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공녀님의 꽃밭에는 그들이 산다-289화 (289/323)

##  289화: 외전. 휴고와 엘리시아 (3)

그들은 통성명 이후 가만히 서서 서로를 응시했다.

짧은 시간 많은 감정이 스쳐 지나갔지만, 투영하는 눈은 무감하기만 했다. 그렇게 살아온 7년이었으니까.

“……방해는 마라.”

“너야말로.”

인사 없이 다만 차가운 당부 끝에 둘은 함께 산길을 올랐다.

얼마 지나지 않아 빼곡하게 선 나무 틈새로 적의 깃발이 보인다.

휴고가 지금껏 그래왔듯 검을 고쳐 쥐고 쇄도하려던 찰나. 엘리시아가 갑주 뒷덜미를 세게 잡아당겼다.

“잠깐.”

“컥……! 무슨 짓이야!”

“저거 방원진(方圓陳)이야. 물소처럼 그냥 들이받았다간 다쳐.”

“난 계속 이렇게 해왔다.”

“그러니 꼴이 그 모양이지. 날 봐. 너랑 비슷한 시기에 영지로 왔는데 멀쩡하잖아.”

“……잘나셨군.”

“아는 줄 알았는데?”

“내가 너에 대해 아는 건 오만하고 건방지다는 것뿐이다.”

“그럼 이참에 하나 더 알려줄게.”

엘리시아의 푸른 눈이 유리알처럼 빛났다.

“세상에 내가 모르는 진법은 없어.”

자만인가. 바라보던 휴고는 단번에 깨달았다. 자만은 무슨. 저건 자신감이다.

“방원진은 수비엔 더할 나위 없이 뛰어나지만, 원거리와 치고빠지는 공격엔 약하지.”

“…….”

“나는 정령을 불러 오른쪽 진형을 무너뜨릴 테니, 너는 말을 잡아타고 외벽부터 깎아내. 한 군데를 갉아먹고 나선 반드시 빠졌다가 적어도 백 보 이상 떨어진 곳을 타격해야 해.”

“……정령도 다루나.”

“놀랄 거 없어. 나도 너랑 비슷한 시간을 보냈으니까.”

그 담담한 말에 휴고의 심장 한구석이 지끈거렸다.

네가 그 지옥을 걸었다는 것이 안쓰러워서일까. 아니면 나와 함께 그 지옥을 걸은 이가 있다는 것이 못내 기꺼워서일까.

왜인지 알 수 없었고, 알고 싶지도 않았다.

휴고는 그저 이제는 한 몸처럼 느껴지는 검을 휘둘렀다.

***

인정하고 싶진 않았지만, 엘리시아는 정말 뛰어난 전략가였다.

그 증거로, 휴고의 몸에는 새로운 상처가 더 늘어나지 않았다.

정령이 정찰을 마치면 엘리시아가 진법을 살펴 약점을 휴고에게 전달했고, 그러면 휴고는 압도적인 무력으로 그곳을 짓밟았다.

꼬박 스무 밤.

밤엔 등을 맞대고 전투를 치르고, 낮엔 곁에서 새우잠을 청하고, 배가 고프면 작은 열매를 반으로 잘라 나누면서 둘은 점점 입을 여는 횟수가 늘었다.

보통은 서로를 놀리는 식의 가벼운 대화였다.

같은 현실을 공유하는 이들끼리 그 현실을 잊고자 나누는 알맹이 없는 이야기들.

“꾸엑. 그렇게 특이한 비명은 처음 들어봤다.”

“네가 미적거리는 바람에 죽을 뻔했으니까 그렇지. 배고프니까 그거나 내놔!”

“네 몫은 이미 다 먹고 뼈만 남아 있는데.”

“아까 다 봤어. 네 고기가 내 고기보다 큰 거.”

“……다 좋은데. 그거 내가 먹던 거다.”

“전쟁터에서 그런 거 따지다간 굶어 죽는 거야.”

“돼지라서 꾸엑 소리를 낸 건가…….”

“너 지금 뭐랬냐?”

“아무 말도 안 했다.”

그렇게 베르타샨에 주둔한 악마 휘하의 진영을 하나하나 부수며 돌아다닌 그들은 머지않아 악마의 직속 군에서만 사용하는 깃발을 발견했다.

“휴고. 대장기(大將旗)야.”

“저기만 부수면 끝이겠군.”

“근데 너 악마 죽여봤어?”

“아니.”

“…….”

“왜. 내가 못 미덥나?”

“……저 악마 강해. 불을 다루는 것처럼 보였어.”

엘리시아의 눈앞에 7년 전 참혹했던 순간이 스쳐 지나갔다.

본능적으로 바르르 떨리는 손끝. 내려다보던 휴고가 전우의 손을 살짝 잡았다가 빠르게 놓았다.

“……?”

“나와 같은 시간을 보냈다면 알 텐데. 우리가 여기서 죽을 리 없다는 걸.”

투박한 격려에 엘리시아가 옅게 웃으며 검을 세게 쥐었다.

“그래. 저놈을 잡기 위한 7년이었지.”

“목을 부모님 묘에 바치는 것도 좋겠군.”

“방심하지 마. 우리까지 저놈 손에 죽으면 어머니 아버지 눈 못 감으셔.”

“……우리 아버지는 내 등짝을 때리실 거다.”

의도적으로 회피하던 ‘부모님’이라는 주제가 부지불식간에 튀어나왔음에도 생각보다 그리 아프진 않았다.

대화의 상대방이 같은 기억을 공유하는 너여서겠지.

둘은 마지막 격전지로 발을 들였다.

동시에 사방에서 비처럼 쏟아지는 창.

그리고 과거 그날처럼 흐린 하늘 위로 솟구치는 불길.

한날한시에 부모님을 앗아간 그 잔혹한 권능을, 두 아이는 사그라지지 않은 눈으로 마주했다.

똑똑히 봐라.

아르티나는. 베르타샨은.

우리는 아직 끝나지 않았다.

***

고작 16세. 아르티나 공작과 멸문한 줄 알았던 베르타샨의 마지막 후계가 단둘이서 영지를 해방했다는 소식은 제국 전역을 뒤덮었다.

“고작 둘이서? 에이, 과장된 소문이겠지!”

“진짜라니까! 황실에서 공언했다고!”

“허어, 아르티나의 가세가 크게 기운 줄 알았더니……. 굳게 닫힌 가문 내에 용이 숨어 있었구나.”

“베르타샨은 또 어떻고. 과거에 총명하기로 소문 자자했던 그 영애가 범으로 자란 모양이야.”

최근 마족들의 잦은 침공으로 불안에 떨던 제국은 연일 둘의 이야기로 들썩였다.

휴고를 따라 쫄래쫄래 수도로 온 엘리시아는 사방에서 들리는 제 이름에 후드를 조금 더 눌러썼다.

“우리 완전 유명 인사네.”

“명성이 하늘까지 닿겠는데.”

“그러면 우리 부모님들도 들으셨겠다.”

“좋아하시겠군.”

“왠지 우리 아빠 술 단지 열었을 것 같아.”

“맞은편엔 우리 아버지가 계시겠지.”

엘리시아가 잠시 하늘을 올려다봤다. 어떻게든 부모님의 흔적을 찾아보려 애썼지만, 아무것도 보이지 않는다.

침을 삼키면서 치받는 감정도 함께 내려보낸 엘리시아가 일순 발을 멈추고 머뭇거렸다. 그러자 휴고가 슬쩍 시선 돌려 물었다.

“뭐 해. 안 오고.”

“……나, 사실 수도에 연고가 없어.”

“……?”

“갈 곳이 없다는 뜻이야.”

“없긴 왜 없어. 지금 나랑 같이 가고 있잖아.”

“어딜?”

“내 집.”

“그래도 돼? 나 어쩌면 집을 구할 때까지 꽤 오래 머물러야 할지도 모르는데…….”

“말했을 텐데. 같은 길을 걸었으니, 짐도 함께 나누자고.”

높낮이 없는 목소리 속. 이제는 모를 수가 없는 따뜻함이 반짝인다.

저 등이 조금은 든든해 보인다는 말도 안 되는 생각을 하며, 엘리시아가 속삭였다.

“……고마워.”

전대 가주의 서거 이후 문을 닫아걸었던 아르티나 공작저는 그렇게 7년 만의 손님을 맞이했다.

***

사실, 엘리시아는 공작저에 발 들이기 전부터 결심했었다.

‘눈치 빠르게 선수를 치자. 먼저 일을 시켜달라고 하는 거야.’

영지고 재물이고 사람이고 죄다 잃고 쫄딱 망해버린 집안의 영애.

공작저 사람들로서는 불편한 동거인 하나가 난데없이 늘어난 것이나 다름없으니까.

게다가…….

‘우리 가문을 돕다가 아저씨와 공작부인이 돌아가셨으니 내가 얼마나 밉겠어.’

그러니까 눈총을 받더라도 상처받지 말자.

‘전술 교습이라든가 아니면 하다못해 청소라도 도우면 나를 내쫓진 않을 거야.’

곧 펼쳐질 냉대에 엘리시아는 크게 심호흡하고 발을 디뎠다.

“아이고!”

아니나 다를까. 사용인들 사이에서 탄식이 들려온다. 날 왜 데리고 왔냐는 의미겠지.

가장 나이가 지긋한 하녀가 빠르게 달려왔다. 나 때문에 아저씨가 죽었다면서 저주를 퍼부을지도 몰라.

억센 손이 어깨를 부여잡았다. 엘리시아가 눈을 질끈 감고 입을 열었다.

“일을 시키면 뭐라도 열심히…….”

“혼자 얼마나 고생이 많으셨을까…… 아이고, 신이시여…….”

“……?”

뒤에 서 있던 하녀들이 엘리시아 근처로 우르르 모여들더니 새 옷을 가져와라, 음식을 내어오라 부산을 떨기 시작했다.

엘리시아는 얼떨떨했다. 지금 이 상황을 이해할 수가 없었다.

‘나한테 왜 이러지? 날 미워해야 정상 아닌가?’

“자, 이리 오십시오, 아가씨. 고운 얼굴에 상처 남기 전에 치료부터 하셔야지요.”

“배는 안 고프십니까? 춥지는 않으시고요?”

“주인님과 마님께서 생전에 아가씨 이야기를 얼마나 많이 하셨던지…….”

다들 이렇게 속없이 다정한 건 아저씨를 닮아서인가.

문득, 이젠 기억 저편으로 넘어간 목소리 하나가 들려왔다.

- 뛰어라, 엘리시아.

- 반드시 살아남아서, 우리 아들 좀…… 들여다 봐주렴.

오래 잊고 살았던 음성. 오래 들어주지 못했던 부탁.

일곱 해 동안 필사적으로 억눌렀던 감정이 해일처럼 밀려든다.

참사의 유일한 생존자는 제 탓이 아닌 것을 알고 있음에도 죄책감에 깊이 가라앉는다.

엘리시아는 하녀의 손을 뿌리치고 두 팔로 스스로의 몸을 감싸 안았다.

“아가씨?”

“아아…….”

덜덜 떨던 엘리시아는 누구에게인지도 모르게 털썩 무릎을 꿇었다.

“……미, 미안……해.”

끅끅 찢어지는 울음이 잇새를 비집었다.

“나, 때문에…… 끄으…… 우리 영지 때문에…….”

“……엘리시아.”

“마지막에, 하신 말씀도…… 이제야 기억해서…….”

간헐적으로 흘러나오는 조각난 말들.

고요히 내려다보던 휴고가 한쪽 무릎을 꿇어앉았다.

“엘리시아. 날 봐. 내게 미안해?”

“미안해…… 미안해…… 나만 살아남아서, 나만…….”

“그건 잘못됐는데.”

“내가 할 수 있는 건 뭐든…….”

하염없이 떨리는 몸과 불안정하게 구르는 눈동자. 일종의 공황 상태다. 휴고가 엘리시아의 얼굴을 붙잡고 눈을 맞췄다.

“아니. 그런 뜻이 아니야.”

“……?”

“우리 부모님. 표정이 편안하셨어. 후회 없는 선택 끝에 마지막을 맞이한 것처럼.”

휴고가 엘리시아의 눈가를 닦아주었다. 따뜻한 온기에 엘리시아가 살짝 눈을 감았다.

“내 부모님의 선택에 네가 미안할 이유는 없어. 숭고한 죽음이었고, 나는 그 선택이 자랑스럽거든.”

“…….”

“우리가 함께 승리하고 돌아온걸, 분명 웃으며 보고 계실 거야.”

아주 어색한 몸짓으로 휴고가 엘리시아를 끌어안았다.

불규칙적으로 등을 토닥이는 손길이 과거 그 어느 날을 떠오르게 했다.

- 아빠는 왜 제국을 지켜?

- 아빠가 사랑하는 게 모두 이 제국에 있으니까.

- 아저씨는 왜 제국을 지켜요?

- 아저씨가 사랑하는 게 모두 이 제국에 있어서란다.

제국을 수호하는 이들의 이유는 같았다.

부디 사랑하는 그대만은 안온하길 바라는 마음.

아빠와 엄마에게 그건 나였을 테고, 아저씨와 공작부인에게 그건 휴고였을 테지.

이제 그 마음을 어렴풋하게나마 이해한 엘리시아는 친우의 품에 아이처럼 기대 엉엉 울었다.

그날 이후 처음으로 흘리는 눈물이었다.

***

17세.

축복제가 열리는 봄의 계절에 엘리시아는 무료하다는 표정으로 거울 앞에 앉아 있었다.

머리칼을 매만져주던 하녀, 비비안이 웃었다.

“지루하시지요?”

“으음…… 원래 단장이 이렇게 오래 걸려? 나 사실 연회 같은 건 별로 참석해 본 적이 없어서.”

엘리시아의 과거를 잘 알고 있는 비비안의 표정에 안쓰러움이 떠올랐다가 사라졌다.

“아가씨. 수도 사교계는 야생의 초원이나 다름없답니다.”

“야생의…… 초원?”

“남의 약점을 물고 뜯지 못해 안달이 난 짐승들이 가득하지요.”

비비안이 정성 어린 손길로 장신구를 달아주며 말을 이었다.

“약점을 보이지 마셔요, 아가씨. 사교계에서는 한 번 얕보이면 끝이에요. 잡아먹히는 사슴이 되느니 포악한 범이 되셔야 해요.”

“새겨들을게, 비비안.”

“그리고 분명 사내놈들이 아가씨에게 달라붙으려고 꾀를 쓸 터인데, 주인님보다 못난 사내가 다가오면 부채로 콧등을 후려서 날려버리시고요.”

“물론이지.”

대귀족 가문의 하녀들은 사교계 정세에 빠삭하다.

연회를 겪어본 적 없이 자란 엘리시아는 비비안의 조언을 금과옥조처럼 새겼다.

저녁 즈음.

휴고의 에스코트를 받아 황궁 연회장으로 들어간 엘리시아는 침을 꿀꺽 삼켰다.

‘예상보다 더한걸.’

날카로운 눈초리와 그보다 더 차가운 말씨가 비수처럼 날아들었다.

“언제부터 망한 가문의 영애가 황궁 연회에 초대를 받았죠?”

“그보다 지금 아르티나 공작저에 머물고 있다면서요?”

“세상에, 다 큰 영애가 조신하지 못하게. 쯧쯧.”

“그러면 안 된다고 가르쳐 줄 부모가 없으니 저리 자유분방하게 자랐을 테지요.”

“이게 다 공작 각하를 어떻게 해보려는 속셈 아니겠어요? 가문 망한 걸 저렇게 써먹을 줄은 몰랐네요.”

자기들끼리 나누는 이야기만은 아니었다. 연회장에 있는 모두가 듣고 소문을 나를 수 있도록 목소리가 제법 높았으니까.

이를 가만히 듣던 엘리시아가 그들에게 다가갔다.

무리의 여왕벌 격인 데퐁트 후작부인이 놀라는 시늉을 했다.

“이런, 다 들었나 보군, 영애. 이거 미안해서 어쩌지?”

“들으라고 한 이야기니 들어야지요.”

입에 독을 문 여우들이 화려한 부채 뒤에서 키득키득 웃는다.

데퐁트 가문에 줄을 댄 영애들이 후작부인에게 아양 떨듯 재잘댔다.

“집안은 없는데 눈치는 있는 모양이네요.”

“그거라도 있어서 얼마나 다행이에요.”

“하긴. 집도, 재산도, 영지도, 부모도, 가신도 없는데. 빌어먹고라도 살려면 눈치는 있어야지요.”

그러자 데퐁트 후작부인이 짐짓 말리는 것처럼 혀를 찼다.

“다들 말이 지나치군. 어렵게 상경한 이에게.”

말과 달리 눈에는 표독스러움이 가득하다. 후작부인이 입꼬리를 올리며 권했다.

“연고도 없을 텐데 함께 차라도 들지.”

“…….”

“다만, 나와 함께 있는 영애들은 모두 명문가의 자제들이라 그대가 물을 흐릴까 걱정하는 것도 충분히 일리가 있어. 그러니…….”

후작부인이 연회장 한가운데에서 솟구치는 분수를 가리켰다.

“저기 들어가서 목욕재계하고 오게. 깨끗이.”

영애들은 세상에서 가장 재미있는 농담을 들었다는 듯 까르르 웃으며 뒤집어졌다.

연회장의 모든 시선이 그들에게 집중됐다.

변경백의 가문에서 나고 자란, 최근엔 악마의 목을 베었다고 소문 자자한 신성이 사슴인지 범인지 탐색하는 눈길.

엘리시아의 입가에 가느다란 비소가 떠올랐다.

온실 속 화초들. 내가 검만 들이대도 엉엉 울어댈 화분 속 꽃들.

‘같잖아서 진짜…….’

엘리시아가 저쪽에서 사내들에게 둘러싸여 있는 휴고를 돌아봤다.

그러자 휴고가 입 모양으로 속삭였다.

‘마음껏 밟아.’

이 제국 유일한 공작의 허락이 떨어졌다. 씩 웃으며 엘리시아가 입을 열었다.

“중급 정령사는 수도에서도 제법 귀한 존재라던데. 맞나요?”

“몰락한 가문의 영애께선 죽었다 깨도 뵙기 힘들 정도로 귀하죠.”

“굳이 뵈어야 한다면 제게 무릎이라도 꿇고 애원해보세요. 정성을 다해서 간청하시면 제가 아버지께 말씀드려 자리를 한 번 마련해 볼게요.”

내가 귀한 존재구나. 그러면 여기서 어느 정도 깽판을 쳐도 날 함부로 처벌하긴 어렵겠어.

“제게 목욕재계를 하라고 한 이유는 뭐죠?”

“더러우니까요.”

“가문이 몰락한 이후에 어디서 무슨 일을 했을지 어떻게 알고 어울리겠어요.”

엘리시아가 서늘하게 웃으며 물빛 머리칼을 쓸어 넘겼다.

“너희부터 그 더러운 머리통 좀 씻자.”

삽시간에 하대로 바뀐 어조에 영애들이 귀를 의심하던 찰나.

“운다인.”

자연력을 받아 또렷한 형체를 갖춘 물빛의 소녀가 연회장 허공에 떠올랐다.

계약자의 분노를 느꼈는지 평소 귀엽던 얼굴에는 짙은 노기가 서려 있었다.

“엎어.”

명하자 커다란 호수를 만들어낸 운다인이 작은 손바닥을 휙 뒤집었다.

- 촤아아악!

가히 폭포수나 다름없는 양의 물이 방금까지 기세등등하게 재잘대던 후작부인과 영애들을 쫄딱 적셔버렸다.

“꺄아악!”

“이게 무슨 짓이야!”

“……저, 정령?”

“어떻게 정령이……!”

“어떻게긴. 뵈려면 무릎이라도 꿇어야 한다는 그 정령사거든. 내가.”

정성을 들인 화장이 무너져내린다. 값비싼 깃털도 모두 망가졌다. 개중 심약한 영애들은 울음을 터뜨렸다.

“공작 각하께선 일찍이 내 능력을 알아보시고 나를 가신으로 거둬 공작저에 머물게 하셨지.”

“……!”

“내가 뭐 몸이라도 던져 각하를 어떻게 해보려 한다고 오해한 모양인데…… 그건 별 능력이 없는 그대들 머릿속에나 있는 방법이고.”

제국의 가장 중요한 행사에서 공개적으로 망신을 당한 영애들이 부들부들 떨며 이를 갈았다.

엘리시아는 가장 열정적으로 부모가 있네 없네 했던 영애에게 다가가 턱을 들어 올렸다.

“내 부모님은 일평생 국경을 지키셨다. 나 역시, 악마가 현현한 곳이라면 그 어디든 달려가 참전할 거야.”

“…….”

“그러니 그대들은 내가 지키는 제국에서, 호화롭고 안전한 곳에 이리 숨어서, 마음껏 내 험담을 하길 바라.”

“…….”

“그게 내 가문이, 내 아버지가, 그리고 내가 바라는 제국이니까.”

오랜 세월 제국의 동부 국경을 지킨 변경백(邊境伯)의 가문.

그 유일한 후계의 포고엔 가문의 기치가 듬뿍 담겨 있었다.

자신을 비난하는 이들에게 외려 안전히 나를 비난할 수 있는 제국을 만들어주겠다고 선언하는 배포.

그날 이후-.

수도 사교계의 왕은 그 누구도 부정할 수 없이 엘리시아였다.

먼 훗날 그녀의 딸이 그 자리를 이어받을 때까지, 줄곧.

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