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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녀님의 꽃밭에는 그들이 산다-279화 (279/323)

##  279화: 이브의 연인 공개!

아르티나 일가의 해후에는 제법 오랜 시간이 걸렸다.

그동안 주변을 경계하고 있던 루드비히의 친위대는 감히 침 삼키는 소리조차 내지 못했다. 그만큼 먹먹한 분위기에 압도된 터다.

“……집에 가자, 딸.”

“이브, 뭐 먹고 싶은 건 없어?”

“자, 아가. 아빠한테 업히려무나.”

“여기 담요에 쏙 들어갈래? 내가 돌돌 말아서 안고 갈게.”

“그건 포대기잖아, 오라버니!”

이벨리아는 자신을 갓난아이 대하듯 유난을 떠는 가족들의 손을 살짝 밀어내고 고개를 저었다. 집으로 가기 전에 먼저 들를 곳이 있다.

“잠깐. 잠깐. 혹시 전쟁 추모비 세워졌어요?”

누가 이벨리아를 담요로 싸안고 돌아갈지 의견 분분하게 대립하던 가족들이 답했다.

“임시로 광장에 세웠단다.”

“상흔이 가실 때까지는 모두 함께 이겨내자는 취지에서.”

“근데 추모비는 왜?”

“거기 먼저 가고 싶어서.”

“……집에서 조금 쉬다가 가지 않고.”

“난 전쟁의 끝을 눈으로 직접 보지 못했으니까……. 그리고 제국민들한테도 내가 돌아왔다는 걸 알려야죠. 아직 아무도 모르고 있을 텐데.”

그러자 엔리르가 말랑한 두 앞발로 입을 합 틀어막았다.

“내가 이미 다 말했는데!”

“응? 내가 돌아온 걸? 나 방금 왔는데?”

“나도 방금 말했지! 날아오는 길에!”

털의 무게만큼이나 입이 가벼운 용이 배시시 웃었다.

“이런. 조용히 가서 슬쩍 얼굴이나 비추려고 했더니.”

“그건 불가능해. 지금 제국민들한테 누나는 황태자보다 인기가 많아.”

사실이라며 고개를 끄덕인 루드비히가 팔을 뻗었다. 마치 에스코트라도 하겠다는 듯.

“가자, 광장. 안내할게.”

“루이 안 바빠? 황제 폐하 아니야?”

“아직 아니야.”

“에엥? 1년 동안 뭐 했어, 황위도 안 받고?”

“…….”

“설마 너, 되도 않는 놈팡이한테 황위 빼앗긴 건 아니지?”

“내 황위를 빼앗을 수 있는 되도 않는 놈팡이는 사형당했고.”

“그거 못 본 건 좀 아쉽네.”

“대관식은 널 기다리느라 미뤘고.”

“그걸 왜 미뤄! 제국을 떠먹여 주면 냉큼 받아서 씹어 삼켰어야지!”

“네가 없는 제국을 받아먹으면 체해.”

알잖아. 내가 황위에 앉고자 하는 이유. 평화로운 제국을, 더 나아가 널리 태평성대를 이룩하고자 하는 이유.

“이 황위를 쥐고 이루고자 하는 모든 것이 너를 위한 거라.”

“…….”

가감 없이 와닿는 진심에 이벨리아가 눈을 도르르 굴리던 그때였다.

에르트 백작이 마침 잘 됐다 싶어 포르르 다가와 물었다.

“커흠. 그런 의미에서 전하, 그럼 대관식은 언제……?”

“공녀가 돌아왔잖나. 그러니-.”

간결한 이유. 루드비히가 씩 웃었다.

“가장 이른 시일로.”

대관식 일로 깨나 골머리 썩었던 에르트 백작이 환호성을 질렀다.

“그럼 당장 가서 길일을 잡아오도록 하겠습니다!”

역시! 공녀님께서 귀환하신 지 고작 1시간 만에, 지난 1년간 얽히고설켜 꼬여 있던 모든 일들이 순리대로 돌아간다.

전하께선 대관식을 치르겠다 하셨고, 두문불출하던 아르티나 일가가 폐문을 풀었으며, 마계와의 연결고리를 만들어줄 루페르트 후작 역시 말랑한 표정으로 서 있지 않은가!

“오늘부로 내 야근도 끝이다-!”

공녀님 만세! 만만세!

에르트 백작은 채신도 잊고 나비처럼 나폴나폴 궁을 향해 뛰어갔다.

***

“헤엑!”

개미 떼처럼 광장을 에워싸고 있는 인파에 이벨리아가 멍하니 입을 벌렸다.

“광장이 원래 이렇게 인기가 많은 장소였어?”

“광장이 아니라 네가 인기가 많은 거지.”

“내가?”

“응. 네가 잠시 떠나 있던 동안, 제국민들이 매일 아침 공작저 앞에 꽃을 두고 갔대.”

“…….”

“밤이면 촛불을 켜 기도를 올리기도 했지. 내 집무실에서도 아주 잘 보였어.”

“……그랬구나.”

이벨리아가 새삼스럽게 제국민들을 훑었다. 생업으로 거친 손에는 향기로운 꽃과 과일이 담뿍 들려 있다.

할 수 있는 범위에서 늘 손을 내밀었던 그대들은, 내가 없는 동안 내 소중한 이들과 슬픔을 함께 나눠주었구나.

천천히 광장으로 발 들이자 웅성거림이 커진다. 누군가는 훌쩍이며 눈물을 닦아냈다.

또래의 소년 하나가 이벨리아의 로브 자락을 덥석 잡았다.

단번에 떼어내려는 기사들을 제지하고, 이벨리아가 소년을 빤히 바라봤다. 말하라는 듯. 그러자 얼굴 붉어진 소년이 쭈뼛쭈뼛 입을 열었다.

“고, 공녀님.”

“그래.”

“어디 다치신 곳은…… 없으시지요? 강녕하신 거지요?”

“……그대가 걱정해 준 덕에.”

순박한 마음이 느껴져 옅게 웃자, 소년의 얼굴에 떠오른 홍조가 더욱 짙어진다.

동시에 대답을 들은 제국민들의 환호가 광장을 우레처럼 울렸다.

- 와아아아아!

- 공녀님, 잘 돌아오셨습니다!

- 뵙고 싶었습니다, 공녀님!

함빡 쏟아져 내리는 건 감사.

인마전쟁의 영웅. 불세출의 장군. 악마들의 지배자-.

이벨리아를 표현하는 수식어에…… 더는 아르티나가 붙지 않는다.

가문의 배경을 제외하고 일신이 세운 업적만으로도 추앙을 받기엔 부족함 없으니까.

단정한 걸음으로 드높은 석조 추모비 앞에 선 이벨리아가 검지를 입가에 가져다 댔다.

그러자 하늘까지 가닿던 환호성이 뚝 그치고, 광장 전체, 침묵이 들어찬다.

이벨리아는 마치 보란 듯, 오른손을 심장 위에 대고 깊이 고개를 숙였다.

추모비에 빼곡하게 새겨진 그대, 이름들.

그대들의 희생에 감사를 표하며.

그대들을 지키지 못하였음에 사죄를 표하며.

“……부디 평안하기를.”

석조 추모비에 나란히 적힌 이름들은 대부분 힘없고 가난한 이들.

그럼에도 여느 귀족을 대하듯 경건히 예를 갖추는 모습은 전쟁 종식 이후 단 한 번도 본 적 없는 것이었다.

아들을 잃은 어미가 자리에 주저앉아 통곡했다. 부인을 잃은 남편이 이름을 외치며 절규했다.

부모를 잃은 자식이 하늘을 바라보며 기도를 올렸다.

누군가 들고 있던 꽃을 추모비 근처로 던지자 모두가 같은 마음으로 헌화했다.

하늘에서, 눈물처럼 꽃비가 흩날린다.

눈짓하자 기사들이 떨어진 꽃을 모아 이벨리아에게 건넸다.

이벨리아는 꽃 하나하나를 정성스럽게 다듬어 추모비 앞에 정갈히 올려두었다.

그렇게 제법 오랜 시간 함께 슬픔을 나눈 뒤. 이벨리아가 천천히 입을 열었다.

“……참 많이도 잃었다, 우리.”

“…….”

“그대들의 상실에 나 역시 함께할 테니…….”

상처투성이가 되어 돌아온 영웅이 제국민들을 또렷하게 응시했다.

“같이, 이겨내자.”

내 상실이 덜하다 하여 네 슬픔을 가리지 않는 것.

오랜 시간이 지났다 하여 네 비탄을 잊으라 강요하지 않는 것.

끝끝내 함께 부둥켜안고 견뎌내는 것.

그게, 이 제국이 존재하는 의미니까.

***

추모 후에 공작저로 돌아온 이벨리아는 감격하여 울먹였다.

“이게 몇십 년 만이야!”

“뭐? 몇십 년?”

아차. 아직은 다들 내가 1년 정도만 단층에서 있었던 걸로 알 텐데.

“그, 체감상 그렇다는 거지, 체감상!”

지금 알면 또다시 눈물바다가 될 것이 뻔하니, 이건 차차 기회가 있을 때 말하자. 대충 둘러대며 발을 들이던 그때.

“아이고오, 우리 아가씨이이이-!”

외침과 함께, 쿵, 쿵, 쿵, 걸음에 따라 지축이 울린다.

“……멍멍이들!”

“아이고오, 꼬질꼬질 아가씨이이이-!”

“닥쳐, 알레기 새끼야. 꼬질꼬질은 빼.”

“그럼 구질구질 아가씨이이이-!”

“누가 이 재앙의 조동아리 좀 봉인해서 던져 놔!”

기사들이 대충 티슈를 뜯어 알렉의 입에 욱여넣고 옆으로 휙 던져버렸다.

“으읍, 읍읍읍읍 읍읍읍읍읍읍-!”

“아가씨, 다른 차원에 다녀오신 것 맞습니까? 예?”

“그곳에서 아가씨를 괴롭히는 것들은 없었고요?”

“이렇게 늦으신 건 길을 잃으셨기 때문이지요?”

“남의 집 감자를 서리해서 드셨겠지요, 분명?”

“집주인이 빗자루를 들고 아가씨를 쫓지는 않았습니까?”

“……뭔가 굉장한 오해가 있는 모양이네.”

대체 내가 없는 동안 무슨 상상들을 한 거야.

멍멍이들은 자기들끼리 이미 근본 없는 시나리오를 맞춘 듯 눈썹을 팔자로 만들고는 주위를 뱅뱅 돌며 곡소리를 냈다.

정신없어, 살려줘…….

그때였다. 계약자의 구조요청에 반응한 것인지, 응접실 한가운데 청명한 물방울이 튀어 올랐다.

삽시간에 형체를 갖추고 두 팔을 벌린 미남자. 이벨리아가 환히 웃으며 도도도 달려가 맹약자에게 폭 안겨들었다.

“엘라임-! 나 왔어-!”

동시에 아가레스의 손에서 마기가 언뜻 피어올랐다가 사라진 것을, 이벨리아를 제외한 모두가 목격했다.

엘라임이 흡사 둘도 없는 보석을 만지듯 이벨리아의 머리칼을 조심스럽게 쓸었다.

“그리웠습니다, 나의 계약자.”

“잠시였는걸!”

“……글쎄요.”

잠시 그대를 잃어서 그리웠고.

오래도록 그대를 잊어서 또 그리웠습니다.

과거를 모두 기억해낸 엘라임의 눈이 여러 감정을 품고 하염없이 깊게 가라앉았다.

미처 보지 못한 이벨리아는 엘라임의 품에서 빼꼼 고개를 내밀어 뒤에 조르르 선 정령왕들을 향해 방긋 웃으며 물었다.

“페르세스 언니랑 양아치 오라버니랑 트로이 오라버니도 다들 잘 지냈지?”

“잘, 크흡, 잘, 지냈지이…….”

“봐. 이프리트 녀석 제일 먼저 울 줄 알았어.”

“말랑아아…… 우리 말랑이이…….”

비척비척 다가온 페르세스가 엘라임을 매몰차게 밀어내고 이벨리아를 꽉 끌어안았다.

“내 계약자다. 내놔.”

“내 말랑이야. 꺼져.”

높게 묶은 은빛 머리칼이 이벨리아의 볼을 간지럽힌다. 마구 비비적대던 페르세스가 훌쩍이며 속삭였다.

“언니라고 이렇게 잘 불러주면서. 그땐 왜 그렇게 튕겼나 몰라.”

“……?”

“생을 돌고 돌아서, 결국 이렇게 다시 만났네, 이브.”

“……!”

눈물 콧물 줄줄 흘리며 다가온 이프리트도 덧붙였다.

“그 빌어먹을 물뿌리개는 전생에 두고 와서 다행이다. 마음에 안 드는 게 있으면 냅다 물어버리는 그 못된 버릇도 전생에 두고 오지.”

“맞다. 너 이브 태어나자마자 물렸었지?”

“……성질이 아주 더러운 천사였어. 지금 내 눈앞에 있는 누구처럼.”

“네가 애먼 천사 날개 잡고 볼을 막 찔러댔잖아.”

이건. 이벨리아가 단층에서 보았던 그 천사에 대한 이야기다. 그러니까, 자신의 전생에 대한 이야기.

“다들 어떻게 그걸…….”

트로이가 이벨리아의 머리칼을 매만지며 설명했다.

“아가레스와 네가 걸은 시간이 신물을 복구하면서 과거로 편입된 모양이야. 본디 우리는 천사가, 그러니까 네가 소멸하는 걸 막지 못했었지만- 아마 단층 속의 우리는 잘 막아냈던 모양이지.”

페르세스가 더욱 숨 막히게 이벨리아를 끌어안고 속삭였다.

“고마워. 이브. 고마워…….”

“……나 안 미워? 언니는 나를 구하려다가 여기로 떨어졌는데?”

“엿 같은 신계는 원래 나랑 안 맞았어. 어차피 널 빼면 다 지긋지긋한 곳이었고…….”

“…….”

“나를 언니라고 불러줬던 너는, 그 오랜 시간을 걸어 다시 나를 구해냈는걸.”

참으로 얄궂은 운명이다.

한번 얽히면 생을 돌고 돌아도 결코 끊을 수 없다고 알려진 붉은 실.

아주 오랜 과거에도 서로 아꼈던 우리 사이엔 정말 그게 묶여 있는 걸까.

“있잖아. 그 천사가 하나 전해달랬어.”

이벨리아는 수십 년 만에, 혹은 수천 년 만에 재회한 친구들에게, 과거 천사가 남긴 말을 전했다.

“친구가 되어줘서 고맙다고. 볼을 찔렀던 것도, 날개를 꽉 잡았던 것도, 물뿌리개를 숨겨뒀던 것도…… 전부 다 용서해 주겠다고.”

왕들이 오래도록 잊고 살았던 작은 천사.

그들로 하여금 신의 물레를 부수게 만들었던 소중한 친구.

모든 죄업의 굴레에서 벗어난 정령왕들은 바야흐로 자유로운 웃음을 흘렸다.

그야말로, 자연이라는 이름에 버금가는 시원한 미소였다.

***

그리고.

정령왕들과 이벨리아의 재회를 가만히 바라보던 엔리르는 들고 있던 초콜릿 접시를 툭 떨어뜨렸다.

“나 굉장히 똑똑해. 나 굉장히 예리해. 대단한 용이 판단하건대…… 누나, 혹시 전생에 천사였어?”

“그렇더라?”

그러자 엘리시아가 입을 틀어막고 더듬더듬 말했다.

“어, 어쩐지…… 우리 딸 생긴 게 딱 천사 같다고 생각하긴 했어. 태어났을 때부터.”

“저, 저도 같은 생각이었습니다, 어머니.”

놀란 가족들의 뒤편. 아르티나 기사단은 다른 의미로 입을 떡 벌렸다.

“악마 아니고 천사?”

“우리 제대로 들은 거 맞아?”

“아가씨 거짓말하시는 거다. 사실 악마였는데 천사라고 둔갑시킨 거야.”

“……저 개자식들이.”

“봐봐. 천사가 어디 저런 말 쓰냐.”

“악마네. 악마야.”

“세상에서 가장 작고 소중한 악마야.”

이벨리아가 기어코 멍멍이들의 등짝을 후려치려던 찰나였다.

요리장 세토가 껄껄 웃으며 나타나더니 커다란 오크통을 턱 내려두었다.

“자아, 제가 직접 담근 술입니다! 오늘 같은 날 술이 빠져서야 쓰겠습니까!”

“이야. 역시 요리장.”

“배우신 분!”

“세토, 세토, 나 고기 먹고 싶은데, 고기는?”

“우리 아가씨 드릴 고기는 종류별로 굽는 중이지요! 조금만 기다리십시오!”

들뜬 분위기에 휴고가 픽 웃었다.

그래. 오늘만큼은 다들 조금 풀어지는 것도 나쁘지 않을 터다.

“하델. 연회를 준비해라.”

만면에 주름 가득한 미소를 띤 집사가 깊게 고개를 숙였다.

친애해 마지않는 이 공작저가 예전과 같은 활기를 띠는 것이 기꺼워서 금방이라도 눈물을 흘려버릴 것만 같았다.

그리고 그때.

이벨리아가 해맑게 손뼉을 쳐 시선을 모았다.

“아, 맞다! 연회하는 김에 축하해야 할 일이 하나 더 있어!”

“뭔데?”

“다른 세계에서 무슨 좋은 일 있었어?”

“응! 우리 연애해!”

조금 전까지만 해도 왁자했던 공작저가 쥐 죽은 듯 고요해졌다.

이벨리아가 활짝 웃으며 아가레스의 손을 붙잡고 들어 올렸다.

“오늘부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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