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287화: 외전. 휴고와 엘리시아 (1)
“토끼야.”
“응, 폐하.”
“너 나한테 할 말 없어?”
“항상 넘치도록 많지.”
마계 옥좌에 거만하게 앉아 있던 이벨리아가 그 말에 반색하며 허리를 꼿꼿하게 세웠다.
하여간 이 요망한 토끼. 꼭 이렇게 판을 깔아줘야 운을 띄운단 말이지.
“자, 해 봐. 어서!”
그러자 겁도 없이 옥좌 양 팔걸이에 손을 짚은 아가레스가 머리 위로 짙은 그림자를 만들어 낸다.
단단한 사내의 몸이 조심스럽게 쏟아져 내리고, 이마에 불처럼 따뜻한 입술이 와닿았다. 그리고 그보다 뜨거운 목소리.
“사랑해.”
“…….”
“……?”
아가레스는 반응 없이 멀뚱히 올려다보는 연인을 의아하다는 듯 바라봤다. 이상하다. 평소 같으면 해사하게 웃으면서 안아줬을 텐데?
‘설마 마르바스가 경고했던 것처럼 밀고 당기기를 하지 않아서……?’
세상이 쪼개지는 듯한 불길한 상상에 악마의 눈꼬리가 서러운 강아지처럼 내려갔다.
“이브.”
“…….”
“혹시 내게 질렸어?”
“갑자기 무슨 헛소리야!”
“그럼 왜 아무 답도 안 해줘?”
“하고 싶은 말은 그게 다야?”
이벨리아는 순진한 표정으로 고개를 기울이는 연인을 빤히 바라봤다.
토끼를 탈탈 털어봤자 뭐가 더 나올 것 같지는 않다.
씨익, 씨익, 콧김을 내뿜으며 이벨리아가 옥좌를 박차고 일어섰다.
“됐어! 나 다시 집에 다녀올래!”
“같이…….”
“토끼는 반성이나 하고 있어!”
“이, 이브?”
이벨리아는 아가레스가 열어 준 보랏빛 통로로 쌩하니 들어갔다.
마계와 인간계를 잇는 통로 밖까지 쾅쾅 울리는 발소리가 왕의 심기 불편함을 그대로 드러내는 듯하다.
덩그러니 혼자 남은 아가레스가 한숨 쉬며 주머니 속 반지를 매만졌다.
“……아무리 그래도 이렇게 멋없게 할 순 없잖아.”
봐 줘, 이브.
네가 듣고 싶어 하는 그 말은 내가 가장 하고 싶은 말이기도 하니까.
***
그 시각, 모두가 분주한 아르티나 공작저.
경력이 깡패라는 말을 몸소 보여주기라도 하듯 유일하게 한가한 선대 공작 부부는 별채 뒤뜰에 놓인 의자에 늘어지게 누워 햇빛을 만끽하는 중이었다.
“나른하네요.”
“왜 우리 딸이 그렇게 백수가 되겠다고 노래를 불렀는지 알겠군.”
“백수 만세.”
가을바람이 나무를 훑고 지나가자 낙엽이 두 사람의 머리 위로 우수수 떨어져 내렸다. 그러나 지긋한 중년이 된 부부는 손 하나 까딱하지 않았다.
“엘. 당분간은 공작저에 머무는 게 어때?”
“언제는 영지 돌아다니는 게 좋다더니?”
“지금도 그렇긴 한데, 우리 딸 곁에 속 시커먼 놈 하나가 호시탐탐 기회를 노리고 있으니 말이지.”
엘리시아가 탐탁지 않은 표정으로 바라보자 휴고가 뒹굴 몸을 돌려 열변을 토했다.
“어제만 해도 그래. 그 몹쓸 악마 놈이 같잖게 촛불을 켜고 있었다고.”
“촛불?”
“첨탑으로 오르는 길을 죄다 촛불로 장식을 해뒀어. 우리 딸을 그곳으로 불러내 뭘 하려고 했는지는 안 봐도 뻔하지.”
“흐음…….”
“듣자 하니 이런저런 요망한 시도가 한두 번이 아니라고 하던데, 마침 어제 영지에서 돌아오지 않았으면 어쩔 뻔했어.”
가만히 듣던 엘리시아가 거칠게 오르내리는 남편의 가슴에 손을 얹고 픽 웃었다.
“촛불이라니. 귀여운 구석이 있네.”
“귀엽긴 뭐가 귀여워. 촌스럽지.”
“촌스럽긴요. 자루에 처박히고 나서야 청혼한 당신보단 낫지.”
“…….”
휴고의 입이 조개처럼 꽉 다물렸다. 엘리시아가 놀리듯 빙글 웃었다.
“다시 말해봐요, 자루씨. 촛불이 뭐가 어쨌다고요?”
붉어진 목덜미로 어찌어찌 변명을 꺼내보려던 찰나.
별채에서 다급한 외침이 들려왔다.
“도움! 도움! 이브 도움!”
휴고가 자리에서 벌떡 일어섰다.
타이밍 최고다, 우리 딸!
***
별채의 응접실. 드넓은 공작저 중에서도 가장 한적한 곳에 있기에 창밖을 기웃거리는 새들의 지저귐이 잔잔하게 스며드는 곳.
이벨리아는 부모님의 옷자락 끝에 짙게 든 풀물을 내려다보다가 포옥 한숨을 내쉬며 입을 열었다.
“엄마. 나 궁금한 게 있어요.”
“우리 딸이 아직도 엄마 도움을 필요로 하다니 기분 좋은걸. 뭐든 말해보렴, 아가.”
“예전에 엄마 일기장 보니까 아빠는 뇌도 근육으로 덮여서 엄마한테 청혼을 안 했다고 쓰여 있던데.”
“쿨럭…….”
가만히 있다가 날벼락 맞은 휴고가 사레들려 기침을 했다. 그러나 이벨리아는 아랑곳하지 않고 질문을 이어갔다.
“엄마가 아빠를 자루로 요리조리 해서 청혼을 받은 거죠?”
“그랬지. 거의 엎드려 받았다고 할 수 있단다.”
“아니, 엘. 그게 아니었는데-.”
“죽어도 청혼 안 하던 아빠한테 청혼을 받은 그 자루 비법 좀 알려주세요.”
“아니, 둘 다 지금 오해를 하는 것 같은데-.”
휴고가 아내와 딸의 대화에 어떻게든 끼어들고자 했으나 똑 닮은 두 모녀는 놀라우리만치 관심을 주지 않았다.
엘리시아가 자꾸 달싹이는 휴고의 입에 가장 퍽퍽해 보이는 다과를 넣었다. 그만 입 다물라는 뜻.
“자루 비법이 왜 궁금하니, 딸?”
“우리 토끼도 자루에 확 담아버리게요.”
“이런, 불쌍해라.”
그 악마 나름대로 열심히 하는 것 같은데.
아르칸을 필두로 한 아르티나 일가의 청혼 방해 공작은 철저히 이벨리아가 모르는 곳에서 이뤄졌기에, 대악마는 삽시간에 자루에 처박힐 위험에 처했다.
모든 사실을 알고 있음에도 엘리시아는 굳이 딸에게 이를 알리지 않았다.
감히 내 딸을 차지하려는 예비 사위를 골려주고 싶은 마음이랄까.
“자루 얘기를 하자면…… 간만에 기억을 좀 더듬어봐야 할 것 같구나.”
오랜 시간이 흘렀음에도 변함없이 은애하는 반려와의 과거를 회상하며 엘리시아가 옅은 웃음을 흘렸다.
***
휴고 아르티나, 7세.
공작부인이 둘째를 출산할 수 있을 만큼 건강하지는 않은 탓에, 휴고는 제국 유일 공작가의 하나뿐인 후계로서 금이야 옥이야 자라고 있었다.
세상 무서울 것 없는 위치에서 부족함 없는 애정을 받은 아이들이 종종 그러하듯, 다소 안하무인으로.
엄한 표정의 공작이 아들을 앞에 세워두고 꾸짖었다.
“휴고. 검술 수련을 또 빼먹었더구나.”
“델라스 경, 치사하게 일렀어?”
“왜 애먼 델라스 경에게 눈을 그리 떠! 이놈이 커서 대체 뭐가 되려고!”
“여러 번 말씀드렸잖아요. 제 꿈은 백수라고.”
“이게, 이게, 자기 꼭 닮은 자식 낳아봐야 정신을 차리지.”
“여러 번 말씀드렸잖아요. 제가 혼인을 하는 일은 없을 거라고.”
천연덕스러운 표정으로 어깨를 으쓱이는 어린 아들.
공작은 지끈거리는 이마를 짚었다.
하나뿐인 아들내미 입에서 ‘백수’ 따위의 품위 없는 단어를 떼어내고 싶은데, 어떤 스승을 가져다 붙여도 쉽지가 않다.
속 타는 아비 마음은 헤아릴 생각도 없이, 휴고는 종종걸음으로 다가와 산처럼 쌓인 짐 마차 주변을 기웃거렸다.
“또 가세요? 베르타샨에?”
“여러 번 말했잖으냐. 오늘 출발한다고.”
“여러 번 말씀드렸잖아요. 저는 잘 잊는다고.”
“……이 재앙의 조동아리를 진짜 확 그냥.”
휴고는 볼을 꼬집는 시늉을 하는 아버지를 피해 어머니 뒤로 쏙 숨어들었다. 그러고선 두 손을 배꼽에 올리고 꾸벅 인사를 건넸다.
“잘 다녀오십시오, 아버지, 어머니. 먼 길 다녀오신다니 소자 걱정되기 한량없습니다.”
“웃고 있는데?”
“딱 봐도 공부 따윈 이제 안녕이다, 생각하는 얼굴이네요.”
“……헤헤.”
마차에 올라타며, 공작이 쯧쯧 혀를 찼다.
“내가 저놈 정도의 재능을 타고 태어났으면 대륙을 씹어먹었을 것을.”
“휴고는 고작 일곱 살인걸요.”
“내가 일곱 살 때는 안 저랬어!”
“어린아이가 훌쩍 자라는 데는 계기가 필요한 법이에요. 그걸 마주하면 누구보다 잘 자랄 아이이니 재촉 좀 하지 마시고요.”
남편의 팔을 토닥이던 공작부인이 화제를 돌렸다.
“그나저나 엘리시아가 얼마나 컸을지 궁금하네요.”
“백작 그놈이 막내딸 자랑을 어찌나 하던지…… 휴고와 같은 나이인데도 벌써 영지의 온갖 고민거리를 해결하고 다닌다더군.”
“영애가 영민하다는 소문은 수도에도 파다해요. 우리 휴고의 벗이 되어주면 좋을 텐데.”
그런 아이와 친분을 맺으면 우리 아들도 조금 달라지지 않을까.
휴고가 자유의 몸으로 경제학 강의를 때려치우던 그때. 공작 부부는 아들 갱생의 희망을 안고 부지런히 베르타샨으로 향했다.
***
엘리시아 베르타샨, 7세.
변경백(邊境伯)인 아버지 덕에 수도가 아닌 변방 영지에 머무는 백작가 막내딸의 일과는 꽤 단조로웠다.
눈 뜨자마자 하는 일은 오라버니들 골탕 먹이기.
“엘리시아!”
“너 또!”
두 오라버니의 방에서 들려오는 고함이 상쾌하다. 닭장 속에 숨은 엘리시아가 당과를 입에 넣으며 키득 웃었다.
“그러게 감히 나만 떼어 놓고 수도를 다녀와?”
나한테 숨바꼭질하자면서 눈 감고 백까지 세라고 하더니. 백까지 세는 사이에 수도로 떠나 버릴 줄 누가 알았냐고.
“다 자업자득이야.”
뿌듯하게 웃던 엘리시아는 침입자를 경계하듯 꼬꼬 소리를 내는 닭을 보며 검지를 입술 위로 올렸다.
“쉿. 놀라게 해서 미안해. 딱 두 시간만 꼬끼오 참아줘.”
그렇게 닭장 속 닭처럼 건초 속에 숨어 있으니 솔솔 잠이 온다.
아침부터 오라버니들 얼굴에 칠할 물감을 구하러 뛰어다녔던 탓에, 엘리시아는 자신도 모르게 까무룩 잠이 들었다.
그렇게 몇 시간 뒤.
엘리시아는 팔을 콕콕 찌르는 부리의 감촉에 부스스 눈을 떴다.
닭이 부리부리한 눈으로 자신을 바라보고 있다. 마치 이제 방 빼라고 독촉하는 것처럼.
“알았어, 알았어…….”
중얼거리며 눈을 비빈 엘리시아가 주변을 둘러봤다. 닭장으로 들어오는 해가 쨍한 것을 보아하니 오후가 된 모양이다.
“이쯤 되면 오라버니들도 포기했겠지.”
엘리시아는 닭장의 작은 문을 엉금엉금 기어 빠져나왔다. 머리에는 지푸라기를 가득 이고 볼에는 검댕을 잔뜩 묻힌 채로.
그리고.
마침 앞을 지나던 누군가와 눈이 딱 마주쳤다.
“…….”
“…….”
아빠 친구다. 아주 어렸을 적에 뵈었던 기억이 난다.
바닥을 기고 있던 엘리시아가 땅거지 몰골로 배시시 웃었다.
“안녕하세요?”
***
“성 구경시켜드리다가 못 볼 꼴 보여드리게 될 줄은 몰랐습니다.”
“이 나이대 아이들이 다 그렇지. 신경 쓰지 말게.”
“아침부터 도무지 보이질 않던 아이가 닭장에 들어가 있을 줄은…….”
백작의 얼굴이 붉게 달아올랐다. 영지 내에선 아무리 천방지축이라고 하더라도 최소한 손님이 왔을 때만큼은 의연한 모습을 보여주길 바랐건만.
웬만한 사고도 아니고 닭장에서 기어 나올 건 또 뭐야. 귀족의 수치를 담는 책이 있다면 능히 1면에 실리고도 남을 사건이다.
“이게 다 오라버니들 때문이야. 꿀밤을 때려버린다, 간식을 없애버린다 협박을 하니까 나는 무서워서 닭장에 숨어버릴 수밖에 없었지!”
“네가 내 얼굴을 온통 물감으로 뒤덮어 놨잖아!”
“내 입술은 노란색이 됐다고!”
서로 삿대질하는 세 자식을 아련한 표정으로 바라보던 백작이 시선 돌려 공작에게 물었다.
“……공자께서는 제 딸아이와 달리 아주 기품이 넘치시겠지요?”
“…….”
“왜 대답이 없으십니까?”
차마 네 딸보다 내 아들이 더하다는 말을 할 수가 없어 공작은 멋쩍게 시선을 돌려 엘리시아를 바라봤다.
단장을 마친 엘리시아는 그 나이 아이다운 귀여움을 한껏 갖추고 있었다.
“아가.”
“저 아가 아닌데요.”
“그래, 이 아저씨가 실언했다. 엘리시아.”
“네, 각하.”
“편히 부르거라. 아저씨라고.”
“네, 아저씨.”
맹랑하게 답하는 친우의 아이가 사랑스럽다. 공작 부부의 만면에 웃음이 짙어졌다.
“영지로 오는 길에 보았는데, 강 하류의 댐을 네가 만들었다고?”
“그냥 생각만 전달한 거예요. 만드는 건 어른들이 했어요.”
“시장의 환전소도 네 생각이었고?”
“네. 베르타샨 영지는 지오스 왕국의 국경과 맞닿아 있으니까요.”
공작이 탄복했다.
“……실로 영민하구나.”
“그런 말 많이 들어요.”
극찬에도 태연하게 고기를 씹느라 흰 빵처럼 움직이는 볼. 딸이 없는 공작 부부는 엘리시아에게 완전히 빠져버렸다.
“엘리시아. 아저씨한테 너와 같은 나이의 아들이 있단다.”
같은 나이라는 말에 호기심이 동했는지 엘리시아가 고개를 들었다.
“어떤 애예요?”
공자를 상대로 한 불경한 말버릇에 백작이 화들짝 놀라 딸의 입을 막으려 했으나, 공작은 사람 좋게 웃으며 백작을 만류했다.
“내 아들이지만 신수가 참으로 훤하단다. 검에 재능도 있고.”
“대단하네요. 저는 몸 쓰는 거에는 별로 재능이 없는데.”
“대신 내 아들은 너만큼 똑똑하진 못하지. 다소 천방지축에 게으른 면이 있거든.”
아이의 입가에 묻은 소스를 냅킨으로 닦아주며, 공작이 넌지시 말했다.
“먼 훗날에 내 아들을 보고 거둘 만하다 싶으면 좋은 연을 맺어주지 않겠느냐?”
“좋은 연이요? 혼약을 말씀하시는 건가요?”
“인연에는 부부의 연 외에 친우의 연도 있지.”
“으음…… 저는 친구를 아주 깐깐하게 사귀는데…… 아저씨 아들이니까 특별히 생각해 볼게요. 물론 제 기준에 차지 않으면 어림도 없어요!”
엘리시아가 단호한 표정으로 으름장을 놓았다. 그래봤자 접시 앞엔 골라낸 마늘이 산처럼 쌓여 있어 그다지 위협적이지는 않았다.
일국의 공작을 앞에 두고도 도무지 봉인되지 않는 딸의 자유로운 말버릇에 뒷목 잡고 넘어가기 직전인 백작 부부와는 달리, 공작 부부는 엘리시아가 마냥 귀여워 크게 웃어댔다.
***
공작 부부는 이레 동안 베르타샨 영지에 머물렀다.
수도를 오래 비울 수 없기에 아쉬운 마음을 뒤로하고 돌아가는 날.
엘리시아는 공작 부부에게 책과 체스판을 건넸다.
“아저씨 주는 거니?”
“아니요, 아저씨 아들이요!”
“책과 체스판을?”
“체스도 두고 책도 읽으면서 똑똑해지라는 뜻이에요!”
“세상에, 사려 깊기도 하지. 고맙구나. 잘 전해주마.”
자, 이걸 받고 똑똑해지렴, 하면서 건네주었다가는 아들이 입에서 불을 뿜을 터다.
잘 여과하여 전해주어야겠다고 생각하면서, 공작은 엘리시아의 선물을 소중히 받아들고 귀로에 올랐다.
***
부모님이 선물을 들고 돌아오셨다.
베르타샨 백작가의 막내딸이 자신과 동갑인데, 언젠가 꼭 만나고 싶다는 의사를 표하면서 이 선물을 잘 전해달라고 했다나.
고급스러운 나무로 만든 체스판과 흉기로 써도 무방할 두께의 책을 가만히 내려다보던 휴고가 중얼거렸다.
“체스판. 책. 안 봐도 알겠군.”
아주 고루한 아이가 분명해. 어른 흉내나 내는 예법쟁이겠지.
뒤로 휙 던져버리려던 휴고는 올린 손을 잠시 멈칫했다.
“그래도 마음 써서 준 건데. 열어나 볼까.”
주변을 둘러보던 휴고는 아무도 없다는 것을 확인한 후 두꺼운 책의 표지를 열었다.
그러자 살랑이며 떨어져 내린 쪽지 한 장.
언뜻 보이는 단정한 필체가 쪽지 너머 상대방의 지루한 성격을 드러내는 듯해 휴고는 살짝 인상을 찌푸리며 쪽지를 주워들었다.
그런데 그 내용이…….
「안녕, 난 엘리시아야. 듣기로 네가 멍청하다길래 책과 체스판을 보내. 이 책 다 읽고 체스도 열심히 두다 보면 나랑 말이 통할 정도로 똑똑해질 수 있을 거야. 혹시 글을 읽을 줄 모른다면 아저씨께 읽어달라고 해! 그럼, 언젠가 만나!」
“…….”
이거 욕 맞지?
단아한 필체에 태연한 문체로 쓰여 있지만 그래도 욕 맞지?
상황 파악을 완료한 휴고가 쪽지를 와그작 구겼다.
“이, 이, 이 못된 게!”
천상천하 유아독존으로 살다가 난생처음 뼈를 두들겨 맞은 휴고의 얼굴이 처참하게 일그러졌다.
***
“집사! 나한테 선물이 왔다면서!”
“예, 아가씨. 아르티나 가문의 공자님께서 보내셨습니다.”
오. 소포가 커다랗다! 엘리시아의 눈이 반짝 빛났다.
“선물을 보내자마자 답례를 하다니! 인성이 된 놈이야!”
호다닥 달려가 낑낑대며 선물을 받아 안은 엘리시아가 환히 웃으며 포장지를 뜯어냈다. 그러자 보이는 건…….
“에엥, 검이네? 나 검은 잘 못 쓰는데.”
무거운 목재로 만들어진 검은 엘리시아가 들기엔 지나치게 무거웠다.
어쩔 수 없이 땅에 두고 데굴 굴려보자, 반대편 검날에 휘갈기듯 쓴 쪽지 하나가 붙어 있다.
「듣기로 네가 개미보다 허약하다길래 검을 보낸다. 아, 무거워서 못 들려나? 유감이로군. 그 검을 만 번쯤 휘두르다 보면 나랑 만나도 겁먹어 주저앉지 않을 정도로 건강해질 수 있을 거다. 그럼, 언젠가 만나자.」
“…….”
이거 욕 맞지?
유려한 필체에 담담한 문체로 쓰여 있지만 그래도 욕 맞지?
상황 파악을 완료한 엘리시아가 쪽지를 와그작 구겼다.
“이, 이, 이 비루먹은 놈이!”
베르타샨 영지의 폭군으로 군림하던 엘리시아의 얼굴이 야차처럼 일그러졌다.
세상 무서울 것 없이 살던 두 아이에게 얼굴 모르는 적이 생기는 순간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