“이 모습으로 누나를 만났으니까.”

먼 미래에 누나의 자식도, 손자도, 후손도. 모두 내 모습을 이렇게 알아주면 좋겠어.

제국의 수호룡은, 아르티나의 막내는, 이 모습으로 구원받고 사랑받았다고.

눈을 빼꼼 내놓으니 익숙한 얼굴들이 꽤 많이 보인다.

저 인간은 어제 사과를 놓아둔 노인.

저 인간은 며칠 전 빵을 놓아둔 소녀.

저 인간은 어디에 쓰는지 알 수 없는 장난감을 두고 간 어린아이.

엔리르가 귀를 쫑긋 세웠다.

인간들이 늘 나쁜 말만 하는 게 아니라는 걸 알았으니, 다들 이 멋진 동상을 뭐라고 평가하는지 듣고 싶었다.

“수호룡님만 계시면 무서울 게 없지! 뭐가 쳐들어오더라도 용님 앞발에 죄다 나가떨어질 텐데!”

- 하여간 반쪽짜리. 개새끼 발도 네 발보단 낫겠다.

일순 과거 발에 족쇄를 찬 채로 듣던 말이 겹치듯 떠올라 엔리르는 고개를 푸르르 저었다.

……내 솜방망이 앞발이 대단한 걸 이 인간들은 알고 있네.

“꼬리만 휘둘러도 추풍낙엽일걸!”

- 꼬리를 잘라보자! 용은 재생이 뛰어나다며?

……몇 번이고 잘렸던 내 보드라운 꼬리가 멋진 것도 다들 알고 있어.

“무엇보다 공작 각하께서 아르티나의 막내 공자님이라고 공언하셨지! 그게 뭘 뜻하겠는가. 용님이 나서면 아르티나도 함께 나선다 이거야!”

- 넌 가족도 동족도 없어. 평생 이곳에서 울부짖다 죽는 거야.

이젠 내게 가족이 생겼다는 것도…… 모두 알고 있어.

귓가에 울리던 잔인한 말들이 깨어지듯 사라진다.

엔리르는 햇볕을 듬뿍 받으며 빛나는 자신의 동상을 올려다봤다.

세계에서 가장 어둡고 끔찍한 지하 실험실에서 울던 내가, 이젠 수도에서 가장 밝은 곳에 서 있다.

세상에서 가장 모질고 차가운 말만 듣던 내가, 이젠 가장 예쁘고 고운 말들만 모아 듣고 있다.

“…….”

기분이 벅차올랐다.

흑백의 과거가 오색으로 조금씩 덧칠되는 것만 같았다.

“……누나. 나 행복한 것 같아.”

“말했잖아. 그러려고 너를 데려왔다고.”

“너무 행복해서 날고 싶어.”

“마음껏 날아. 네가 날 때면, 내가 항상 너를 보고 있을 테니까.”

후드에서 빠져나온 엔리르가 창공으로 뛰어올랐다.

이내 터지는 환한 빛.

가르고 솟구치는 것은 태양조차 가릴 만큼 거대한 용.

손으로 차양을 만들고 위를 올려다본 제국민들이 제각기 소리쳤다.

“용님이다!”

“와아, 세상에……!”

“엄마, 내가 책에서 본 거랑 똑같아! 수호룡님이야!”

무지개 아래, 바야흐로 과거의 족쇄를 끊어낸 온전한 용이 활강한다.

“멋있다, 내 동생!”

자랑스러움을 듬뿍 담은 외침에 엔리르는 웃었다.

하늘은 맑았다.

누나가 처음 동생이라고 불러줬던 그날처럼.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