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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녀님의 꽃밭에는 그들이 산다-278화 (278/323)

##  278화: 우리 모두의 재회

또 수십 번도 더 꾸었던 그 꿈인가.

내 햇살, 내 동생, 네가 돌아오는 아프고 아린 꿈.

“…….”

이젠 쉽게 속지 않는다.

아르칸은 여전히 자신을 껴안은 채 훌쩍이는 에르트 백작의 볼을 냅다 꼬집었다.

꿈에서는 꼬집힌 모두가 그저 눈을 멀뚱히 뜬 채로 그를 바라봤으니까. 그런데-.

“으악! 각하! 아픕니다!”

“……꿈이, 아닌가.”

“아니, 그건 보통 자기 볼을 꼬집지 않습니까?”

아르칸이 투덜대는 에르트 백작을 옆으로 밀었다. 머릿속이 백지장처럼 하얘져 힘 조절이 잘되지 않는다.

무력과는 거리가 먼 백작이 형편없이 밀려나 벽에 부딪혔다.

그렇지 않아도 울고 있던 세드릭은 아예 주저앉았고, 흥분을 감추지 못한 엔리르는 고무공처럼 날아다니며 샹들리에를 깨버렸다.

“하, 하하……! 이럴 줄 알았어, 이럴 줄 알았어! 우리 이브가 돌아오지 않을 리가 없지! 내 동생인데!”

“누나가 돌아왔다! 내가 개발한 마법은 쓰레기가 돼버렸지만 누나가 돌아왔으니 아무렴 어때!”

형제들의 격한 반응에 꿈이 아니라는 것을 확신한 아르칸이 덜덜 떨며 집사 하델에게 손짓했다.

“당장 별채로 가서 아버지와 어머니를…….”

“고정하십시오, 주인님. 이미 모셔왔습니다.”

에르트 백작이 막무가내로 쳐들어올 때부터 심상치 않은 소식이 있으리라 짐작했던 집사는 곧바로 별채로 달려가 백작의 방문 소식을 전했더랬다.

혹시 좋지 않은 소식이면 한계 없이 무너져내릴까 봐 응접실 밖에서 서성이던 엘리시아가 용기 내 물었다. 급히 달려오느라 단장하지 않은 모습으로.

“이브지? 이브가…… 돌아온 거지?”

제발 그렇다고 말해. 아들의 입을 바라보는 어머니의 눈에 간절함이 깃든다.

“예, 어머니.”

이윽고 눈물을 담고 떨어지는 대답은 엘리시아에겐 새 삶을 알리는 포고나 다름없었다.

“아, 아아…….”

엘리시아가 그대로 뒤를 돌았다.

꿈에서도 그리던 소식에 휘청이는 다리를 주먹으로 내리치면서, 엘리시아는 불안정한 걸음으로 달려 나갔다.

딸의 생사를 자신의 눈으로 똑똑히 확인해야 한다는 일념 하에. 말을 탈 정신도 없이. 몇 걸음 뛰지 못하고 넘어지자, 네발로 기어서 황궁 방향으로 향한다.

휴고가 달려가 엘리시아를 안아 들고 말 위에 올라탔다.

그 뒤를 아르칸과 렐리안, 세드릭이 따랐다.

무려 1년 만에…… 가문의 상징이 음각된 중문이 활짝 열린다.

마치 깊은 동면에 들었던 금빛 용이 기지개를 켜는 것처럼.

***

히죽히죽 웃으며 쏜살같이 날아가던 엔리르는 광장 부근의 창공에 잠시 멈춰 서서 제국민 모두가 듣도록 쩌렁쩌렁하게 소리쳤다.

“세상 인간들아!”

“어어? 저건 용님이 아니신가!”

“엥? 어디? 저 빨간 공 말인가?”

“예끼, 이 사람이 경을 치려고!”

엔리르의 정체를 아는 제국민들은 고개 숙여 예를 갖췄다.

“하명하십시오, 용님.”

“제물을 바칠까요, 예쁜 과일들로?”

엣헴. 용인 것을 밝히고 나니 세상살이가 참으로 편해졌단 말이지.

전쟁 이후 그토록 바라던 수호룡(守護龍) 칭호를 얻은 엔리르가 짧은 허리 위에 말랑한 앞발을 척 올렸다.

“내 것은 되었다! 우리 누나에게 바칠 예쁜 과일과 꽃을 준비하거라! 대가는 내가 금화로 치르도록 하지! 나는 수호룡! 돈이 많은 수호룡이니까!”

“잠깐, 용님의 누님이시면…….”

“설마 공녀님께서?”

“공녀님께서 돌아오셨습니까, 용님?”

엔리르가 팔다리를 쭈욱 뻗었다. 하늘에 뜬 불가사리 같은 모양새였지만 본인 스스로는 제법 위엄이 넘치는 자세라고 생각하는 듯했다.

“그렇다! 돌아왔다! 악마 놈과 함께!”

파도가 휩쓸듯, 이벨리아와 아가레스가 돌아왔다는 소식은 광장을 중심으로 수도 전역에 발 빠르게 퍼져나갔다.

기쁨을 이기지 못한 제국의 수호룡이 하늘에서 빙글빙글 춤을 추며 광장에 있던 사람들 모두에게 돌아가고도 남을 금화며 보석을 펑펑 뿌려댔다는 사실 또한.

***

루드비히가 이벨리아의 귀환 소식을 들은 것은 국정 회의 도중이었다.

기사 하나가 ‘공녀님께서 사라지셨던 자리에서 심상치 않은 광휘가 피어오른다’라고 전하자마자, 루드비히는 회의고 뭐고 다 때려치울 기세로 자리를 박차고 일어섰더랬다.

“오늘 회의는-.”

“어서 가보시지요, 전하.”

“공녀님께서 기다리시겠습니다.”

“……고맙다. 다들.”

황태자가 공녀의 부재로 인해 대관식마저 미루고 있다는 것은 공공연한 비밀이었다.

이를 익히 알고 있는 귀족들은 제멋대로 회의를 파하는 루드비히의 태도를 탓하기보다는 외려 어서 가보시라 등을 떠밀었다.

2차 인마전쟁 끝에 제국의 전복을 꾀하는 귀족들은 모두 숙청된 터.

남은 귀족들은 노선에 다소 차이가 있긴 해도 기본적으로 제국의 부흥을 원하는 이들이라는 점은 모두 같았으니까.

루드비히는 갓 태어난 사슴처럼 떨리는 다리로 그곳을 향해 달렸다.

아무리 어두워도. 심지어 눈을 감아도. 한 치의 오차도 없이 찾아갈 수 있을 정도로 수백 번 수천 번 걸음 했던…… 네가 사라진 그곳.

긴 회랑을 지나 남문으로 이어지는 통로에 접어든 루드비히는 일순 걸음을 멈췄다.

유리창에 비친 자신의 얼굴을 부지불식간에 마주했기 때문이다.

‘……꼴이 말이 아니군.’

왜 신료들이 자신을 보기만 하면 수라를 챙기시라 그리 잔소리를 내뱉었는지 알 만도 하다.

‘이브가 걱정할 텐데.’

무려 1년 만에, 루드비히는 옷매무새에 신경을 썼다.

어설픈 손이 옷깃을 매만지자, 곁을 따르던 시종장이 솜씨 좋은 손길로 크라바트를 단정히 매주었다.

“공녀님께서 처음 황궁을 방문하셨던 날이 떠오르는군요. 그때도 제가 이리 단장을 해드렸는데…….”

루드비히가 픽 웃자 시종장이 마주하여 환한 미소를 지었다.

“자. 다 되었습니다. 어서 가시지요. 외사랑하는 분을 오래 기다리게 하셔선 안 되는 법이니.”

“……알고 있었나.”

“모르는 이 없는 비밀이지요, 전하.”

민망함에 귓가를 붉힌 루드비히는 종전보다 조금 더 빠르게 발을 놀려 남문으로 향했다.

루드비히의 명으로 흡사 성역처럼 펜스가 둘린 장소.

최후의 전투 끝에 이벨리아가 사라졌던 바로 그곳.

오래도록 깊이 가라앉아 있던 눈이 그토록 바라던 광경을 눈에 담았다.

“……이브.”

수도 없이 홀로 불렀던 이름에.

“어? 식량 도둑! 아니지, 이젠 황제 폐하인가?”

이제야 비로소 답이 돌아온다.

저 바보가. 기다렸던 사람 속도 모르고-.

“듣자 하니 내가 1년 만에 돌아왔다던데! 그간 잘 지냈어?”

뭐 저렇게 예쁘게…… 웃고 있어.

“……멍청한 게.”

괜히 투덜거려보는데, 입가에서 짠맛이 느껴진다. 동시에 화들짝 놀란 땅 도둑의 음성이 들려온다.

“루이! 왜 울어!”

냅다 눈물을 흘리는 친우에 당황하여 자신도 모르게 나온 반말.

이벨리아가 흠칫하며 입을 틀어막자 루드비히가 형형한 눈으로 주변 기사들을 스윽 훑었다.

황태자의 친위대는 모두 눈과 귀를 닫겠다는 듯 깊이 고개를 숙이고 뒤로 돌았다.

천천히 다가온 루드비히가 이벨리아의 앞에 한쪽 무릎을 꿇고 앉았다. 형편없이 떨리는 손이 생채기 남은 볼 위를 조심스레 더듬는다.

“……너는.”

“응?”

“나 말고. 너는.”

“…….”

“얼굴이 왜 이렇게 상했어. 왜 이렇게, 많이 다쳤어……. 왜, 왜 이렇게…… 늦었어.”

루드비히의 얼굴이 이벨리아의 어깨 위로 툭 떨어졌다.

허름한 로브를 입고 있던 어깨 위가 삽시간에 젖어 든다. 꼭 구름이 힘겹게 붙잡아둔 소나기를 뿌리기라도 하는 것처럼.

답지 않게 흐느끼는 소리가 심장을 아프게 울린다. 이벨리아가 손을 올려 루드비히의 등을 토닥였다.

“많이 기다렸어?”

“……숨 쉬는 것보다.”

“조금 멀었어. 꽤 험했어. 이 세계가 쉽지 않듯, 다른 세계도 마찬가지더라.”

이벨리아가 과거와는 달리 푸석해진 은빛 머리칼을 쓸어내렸다.

“우리 루이. 내가 없어도 잘하고 있을 줄 알았는데.”

“네가 없으면 세상이 엉망인데 내가 어떻게 멀쩡해.”

말했잖아. 나를 지옥에서 끌어냈으면 책임도 지라고. 감히 이 수라장을 함께 구르자 청하진 않을 테니, 적어도-.

“적어도 내가 만든 제국을 함께 바라봐줘야지…….”

루드비히가 이벨리아의 어깨에 볼을 비볐다. 마치 어린 짐승이 어리광을 부리는 것처럼.

이벨리아가 다시 한번 머리를 쓸어주려던 그때.

“보자 보자 하니까 정도를 모르는군.”

섬뜩하게 이를 가는 소리와 함께, 아가레스가 루드비히의 뒷덜미를 우악스럽게 잡아 끌어냈다.

“같잖은 아양 떨지 마라.”

“부러우면 너도 떨든가.”

“해 봐, 어디?”

금방이라도 왼쪽 어깨를 차지할 것처럼 몸을 움찔거리는 악마와 오른쪽 어깨에서 떨어질 기미를 보이지 않는 식량 도둑.

번갈아 바라보며 이벨리아가 인상을 굳혔다.

“서로 반갑다, 이런 생각은 안 들어, 너희?”

“전혀.”

“일절.”

“루이 너는 토끼 없으면 비밀기지 허전할 테니까 데려와달라고 했었잖아.”

그 말에 아가레스가 오만하게 웃었다.

“그래? 그럼 내 앞에서 이리 방자하게 구는 건 수줍어서인가?”

“그리고 토끼 너는 오는 길에 루이가 제국 잘 다스리고 있는지 걱정이라고 했었잖아.”

그러자 이번엔 루드비히가 거만하게 입꼬리를 올렸다.

“그래? 그럼 내 앞에서 이리 짖어대는 건 관심 좀 가져달란 의미인가?”

“개소리 집어치워라.”

“너나.”

“내가 없으면 허전하다고 질질 짰던 주제에.”

“그러는 너는 내가 걱정된다면서 엉엉 울었던 주제에.”

이벨리아가 쯧쯧 혀를 차며 고개를 저었다. 둘 다 떨어져 있으면 걱정하면서. 꼭 같이 있으면 이런다니까.

“어휴, 어린애들도 아니고 정말.”

그래도…… 한없이 그리웠다.

내 비밀기지의 공유자들.

이 시도 때도 없는 거지 같은 말다툼.

1년의 공백기가 무색하게 으르렁 컹컹대는 친구들 사이. 이벨리아의 입가엔 환한 미소가 맴돌았다.

***

두 친구가 익숙한 공방을 주고받던 와중이었다.

“아가! 이브!”

저 멀리서 찢어지는 듯한 외침이 들려왔다.

“……?”

이벨리아가 눈을 휘둥그레 떴다.

분명 엄마 목소리긴 한데, 동시에 낯설다.

우아하다기보다는 우짖는 듯한 음성. 설마. 이벨리아의 시선이 천천히 돌아갔다.

그러자…….

기억과 달리 잔뜩 흐트러진 엄마가.

얼마나 눈물을 닦았는지 눈가가 짓물러버린 엄마가.

가슴을 쥐어뜯으며 저곳에 서 있다.

“어, 엄마……?”

그 처참한 모습을 도무지 믿을 수 없어 부르는데, 뒤로 보이는 아빠와 오라버니들의 모습 역시 엄마와 다르지 않다.

제대로 면도조차 하지 않은 아빠.

단추도 제대로 채워 입지 않은 큰 오라버니.

양쪽 다른 신발을 신고 있는 작은 오라버니.

몸체가 눈에 띄게 작아진 엔리르…….

가족들이 자신을 부르는 소리가 저 멀리 희미하게 부유한다.

형체 없는 뭔가가 이벨리아의 머리를 후려쳤다.

‘나 때문에. 다들 나 때문에…….’

잘 있을 줄 알았는데. 다소 걱정하긴 해도 나를 믿고 잘 지내고 있을 줄 알았는데.

‘아니었어…….’

내가 그렇게 떠나버리는 바람에 가족들은 완전히 무너졌었어.

후회는 없다. 돌아가도 똑같이 했을 터다.

다만, 그렇게 가벼운 마음으로 떠나지 말걸. 충분한 보루라도 만들어두고 갈걸. 단층에서 조금 더 빠르게 뛸걸.

이벨리아의 눈에 왈칵 눈물이 고였다.

불어오는 바람을 타고, 눈물이 아래로 뚝뚝 떨어진다.

“나…… 다녀왔어어…….”

봄바람이 나르는 인사가, 모두에게 새로운 시작을 알린다.

달려온 엘리시아가 딸을 와락 끌어안았다. 그 위로 휴고의 단단한 팔이 덮인다.

“그래. 내 아가…… 기다렸어…… 엄마가 정말, 정말 많이 기다렸어, 우리 딸.”

“미안해, 엄마. 흐으, 미안해…….”

난 정말 몰랐어. 다들 웃으면서 날 기다리고 있을 줄 알았어. 누구보다 강한 내 가족들은 나의 부재 앞에서도 끝내 굳건할 거라고, 그렇게 생각했어. 바보같이.

이벨리아가 떨리는 손으로 엘리시아의 야윈 어깨를 매만졌다.

“밥은, 엄마, 밥은 먹은 거야? 응? 왜 이렇게 말랐어……?”

“잘 먹었지, 그럼. 우리 딸 생각하면서, 잘 먹었지.”

단 한 번도 뭔가를 제대로 삼켜낸 적 없는 부모는, 딸이 걱정할까 봐 거짓을 말했다.

“오라버니들은? 잠은 잘 잔 거야? 피곤해 보이는데…….”

“항상 잘 잤지. 네 꿈을 꾸면서.”

단 한 번도 제대로 눈을 붙인 적 없는 형제는, 동생이 우려할까 태연히 웃어 보였다.

“엔리르는? 내 동생, 잘 쉬고 있었어?”

“그럼! 난 아무것도 안 하고 놀고먹기만 했지!”

단 한 번도 연구실에서 나온 적 없던 동생은, 누나 마음이 아플까 봐 짐짓 밝게 꼬리를 살랑였다.

“이브, 너는. 너는 왜 이렇게 많이 다쳤어, 응?”

“이거? 그냥 긁힌 거야! 다른 세계도 별 것 없던데, 뭘.”

그리고…… 단 한시도 쉬지 않고 험한 세계를 떠돌았던 딸은, 가족들이 속상해할까 봐 과장된 몸짓으로 볼을 닦아냈다.

가족.

내가 받을 커다란 상처보다 네가 받을 작은 생채기가 더 아프게 다가오는 관계.

하여 아르티나 일가 모두는 지옥과도 같았던 지난 1년을 별것 아니었던 일상으로 어설프게 포장했다.

거짓임은 서로 알고 있었다. 다만, 누구도 나서서 지적하진 않았다.

나의 안온함이 바야흐로 당신의 행복이라는 것을.

이제는 모두 알고 있기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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