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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녀님의 꽃밭에는 그들이 산다-286화 (완결) (286/323)

##  286화: 이브의 꽃밭에는 그들이 산다

화합제 준비로 분주하던 당일 아침.

이크리안은 렐리안에게 전서를 보냈다.

「급하게 할 말이 있으니 후작저로.」

혹시 무슨 변고라도 생겼나 싶어 마법을 사용해 후다닥 날아온 렐리안이 집사에게 물었다.

“오라버니는?”

“도련님께선 조금 전에 마탑으로 출발하셨습니다.”

“마탑? 내겐 급히 할 말이 있으니 후작저로 오라고 했…….”

잠깐. 문득 불길한 예감이 렐리안의 척추를 타고 찌르르 흘렀다.

“……혹시 이번 화합제에서 오라버니가 하기로 한 일이 있어?”

“예, 아가씨. 화합제 내내 제국민들이 풍등을 날리는데, 그게 하늘 높이 떠오를 수 있게 마법을 쓰시기로 폐하와 말씀 나누셨다고 들었습니다.”

“그럼 지금 이 상황, 나 어떻게 이해하면 될까?”

“도련님께서 풍등 날리기를 아가씨께 죄다 떠넘기고 도망치셨다고 이해하시면 될 것 같습니다.”

“…….”

렐리안이 손에 쥐고 있던 전서를 사정없이 구겼다.

오늘 아르칸 오라버니와 데이트하려고 다 준비해 뒀는데!

“이크리안 카시스, 이 여우가!”

당장 쫓아가서 그 얄미운 꽁지머리를 잡아 와야겠다.

어울리지 않게 대문을 박찬 렐리안은 나무 뒤로 황급히 숨어드는 연보랏빛 머리칼을 보고 흠칫 걸음을 멈췄다.

“…….”

“…….”

삽시간에 공기가 가라앉는다. 들켰다는 것을 안 네피르가 주춤주춤 옆으로 걸어 나왔다. 둘 사이에 어색한 침묵이 흘렀다.

배다른 자매. 같은 가문의 적통과 사생아.

그러나 태생부터 지고 있던 굴레를 벗은 지금은-.

마법사와 대륙 제일의 상단을 이끄는 상단주.

렐리안이 먼저 입을 열었다.

“……여긴 어쩐 일이야?”

“내가 못 올 데 왔어?”

“다신 안 올 줄 알았거든.”

코웃음 친 네피르가 품 안에서 두꺼운 서책을 꺼내 렐리안에게 툭 던졌다.

얼떨결에 잡아챈 책의 표지에는 자필로 제목이 적혀 있었다.

「기행록.」

빤히 내려다보던 렐리안이 물었다.

“이게 뭐야?”

“대륙 제일의 상단을 논할 때, 이제는 내가 이끄는 곳이 첫손가락에 꼽혀.”

“들었어.”

“그렇게 되기까지 내가 밟았던 모든 땅에 대한 기행록이야. 어디서 무엇을 보았는지. 이 세상에 얼마나 신기한 것들이 많았는지.”

“…….”

“이런 아름다운 세상, 새장에 갇혀 사는 너는 다 보지 못했을 테니까.”

“호의야?”

“악의였어. 이걸 본 네가 부러워 미쳐버리길 바라면서 만든 거였는데…….”

글쎄. 어느 순간부터 그건 별로 중요하지 않더라. 네게 추악한 자격지심을 갖기엔 나 역시 부족함 없이 이루었으니까.

“가볼게. 그거 놓고 가려고 온 거였어. 만날 줄은 몰랐지만.”

말끝을 흐리며 네피르가 돌아섰다.

자신도 모르게 몸을 앞으로 기울인 렐리안이 네피르의 소매를 잡았다.

“……?”

“…….”

“뭐. 할 말 있으면 해.”

“언제 한 번 놀러 와. 공작저에.”

“널 보러? 내가 왜?”

“아니. 공녀님께서 보고 싶어 하셔.”

자신도 모르게 거짓을 내뱉은 렐리안이 살짝 입술을 깨물었다. 이복동생의 익숙한 버릇을 가만히 바라보던 네피르가 조금 느리게 답했다.

“……시간 내 볼게.”

손에서 옷자락이 빠져나간다. 뒷모습을 한참 바라보던 렐리안은 네피르의 신형이 더는 보이지 않게 되었을 때쯤, 손에 쥔 기행록을 펼쳤다.

뒤로 넘길수록 글과 그림이 점점 빼곡해진다. 얼마나 정성을 쏟았는지 알 것 같았다.

그렇게 끝까지 넘기자, 마지막 장.

쓸까 말까 한참을 머뭇거린 것처럼 잉크가 뭉친 글씨가 눈에 띈다.

- 동생에게.

검지로 글자 위를 더듬는 렐리안의 입가에 산들바람 같은 미소가 번졌다.

***

대륙 최고의 정보 길드, 파라반트는 화합제 날인 오늘도 문전성시를 이루었다.

아르티나 공녀가 마계를 일통했다는 소식은 날개 돋친 듯 대륙 전역으로 퍼져나간 터.

경제에 눈 밝은 이들은 파라반트를 찾아와 이에 대한 상세 정보를 요청했다.

마계와의 교역, 그 첫 주자가 된다면 돈방석에 앉는 것은 시간문제였으니까.

파라반트에서 특별히 관리하는 S급 고객, 사슴 가면을 쓴 거상이 마스터에게 물었다.

“아르티나 공녀가 마계를 일통하였다던데.”

“…….”

“혹 파라반트의 눈이 마계에까지 닿는가.”

“닿지 못할 것은 없지.”

“값은 얼마든지 쳐줄 테니-.”

“그러나 공녀의 신변과 조금이라도 관련이 있다면, 그 정보는 파라반트의 거래 대상이 아니다.”

“……의외로군. 세상 모든 정보를 다루는 것이 기조인 줄 알았는데.”

가면 아래 마스터의 입매가 씁쓸한 호선을 그렸다.

연모하는 이의 정보를 팔 바엔 길드 문 닫고 말지.

그러나 천한 것의 연심 한 자락이 귀한 분께 오점이라도 될까, 마스터는 그저 답 없이 축객령을 내렸다.

그날 이후.

대륙 최대의 정보 길드가 공녀의 하부 조직으로 전락했다는 불명예스러운 소문이 퍼져나갔으나, 파라반트 측에서는 그 어떤 반박도 내놓지 않았다.

***

최근, 수도에는 못 보던 소담한 저택 한 채가 지어졌다.

높이 휘날리는 깃발에는 주황색 새가 그려져 있었다.

논공행상으로 받은 돈을 탈탈 털어 기어코 수도에 기반을 마련한 델포이 백작의 입은 찢어지기 직전이었다.

“하하하핫! 딸 잘 둔 덕분에 이리 호강을 하는구나!”

“내가 백작부인이라니…… 아직도 꿈만 같네요.”

좋아 어쩔 줄을 모르는 부모님과 흥분을 감추지 못하고 주변을 둘러보는 하녀들. 뒤에 서서 가만히 바라보던 카밀라가 옅은 웃음을 지었다.

영지민들에게 세금을 받으면서도 정작 되돌려 줄 수 있는 건 없어 마음이 편치 않았는데…… 이대로 가문이 부흥하면 부흥할수록 영지에 내릴 수 있는 혜택도 많아질 터다.

‘다 망해가던 가문이 수도에까지 올라오다니.’

새삼 감개무량하여 카밀라가 저택의 벽을 손으로 쓸던 찰나였다.

하인이 발 빠르게 다가와 백작에게 고했다.

“주인님, 아르티나 기사단의 카론 하벤스 경이 오셨습니다.”

“오! 어서 모시거라! 어서!”

아르티나라면 껌뻑 죽는 백작 부부가 황급히 옷매무새를 정돈했다.

아직 채 정리되지 않아 부산한 저택으로 카론이 들어서자, 부부는 한달음에 달려 나가 손을 덥석 잡아챘다.

“아이고, 고명하신 기사님께서 이 누추한 곳엔 어쩐 일이십니까!”

“말씀 낮추시지요. 저는 내세울 작위가 없습니다.”

“무슨 말씀을! 감히 누가 공녀님의 호위 기사인 경께 함부로 말을 낮춘단 말입니까!”

백작의 눈이 과히 반짝인다. 자신을 빌미 삼아 아르티나 가문과 연을 맺으려는 것이 빤히 보여 카론은 식은땀을 흘렸다.

눈치 빠른 카밀라가 자연스럽게 아버지를 떼어내고 물었다.

“무슨 일이십니까, 카론 경.”

“……공녀님께서 수도 입성을 기념하여 선물을 보내셨습니다.”

카론이 뒤에 선 이들에게 눈짓하자 적지 않은 인력이 우르르 몰려 들어왔다.

그러더니 한눈에 봐도 최상등품인 책상과 의자, 선반 등 업무에 필요한 가구 일체를 나르기 시작한다.

“이게 다 무슨…….”

“그리고 이것은 아가씨께 직접 전하라 하셨습니다.”

카론이 건넨 것은 값비싼 흑단 나무로 만든 길고 얇은 상자. 열어보자 카밀라의 이름이 음각된 고풍스러운 깃펜이 놓여 있다.

함께 놓인 전서에는 늘 그렇듯 간결한 문구가 적혀 있었다.

「그대에겐 꽃이나 보석보다 이런 것들이 더 필요할 것 같아서.」

유려한 글씨를 가만히 내려다보던 카밀라가 소리 내어 웃었다.

“또 저를 홀리시네요, 공녀님께서.”

예나 지금이나, 뒤를 따르지 않고는 못 배기게 만드시는 분이었다.

***

인간계와 마계의 전례 없던 화합제는 예상보다 더 성공적이었다.

“이거 나 주는 거야?”

“예. 저희 가게의 명물이지요.”

“나 돈 없는데?”

“그냥 드리는 겁니다. 맛보시라고요.”

“……인간들은 바보야?”

“대가를 받기도 애매한 작은 호의입니다.”

악마와 마족들은 난데없이 쥐여주는 아이스크림이나 꼬치 등을 먹으면서 연신 감탄을 흘렸다.

인간들은 죄다 이기적인 줄 알았건만, 직접 눈으로 보니 꼭 그렇지는 않았다.

역으로-.

“그거 이리 내. 내가 올려줄 테니까.”

“이거 아주 무거운데…….”

“나한텐 안 무거우니까 저기 가서 아이나 챙겨.”

인간들은 곤경에 처했을 때 툴툴대면서도 적극적으로 돕는 마족들을 바라보며 연신 감사 인사를 했다.

마족들은 죄다 폭력적인 줄 알았건만, 직접 눈으로 보니 꼭 그렇지는 않았다.

해가 기울수록 인간과 마족이 같은 일행으로 묶이는 일이 늘어났다.

심지어 주점에서는 한 테이블에 함께 둘러앉아 술잔을 기울이기도 했다.

그 사이에서 아가레스와 함께 실컷 즐기다가 공작저로 돌아온 이벨리아는 응접실에 모여 앉은 가족들을 보며 고개를 기울였다.

“응? 다들 나가서 놀지 않고 여기서 뭐 해?”

“휴고와 나는 이미 다녀왔단다.”

“꽤 재미있더군.”

“나는 금가루에 몸 굴리느라 바빠. 이따 밤에 반짝반짝 별처럼 두둥 등장할 거야. 수호룡은 마땅히 그래야 해.”

각자의 방식으로 간만의 축제를 즐기고 있는 아빠와 엄마, 엔리르와는 다르게, 오라버니들은 음울한 목소리로 원망을 쏟아냈다.

“내 연인은 폐하 곁에서 마나를 착취당하는 중이다. 저기 저 풍등은 내 연인을 갈아 넣어 날리고 있는 것이지.”

“내 연인은 얼마 전 어느 정령사에게 권능을 착취당했대. 이 봄날은 내 연인을 갈아 넣어 만든 계절이지.”

“그럼 둘 다 연인 없어서 이러고 있었던 거야? 불쌍하게?”

두 오라버니가 울적한 얼굴로 소파에 몸을 기댔다.

쯧쯧 혀를 차며 이벨리아가 제안했다.

“조금 있으면 야시장이 열린대! 우리 비밀기지 가서 놀다가 다 같이 야시장 가자!”

그러자 아가레스가 연인의 머리칼을 귀 뒤로 넘겨주며 중얼거렸다.

“……야시장. 둘이 가고 싶은데.”

“오늘은 토끼가 봐줘. 연인 잃은 기러기들 불쌍하잖아.”

이벨리아가 밤을 대비해 따뜻한 옷으로 갈아입으려 방으로 올라가자, 아가레스가 차가운 눈으로 아르칸과 세드릭을 바라보며 말했다.

“그 나이 먹고 연인 없으면 아무것도 못 하는 꼴이라니.”

“남 말 하네.”

“난 오늘 여동생과 보고 싶은 게 아주 많아. 악마는 빠져.”

“나 역시 오늘 이브와 하고 싶은 게 아주 많다. 둘 다 빠지도록.”

그러자 느리게 몸을 일으킨 휴고가 끼어들었다.

“오랜만에 딸과 오붓하게 밤거리를 거닐고 싶군. 셋 다 빠져라.”

“나는 오늘 누나랑 같이 제물 받고 싶어. 넷 다 빠져!”

“저야말로 간만에 딸과 데이트하고 싶네요. 다들 빠져요.”

묘한 긴장감이 감돈다.

누구 하나 죽어도 양보하지 않을 태세.

‘브레스 뿜고 누나를 납치해서 도망치자.’

기회를 노리며 날아오른 엔리르가 살짝 입을 벌렸다.

심상치 않은 기운이 입가로 모이던 그때.

‘……!’

악마의 주머니 속 반짝이는 무언가가 포착됐다.

보석이라면 사족을 못 쓰는 용이 먹이를 낚아채는 솔개처럼 수직 하강했다.

이윽고 엔리르의 입에 물려 나온 것은-.

“엄청 반짝이는 반지다! 악마, 이거 왜 가지고 있어?”

“……내놔.”

눈에 보이지도 않는 속도로 회수한 아가레스가 애써 태연하게 시선을 돌렸다.

그러나 지금 이곳엔 엄청 반짝이는 반지를 주고받았던 기혼자가 무려 셋이나 있다.

“그 반지…….”

“설마 그거…….”

“……청혼이라도 하려고? 우리 아가에게?”

아가레스의 귓가가 옅게 붉어졌다.

현실을 부정하듯 경악한 아르티나 일가의 눈빛을 받으며, 악마는 속으로 혀를 찼다.

‘오늘은 글렀군.’

***

도톰한 망토를 걸치고 나온 이벨리아가 의외라는 듯 말했다.

“어째 다들 사이좋게 서 있네? 누가 나랑 야시장 갈 건지 대판 싸우고 있을 줄 알았는데.”

“싸울 틈이 없었다. 너무 충격적인 것을 목격해서.”

“뭔데, 오라버니?”

“있어. 비밀이야. 알면 다쳐.”

“뭐야, 토끼야?”

“……아직 비밀이야. 알면 다쳐.”

“뭐예요, 아빠?”

“개잡놈…….”

“……?”

***

비밀기지의 사계절은 모두 아름답지만 이벨리아는 그중에서도 봄의 풍경을 가장 좋아했다.

경계에 발 들이자마자, 만발한 도화가 오랜만의 손님을 반기듯 물결처럼 살랑인다.

“짜잔! 내 비밀기지에 온 걸 환영해! 다들 마시고 싶은 거 있어?”

비밀기지의 주인이 기세등등하게 객을 맞았다.

“물 부탁한다, 아가.”

“나는 와인.”

“응, 잠시만!”

오두막으로 달려간 이벨리아는 시원하게 보관해 두었던 오렌지 주스를 가지고 나와 모두에게 나눠주었다.

“……물은?”

“와인은?”

“내 비밀기지에서 마실 수 있는 액체는 오렌지 주스뿐이야! 다들 편히 마셔!”

물의 정령사인 주제에 정령 불러서 물 달라고 할 정성조차 없는 모양이다.

강제로 오렌지 주스를 쥔 이들은 돗자리 위, 나무 아래, 돌 위에 각자 자리를 잡고 앉았다.

루드비히의 매, 라르고가 긴 울음을 토해내며 창공을 휘돌았다. 마치 주인을 찾는 것만 같아, 이벨리아는 달래듯 속삭였다.

“네 주인은 바빠. 네가 날고 있는 하늘도 이젠 네 주인의 것이거든.”

알아듣기라도 한 것처럼, 영명한 매는 가지 위에 내려앉아 깃털을 골랐다.

제법 고지 높은 곳에 있음에도 멀리 산 아래 축제 소리가 어렴풋하게 들려온다.

소리를 날라 온 봄바람이 그들 모두를 포옹하듯 감쌌다.

“우리 딸 비밀기지 참 평화롭다.”

종전 이후 딸을 되찾고 나서는 각종 뒷수습으로 눈코 뜰 새 없이 바쁜 나날이었다.

오랜만의 휴식에 엘리시아는 휴고에게 기대 선잠이 들었다.

휴고 역시 미리 챙긴 담요를 엘리시아의 어깨에 덮어주고 잠시 눈을 감았다.

“야. 이 정도면 됐어?”

“더 뿌려줘. 별처럼 빛나게.”

소리 죽여 대화 나누며 세드릭은 엔리르의 몸에 양념을 치듯 금가루를 툭툭 뿌려주었다.

“풍등이 아주 잘 날아가는군. 이크리안 녀석의 머리 위로 떨어져 불이 붙으면 좋으련만.”

잔디 위에 자유로이 누운 아르칸은 하늘을 수놓는 풍등을 보며 마탑으로 튀어버린 벗을 향한 저주를 내뱉었다.

그리고…….

조금 떨어진 곳.

가족들을 바라보던 이벨리아의 입가엔 진한 미소가 내려앉았다.

“역시 우리 비밀기지야. 누가 와도 행복해지는. 그치?”

“나조차 행복하게 만들었던 곳이니 오죽할까.”

그 말이 또 달콤하여 연인의 어깨에 기대는데, 문득 옆 바위에 남은 묘한 문양의 생채기가 눈에 들어온다. 이벨리아가 픽 웃었다.

“아스. 이거 기억나?”

“네가 검술 못 해 먹겠다고 검을 던지는 바람에 생긴 상흔. 기억나지.”

“저기 오두막 문은 어쩌다 약간 기울어졌더라?”

“저건 황제 놈이 그랬다.”

“아, 기억난다. 네가 루이한테 우냐? 울어? 놀려서 루이가 문짝 부숴버렸었지.”

찬찬히 시선을 돌리자 작은 흔적들 하나하나마다 선연히 새겨진 추억이 아른거린다.

카론과 함께 비밀기지를 알아보러 다녔던 일.

아르티나 기사단이 오두막을 세워줬던 일.

루드비히를 처음 만났던 일.

아가레스에게 검술을 배웠던 일…….

이곳에서 함께 웃고, 울고, 꿈을 꾸고, 끝내 바로 섰던 그 모든 날들.

흘러간 시간을 마주하며 이벨리아가 읊조렸다.

“……보기 좋다.”

“네가 이 손으로 일군 꽃밭이니까.”

“우리 모두가 함께 가꾼 꽃밭이지.”

정쟁이 버거워 수도 없이 마음을 죽이던 황태자는 강대한 군주로.

세계의 배척을 받아 헤매던 악마는 시간을 함께 걷는 연인으로.

가혹한 학대를 받다가 도망친 용은 제국의 유일한 수호룡으로.

시한부 인생을 살던 후작가 영애는 비견할 데 없는 대마법사로.

모든 것을 증오하던 사생아는 대륙 제일을 논하는 상단주로.

“……모두 어른이 되면 시원섭섭할 줄 알았는데. 그냥 시원하기만 하네.”

“섭섭함이 남지 않을 만큼 후회 없이, 매 순간 최선을 다해 걸었다는 뜻이겠지.”

악마가 자신의 유일한 신에게 경배하듯 입을 맞추며 속삭였다.

“나의 왕답게.”

노란 꽃잎이 둘의 머리 위로 소담스레 흩날렸다.

이마를 맞댄 연인이 소리 내 웃으며 다시 한번 입술을 겹쳤다.

모든 것이 낡아가는 시간 속.

우리 모두는 뜨겁게 만개했다.

서로를 버팀목 삼아…… 아주 찬란하게.

완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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