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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녀님의 꽃밭에는 그들이 산다-284화 (284/323)

##  284화: 이벨리아가 불러온 봄

전쟁 이후 비어 있던 황좌가 바야흐로 주인을 맞았다.

젊은 나이에 검의 끝을 본 맹장. 동시에 인마전쟁의 주역인 적통 황태자.

모두가 우러르기에 부족함 없는 새 황제의 치세가 시작되었다는 것만으로도 제국에는 전에 없던 활기가 돌았다.

무려 이레의 연회 기간엔 즉위를 축하하기 위한 타 왕국의 사절이 연일 제국을 드나들었고, 그 과정에서 웃지 못할 일들이 다수 발생하기도 했다. 가령…….

“즉위를 경하드립니다, 폐하. 제국에 변함없는 광영이 깃들기를.”

“먼 길을 마다하지 않고 와주어 고맙소, 왕자.”

지오스 왕국의 왕자는 등 뒤로 와닿는 영애들의 시선을 즐기며 거만한 미소를 지었다.

내려다보던 루드비히가 옅게 눈을 찌푸렸다.

왕자는 헌앙한 외모와 달리 난봉꾼 기질이 있기로 소문난 자였다. 특히 여성 편력 측면에서.

‘이브가 이자의 눈에 띄지 않으면 좋겠는데.’

이브를 보면 이자의 눈이 뒤집어질 테고, 그러면 내 기분은 나락으로 떨어질 테니까.

루드비히는 연회장 중심에 선 친우를 빤히 바라봤다.

시선을 느꼈는지, 아가레스가 까주는 오렌지를 족족 받아먹던 이벨리아가 고개를 기울였다.

‘왜?’

‘잠시 발코니에 나가 있는 게 어때.’

‘아 오렌지 달라고?’

‘응. 이 왕자 놈 소문이 상당히 지저분하다.’

‘진작 말을 하지. 무게 잡느라 오렌지도 못 먹고 있었어?’

이벨리아는 오렌지를 와르르 접시에 담은 다음 터벅터벅 걸어가 루드비히에게 척 건넸다.

“여기 있습니다. 폐하.”

“……내가 공녀에게 오렌지를 가져다 달라고 했었나.”

“눈으로 신호를 보내시지 않으셨습니까?”

“……평소엔 찰떡같이 잘만 알아듣더니 오늘은 왜 이래.”

이브를 이 망나니 왕자 시선 밖으로 보내긴커녕 바로 앞까지 데려와 버렸다. 루드비히가 언짢은 한숨을 내쉬었다.

위가 소란스럽자 왕자가 흘끗 시선을 올렸다. 진한 보랏빛 옷자락이 눈에 들어온다.

호기심에 조금 더 고개를 들자…… 보이는 건 가느다란 턱과 젖살이 남은 볼, 오뚝한 코와 푸른 눈동자, 마지막으로 연회장을 밝게 비추는 화려한 금발.

“……!”

왕자가 거친 숨을 들이켰다.

이벨리아는 그제야 예를 갖추고 있는 왕자를 돌아봤다.

“아. 제가 알현을 방해한 모양입니다.”

루드비히에게 한 말이었으나 대답은 왕자에게서 들려왔다. 거세게 고개를 저으며 왕자가 말했다.

“방해라니요! 방해라니요! 실제로 뵙게 되어 그저 감개무량할 따름입니다!”

“……?”

왕자의 눈이 숫제 돌았다. 왕국에서 아름답다 소문난 여성이라면 모두 만나보았지만 이런 여인은 정말이지 본 적도 없었다.

루드비히에게 마지막 예를 갖추어 고개 숙인 왕자가 황급히 일어나 이벨리아에게 성큼성큼 걸어왔다.

“정식으로 인사드리겠습니다. 저는 지오스 왕국의…….”

미처 소개를 끝마치기도 전.

누군가 왕자와 이벨리아 사이를 몸으로 가로막았다.

“감히 누가!”

“아레스 루페르트.”

“……!”

“네 소개는 궁금하지 않고 내 소개는 마쳤으니 이만 가지.”

루페르트 후작! 생각보다 만만치 않은 이의 등장에 왕자가 꿀꺽 침을 삼켰다.

‘이자도 공녀를 은애하고 있는 모양인데…… 이대로 물러난다면 지오스 왕국 카사노바의 명성이 아깝지.’

둘의 연애 사실을 모르는 왕자가 겁도 없이 손을 뻗었다.

덥석.

얇은 손목이 부서질 듯 손아귀에 들어온다. 보드라운 감촉에 왕자는 여러 여인을 홀렸던 미소를 그려냈다.

“공녀님. 잠시 제게 시간을-.”

단번에 뿌리친 이벨리아가 서늘하게 일갈했다.

“무례하기 짝이 없군.”

“예?”

“내겐 연인이 있다.”

그러니 봐줄 때 곱게 물러나라는 경고.

그러나 눈치를 이역만리 왕국에 놓고 온 왕자는 반짝이는 건치를 내보이며 웃었다.

“하하하! 그게 걱정이셨습니까?”

“……?”

“공녀님께서 연인 두엇 만든다고 하여 감히 누가 흠이라 하겠습니까! 제게도 기회를 주시지요!”

“……토끼야, 처리해.”

“토끼라니! 그렇다면 저는 귀여운 강아지로 불러주시면…… 허억!”

해사하게 꼬리치던 왕자의 눈앞에 검날이 번뜩였다. 동시에 살기를 가득 담고 떨어지는 음성.

“네놈이 아홉 번째다.”

“예, 예?”

“혀 함부로 놀려 내 손에 죽도록 처맞은 게.”

“……!”

“따라 나와.”

***

참으로 불행하게도, 바로 다음 날 제국 전역은 왕자의 얘기로 들썩였다.

마당발 사내가 주점에서 이 일화를 입에 담자 술을 걸치고 있던 이들이 모두 귀를 기울였다.

“후작 각하와 결투라니. 그 왕자는 살아 돌아갔다던가?”

“죽었다고 봐야 할지, 살았다고 봐야 할지.”

“그건 또 무슨 말인가?”

“왕자가 당당하게 따라 나가 검을 뽑길래 그때까지만 해도 꽤 볼만한 대결이 성사될 줄 알았지. 그런데 대결은 무슨.”

사내가 앞에 놓인 술로 목을 축이고 말을 이었다.

“후작 각하께서 검집째로 왕자를 두들겨 패시다가 종국에 가서는 왕자의 옷을 잘라 공개적으로 망신을 줘버리셨다네.”

“살아도 사는 게 아니겠군.”

“엉엉 울면서 돌아갔다지.”

“다른 왕국에도 소문이 짜하게 퍼지겠구먼.”

듣던 이들이 고개를 끄덕였다. 이런 소문이 널리 퍼져야 우리 공녀님을 귀찮게 하는 것들도 줄어들 터다.

“공녀님께서 타국의 영식과 혼약하시는 건 말이 안 되지!”

“그럼! 어디 감히 타국의 잡것들이 우리 제국의 보물을 노린단 말인가!”

사절마다 공녀님을 뵙고 넋을 놓았다는 소문이 황궁 담장을 넘어 들려오길 여러 번. 제국민들은 그것이 자랑스러우면서도 동시에 불안했다.

“두 분이 어서 혼인하시면 좋겠는데.”

“참으로 잘 어울리시더란 말이지.”

“이럴 게 아니라 오늘 밤에 촛불 한 번 더 켜서 빌어보자고.”

그리고 그날 저녁.

아가레스의 무릎에 앉아 포도주를 홀짝이던 이벨리아는 밖을 환히 밝힌 불빛을 보며 고개를 기울였다.

“촛불이 왜 저렇게 많이 켜져 있지?”

“축제라도 하는 모양이군.”

“그런가 보네.”

저 많은 촛불이 죄다 둘의 혼인을 기원하는 것이라곤 꿈에도 생각하지 못한 채, 연인은 서로의 입에 남은 포도주의 잔향을 나누며 웃었다.

***

혹독한 겨울을 앞둔 시점.

관청 앞은 인산인해를 이루고 있었다.

황실을 비롯한 제국 유수의 가문들이 새로운 황제의 즉위 후 첫 겨울을 맞아 넉넉한 구휼미를 풀었기 때문이다.

물자 앞에는 제각기 가문의 인장이 대문짝만하게 찍혀 있었기에 어느 가문에서 내린 은혜인지 구분하는 것은 어렵지 않았다.

“아르티나에서는 공녀님 드실 것까지 탈탈 털어온 수준이 아닌가!”

“실로 하늘을 찌르겠구먼.”

“그만큼 공녀님과 황제 폐하의 친분이 두텁다는 뜻이겠지!”

“카시스에서 내려주신 것은 또 어떻고!”

바구니와 자루를 들고 재잘대던 제국민들의 시선이 저 구석, 소담하게 쌓인 물자에 머물렀다. 주황색 새가 그려진 인장은 낯설었다.

“그런데 저건 어느 가문에서 내려주신 건가? 양을 보아하니 그리 넉넉한 가문은 아닌 듯한데…… 참으로 감사한 일이구먼.”

“처음 보는 인장인데.”

모두가 어깨를 으쓱이던 찰나였다. 후드를 깊게 눌러쓴 이가 답했다.

“저거, 델포이 자작가.”

“델포이 자작가? 어디선가 들어본 것도 같고.”

시원찮은 반응에 후드 쓴 이가 입을 삐죽이며 말했다. 왠지 섭섭하다는 듯한 말투였다.

“그 가문 영애가 최근 황제 폐하와 공녀님의 총애를 받는다고 소문이 자자해!”

“내 사돈의 팔촌이 황실에서 일하는데 그런 소식은 처음 접하는구먼.”

그러자 후드 아래로 조금 더 삐딱한 대답이 흐른다.

“그야 자네 사돈의 팔촌이 그다지 높은 인사가 아닌가 보지.”

“그야 그렇지만…….”

“델포이 자작가의 영애가 아주 드문 인재거든. 굉장히 똑똑하고 날렵해.”

“……?”

“용모도 굉장히 단정하다고. 주황색 머리가 얼마나 오렌지 같고 발랄한데!”

“……혹시 델포이 자작가에서 나오셨습니까?”

“설마 본인……?”

충분히 합리적인 의심. 본인이나 관계자가 아니라면 이렇게 소리 높여 얼굴에 금칠할 이유가 없지 않은가.

자작가 영애라고 하더라도 평민들에겐 드높은 귀족이다.

입을 함부로 놀렸다간 쥐도 새도 모르게 끌려가기 딱 좋은 터라 한껏 대화를 나누던 주변이 차게 식었다.

경계하는 시선 속. 델포이 가문을 칭찬하던 이가 잠시 머뭇거리다가 후드를 내렸다.

“분위기 망가트려서 미안. 사실 내 친구라서 칭찬 좀 한 거야.”

이 제국 단 하나뿐인 금빛 머리칼이 태양 아래 굽이쳤다.

상상도 못 한 정체.

제국민들이 멍하니 입술을 달싹였다.

“……고, 공녀님?”

***

“공녀님이라고?”

“공녀님? 어디?”

구휼미를 받고자 몰려 있던 군중의 시선이 일제히 쏠렸다.

조금이라도 가까이서 보고 싶은 마음에 제국민들이 걸음을 옮기자, 바로 곁에 마찬가지로 후드를 쓰고 있던 장신의 사내가 앞으로 나섰다.

호위를 맡은 아르티나 기사단인가 생각하던 찰나.

“조심해야지, 이브.”

다감한 목소리와 함께 공녀님을 부드러이 끌어안는 손길.

얼굴은 보이지 않지만, 그 태도에서 누구인지 유추하는 것은 어렵지 않았다.

공녀님의 애칭을 입에 담을 수 있는 것도, 감히 존체에 손을 댈 수 있는 것도, 아르티나 일가를 제외하면 이 제국에 단 한 분뿐일 것이니.

고개 들어 연인을 바라본 공녀님이 환히 웃었다. 북풍한설도 녹일 것만 같이 따스한 눈으로.

연인이자 충직한 수하의 호위를 받으며, 이벨리아는 홀린 듯 자신을 바라보는 제국민들에게 말을 건넸다.

“혹시 힘든 건 없는지 해서 나와봤어. 직접 듣고 싶어서.”

그 다정한 말에 울컥한 표정을 짓던 제국민들은 들어줄 사람이 필요했다는 듯 한탄을 시작했다.

“말도 못 합니다, 공녀님.”

“전쟁통에 땅이 홀랑 다 타버렸지 뭡니까.”

“그냥 탄 수준이 아닙니다. 마족들이 마기를 뿌리는 바람에 땅이 다 죽어버렸지요.”

“애지중지 키우던 작물이 죽은 건 한 해 농사 망쳤다고 생각하면 그만이지만, 땅 자체가 상해버리는 바람에 몇 년간은 꼼짝없이 굶게 생겼습니다.”

“생각보다 상태가 심각한 모양이네.”

이벨리아의 굳은 표정을 어찌할 수 없다는 것으로 오인하였는지, 앞장서서 토로하던 사내가 급히 말을 바꾸었다.

“그래도 어쩌겠습니까. 천재지변이나 다름없는 일인데…… 그나마 이렇게 구휼미라도 풀어주시니 감읍할 따름이지요.”

이벨리아가 주변을 둘러싼 이들을 찬찬히 살폈다. 하나같이 짙은 수심이 드리워져 있다.

제국의 근간은 농사다. 농사가 무너지면 자연히 상업도 무너질 수밖에 없다.

죽어버린 땅이 비단 농민들만의 문제가 아닌 이유였다.

기둥이 무너진 파급력은 연쇄적으로 제국 전역에 퍼지고 있었으나, 아무리 우는소리를 해봤자 해결할 방법은 마땅치 않아 제국민들은 자포자기한 상태였다.

지금도 그저 시름을 덜고자 했던 말인데…….

“힘들었겠네. 그럼 시작해볼까?”

“알아주시는 것만으로도 그저 감읍…… 예? 시작이요?”

여느 귀족들과는 현저히 다른 반응이 돌아온다.

의문 어린 표정으로 바라보는 이들을 향해 이벨리아가 씩 웃었다.

“힘을 꽤 쏟아부어야겠지만 불가능할 것 같진 않은데.”

“그게, 무슨…….”

“나 뛰어난 정령사잖아.”

“……!”

정령사. 감히 기적을 바랄 수 있도록 하는 수식어.

제국민들의 시선이 불신과 희망을 동시에 담았다.

관청 바로 옆에 신전이 있던 탓에, 이벨리아는 신전을 이루는 디딤돌 위에 자리를 잡고 앉았다.

흰 대리석과 금빛 머리칼이 겨울 공기 속에 어우러진다.

눈을 감자 대지와 대기에 거미줄처럼 달라붙은 마기가 느껴진다.

‘다 정화하려면 힘을 탈탈 털어서 써야겠는데.’

하지만 어쭙잖게 몸 사릴 생각은 없다. 이건 나 아니면 그 누구도 하지 못하는 일이니까.

묘한 침묵 사이. 이벨리아의 주변으로 짙은 자연력이 퍼져나간다.

놀란 이들의 탄성과 함께 발아래에서부터 푸른 새싹이 자라났다.

조금 떨어진 나무는 계절에 맞지 않은 꽃을 흐드러지게 피워내고, 다시 없을 자연력을 담뿍 받은 산천초목이 기쁜 듯 몸을 떨어댄다.

공간을 자연력으로 절여버린 이벨리아가 이를 매개로 정령왕들의 이름을 읊었다.

오랜 시간 끝에 바야흐로 세계의 제약에서 벗어난 왕들이 화마로 죽어버린 땅에 현현한다.

정령왕들이다…… 누군가 멍하니 중얼거렸다.

네 정령왕의 시선이 눈을 감고 자연력을 운용하는 벗에게 가닿았다.

“우리 말랑이 많이 컸네. 우리를 한 번에 불러내고.”

“침대 위에서 옹알이하던 때가 엊그제 같건만.”

“물뿌리개 내동댕이치고 죽기 싫다고 울던 것도 얼마 전 같은데.”

“이젠 어엿하게 홀로 선 지배자가 됐네.”

오랜 벗의 시작부터 지금까지, 모든 순간들이 선연하다.

짙게 웃으며 이프리트가 가볍게 발을 굴렀다.

그러자 정결한 불길이 일어 제국 전역을 휩쓴다.

놀란 제국민들이 발을 물렸으나 그들에게는 따스함 그 이상의 어떤 것도 느껴지지 않았다.

불길에 의해 마기가 걷힌 땅. 트로이가 입김을 불자 메마른 대지가 비옥해지고 저 아래 묻혀 있던 씨앗이 다시금 힘을 얻는다.

이어 엘라임이 엄지와 중지를 맞부딪치자 논밭 위에 형체를 갖춘 구름이 생명력을 담뿍 담은 비를 흩뿌려 싹을 틔웠다.

마지막으로 페르세스가 손뼉을 치자 제국 전역을 뒤덮은 봄바람이 어린 새싹을 감싸 다독였다.

눈앞에서 겨울이 흘러가고 봄이 도래한다.

“신이시여…….”

“맙소사…….”

기적을 목도한 제국민들이 하나둘 무릎을 꿇었다.

“…….”

눈 감아 평온한 얼굴 그대로, 이벨리아의 신형이 휘청였다.

곁을 지키던 아가레스가 연인을 안아 올렸다.

새액, 새액, 힘겹게 내쉬는 숨결 사이. 가느다랗게 눈을 뜬 이벨리아가 물었다.

“……우리 제국, 어때?”

“찬란하다. 그 어느 때보다.”

깊고 깊었던 상흔이 온전한 자연으로 뒤덮였다.

길고 길었던 전쟁이 바야흐로 완전한 종막을 고한다.

혹독한 계절 끝에 새로이 도래한 봄.

“……토끼야. 제국이 온통 꽃밭이야.”

이벨리아는 코끝을 스치는 꽃향기에 말갛게 웃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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