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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녀님의 꽃밭에는 그들이 산다-285화 (285/323)

##  285화: 새로운 공작가문, 루페르트

큰 전쟁이 끝나면 모두의 귀추는 논공행상에 주목된다.

목숨 바쳐 전공을 세운 공신에게 새로운 작위와 전리품, 그리고 금은보화를 하사하는 의식.

이는 비단 전쟁에 참여한 이들에게만 국한되는 행사는 아니었다.

한 발 떨어져 있던 이들로서도 누가 얼마큼의 공을 세워 어떠한 보상을 받을 것인지 짐작하는 것은 제법 흥미로운 이벤트가 되기 때문이다.

아니나 다를까, 논공행상을 거행한다는 방이 나붙자 귀족들부터 제국민들까지 둘만 모이면 열띤 토론을 벌이기 일쑤였다.

“이번 논공행상은 왜 이렇게 늦어졌다는가? 전쟁 끝난 지도 벌써 일 년이 다 되었는데!”

“가장 큰 공을 세우신 공녀님과 후작 각하께서 부재중이셨지 않은가.”

“게다가 황제 폐하께서도 이제 막 즉위식을 치르셨고.”

정확했다. 사실 진작 진행되어야 했던 논공행상은 황위의 공석과 둘의 부재 때문에 여태 미뤄진 터였다.

“누가 특별대공일지 내기하겠나?”

“그야 뻔하지! 아르티나의 공녀님과 루페르트 후작 각하 아니겠는가!”

“나도 거기에 걸지!”

“나도!”

“……죄다 같은 의견이니 내기 성립이 안 되겠구먼. 그럼 특별대공 바로 아래, 제1공을 맞추는 것으로 하세.”

“좋아. 나는 카시스의 소가주님께 걸겠네!”

“나는 선대 공작님께 걸지!”

논공행상의 공은 총 네 등급으로 분류된다.

구국의 공은 특별대공.

승리에 크게 기여한 공은 제1공.

전황을 유리하게 이끈 공은 제2공.

황제나 황태자 등 제국의 근간을 지킨 공은 제3공.

제국 역사상 유례없을 정도로 큰 전쟁이었던 만큼, 제3공 안에만 들어도 그 보상은 상상을 초월할 터다.

“어쩌면 새로운 작위를 하사받는 가문이 나올 수도 있겠군!”

과연 어떤 가문일까.

누가 새로운 실세로 부상할까.

저잣거리 노점의 불은 늦은 밤까지 꺼질 줄을 몰랐다.

***

논공행상 당일.

대전 가장 높은 곳에 앉은 루드비히는 좌우에 빼곡하게 도열한 귀족들을 훑었다.

상석에 이르러 진득하게 머물던 시선이 힘겹게 거둬졌다.

그가 작게 고개를 끄덕이자 시종장이 시작을 알렸다.

“2차 인마전쟁의 논공행상을 거행하겠습니다-!”

장엄한 북소리가 대전을 울린다. 그에 맞춰 귀족들의 가슴이 둥둥 뛰었다.

그 어느 가문이더라도 제3공 안에 들기만 하면 팔자 펴는 것은 당연지사요, 높은 확률로 작위의 승급 또한 이뤄질 터.

가주들은 참전했던 자식들의 어깨를 꽉 쥐며 고개를 끄덕였다.

시종장이 붉은 비단으로 단단히 감싼 교서의 매듭을 풀었다.

가장 첫 순서로 불리는 자가 가장 큰 공을 세운 자.

꿀꺽.

여기저기서 침 삼키는 소리가 들려왔다.

“아르티나 가문의 이벨리아는 앞으로 나오라!”

이변이 일어나길 기대했던 귀족들의 입에서 힘 풀린 한숨이 탁 새어 나왔다.

오늘만큼은 단정한 걸음으로 이벨리아가 황제의 단상 아래 무릎을 꿇었다. 슬쩍 마주친 시선 끝에 두 친우는 옅은 웃음을 머금었다.

시종장이 이벨리아의 공을 읊었다.

“아르티나 가문의 이벨리아는 2급 괴수종 바실리스크를 비롯한 고위 마물 수백 개체를 홀로 소멸시켰으며, 병력 전체를 지휘하여 전황을 유리하게 이끌었을 뿐만 아니라, 본인은 가장 치열한 전투가 벌어지던 남문을 수성하였다.”

어디 얼마나 공을 세웠는지 보자는 심산으로 듣던 귀족들의 표정이 파리해져 갔다.

“게다가 친교를 맺은 악마들을 지휘하여 세레스 데퐁트를 비롯한 반역자들을 잡아들였으며, 제4위의 대악마와 홀로 맞서 승리하였고, 연금술사들의 병력 또한 무력화시켰다.”

인간 하나가 이룬 업적이라고? 저게?

“그 외에도 세운 업적은 감히 일일이 나열할 수가 없으니-.”

잠시 말을 멈춰 긴장감을 고조시킨 시종장이 선포했다.

“그 공이 구국에 이르렀으므로 특별대공으로 한다!”

와아아아아!

귀족들이 순수한 경탄을 담아 환호했다. 비벼볼 만해야 질투도 나는 법. 이 정도로 압도적이라면 탄복하지 않을 수가 없었다.

옥좌에서 일어선 루드비히가 이벨리아를 내려다보며 말했다. 지금만큼은 친우가 아닌 군신의 관계로.

“구국의 영웅. 그대가 세운 공에는 이 말조차 부족하다.”

“영광입니다, 폐하.”

“땅과 금은보화를 하사하는 것이야 당연하나, 그것이 그대에게 얼마나 의미가 있을지는 의문이로군.”

“땅과 돈은 많을수록 좋습니다.”

“……그대가 원한다면 새로운 작위도 함께 수여하고자 하는데.”

“작위요?”

“후작위로.”

이벨리아가 고개 들어 루드비히를 노려봤다.

너 나 일 시키려고 그러지. 아주 등골 휠 때까지 부려 먹으려고.

“성은이 망극하나 거절해야겠습니다. 폐하.”

“어째서?”

“다스리게 된 세계가 이미 있어서요.”

이크리안 오라버니 꼴 나는 건 사양이다.

“가장 비옥한 곳에 성을 지어줄 텐데도?”

“괜찮습니다.”

“오렌지 나무를 잔뜩 심어줄 것인데도?”

“……좋, 괜찮습니다.”

루드비히가 아쉽다는 듯 낮게 혀를 찼다. 이래서 눈치 빠른 꼬맹이는 곤란하다니까. 이참에 보라색 뺀질이 여우처럼 곁에 두려고 했는데.

뛰어난 직감으로 마수를 피한 이벨리아가 슬쩍 운을 띄웠다.

“작위 대신 다른 것 하나를 요청드리고 싶은데…….”

“무엇이든 말해보도록.”

“인간계와 마계의 화합을 도모하는 행사를 대대적으로 개최해주셨으면 합니다.”

“마계와 인간계의 화합이라…….”

이벨리아가 모두 들으라는 듯 말했다.

“아시다시피 제가 마계를 일통하지 않았습니까.”

“……!”

전혀 모르고 있던 귀족들이 경악했다. 마계 일통이라니 그게 무슨…….

루드비히가 장단을 맞추어 답했다.

“그대가 마계의 새로운 지배자가 되었다는 소식은 들었다.”

허억. 여기저기서 숨 들이켜는 소리가 들려왔다.

“그렇다면 전례 없던 화합도 불가능한 일은 아닐 터. 조만간 진행토록 하지.”

씩 웃은 이벨리아가 하사받은 전답과 금은보화가 빼곡하게 적힌 교지를 들고 자리로 돌아갔다.

그 뒤로 선망과 경악의 시선이 진득하게 따라붙었다.

금방이라도 몰려들어 자초지종을 묻고자 하는 눈빛들. 그러나 그들이 채 한 걸음 떼기도 전, 시종장이 차순위 전공자를 호명했다.

“루페르트 가문의 아레스는 앞으로 나오라!”

느긋한 걸음으로 나간 아가레스는 루드비히 앞에 무릎을 꿇지 않았다. 그러나 그 오만한 태도를 탓하는 이는 그 누구도 없었다.

“루페르트 가문의 아레스는 고위 마물 수백 개체를 홀로 소멸시켰을 뿐만 아니라, 현저히 적은 병력만을 이끌고 동문을 수성하였고, 마계 동부의 악마들을 제국의 편으로 교화시켰으며, 적장 마왕과의 혈투 끝에 승리하였다.”

“……허어!”

“……역시 루페르트 후작께서!”

“하여 그 공이 구국에 이르렀으므로, 마찬가지로 특별대공으로 한다!”

루페르트! 루페르트!

귀족들의 연호가 대전을 쩌렁쩌렁 울렸다.

악마이면서도 인간의 편에 서서 전쟁을 승리로 이끈 제국의 귀족. 바라보는 인간들의 시선이 곱지 않을 리가 없었다.

루드비히가 이벨리아 때와는 달리 무심히 황좌에 앉아 물었다.

“그대에게 땅이나 보화는 필요 없겠지.”

“주면 받을 건데.”

“제국도 최근 주머니 사정이 좋지 않아서.”

“그렇다고 그냥 넘어가려는 속셈은 아니겠지?”

“물론 구국의 보상은 제대로 치러야지.”

루드비히가 작은 패를 휙 던졌다.

공작가를 뜻하는 공(公)이 새겨진 금빛 신분패.

“그거면 어떤가.”

“나쁘지 않군.”

이브가 마계의 왕이니, 나 역시 인간계에서 그에 버금가는 지위엔 올라야지.

흡족한 듯 끄덕이는 악마를 바라보며 루드비히가 시종장에게 턱짓했다. 시종장이 황제의 뜻을 받들어 공표했다.

“지난 전쟁에서의 전공을 참작하여, 아레스 루페르트 후작을 공작위에 봉한다!”

오래도록 이 제국 단 하나뿐이었던 공작 가문이 둘이 되는 역사적인 순간이었다.

***

논공행상은 제법 길게 이어졌다.

균열 발생 초반부에 군계일학의 마법진으로 황궁을 방어하였을 뿐만 아니라 북문을 홀로 수성하였던 카시스 소가주는 제1공에.

토벌전에서 많은 제국민들의 목숨을 구한 뒤 곧바로 복귀하여 참전하였던 휴고, 엘리시아, 아르칸, 세드릭은 제2공에.

토벌전 지원군으로 합류하였던 렐리안, 네피르, 파라반트의 마스터는 제3공에.

그리고…….

시종장의 손에 마지막 교서가 들렸다.

바라보던 귀족들이 이를 악물었다.

제발, 제발 우리 가문이 호명되기를……!

“델포이 가문의 카밀라는 앞으로 나오도록!”

“……!”

지엄한 부름에 기대조차 하지 않고 있던 델포이 자작 부부는 흡사 벼락이라도 맞은 것처럼 벌떡 일어섰다.

그러고서는 얼떨떨한 얼굴을 딸에게 돌렸다.

“지, 지금 시종장께서 너를 부르시는 게냐?”

“그런가 봅니다.”

“대, 대체, 아니, 대체 왜…….”

“제가 공을 세운 모양이지요.”

카밀라의 주홍빛 눈동자가 부모님을 찬찬히 눈에 담았다.

귀족 사회에서 살아남기엔 능력이 부족한 부모님. 객관적으로 보더라도 그리 뛰어난 점은 없는 부모님. 얼마 전에는 나를 인성 뭉개진 귀족의 후처로 들이려 하셨던 부모님.

밉지 않았다면 거짓이다. 그러나 원망한 적은 없다.

‘……괜찮습니다. 당신들의 모든 행동이 가문을 지키려는 나름의 발버둥이었음을 누구보다 잘 알고 있으니.’

카밀라가 눈을 휘둥그레 뜬 부모님의 어깨를 쥐며 말했다.

“저 역시 이제는 가문의 식솔들을 지키기에 부족함 없는 소가주 아니겠습니까.”

귀족들의 질시 어린 시선을 받으며 카밀라가 단상 아래 경건히 무릎을 꿇었다.

카밀라를 잘 알고 있는 시종장이 부드러운 눈빛으로 전공을 읊었다.

“델포이 가문의 카밀라는 전쟁 이전의 첩보 수집은 물론이요, 전쟁 당시 무려 제6위 악마의 술법을 홀로 견뎌 폐하를 위해 몸을 던졌을 뿐만 아니라, 이후 폐하를 도와 서문을 수성하였다. 세운 공이 실로 혁혁하므로-.”

시종장의 시선이 저 멀리서 두 손을 꼭 모으고 발을 동동 구르고 있는 자작에게 향했다.

“오베르 델포이 자작을 백작위에 봉한다!”

“……!”

“아이고, 황제 폐하! 이 하해와 같은 성은을 다 어떻게……!”

카밀라는 고개 돌려 부모님을 향해 자중하시라는 눈빛을 보냈다.

뚝 그친 소음 속.

충직한 수하는 그 누구보다 존경하는 주군을 향해 엄숙히 다짐했다.

“올바른 귀족이 되겠습니다. 폐하.”

“그대의 올바름과 나의 올바름은 결이 같지.”

“…….”

“믿네. 소백작.”

가문을 지키기 위해. 아니, 가문에 속한 ‘사람’을 지키기 위해 일평생 고군분투했던 소녀는 그 누구보다 귀족다운 모습으로 예를 올렸다.

***

제국에 새로운 공작가가 생겼다는 것.

아르티나의 공녀님과 그 연인이신 루페르트 공작께서 마계를 일통하셨다는 것.

마계와 인간계의 화합을 위한 축제가 바로 내일부터 시작된다는 것.

하나하나가 제국을 떠들썩하게 하기엔 부족함 없는 소식들이었다.

처음에는 악마들과 얼굴을 맞대는 것 자체를 꺼리던 이들도 그리 어렵지 않게 마음을 열었다.

오래전부터 제국에 투신하여 혁혁한 공을 세운 루페르트 공작과 둘도 없는 공신 가문의 금지옥엽인 이벨리아의 존재 덕분이었다.

하여 현재.

마르바스는 제대로 곤욕을 치르고 있었다.

“우와! 사자다!”

“사자! 머리 위가 푸릇푸릇한 사자다!”

“사자님, 사자님, 머리 위에 씨를 심으면 나무가 열리나요?”

목재를 물고 나르던 마르바스가 으르렁 이를 드러냈으나, 이벨리아가 안전한 사자라고 보증한 탓에 겁을 먹는 어린아이는 아무도 없었다.

외려 한 아이가 두 팔 벌려 마르바스의 목을 와락 끌어안았다.

“사자 털 보들보들해!”

“위에 올라타서 이랴 놀이 하자!”

확 물어버릴까.

본능적으로 든 생각에 마르바스가 푸르르 고개를 흔들었다.

이 올망졸망한 눈과 쉴 새 없이 재잘대는 입에서 어릴 적의 땅콩 폐하가 떠올랐기 때문이다.

마르바스가 거대한 입을 벌려 말했다.

“타라, 하찮은 땅콩들. 이 한 몸 바쳐 놀아주지.”

“우와, 말한다! 사자 말한다!”

“갈기를 뽑으면 죽여…… 아니, 앞발로 쓰다듬어 줄 테다.”

등 위에 올라탄 어린아이 여럿이 마르바스의 갈기를 꽉 움켜쥐었다.

“갈기 뽑지 말라고!”

“하지만 잡을 곳이 없는걸!”

“머리 위에 잔디 부분 잡아도 돼?”

“안 돼, 그게 이 몸의 포인트라고! 이 빌어먹을 땅콩들!”

입은 있는 대로 투덜거리면서도 걸음은 조심스럽다. 아무래도 등 위에 탄 어린아이들이 떨어질까 염려하는 듯했다.

조금 동떨어진 언덕에 앉아 이를 바라보던 이벨리아가 픽 웃음 지었다.

“우리 잔디 고생하네.”

“우리?”

“……그냥 잔디 고생하네.”

“어릴 적의 네가 생각나는 모양이다. 아이들에게 너그러운 성격은 아닌데.”

“어쨌든 잔디 덕분에 일이 제법 수월하겠어.”

저 복슬복슬한 털과 우스꽝스러운 정수리는 꽤 도움이 된단 말이지.

쭉 기지개를 켠 이벨리아가 연인의 어깨에 머리를 기댔다.

되돌린 봄의 선선한 바람이 둘을 훑고 지나간다.

비밀기지 같기도, 혹은 단층 속의 그 어느 순간 같기도.

가만히 눈을 감고 연인의 손길을 즐기던 이벨리아가 툭 내뱉었다.

“나도 우리 엄마처럼 공작부인이 되겠네?”

“…….”

“뭐야. 왜 말이 없어?”

“……내 연인께서는 눈치가 없어.”

“눈치 하면 이브인데?”

“그랬다면 그 말을 먼저 꺼내실 리가 없지.”

아가레스는 의아하다는 듯 올려다보는 눈가를 엄지로 쓸었다.

“준비하고 있는데 그새를 못 기다리고.”

“……그랬어? 그럼 방금 한 말은 취소!”

이벨리아가 몸을 돌려 연인의 품에 파고들면서 작게 속삭였다.

다행이다.

난 또 자루라도 준비해야 하나 했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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