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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녀님의 꽃밭에는 그들이 산다-288화 (288/323)

##  288화: 외전. 휴고와 엘리시아 (2)

휴고 아르티나, 8세.

무가의 핏줄 덕인지 또래보다 큰 손에는 작년 엘리시아에게 받았던 두꺼운 책이 들려 있었다.

삼분의 일 정도 지난 곳까지 손때가 묻은 채로.

밤낮으로 책을 죽일 듯 노려보시기를 몇 개월. 이쯤 되니 며칠 읽다가 포기하실 거라고 수군대던 사용인들은 마음을 고쳐먹었다.

‘베르타샨 영애께서 지식으로 도발하셨기에 망정이지.’

‘닭장에서 오래 버티기 이런 것에 꽂히시면 어쩔 뻔했어.’

행여 방해라도 될까 슬그머니 들어온 집사는 세상 제일의 불가사의를 마주하기라도 한 것처럼 인상을 한껏 찌푸리고 책을 내려다보는 작은 주인에게 고했다.

“도련님, 주인님께서 잠시 연회장에 들러 인사라도 하시라고…….”

“나 바빠. 이 책이 또 헛소리를 하고 있단 말이야.”

“도련님의 탄신을 축하하기 위해 모인 이들입니다. 적어도 얼굴은 비추셔야지요.”

“매년 돌아오는 생일인데 뭐 그리들 유난이야?”

“도련님의 여덟 살 생일은 단 한 번이니 다들 유난이지요.”

“나중에, 정말 만에 하나 내가 아이를 낳게 된다면 나는 절대 생일 따위에 이렇게 요란 떨지 않을 거야.”

약 스물 몇 해 뒤에 딸의 생일파티를 위해 황제의 연회장을 강탈해버릴 예비 팔불출이 미래도 모르고 툴툴댔다.

휴고는 손에 들고 있던 책을 테이블에 성의 없게 툭 던졌다. 그러자 옆에 놓여 있던 체스판 위의 말들이 좌우로 흔들리다가 옆으로 쓰러진다.

바닥에 데구루루 구르는 흑색 킹과 백색 퀸을 가만히 내려다보던 휴고는 쯧 혀를 차며 이를 집어 올려두었다.

“아. 도련님. 가시기 전에…… 베르타샨 영애께서 따로 선물을 보내셨습니다.”

“안 받아. 걔가 보낸 거 보면 화병 나.”

퉁명스러운 말과 달리 휴고의 눈은 집사의 손으로 도르르 굴러갔다.

투명하게 보이는 태도에 집사가 옅게 웃었다.

두 분의 관계가 친우인지 원수인지는 모르겠지만, 그간 쪽지 몇 번 주고받으셨다고 관심을 보이시는 것이 퍽 귀여우시다.

집사는 등 뒤에 숨겨 두었던 책을 꺼내 휴고에게 건넸다. 그러자 은근히 기대하던 표정이 팍 식어버렸다.

“또 책이야? 그 촌구석 영지엔 책밖에 없는 모양이지?”

도덕론. 이름도 거창하다.

익숙하게 겉표지를 열어보니 쪽지 하나가 달랑 붙어있다. 심지어 밥풀로 붙였다. 더럽게.

「안녕, 재수탱이. 생일이라고? 부디 사람답게 자라길 바라면서 인성 함양을 위한 책을 보내. 모를 것 같아서 알려주자면 함양은 길러 쌓는다는 뜻이야. 참, 네가 보낸 목검은 언젠가 네 뒤통수를 후려갈기기 위해 잘 보관하고 있으니 염려 마.」

성난 고양이처럼 쪽지를 물어뜯어 바닥에 패대기친 휴고는 집사를 따라 연회장으로 향했다.

“베르타샨 백작께서도 오셨어?”

“물론이지요. 주인님의 벗이시니까요.”

“백작부인은?”

“영지를 지키고 계십니다. 변경백(邊境伯) 일가는 쉬이 자리를 비울 수 없는 법이지요.”

“그럼…….”

“영애께선 못 오셨습니다. 듣자 하니 숨바꼭질로 속여 겨우 떼어두셨다고 하더군요.”

“……흥. 유치하긴.”

집사는 어린 주인의 얼굴을 흘끗 살폈다.

솜털이 보송한 얼굴에는 아쉬움과 다행스러움이 공존하고 있었다.

집사의 시선을 느낀 휴고가 빠르게 표정을 갈무리했다.

“잘 됐지, 뭐. 나 아직 책 다 못 읽었거든. 그 못된 것이 오면 내가 멍청하다면서 깔짝댔을 거야. 그럼 나는 책으로 그 녀석 머리를 찍어버렸겠지.”

“체스는 조금 진척이 있으십니까?”

“……그런 실례되는 질문 하는 거 아니야.”

휴고는 대귀족 가문의 후계자답게 고개를 빳빳하게 들고 회랑을 가로질렀다.

혼잡한 연회장에서 빠져나와 쉬고 있던 귀족들이 앞다투어 인사를 건넸고, 나름대로 가문의 위신을 생각하는 휴고는 정중하게 고개를 숙였다.

‘내 이런 의연한 모습을 그 녀석이 봐야 하는데.’

다시 걸음을 옮기려던 그때. 익숙한 이름이 귓가를 간질였다.

“베르타샨 영애가 그리도 출중하다던데.”

“지오스 왕국까지 소문이 파다하더군요. 영지에 무슨 일만 생겼다 하면 척척 해결책을 내놓는다고요.”

“제게 영애와 비슷한 나이의 아들 하나가 있는데…….”

“어머, 양심은 영지에 두고 오셨나요? 영식은 이제 막 두 살이 되었잖아요!”

귀를 쫑긋 세우고 엘리시아에 대한 극찬을 엿듣던 휴고가 투덜댔다.

“고슴도치보다 더 뾰족한 성질을 아무도 몰라서 저러는 거야.”

“외람되오나, 도련님. 영애의 성정은 밝고 다정하다고 정평이 나 있습니다.”

“그럼 아주 못난이일 거야. 심술보가 덕지덕지 붙었을걸?”

“외람되오나, 도련님. 영애의 외양은 아기천사나 다름없다고 널리 소문이 났습니다.”

“……외람되지만, 집사. 집사는 내 편이야, 걔 편이야?”

난생처음 뚜껑 열리게 한 또래 아이를 모두가 입을 모아 칭찬한다.

아무도 그 녀석의 본질을 몰라!

잔뜩 심통이 난 휴고가 발을 콩콩 굴렀다.

‘그 몹쓸 녀석. 언젠가 만나기만 해봐라.’

책을 달달 외우고 체스를 수만 번 두어서 코를 아주 납작하게 눌러줄 테다.

***

엘리시아 베르타샨, 8세.

무복을 입고 연무장을 뽈뽈 돌아다니던 엘리시아는 물집 잡힌 손에서 검을 툭 내려두었다.

어느새 손잡이 부분이 새까매진 목검이 흙바닥 위에 떨어지면서 옅은 먼지를 일으켰다.

‘그 녀석, 지금쯤 내 쪽지를 보고 분통이 터져 부들부들 떨고 있겠지?’

이번에 나도 갔으면 좋았을 텐데. 만나서 확 대거리 한 판 하게.

상상하며 엘리시아가 사악한 웃음을 짓고 있자, 큰 오라버니가 수건으로 땀을 닦아주며 물었다.

“엘. 그새 아르티나의 공자님이랑 친구라도 됐어?”

“친구는 무슨!”

“친구가 아니라기엔 너 잘 때도 그 목검 껴안고 자잖아. 아니면 혹시…… 공자님한테 다른 마음이라도 품고 있는 거야?”

“응! 죽여버리겠다는 마음을 품고 있어!”

“……공자님의 검술 실력이 굉장히 출중하대.”

“그래서 나도 연마 중이지!”

“풍채도 엄청 좋다던데.”

“얼굴로 치면 나도 어디 가서 지지 않아!”

“넌 못난이잖냐. 공자님은 잘생겼다니까?”

“그럴 리 없어. 얼굴은 심보 따라간다고. 분명 심술보가 덕지덕지 붙었을걸?”

“그래서 네 얼굴에도 심술보가 덕지덕지로구나.”

“내일 아침에도 오라버니 방에 닭 풀어버릴까?”

“……참아주라. 아직도 닭똥 냄새가 진동을 한다.”

오라버니의 너스레에 씩 웃으며 목검을 들어 올린 엘리시아는 눈앞의 짚 인형 머리를 내리쳤다.

목검이 제법 무거운 데다가 힘 조절을 하지 못한 탓에 탁, 소리가 아닌 뻐어억, 소리가 울려 퍼진다.

‘내 호의를 농락으로 갚은 녀석. 언젠가 만나기만 해봐라.’

검을 만 번 휘둘러서 이 소리를 네 머리에다 내줄 테다.

***

「나 역시 네가 준 책들을 잘 보관하고 있다. 너를 만나면 흉기나 다름없는 이 무식한 책들로 네 뒤통수를 후려갈기고자.」

「오늘부터 뒤통수 연마 들어간다. 돌머리를 상대하려면 돌머리가 되어야지.」

「돌머리? 내가? 내가 아버지의 자리를 물려받기만 하면 너를 잡아서 잔뜩 괴롭혀주마. 닭장에 들어가는 것을 그리도 좋아한다고 하니 네 방에 온통 투계를 풀어버릴 테다.」

.

.

.

「너 내가 보낸 쪽지 우리 아버지한테 일렀냐? 이 얌생이가 치사하게!」

***

휴고 아르티나 9세.

엘리시아 베르타샨 9세.

둘은 종종, 아니, 제법 자주 선물과 쪽지를 주고받았다.

쪽지에는 날이 갈수록 유려해지는 욕이 가득했고, 선물에는 점점 무르익어가는 농락의 뜻이 담겼다.

둘 다 누구에게 지고는 못 사는 지독한 성격이었기에, 엘리시아가 오라버니들로부터 무예를 배우는 것과 휴고가 어려운 단어를 하나하나 짚어가며 책을 읽는 것은 이제 일상이 되었다.

상황이 이에 이르니 부모님들로서는 서로의 아이가 기껍지 않을 수가 없었다.

둘은 전혀 모르는 혼담이 슬그머니 오가기 시작한 것은 그 무렵부터였다.

“요즘 들어 베르타샨에 더욱 자주 가시는 것 같은데요, 아버지.”

“자주라니. 휴가 겸 가끔 가는 것을.”

“그런데 우리 아들, 이젠 우리가 공작저를 비운다고 해도 사악하게 웃지 않는구나.”

“사실 예전에는 아버지 어머니 안 계실 때 수업 빼먹으려고 했었는데…….”

이젠 안 그러거든요, 저. 말끝을 흐리며 잠시 머뭇거리던 휴고는 아버지에게 진검과 조금 긴 편지 하나를 건넸다.

“이거 걔 좀 전해주세요.”

“걔?”

“그 못된 애요.”

가만 내려다보던 공작이 피식 웃었다. 못된 애라면서 편지엔 제법 정성을 들인 게 보였다.

“전하고 싶은 말이 많은 모양이구나.”

“제가 얼마나 똑똑해졌는지 남겨뒀어요. 이걸 읽는 걔 표정도 잘 살피셨다가 저한테 꼭 알려주셔야 해요!”

“그래, 엘리시아 그 아이가 얼마나 감탄하는지 꼭 살펴서 네게 일러주마.”

공작이 허리 숙여 아들의 머리를 쓰다듬었다.

“잘 다녀올 테니 네가 나의 대리로서 의연히 버티고 있어야 한다. 오는 길에 선물 많이 사다 주마.”

“걱정 마세요. 저도 이제 다 컸으니까.”

자신만 믿으라는 듯 어깨를 편 채로, 휴고는 빠르게 멀어져가는 마차 뒤꽁무니를 바라봤다.

책을 죄다 읽고 일일이 독후감까지 썼으니, 아마 그 녀석이 편지를 보면 깜짝 놀라 자빠질 터다.

“벌써 고소하네!”

키득 웃으며 후련한 마음으로 배웅을 마친 휴고는 미처 몰랐다.

애써 준비한 선물과 편지는 전해지지 못하리라는 것을.

다시는 부모님을 뵙지 못하리라는 것을.

이것이…… 어릴 적 빛나는 추억의 종막이라는 것 역시도.

***

“……꿈이야.”

휴고는 확신했다. 아니, 실은 확신하지 못하여 간절히 빌었다.

당장이라도 날아오를 것만 같은 금빛 용이 음각된 관. 저 관에 누울 수 있는 이는 한 시대에 단둘이다.

가주.

그리고 가주의 반려.

그게 왜 지금. 기사들의 어깨에 메여서. 우리 집으로 들어오는 거야?

멍하니 흔들리는 휴고의 눈앞을 누군가 가로막았다.

“보, 보시면 안 됩니다, 도련님.”

“도련님을 모시고 들어가거라!”

휴고는 만류하는 가신들의 손을 뿌리치고 비척비척 걸었다.

“안 됩니다, 도련님!”

“뭣들 해! 어서 도련님을……!”

“……비켜.”

어린아이의 힘이라곤 믿을 수 없는 완력이 기사들을 밀어냈다.

비틀비틀 관 앞으로 다가서니 그 안엔 난자당한 시신이 있다.

휴고는 형편없이 떨리는 손으로 시신의 얼굴을 가린 흰 천을 끌어 내렸다.

동시에, 잇새에서 어린 짐승 같은 날것의 신음이 샌다.

“흐으…….”

아버지.

“으으아…….”

어머니.

잘 다녀오겠다고 하셨잖아요.

오는 길에 선물 가득 사다 안겨주겠다고 하셨잖아요.

근데 왜 여기 이렇게 차갑게 누워서…….

“……약속, 다 어기고…… 이리 편안한 표정으로, 가시면…….”

제가 원망도 못 하잖아요.

왜 저만 남기고 저 먼 타지에서 눈 감으셨냐 미워하지도 못하잖아요…….

형체 없이 중얼거리던 말이 어느 순간 뚝 끊겼다.

휴고는 그대로 뿌리 내린 나무라도 된 듯 그 자리에 붙박였다.

가신들을 뒤에 둔 작은 등은 때로 감정을 욱여넣듯 일렁였다가, 무언가 다짐하듯 단단해졌다가, 새기듯 아프게 떨렸다가, 이내 다시 일렁이기를 반복했다.

울지도, 먹지도, 잠들지도 않고 그렇게 사흘 밤낮이 꼬박 지난 뒤.

죄 갈라진 목소리로 뱉은 첫 물음은 제 부모를 꼭 닮아 있었다.

“……베르타샨은?”

“……지워졌습니다. 완전히.”

“…….”

“백작 부부와 두 영식, 기사들과 가신들 모두 죽었습니다. 영애의 생사는 확실치 않으나, 소수의 영지민을 이끌고 빠져나가는 것을 본 이가 있다고 합니다.”

“…….”

그날.

휴고는 웃음과 울음을 모두 잃었다.

***

엘리시아는 도망치고 또 도망쳤다.

불길하게 검은 하늘. 구름에 가린 달, 추적추적 내리는 비. 그 아래 사그라지지 않는 화마가 솟구쳤다.

미처 보지 못한 나무뿌리에 걸려 휘청이자, 땅을 짚은 손바닥이 주욱 찢어져 나간다.

“흐윽, 엄마…… 아빠아…….”

엄마가. 아빠가. 두 오라버니가.

아저씨가. 공작부인이.

유모가. 기사들이. 정원사가. 요리사가. 영지민들이.

모두 죽었다.

엘리시아는 보았다.

검이 그들의 몸을 꿰뚫고 나오는 것을. 조금 전까지 웃음 짓던 입가가 파르르 경련하다 움직임을 멈추는 것을. 생명이 꺼지는 광경을. 엘리시아는 죄다 보았다.

“나도, 나도 데려가아…… 흐윽, 나도…….”

여기서 죽고 싶었다. 홀로 살아남고 싶지 않았다. 남은 삶이 죽는 순간보다 지옥일 것임이 너무도 자명해서.

그럼에도.

- 뛰어라, 엘리시아!

- 뛰어!

- 도망쳐, 꼭 살아남거라.

귓가에 주문처럼 아른거리는 목소리들.

그것들을 부여잡고 처절하게 달리는 이유는 단 하나였다.

내가 마지막 베르타샨이니까.

이 한 줌도 안 되는 영지민들은 오로지 나 하나를 보고 달리고 있으니까.

악마의 불이 영지를 완전히 지워버린 그날.

엘리시아는 웃음과 울음을 모두 잃었다.

***

부모님이 돌아가신 날로부터 무려 일곱 해.

휴고는 악귀처럼 검을 휘둘렀다.

복수심. 그것이라도 악착같이 붙들지 않으면 숨을 쉴 수가 없었으니까.

어느 어두운 밤, 달보다도 밝은 검기를 발현해낼 수 있게 된 그때.

휴고는 아버지의 시신과 함께 돌아온 검 한 자루만을 허리에 차고 베르타샨으로 향했다.

***

영지가 화마에 휩싸인 날로부터 무려 일곱 해.

엘리시아는 해와 함께 검을 휘두르고 달과 함께 정령술을 익혔으며, 새벽안개 속에서 전술을 공부했다.

원한. 그것이라도 억세게 붙들지 않으면 살 수가 없었으니까.

어느 어두운 밤, 물의 정령과 계약을 맺은 그때.

엘리시아는 불길 속에서 겨우 건져낸 가문의 검 한 자루만을 허리에 차고 베르타샨으로 향했다.

***

휴고 아르티나 16세.

엘리시아 베르타샨 16세.

“이름이 뭐야. 넌.”

“휴고.”

“성은?”

“아르티나.”

“……엘리시아 베르타샨.”

둘은 비로소 만났다.

천진하게 쪽지를 나누던 어린아이에서 찢어지는 고통을 홀로 감내한 소년과 소녀가 되어.

그들의 부모가 스러진 바로 그 땅 위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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