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272화: 처음과 끝이 다 우리였어
시간을 조금 앞으로 돌려서.
이벨리아는 기어코 재림절에 현현한 천사를 잡아채는 데 성공했다.
천사에게 신계로 안내하라고 했던 것이 회유였는지 협박이었는지를 따지자면 아마 후자에 조금 더 가까울 터다.
아가레스를 찾겠다는 목표로 뵈는 게 없어진 이벨리아에게는 천사 납치극에 기겁한 신성 왕국 사람들이라든가, 살려달라며 울먹이는 천사라든가, 손에 쥐었던 단검 같은 것은 모두 사소한 문제들이었으니까.
우여곡절 끝에 천사의 등에 타서 하늘을 날고 있는 지금.
잠시 덮어뒀던 양심이 콕콕 고개를 들기 시작했다.
이벨리아는 훌쩍이고 있는 천사의 날개 아래를 톡톡 두드렸다.
“저기-.”
“흐으, 살려주세요, 죽이지 말아주세요.”
“그렇게 말하니까 내가 꼭 납치범이라도 된 것 같잖아.”
“맞잖아요…….”
“안내를 부탁한 거지.”
“칼을 목에 대고요?”
“…….”
변명할 여지 없는 실책이다.
심히 미안해진 이벨리아는 반드시 만나야만 하는, 목숨보다 소중한 이가 신계에 잠시 머물고 있다고 설명했다.
“어쨌든 너를 만나서 정말 다행이다. 단순히 하늘만 오른다고 해서 갈 수 있는 곳이 아니구나, 신계는.”
구름 속에 가려진 아치문을 통과할 때마다 주변이 급격히 변하는 것을 보아하니 아마 게이트와 비슷한 원리인가 보다. 천사가 코맹맹이 소리로 답했다.
“그럼요. 신계를 뭐로 보시고.”
“아직도 울어?”
“……훌쩍.”
“아까 거칠게 군 건 정말 미안해. 진심으로 사과할게.”
“네에, 목숨보다 소중한 이가 불의의 사고로 신계에 있다고 하셨으니까…….”
그런 사정이라면 그리 날뛰시는 것도 이해는 가요. 천사가 작게 덧붙였다. 그 순한 반응에 이벨리아가 물었다.
“천사들은 다 너처럼 착해?”
“보통은 그래요.”
“아닌 경우도 있어?”
“얼마 전에 입이 아주 험한 분이 태어났다고 들었어요. 심기가 뒤틀리면 손가락을 콱 물어버리신대요.”
코를 들이마시면서도 천사는 꼬박꼬박 대답을 내밀었다.
신이 허구한 날 짓밟아 되돌리는 이 세계.
적어도 천사와 정령만큼은 완벽한 세상을 창조하겠다는 신의 의도에 정확히 부합하는, 이프리트의 표현을 빌리자면 조금 맹한 존재들이었으니.
여태 지나온 문과 달리 금빛으로 드높은 아치문을 날갯짓 한 번으로 지나치며, 천사가 말했다.
“자. 다 왔어요. 이곳이 세계에서 가장 아름다운 곳, 신계랍니다.”
“……드디어.”
십수 년의 시간을 걸은 끝에 바야흐로 밟은 신계의 초입이었다.
***
신계의 초입.
다른 명칭으로, 에덴의 동산.
인류 최초로 성역을 밟고 선 이벨리아는 끼기긱 목을 돌려 천사를 바라봤다.
“있지. 여기 혹시 지옥이야?”
“이, 이게 대체 무슨……?”
고생고생해서 올라온 하늘 위가 영 쑥대밭이다.
나무는 죄다 뽑혀 땅을 나뒹굴고 있고, 인기척이라곤 없는 데다가, 심지어 탐스러운 열매들도 죄다 부스러져 처박혀 있는 것이 아닌가.
신계는 무슨. 우리 토끼가 사는 마계도 이렇진 않았는데.
“천사야. 아무래도 너희 집 망했나 봐.”
“그, 그런가?”
아무리 봐도 빚쟁이들이 휩쓸고 간 모양새라 이벨리아가 주변을 살피던 찰나.
자욱한 흙먼지 가운데 엉엉 우는 소리가 희미하게 들려온다.
이벨리아가 천천히 걸음을 옮겼다. 겁 많은 천사는 이벨리아의 옷자락을 부여잡고 조심조심 뒤를 따랐다.
점점 소리가 커진다. 동시에 덩그러니 앉은 형체가 보인다.
“흐아아아앙-!”
“…….”
지척으로 다가가 내려다보니 금빛 머리칼의, 작은 날개를 단 천사 하나가 서럽게 울고 있다.
제법 어려 보이는데. 생각하며 이벨리아가 쪼그려 앉았다.
그러자 순하게 생긴 천사가 놀라 질겁하며 엉덩방아를 찧는다.
“흐아- 딸꾹! 흐아! 뭐야!”
“넌 뭐야.”
“내가 먼저 물었잖아!”
“난 인간. 친구를 찾는 중. 혹시 잘생긴 토끼 한 마리 봤어?”
“……난 천사. 방금 친구를…… 훌쩍…… 잃었는데…….”
그 말에 이벨리아가 천사의 어깨를 살짝 잡았다가 놓았다. 이방인이 무언으로나마 건네는 위로에 천사가 히끅 숨을 넘기며 말을 이었다.
“잘생긴 토끼라면…… 까매?”
“까매. 근데 눈은 금색.”
“훌쩍…… 혹시 이름은 아가레스?”
이벨리아가 천사의 어깨를 와락 부여잡았다.
“봤구나. 너.”
“으응.”
“지금 어딨어.”
“……없어. 이제 여기.”
삽시간에 매서워진 기세에 천사가 살짝 어깨를 움츠리고 답했다.
“내가 잃은 친구도 걔거든.”
***
어쩌다가. 이벨리아가 묻자 천사는 숨넘어갈 듯 딸꾹질을 하면서도 꽤 성실하게 답했다.
“나를 구하려다가 신물을 부숴서. 다른 견습신들하고 같이 신벌을 받아서 떨어졌어. 지상으로.”
“빌어먹을. 한발 늦었네.”
이벨리아가 신경질적으로 금빛 머리칼을 쓸어올렸다.
허리께에서 찰랑이는 머리칼을 멍하니 응시하던 천사는 문득 자신의 머리칼을 쥐고 가만히 내려다보았다.
이벨리아의 푸른 눈이 절대 포기 않겠다는 투지로 빛났다.
그러자 천사는 옆에 고인 물에 어렴풋하게 비치는 자신의 눈동자를 깊이 들여다보았다.
그리고.
“아.”
짧은 감탄사. 천사가 여전히 눈물 젖은 얼굴로 옅게 웃었다.
“그렇구나. 단층. 그래. 아가레스에게 이곳은 단층이었어.”
“……?”
“그렇다면 네가 바로 이정표로구나.”
에덴의 동산을 지키는 케루빔(cherubim).
가로되, 하늘 아래 모든 지혜를 담았다 하여 지천사(智天使).
아가레스가 관심을 가졌던 단층. 이정표의 존재를 들었을 때의 반응. 자신의 머리칼과 눈을 빼닮은 이 인간.
그리고 이 인간이 상처와 재로 엉망이 된 얼굴을 하고 신계까지 오른 지금.
조각을 모아 실체를 파악하기는 어렵지 않다.
너는.
곧 나로구나.
“잃은 게 아니었네. 내 친구.”
“……?”
“다시 만나려고 오랜 시간 헤어진 거였어.”
천사가 이벨리아의 손을 붙잡았다. 상처와 굳은살로 거칠어진 손이 안쓰러우면서도 고맙고 대견하다.
“있잖아, 혹시 네 친구 중에 엘라임도, 페르세스도, 이프리트도, 트로이도 있어?”
“있어.”
“다들 행복하대?”
그 물음에 이벨리아는 천방지축 사고를 치고 다니는 정령왕들을 떠올렸다. 그러자 자연히 실없는 웃음이 샌다.
“응. 다들 잘 지내. 심지어 연애도 하면서.”
“……다행이다.”
정말 다행이야.
우리 모두는 다시 만나는구나.
먼 길 돌아도 기어코. 아주 엇갈려도 반드시. 오래 헤매어도 끝끝내.
우리는 다시 벗의 연을 맺는구나.
그리고 그때의 나는-.
기어코 이곳으로 돌아와 그대들을 구해내는구나.
***
천사는 울면서 웃었다. 이벨리아는 방해하지 않았다.
세상에 사연 하나 없는 이 없고, 이벨리아는 친절히 그걸 묻고 듣는 성격은 아니었으니까.
조금 뒤. 마치 먹구름이 갠 하늘처럼 해사해진 얼굴로 천사가 물었다.
“아가레스. 찾으러 갈 거지?”
“물론이지.”
“그러려면 다시 지상까지 내려가야 할 텐데.”
“지상 아닌 지옥이라도 가.”
“……너희는 엄청 좋은 친구였어?”
“친구-.”
잠시 뜸을 들인 이벨리아가 살짝 얼굴 붉히며 답했다.
“-라기보다는, 내 전부야.”
그 답이 참 흡족하다는 듯 천사는 맑게 웃었다.
“그럼 반드시 찾아야지. 바로 내려보내줄게.”
“그럴 수 있어? 저 천사는 날 업고 한참을 올라왔는데.”
천사는 여전히 바닥에 주저앉아 숨을 고르는 동료를 슬쩍 바라보고는 벽안을 휘어 접었다.
“내가 이 성지를 지키고 있는 이유가 뭔데.”
“열매를 잘 가꿀 것 같아서?”
“……계급이 높아서야.”
인간 하나 내려보내는 건 별일도 아니란 소리지.
천사의 고운 손가락이 이벨리아의 이마에 닿으려던 찰나.
내내 기민한 눈으로 천사를 훑던 이벨리아가 살짝 고개를 뒤로 빼고 말했다.
“잠깐. 내려가기 전에 하나만 확인하고.”
“뭔데?”
“너.”
“응.”
“나지.”
지혜를 담뿍 퍼담은 천사의 눈에 이채가 스친다.
“알아챌 줄은 몰랐는데. 어떻게 알았어?”
“아가레스가 널 지키려다 신물을 부쉈다며.”
“그런데?”
“아스는 분명 어떤 식으로든 알았을 거야. 내가 이 단층에 뛰어들었다는 걸. 그런데도 얌전히 기다리지 않고 너를 지키려다 지상으로 떨어진 걸 보면, 네가 곧 나야.”
“……대단한 오만함이네.”
“오만함이 아니라 사실이야. 나는 걔한테 그런 존재거든.”
신이자, 하늘.
지키다 추락해도 기꺼운, 유일한 구원이자 주인.
“과거엔 아마 널 지키려다 떨어졌을 테고, 이번엔 네가 나라는 것을 알고 지키려다 떨어졌겠지.”
이벨리아가 천사의 머리에 턱 손을 올렸다. 천사가 슬쩍 고개를 들었다.
흙먼지 사이를 뚫고 들어오는 빛 한줄기가 여린 인간의 입매를 비춘다. 당당하게도 호선을 그린.
“그러니까 넌 울지 말고 있어. 내 토끼는 내가 구해.”
천사는 문득 생각했다.
아. 토끼라는 호칭에 아가레스가 예민하게 반응했던 이유가.
“그러려고 이곳까지 뛰어든 거니까.”
이정표 이야기를 듣고 심장을 쥐어뜯으며 울던 이유가.
“이 요망한 토끼. 길을 잃었으면 한 자리에서 얌전히 기다려야지 말이야. 만나면 어디 두고 봐라.”
신물을 부숴 온갖 오명을 떠안고 가장 외로운 곳으로 추락한 이유가.
눈앞의 이 인간이라면 모두 납득이 될 정도로-.
“……참 아름답네.”
“뭐가?”
천사는 그저 웃으며 말을 돌렸다.
“나더러는 울지 말라더니, 정작 너는 울고 있는데?”
“내가 안 울게 생겼어?”
운명이라는 말은 좋아하지 않는다. 절대적 의미를 내포한 그것에 그러려니 하고 살아가기엔 부딪쳐 바꿔온 것들이 많았으니까.
근데 이건 정말…… 운명이라는 단어 외에 감히 무엇을 가져다 붙일 수 있을까.
까마득한 과거. 나를 위해 신물을 부순 너.
아주 먼 시간을 돌아 다시 연을 맺은 너와 나.
바알의 힘으로부터 나를 구하고자 이 단층으로 흘러든 너.
그리고 이곳에서조차 다시 만난…… 우리.
“……진짜. 미련하게.”
궤도 속의 처음과 끝이 다 우리였어.
너와 내가 아니라. 우리였다고.
거칠게 눈물을 훔친 이벨리아가 천사에게 말했다.
“이제 내려보내 줘. 얼른 가야지, 우리 토끼 찾으러.”
고개를 끄덕인 천사가 이벨리아의 이마에 검지를 댔다.
권능을 행사하기 직전. 잠시 머뭇거리던 천사가 작게 물었다.
“……저기, 다들 만나면 하나만 전해줄 수 있어?”
“말해.”
“친구가 되어줘서 고맙다고. 내 볼을 찔렀던 것도, 날개를 꽉 잡았던 것도, 물뿌리개를 숨겨뒀던 것도……. 전부 다 용서해 주겠다고.”
“그럴게.”
눈물이 말라 짙은 흔적을 남긴 얼굴이 환하게 웃는다.
순백색의 날개가 기쁘다는 듯 잘게 떨린다.
신계 속, 이벨리아가 기억하는 마지막 장면이었다.
***
이곳, 지상.
아가레스는 천천히 눈을 떴다.
본능적으로 몸을 일으키려 했으나 옅은 신음이 샌다.
신에게 내쳐져 가장 드높은 곳에서 가장 낮은 곳까지 단번에 추락한 타격이 작지 않다.
강인한 육신 이곳저곳에 부서진 듯한 격통이 느껴진다.
혼곤한 정신으로 눈동자를 굴려보니, 오색의 휘황찬란한 불빛이 눈앞을 어지럽힌다.
심지어 우마가 끌지 않는 기묘한 마차들이 주변을 쌩쌩 지나다니고, 닭장처럼 촘촘히 쌓아 올려진 건물들은 산처럼 높이 솟아 있다.
창공에 흩날리는 웅장한 깃발, 붉은색과 푸른색이 조화롭게 어우러진다.
멍하니 올려다보던 아가레스는 단단한 팔뚝으로 눈을 가리며 낮게 한숨을 내쉬었다.
“……여긴 또 어디야.”
***
이벨리아는 천사의 도움으로 삽시간에 지상으로 내려왔다.
그런데…….
“천사님을 납치했던 마녀다!”
“아니, 저건 마녀가 아니라 사탄이다!”
“사탄이 나타났다!”
“저 금발이 바로 사탄의 표식이다!”
신계로 올라갔던 그 자리에 그대로 떨어질 줄은 몰랐지!
단층에선 정령들의 힘을 빌리기도 어려운 만큼 수로 밀어붙이면 이벨리아로서도 답이 없다.
빠른 발 하나 믿고 꽁지 빠져라 도망친 이벨리아는 어둡게 그림자가 진 골목으로 쏙 숨어들어 숨을 골랐다.
“단층에서까지 가문에 사탄 낙인을 찍어버렸네, 내가.”
그렇지 않아도 악마보다 더한 사탄 가문이라는 평이 자자한데 말이야.
주변을 기민하게 살핀 이벨리아는 머리칼을 쓸어올리며 이젠 거의 입에 붙어버리다시피 한 구절을 읊었다.
“피어라, 등불이여. 피안의 경계에서 우리를 이끌어라.”
그러자 아득히 멀리 동이 터오는 곳. 붉은빛이 위치를 알리듯 점멸한다.
“……설마 저기야?”
우리 토끼 깡충깡충 뛰기도 잘 뛰네. 언제 또 저기까지 갔담.
“하하…… 하하하…….”
넋 나간 듯 웃던 이벨리아는 이내 털썩 주저앉아 머리를 감싸 쥐었다.
“저기까진 또 어떻게 가!”
신계에 도착하기까지도 무려 십수 년이 걸렸는데!
“이러다 이 단층에서 백 년은 헤매게 생겼네!”
씩씩거리면서도 착실하게 신발을 정돈한 이벨리아는 꾸역꾸역 일어나 걸음을 옮겼다.
“이놈의 토끼. 진짜 만나기만 해봐라.”
쓰다듬고 안아주고 볼에 입을…… 아니, 이게 아니지.
쓰다듬고 안아주고 아주 혼을…….
“…….”
아니야. 역시 그냥 냅다 입을 맞춰버리자.
아마 너는 당황해서 얼굴이 온통 붉어지겠지만.
“벌이야 벌.”
나 대신 바알의 공간에 흘러 들어간 벌.
나를 이 단층에서 헤매게 만든 벌.
“절대 사심 채우는 게 아니라고.”
그럼. 절대 아니지.
이벨리아는 동쪽의 빛을 향해, 조금 가벼워진 걸음을 옮겼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