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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녀님의 꽃밭에는 그들이 산다-276화 (276/323)

##  276화: 에드윈의 처형식

시간을 조금 앞으로 돌려, 이곳, 에르카디아 제국.

2차 인마전쟁의 마지막 전투가 끝난 이후 꼬박 한 달이 흘렀다.

인간과 연금술사, 그리고 악마.

유구한 시간 명맥을 이어 온 세력의 정면충돌은 제국에 상상을 초월하는 상흔을 남겼다.

에르카디아의 상징인 황궁은 반파되었고, 용맹하게 맞서 싸웠던 황제는 전사했으며, 미처 대피하지 못했던 제국민들은 처참하게 살해당했다.

여러 기운이 맞부딪쳤던 하늘은 여전히 어두웠고, 잔해에 깔려 죽은 이들의 시신은 아직도 수습 중이었다.

사망자의 이름을 새긴 비석이 끝도 없이 늘어간다.

제국민들은 날이면 날마다 광장에 모여 부둥켜안고 통곡했다.

너의 가족. 너의 연인. 너의 이웃.

그것들은 바꿔 말하자면 나의 이웃, 나의 가족. 나의 친우나 다름없었으니까.

***

마지막 전투 이후 두 달이 흐른 어느 날.

광장에는 평소보다 많은 인파가 몰려들었다.

오늘만큼은 애도와 비탄이 아닌 분노를 가득 담은 채로.

잔뜩 성난 군중의 목소리가 누군가의 죽음을 간절히 바라며 울려 퍼졌다.

광장 한가운데에 마치 보란 듯 세워진 처형대.

곧이어 처참한 몰골로 끌려온 죄인의 머리에서 낡고 냄새나는 자루가 벗겨진다.

빛바랜 은빛 머리칼이 드러나자 야유와 고함은 극에 달했다.

우우우우우-!

“죽여라! 목을 매달아!”

“아니, 화형이다! 사흘 밤낮을 불에 태워 죽여라!”

“죽여라! 당장 죽여! 때려죽여라!”

핏발 선 눈으로 고래고래 소리치던 누군가가 손에 꼭 쥐고 있던 돌을 던졌다.

도무지 실감이 나지 않는다는 표정으로 멍하니 아래를 바라보던 에드윈의 이마 정중앙에 날카로운 돌이 날아와 박힌다.

“크아악!”

찢어지는 듯한 통증과 함께 번뜩 드는 정신.

이건, 꿈이 아니다.

그래, 이건 꿈이 아니야.

현실. 어떻게 이 끔찍한 것이 현실일 수가 있지……?

에드윈은 턱을 떨며 주변을 둘러봤다.

그러자 보이는 건 동그랗게 올가미를 만들어 달아둔 밧줄.

“나, 나를…… 이 제국의 황족을…….”

아무리 죄를 지었다고 한들, 어찌 이렇게 품위 없는 죽음을 맞게 할 수가 있단 말인가!

독약도. 자결도. 깔끔한 참시도 아니고. 추잡하게 발버둥 치다가 온몸의 배설물을 다 쏟아내고서야 죽는다는 교수형이라니. 그것도 이 많은 군중들 앞에서!

믿을 수가 없어 입을 헤벌리는데, 돌멩이 몇 개가 더 날아와 에드윈의 얼굴과 몸 이곳저곳을 짓찧었다.

에드윈이 묶인 팔을 허우적거렸다.

“으아악! 뭐, 뭣들 하느냐! 내가 맞아 죽게 생겼는데!”

그러나 처형을 준비하는 집행인들은 들은 척도 하지 않았다.

외려 죄인의 비명은 더할 나위 없는 즐거움이라는 듯 비릿한 웃음을 지을 뿐이었다.

치욕적이었다. 이 대제국의 황족으로 평생을 떠받들어져 살아오던 에드윈에게, 고작 평민들 앞에서 구경거리가 되며 죽어가는 것은 더할 나위 없는 치욕이었다.

“차라리 얼른 죽여라! 어서 형을 집행하란 말이다!”

“쉬이. 진정하시지요.”

“……네놈!”

특유의 여유로운 목소리와 함께 두꺼운 양피지 두루마리를 들고 느긋한 걸음으로 처형대에 올라온 것은 바로 이크리안 카시스.

아무리 귀족 사회에 무지한 제국민들이라고 하나 이크리안 카시스를 모르는 이는 존재하지 않는다.

카시스 후작가의 후계자임을 차치하고서라도, 마탑주, 대마법사, 2차 인마전쟁의 공신. 고작 20대의 나이에 그가 이룩한 업적은 세 살짜리 코흘리개들도 줄줄 외고 다닐 정도였으니까.

가열하게 돌을 던져대던 제국민들이 손을 내리고 귀를 기울였다. 이를 빙 둘러보며 이크리안이 비죽 웃었다.

“이것 참. 내가 이런 곳에 나올 짬이 아닌데.”

“비, 비웃으려고…… 네놈이 기어코 내 마지막을 농락하려고……!”

“빙고. 그래서 자원했지.”

빙글거리는 웃음이 에드윈의 속을 뒤집었다.

버릇처럼 악을 지르며 분노를 표하려는데, 이크리안이 검지를 자신의 입술에 대고 작게 속삭였다. 닥쳐.

크흠. 목을 가다듬은 이크리안이 들고 있던 두루마리를 펼쳤다. 도르르 흘러내린 두루마리는 길디길어 그 끝이 바닥에 끌릴 정도였다.

“자아. 죄인은 듣든지 말든지.”

“네 이놈! 감히 이 제국의 황자에게 죄인을 운운-!”

퍼억.

경쾌한 타격음과 함께, 바락바락 소리 지르던 에드윈의 고개가 아래로 휙 꺾였다.

지금 나 머리 맞은 거야? 믿을 수 없다는 표정으로 에드윈이 시선을 들었다.

픽 웃은 이크리안이 에드윈의 머리를 다시 한번 내리쳤다.

“내가 분명 닥치라고 했을 텐데.”

“무, 무슨…… 황자에게 무엄…….”

그 말에 이크리안이 옆에 선 기사의 검을 빼앗아 검집째로 에드윈의 머리를 두들겨 패기 시작했다.

“황자는! 무슨! 얼어 죽을! 황자!”

퍽. 퍽. 퍽. 퍽. 어절마다 떨어지는 매질로 정신이 아찔하다.

“네놈 때문에 내가 뺑이쳤던 걸 생각하면……!”

야근의 원흉. 공무원의 숙적. 험난했던 지난날이 이크리안의 눈앞에 파노라마처럼 스쳐 지나갔다.

“네놈만 아니었으면 아르칸과 렐리안의 연애도 진작에 막았을 텐데-!”

한참을 두들겨 패던 이크리안이 머리칼을 쓸어올리며 제국민들을 일별했다.

“내가 이놈의 죄를 낱낱이 읊어야 하겠는가?”

마법사가 검집으로 죄인을 후려치는 장면을 보고 멍하니 입을 벌리던 제국민들이 일제히 고개를 저었다.

저놈의 죄는 여기 있는 모두가 알고 있다.

마족과 결탁하고 연금술사들을 끌어들여 기어코 황제 폐하를 시해하고 무고한 제국민들을 살해한 놈!

반역이다!

제국 전복을 꾀한 수괴다!

제국민들이 너나 할 것 없이 소리쳤다.

“잘들 알고 있군.”

이크리안은 쥐고 있던 두루마리를 제국민들 사이로 휙 던졌다.

“거기 상세한 죄목이 적혀 있으니 알아서들 보도록 하고.”

그러고선 표독스러운 표정의 에드윈을 바라보며 눈을 차갑게 가라앉혔다.

“본디 황족의 사형 전에 거쳐야 하는 절차가 몇 있기는 하지만-.”

“그, 그래, 저, 절차를 거치도록 하라, 절차를!”

“그걸 다 했다가는 내가 오늘도 야근하게 생겼으니 그냥 바로 집행하도록 하지.”

어차피 에드윈은 황족에서 제명되었기에 큰 문제는 없다. 이크리안이 집행인들을 바라보며 크게 외쳤다.

“불을 지펴라!”

“잠깐. 부, 불이라니……?”

“뭘 놀라나. 제국을 쑥대밭으로 만들고 수만 명의 무고한 목숨을 빼앗았으면 당연히 화형인 것을.”

“화, 화형……?”

허언이 아니라는 것을 입증하듯 나무 기둥이 세워지고 그 아래 장작더미가 착착 쌓여간다. 에드윈이 부들부들 떨었다.

세상에서 가장 고통스러운 죽음을 꼽자면 바로 불에 타 죽는 것이라고 하지 않던가.

심지어 기록에 따르면, 화형을 당하는 죄수는 하루 이상을 꼬박 살아 있는다고 한다.

몸을 직접 태우는 것이 아니라 장작에 불을 붙여 발끝부터 서서히 태우기 때문에.

에드윈이 격렬하게 몸부림쳤다. 두려움에 잠식된 눈동자가 짐승의 것처럼 번들거렸다.

“모, 목을 매달아라! 아니면 차라리 내 목을 베어라! 응? 화형, 화형은 너무하지 않으냐. 이래 봬도 내가 폐하의 아들인데! 황자인데!”

“그러게 계실 때 잘하시지.”

“형님, 형님도 이 사실을 알고 계시느냐! 형님 얼굴이라도 좀 뵙게 해다오, 응?”

염치없이 루드비히를 찾는 마지막 발악에 이크리안이 고개 숙여 속삭였다.

“지금 우리 전하께선 제정신이 아니시거든.”

“……?”

“편히 죽고 싶었으면 적어도 공녀님은 건들지 말았어야지. 그러면 적당히 거열형으로 마무리될 수도 있었을 텐데.”

“제, 제발, 제발…… 살려다오, 아니, 고통만 없이 죽여다오, 제발.”

“가장 고통스럽게 보내라는 지엄한 명이시라. 물론 그 명령이 없었더라도 내가 반드시 이리했겠지만.”

도무지 타협의 여지가 없는 죽음 앞에서 에드윈이 실금했다. 퀴퀴한 냄새가 사방으로 퍼져나갔다.

기사들은 아랑곳하지 않고 한때 이 제국 정상에서 온갖 부귀와 영화를 누리던 황족을 곧게 세워진 나무 기둥에 매달았다.

황족이면서도 돌이킬 수 없는 죄를 지은 반역자의 말로를 모두 똑똑히 눈에 새기라는 듯.

높은 기둥에 매달린 에드윈은 사지를 떨며 까마득한 아래를 내려다보았다.

모두가 한마음 한뜻으로 자신을 손가락질하며 침을 뱉어대고 있다.

아. 아아.

왜 이렇게 된 거지?

어디서부터 잘못된 거지?

어머니가 황후를 독살하였다는 것을 듣고 그것참 좋은 방법이라며 웃었을 때부터?

형님의 음식에 몰래 독을 탔다가 실패했을 때부터?

공녀를 가지고 싶어 탐을 냈을 때부터?

에드윈의 상념은 그리 오래 이어지지 못했다.

저 아래 겹겹이 쌓인 장작에 불이 옮겨붙었다.

매캐한 연기가 덮쳐들 듯 올라오고, 뜨거운 열기가 발바닥의 살갗을 벗겨낸다.

상상을 초월하는 고통. 겪어본 적 없는 격통.

“으아, 으아아아! 으아아아악! 사, 살려줘, 살려줘!”

찢어지는 비명이 광장에 울린다.

그 처절한 몸부림 앞. 그 누구도 동정을 내비치진 않았다.

그들의 부모를, 자식을, 남편을, 아내를, 친구를 모조리 앗아간 죄인의 마땅한 말로였다.

***

칭제(稱帝) 이래 가장 많은 사상자를 낸 반란.

깊이 관여한 자들은 화형.

조금이라도 발 들인 자들은 거열형.

그렇게 석 달 열흘.

광장에서는 하루가 멀다 하고 비명이 울려 퍼졌다.

***

전쟁 종식으로부터 넉 달 뒤.

점차 본래의 삶을 찾아가고 있던 제국민들 사이에 돌연 심상치 않은 소문이 돌았다.

루페르트 후작 각하와 아르티나 공녀님이 승전을 기리는 행사 그 어디에도 모습을 비추지 않으셨다더라.

그렇다고 전사자 명단에 기재되어 있지도 않다더라.

우리를 지키기 위해 가장 앞장서서 검을 휘두르셨다더라.

그러다가 반란의 수괴인 데퐁트 가문, 그리고 마왕을 손수 막아내시고선 사라지셨다더라.

살에 살을 붙인 소문이 끝도 없이 퍼져나가자, 황위 계승식을 준비하고 있던 루드비히는 이례적으로 얼굴을 드러내고 공표했다.

2차 인마전쟁. 감히 비견할 데 없는 전공을 세운 두 장군은 제국에 승리를 가져다 준 대가로…… 실종되었다고.

그날 밤이었다.

제국 전역, 작은 촛불들이 하나둘씩 모여 대지를 빼곡히 덮었다.

황궁 높은 곳에서 그 절경을 굽어보던 루드비히는 위태로이 창틀을 짚고 입술을 깨물었다.

“봐, 이브. 네 귀환을 바라는…… 제국민들의 기도야.”

내 소중한 친구.

내 그리운 벗.

“어서 돌아와, 제발…….”

너는 지금쯤 대체 어디를 헤매고 있는지.

***

전쟁 종식으로부터 다섯 달 뒤.

아르티나 공작저는 물에 잠긴 듯 고요 속에 빠져들었다.

가문의 일원 그 누구도 밖을 나서지 않았고, 방문객 역시 일절 받지 않았다.

대문이 열리는 경우는 단 하나. 바로 전쟁의 상흔으로 재산을 잃은 제국민들을 위해 구휼미를 풀 때.

가문의 일원을 잃은 슬픔 속에서도 어려운 이들에 대한 염려를 놓지 않는 영웅 가문.

그들을 향한 예우로, 제국민들은 매일 아침 갖가지 꽃을 꺾어 담장 앞에 놓아두었다.

언젠가 돌아오실 공녀님께서 그들의 작은 정성을 보고 활짝 웃어주시길 바라면서.

오늘도 담장 안쪽, 늘 그렇듯 선대 공작부인의 울음소리가 들려온다.

제국민들 역시 함께 가슴을 치며 눈물을 흘렸다.

***

이벨리아가 사라진 날로부터 어느덧 반년이 흘렀다.

루드비히의 대관식 준비는 일사천리로 마무리된 지 오래였다.

선대 황제의 서거 후 그리 오랜 시간이 지난 것은 아니었지만, 제국의 황좌가 비어 있을 수는 없는 법.

대관식을 치르고 황위에 오르시라고 청해도 고사를 반복하는 주군 덕에 보좌관인 에르트 백작은 골머리를 앓고 있었다.

“으으…… 전하께서 이번 달에도 대관식을 미루시면 빌어먹을 귀족들이 나를 찜쪄먹으려고 할 텐데!”

머리를 쥐어뜯던 그는 가벼운 발걸음으로 들어오는 이크리안을 향해 냅다 물었다.

“대관식 어떡하지? 나는 어떡하지?”

“뭐. 받으실 분께서 싫다고 하시는데 어쩌겠습니까. 억지로 들어 올려서 황위에 던져버릴 수도 없는 노릇이고.”

“전쟁 끝나고 벌써 반년이야, 반년! 우리 제국 황위가 이리 오랜 시간 비어 있던 경우가 건국 이래 어디 있었는 줄 아는가?”

이크리안이 어깨를 으쓱이며 초콜릿 한 알을 입에 털어 넣었다.

“세상에는 늘 처음이 있는 법이지요.”

“원래 마법사들은 다 그렇게 유유자적 뺀질뺀질한가?”

“그 유유자적 뺀질이가 지난 전쟁에서 백작님의 목숨을 구한 것은 까맣게 잊어버리셨나 봅니다. 언제는 저를 형님으로 모시겠다 눈물 콧물 짜시더니.”

“…….”

“할 말이 없으신 모양입니다?”

“……크흠. 그래서, 무슨 수를 좀 내 보게, 형님.”

“호칭 마음에 드는군요. 근데 저라고 뭐 달리 수가 있겠습니까.”

“적어도 언제쯤 대관식을 진행하시겠다 하는 확답이라도 좀 받아야 귀족들을 진정시키지 않겠는가.”

“아. 그것만 알면 되는 겁니까? 언제쯤 진행하실지?”

“그것만 알아도 다행이지!”

“그 답은 알 것 같은데요.”

“엉? 안다고? 답을? 언젠데?”

“직접 여쭤보시지요.”

이크리안은 에르트 백작의 손목을 끌고 루드비히의 집무실 문을 두드렸다.

똑똑 또도독 똑똑 또도독.

“전하. 전하. 전하. 전하.”

“그, 그만 좀 두드리게! 채신없이 왜 이러는가!”

“전하께서 요즘 넋 놓고 계시길 다반사라. 이래야 재깍 답을 하십니다.”

곧이어 돌아오는 들어오라는 대답은 다 죽어가는 사람의 것처럼 힘이 없다.

문을 여니 집무실 안에서는 음울한 기운이 뻗쳐 나온다.

한때 제국의 태양이라 불렸던 이는 온데간데없고 수척한 좀비 하나가 앉아 있었다.

“전하. 괜찮으십니까?”

“……괜찮다.”

“사실 그냥 예의상 여쭈었습니다. 안 괜찮으신 거 아는데 그 이유도 알 것 같으니 그냥 넘어가겠습니다.”

“……이 자식이. 오늘은 또 왜 왔나.”

“아. 다름이 아니고, 전하께서 대관식 일정을 알려주시지 않으면 이번 귀족회의를 끝으로 에르트 백작을 더는 볼 수 없으실 겁니다. 귀족들이 백작님을 잘근잘근 씹어 삼킬 예정이거든요.”

세 치 혀로는 세드릭 뺨치는 이크리안이 자신의 편을 들자, 에르트 백작은 천군만마를 얻은 것처럼 눈에 쌍심지를 켜고 고개를 끄덕였다.

가만히 바라보던 루드비히가 메마른 입술을 열었다.

“조금 더…….”

“전하. 벌써 반년이 지났습니다. 반년이요. 황좌가 너무 오래 비어 있는 게 아니냐는 귀족들의 불만이 이만저만이 아닙니다.”

“……봐줘. 백작.”

“예에?”

어울리지 않게 처량한 목소리에 에르트 백작이 바보 같은 소리를 내며 되물었다.

“황좌. 이브가 없으면 내겐 아무 의미 없는 거, 그대도 알잖아.”

“…….”

내 제국은. 내 황위는.

“오로지 이브에게 평안한 울타리를 만들어주고자 했던 바람에서 시작된 거라…….”

그 아이가 내 대관식에 없으면, 나는 제위의 첫걸음부터 잘못 내딛는 거라는 생각을 도무지 떨칠 수가 없어서.

“백작.”

“어어, 예, 전하.”

절절하게 새어 나오는 주군의 진심에 에르트 백작의 음성이 자신도 모르게 누그러졌다.

“그대의 마음은 잘 알고 있어. 내가 무책임하다는 것 또한.”

“…….”

“그래도, 반년만. 딱 반년만 더 기다려줘.”

“…….”

“이브는 돌아올 거야, 반드시. 그때 이브에게 보여주고 싶어.”

보라고. 이것이 너를 위해 내가 만든 제국이라고.

무슨 일이 있어도 너를 감싸고 놓지 않을, 너의 울타리라고.

“그때까진 전쟁의 상흔을 덮는 데 주력하도록 할 테니까…….”

루드비히가 단단한 팔을 올려 눈을 가렸다.

제대로 자지도 먹지도 못하여 수척해진 뺨으로 눈물이 흘렀다.

수도 없는 생명의 위협 앞에서도 흘린 적 없던 옥루.

못 본 척, 에르트 백작은 그저 깊이 고개를 숙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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