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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녀님의 꽃밭에는 그들이 산다-273화 (273/323)

##  273화: 대한민국, 윤설

동쪽의 빛이 머무는 곳.

동이 트는 나라, 대한민국.

이 나라에는 건드리면 반드시 피를 보게 되는 존재가 있다.

바로 대학수학능력시험, 줄여서 수능을 앞둔 수험생.

윤설은 바로 그 수능을 고작 50여 일 앞둔 고등학생이었다.

세상에 사정 하나 없는 사람 어디 있겠느냐마는, 특히 이 대한민국에서 조실부모(早失父母)한 청소년에게는 상상 이상의 각종 사정이 죄다 따라붙는 법이다.

네 살에 불의의 사고로 부모님을 여의고 하이에나 같은 친척들 손에 맡겨져 신데렐라 부럽지 않은 눈칫밥 인생을 산지 어언 열다섯 해.

또래들보다 이른 나이에 일터로 떠밀린 윤설은 오늘도 쉽지 않은 아르바이트를 마치고 얹혀사는 집으로 향하는 중이었다.

현 상황에서 그나마 인생 역전을 노려볼 수 있는 도구인 영어 단어장에서 눈을 떼지 않은 채로.

‘대학만 들어가면 바로 기숙사 신청해야지.’

혹시 떨어지더라도 괜찮다. 근처 고시원을 전전하는 한이 있더라도 이 지긋지긋한 집구석에선 반드시 독립할 거니까.

‘로스쿨 준비도 알아보고.’

변호사가 되면. 최소한 법률에 있어서는 이 나라 그 누구도 얕보지 못하는 직업을 가지게 되면.

그러면 이모네 식구들도 지금처럼 자신을 쉽게 대할 수만은 없을 터다.

발버둥 쳐도 바뀌지 않는 것들이 수두룩한 세상에서 오로지 노력만으로 일궈낼 수 있는 미래는 기댈 곳 하나 없는 청소년의 마지막 보루인 동시에 방파제였다.

도피성 상념은 지독히 고단한 이 밤을 그럭저럭 버틸 만하게 만들어준다.

가로등이 흐리게 점멸하는 좁은 골목을 지난 윤설은 그리 크지 않은 빌라의 현관문을 열었다.

오래되어 경칩이 마찰하는 소리가 듣기 싫게 울린다.

깜박, 신발장의 센서등이 켜짐과 동시.

- 까앙!

싸구려 스테인리스 컵 하나가 날아와 그대로 왼쪽 머리를 강타한다.

“…….”

마치 물 풍선이 터지듯, 담겨 있던 물이 사방으로 튀어 윤설의 몸을 축축하게 적셨다.

얼굴로 흘러내린 물을 대강 닦아내자 성큼성큼 다가온 피붙이가 당당하게 손을 내밀었다.

“알바비.”

“…….”

“뭐 해, 알바비 안 내놓고! 오늘 받는 날이라며!”

새삼스럽진 않았다. 보호자의 동의를 받은 청소년의 아르바이트가 가능한 만 15세 이후부터 현재까지 매달 있었던 일이니까.

윤설은 푸근한 인상의 사장님이 쥐여준 흰 봉투를 군말 없이 내밀었다.

그 자리에서 열어 금액을 확인한 중년 여성이 반지 낀 손을 들어 윤설의 머리를 퍽 내리쳤다.

“5만 원은?”

“……그건 문제집 살 돈이라서…….”

“문제집 살 돈이라서? 문제집 살 돈이라서? 길거리에 나앉게 생긴 거 먹여주고 재워주고 키워줬더니, 뭐? 문제집 살 돈이라서?”

이모는 마치 비꼬듯 윤설의 말투를 우스꽝스럽게 흉내 냈다.

그러다 눈앞에 잔뜩 찡그린 얼굴을 들이미는 것이, 재깍 내놓지 않으면 매 타작이 시작될 것은 뻔했다.

반항할 여력은 없다. 평생 줄에 묶여 사육된 동물은 줄이 허용하는 반경을 결코 벗어나지 못한다. 윤설도 다르지 않았다.

하여 윤설은 주머니에 꼬깃꼬깃 접어 넣어둔 5만 원을 꺼내 이모에게 건넸다.

매몰차게 앗아간 피붙이가 중얼거렸다.

“하여간 개랑 윤설은 맞아야 말을 듣는다니까. 수준이 아주 똑같아. 동물이랑.”

잔뜩 가시 돋친 날카로운 말은 이제 더는 아이를 상처 입히지 못한다.

찔릴 데가 남아 있어야 통증도 느끼는 법인데, 이미 심장이고 마음이고 정신이고 너덜너덜한 넝마가 된 지 오래였으니.

돌아서서 창고나 다름없는 방으로 올라가려는 윤설에게 한 번 더 일갈이 날아들었다.

“내일 우리 딸 도시락 잊지 말고 싸둬!”

“……아.”

깜박 잊고 있었다.

“중요한 날이니까 소화 잘되는 거로. 알지?”

“네.”

내일 수능에 앞서 실력을 점검하는 모의고사를 치르는 것은 윤설이나 동갑내기 사촌이나 매한가지인데.

이모의 눈에는 한쪽만 수험생으로 보이는 모양이었다.

시계는 어언 11시를 가리키고 있었지만, 윤설은 다시 집을 나섰다.

빌어먹을 사촌의 도시락 재료를 미리 사두기 위해서.

***

오밤중의 마트 심부름은 제법 흔한 일이었다.

마치 놀리기라도 하는 것처럼, 이모와 이모부, 그리고 두 남매는 번갈아 가면서 이것저것 사 오라고 시켰으니까.

하도 오가다 보니 나름대로 발견한 지름길. 아래가 풀로 뒤덮인, 조금 높은 담을 넘으면 빙 둘러가지 않아도 된다.

오늘도 어김없이 담 위로 훌쩍 올라간 뒤 평소와 다름없이 착지하는데.

- 물컹.

영 이상한 감촉이 발을 타고 찌르르 올라온다.

“뭐야. 설마 토끼라도 밟았나?”

천천히 아래를 내려다보니…….

“사람?”

사람이다. 심지어 눈을 감고 추욱 늘어져 있는. 늘 얼음장같이 차분하던 윤설의 얼굴에 미세한 균열이 일었다.

“이, 이보세요. 이보세요!”

어깨를 흔들다 이내 뺨을 짝짝 내리치자 사내가 느리게 눈을 깜박였다.

“괜찮으세요? 혹시 제가 밟아서 기절하신 건가요? 구급차 불러드려요?”

물음이 끝날 때까지 흔들림 없이 윤설을 올려다보던 사내가 입을 열었다.

“……아무도 부르지 마.”

“어디 아프신 건……?”

“하늘에서 떨어져도 끄떡없어.”

허세가 심하다고 생각했는데 웃음기 없이 맞닿아오는 눈은 상당히 진지하다.

윤설은 마치 빨려 들어가기라도 하는 것처럼 사내의 오묘한 눈동자를 응시했다.

문득 이질적인 느낌이 든다. 어디선가 읽은 적이 있다. 사람이 맞나, 하는 생각이 들면 그건 사람이 아닌 거라고.

“혹시 귀신……?”

“아니.”

“사람, 맞죠?”

“아니.”

그럼 뭐야. 의문을 담은 윤설의 얼굴을 빤히 올려다보며, 사내는 묘하게 당당한 태도로 마치 선언하듯 말했다.

“난 토끼다.”

윤설은 고개를 끄덕였다.

아하. 미친놈이로구나.

목소리가 숫제 유치원생을 대하듯 한층 나긋해졌다.

“토끼님. 혹시 보호자는 있으신가요?”

“있는데 잠시 잃었다.”

“그럼 집은요?”

“있는데 잠시 잃었다.”

“갈 곳은 있으시고요?”

“있는데 길을 잠시 잃었다.”

“……뭘 다 잠시 잃었대.”

경찰에 신고할까. 그러면 알아서 정신병원이나 쉼터 같은 곳에 인계할 텐데. 윤설이 고민하던 찰나였다. 모자란 사내가 물었다.

“길. 잃었을 땐 어떻게 하지?”

“제자리에 있어야죠, 아무래도?”

“찾아 나서는 게 아니고?”

“보호자 있으시다면서요. 그분이 찾으러 오실 텐데 그럼 얌전히 기다려야 만나죠. 괜히 돌아다녔다가 엇갈려요.”

“그렇군.”

간결히 답한 사내는 그대로 담장에 머리를 툭 기댔다. 그 폼이 마치 이곳에서 몇 날 며칠이고 주인을 기다릴 강아지 같다.

“여기서 기다리라는 말은 아니었는데요.”

“……?”

“아무리 봐도 우리나라 사람, 아니, 우리나라 토끼는 아닌 것 같아서 말씀드리는데, 대한민국에선 수상쩍은 토끼가 이렇게 막 길거리에 나앉아 있고 그러면 신고가 들어가거든요.”

“신고. 그러면 어떻게 되지?”

“경찰이 와서 잡아가죠.”

“그게 뭔지는 모르겠지만 내가 이긴다.”

“이기면 더 문제고요. 공권력엔 져주는 게 예의라.”

알 수 없는 것투성이로군. 언짢다는 듯 작게 읊조린 사내가 천천히 몸을 일으켰다.

앉아 있을 때는 잘 몰랐는데, 윤설이 한참 고개 꺾어 봐야 할 정도로 거대하다.

길 잃은 토끼 주제에 마치 초식동물을 앞에 둔 포식자처럼, 사내가 느른하게 요구했다.

“그럼, 날 주워가라.”

***

놀라서 커진 눈. 피곤한 듯 눈가 주변엔 검은빛이 돌고 있으나, 그 사이 눈동자만은 여전히 맑게 안광을 뿜는다.

아가레스는 그 작은 것에서도 필사적으로 이벨리아의 흔적을 찾았다.

너라는 건 이미 알고 있었다.

이 단층 속, 나의 이정표는 바로 너니까.

나를 밟았을 때 ‘뭐야, 설마 토끼라도 밟았나’라고 말하는 것을 듣고는 하마터면 웃음을 터뜨릴 뻔하지 않았던가.

어떻게 너는 어느 세상에서 어느 육신을 입고 있든 그저 너다운지.

한편 제대로 들은 것이 맞나 귀를 의심하던 윤설은 꼿꼿하게 선 사내를 올려다보다가 고개를 저었다.

“그, 미안하지만 모르는 사람, 아니, 모르는 토끼를 주워갈 정도로 여유롭진 않아서요.”

“……모르는 토끼 아닌데. 서럽게.”

“저도 얹혀사는 처지라. 그럼 이만 가볼게요. 부디 안전히 보호자 찾으시길.”

아. 혹시 도움이 필요하시면 국번 없이 112로 전화하시고요. 덧붙이며 윤설은 돌아섰다.

일견 차가운 그 뒷모습마저도 아가레스는 그저 달가웠다.

필요 이상 돕지 않는 깔끔한 성격도. 선을 넘는 자비를 베풀지 않는 단호한 성정도.

단층 속에서 어언 수십 년의 시간을 보냈음에도 여전히 또렷하기만 한 너와 닮았다.

……그리운 마음이 곧 갈증이 되어 목을 새카맣게 태워버리는 느낌이다.

***

- 쨍그랑!

발치에 유리컵이 날아와 깨졌다.

날을 세운 유리 조각이 발목을 스치고 지나간다.

“…….”

그럼에도 담담한 표정이 외려 이모의 분노에 불을 지핀 듯하다.

잔뜩 성이 난 피붙이가 두툼한 손을 번쩍 치켜들어 윤설의 머리를 후려쳤다.

“어디 딴 길로 샜다 이제 들어와!”

“……산책 좀 했어요.”

“시킨 게 있으면 빠릿빠릿하게 움직여야 할 거 아니야! 쓸모라곤 고작 그것밖에 없는 게 뒤뚱뒤뚱 산책이나 하다 와? 엉?”

“……죄송합니다, 이모.”

고개를 숙였음에도 뭐가 그리 마음에 안 드는지 바락바락 질러대는 소리. 그 사이로 텔레비전에서 나오는 왁자한 웃음이 덧씌워진다.

윤설은 알 수 없었다.

뭐가 저렇게 화가 날까.

또 뭐가 저렇게 웃길까.

커다란 고함과 유쾌한 웃음은 어떻게 만들어내는 걸까.

그 형체를 불문하고, 폭발하듯 격한 감정은 가진 이들의 사치나 다름없다.

매시간 매초 그저 존재하는 것만으로도 버거운 이들에겐 지독히 차갑고 정적인 밑바닥밖에 남지 않기 때문에.

***

빈말로라도 청결하다고 할 수는 없는 골목.

빌라 담벼락에 기대 있던 아가레스는 치솟는 살심을 온 힘을 다해 내리눌렀다.

“저 개자식들이…….”

극심하게 이는 분노로 눈앞이 흐려진다.

이브가 저런 삶을 살았다고?

저런 말을 듣고, 폭력을 경험하고, 저딴 대접을 받으면서 살았다고?

모든 이들이 감히 손 하나 대지 못해 절절매던 이브인데.

세상 모든 귀한 것들을 다 그러모아도 감히 가져다 댈 수 없는 존재인데.

‘이래서였나. 네가 엘라임에게 가족들의 사랑을 받게 해달라 청했던 건.’

가족들에게. 그 무엇보다도 든든한 울타리가 되어줘야 하는 가족들에게. 외려 그 무엇보다도 큰 상처를 받아서였나.

누군가 심장을 파헤쳐 갈기갈기 물어뜯는다 해도 이보다 고통스럽진 않을 터다.

아가레스를 더욱 비통하게 만든 건-.

‘이건 내 탓이다.’

바로 확신이었다.

세계는 혼(魂)을 가린다.

자기 영역에서 태어난 혼은 자기 새끼처럼 품어주는 반면, 다른 세계에서 넘어온 혼은 으르렁대며 배척하게 마련.

저 인간, 그러니까 이브의 전생이 기구한 것은 결코 우연이 아니었다.

과거, 천사였던 이브가 물레의 작용으로 사라지고 난 뒤. 길을 잃은 혼은 헤매다 헤매다 이 세계로 떨어졌을 테고.

세계는 작정하고 불운을 만들어내지는 않았을지언정, 가장 불행한 자리에 외부에서 흘러들어온 혼을 꽂아두었을 터다.

그래야, 대신하여 액운을 받아낼 존재가 있어야, 이 세계에서 태어난 혼 중 하나라도 덜 고통받을 테니까.

‘과거의 내가 물레를 조금 더 일찍 부쉈더라면. 그래서 그 천사가 소멸하지 않았더라면.’

그랬다면 너의 혼은 우리의 세계에 그대로 남았을 테고, 이딴 전생 따위 겪지 않아도 되었을 텐데.

2층 다락. 자그마한 창문 틈 사이로 쪼그려 앉아 울고 있는 인간이 보인다.

아가레스는 당장에라도 쳐들어가려는 발을 애써 붙잡아두었다.

저 인간은 이브이자 이브가 아닌 이브의 전생.

함부로 이곳의 일에 개입하였다가는 어떤 나비효과가 일어나 현재의 이브에게 영향을 미칠지 모른다.

‘당분간은…… 그저 지켜볼 수밖에.’

아가레스는 마치 맹세하듯 심장 위에 오른손을 올리고 작은 창을 올려다봤다.

‘조금만. 부디 조금만 울기를.’

언젠가 내가 너의 발치에 세상 전부를 놓아줄 테니.

***

길거리에는 차가 없었다.

인적도 평소보다는 훨씬 드물었다.

일생일대의 시험을 앞둔 수험생들을 정신없이 날라준 경찰들은 차에 기대 한숨 돌리고 있었고, 시험장 앞에서 온갖 물건을 팔던 상인들은 보따리를 싸서 철수하고 있었다.

그리고…….

윤설은 한바탕 흥분이 휩쓸고 가 묘하게 고요한 거리에 서 있었다.

그리도 애끓는 마음으로 준비했던 수능 시험장엔 들어가지도 못한 채로.

별 이유는 아니었다.

그저 닫힌 방문이 열리지 않았을 따름이다.

다락방의 창문은 몸을 빼내기엔 너무 작았을 따름이다.

대한민국 최고의 대학도 노려봄직 하다는 윤설의 뛰어난 성적은 비슷한 연배의 사촌들에겐 눈엣가시 그 이상도 이하도 아니었으니까.

아마 자신들보다 좋은 대학에 가서 으스대는 꼴은 죽어도 못 본다, 뭐 그런 심정이었을 터다.

“…….”

윤설에게 수능은 학업의 성취를 검증받는다는 수준의 의미가 아니었다.

탈출구였고, 숨구멍이었으며, 보다 직관적으로 표현하자면, 생존이었다.

텅 빈 거리.

윤설은 그저 있었다.

서 있음에도 산산이 부서진 채로.

***

다 빠져나간 기력이나마 그러모으는 데는 제법 오랜 시간이 걸렸다.

한참 뒤. 겨우 발을 돌린 윤설의 앞.

검은 세단 한 대가 멈춰 섰다.

화려한 셔츠에 정장을 갖춰 입은 남성 몇이 껄렁껄렁한 걸음으로 내린다.

언뜻 보이는 손목에는 문신이, 손에는 가죽으로 만든 휘황찬란한 클러치 백이 들려있다.

자신과는 일절 상관없는 세계의 사람들. 윤설은 괜히 눈 마주쳐 불똥 튀지 않게 시선을 내리고 슬쩍 걸음을 옮겼다.

고작 두 걸음 나아간 때였을까.

가장 앞에 있던 사내가 목을 벅벅 긁으며 손가락을 까닥였다.

“잠깐.”

“……저요?”

“거, 윤설, 맞제?”

“맞……는데요.”

“아버지 존함은 윤영규. 어머니 존함은 서경희 되시고?”

“어떻게, 아니 누구……?”

“어어. 별것은 아니고.”

진한 사투리를 구사하는 사내가 웃옷 주머니에 손을 넣어 뒤적이더니 단정히 두 번 접힌 종이를 꺼내 느리게 펼쳤다. 마치 연극이라도 하는 것처럼.

이내 눈앞에 떡하니 들이밀어지는 서류의 명칭은 소비대차계약서.

시선을 조금 아래로 내리자-.

제1항. 갑은 을에게 금 3억 원을 대여하고, 을은 이를 차용한다.

이게 뭐지. 이게 대체 뭐야. 윤설의 손이 벌벌 떨렸다.

황망하여 조금 더 떨군 시선 끝에는 아빠의 이름과 서명, 주민등록번호가 수기로 기재되어 있다.

등골이 오싹하다. 머리가 멍해진다.

남자는 검지로 계약서를 툭툭 두드리며 누런 이를 씨익 드러냈다.

“부모가 못 갚았으니 자식 된 도리로 당연히 갚아야제? 이자 두둑이 쳐서?”

“…….”

“혹시나 해서 경고하는데, 잔머리 굴릴 생각은 하지도 말어. 나는 지옥 끝까지 따라가서라도 내 돈은 반드시 받아내니께.”

3억.

시야가 핑 돌아 윤설이 휘청이자 사내가 인심 쓴다는 듯 말을 이었다.

“에이, 쯧쯧. 아무리 그래도 이제 막 성인이 되는 핏덩이한테 무작정 이 큰돈을 내놔라 하는 것도 어른으로서 도리가 아니긴 하제.”

“…….”

“여짝으로 전화혀. 좋은 일자리 하나 소개해 줄라니까.”

발치에 떨어지는 명함.

“이 돈으로는 까까 사 먹고. 응?”

그 옆에 팔랑이며 버려진 만 원짜리 지폐 한 장.

다시 세단에 올라탄 이들이 사라지자 윤설은 그대로 무너졌다.

앞에 놓인 이것들이 세상 대신 말해주는 듯했다.

이 세상에서 너의 가치는. 너의 인생은.

딱. 이 정도라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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