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271화: 이브의 전생을 만난 아가레스
아가레스는 그대로 굳어버렸다.
그에겐 애달프지 않을 수가 없는 이름.
동시에 문득 합리적인 의심이 든다.
‘이게. 우연이 맞나?’
***
아가레스는 여전히 바들바들 떨고 있는 천사의 날개 깃털을 펴주었다.
손이 스칠 때마다 경련하는 몸이 영 마음에 들지 않아 한마디 덧붙이면서.
“안 죽여.”
“……히끅.”
“날개. 아프냐.”
도리도리 열심히 젓는 고개는 빈말로라도 진심이 담겼다고 보긴 어려웠다. 아무래도 조금 전 자신이 과민하게 반응하기는 한 모양이다.
“흐잉-.”
한시도 손에서 놓지 않던 물뿌리개마저 내동댕이치고 울먹이는 것이 제법 서러워 보였다.
아가레스는 도의적으로 사과를 건넸다.
“……미안하다.”
“훌쩍, 천사 날개를 막 잡아당기는 손은 똑 잘라서…….”
“…….”
“나, 나를 반으로 자를 것처럼 쳐다보네…….”
아가레스는 한 손으로 얼굴을 덮고 그만 가라 손짓했다.
한번 너와 닮은 점을 찾아내고 나니 그리움만 속절없이 커져서.
나의 이브와 비슷한 구석이 존재한다는 이유만으로 마음의 빗장은 참 허무하게도 허물어진다.
종종 뛰어가는 천사의 발소리를 들으며 아가레스는 낮게 한숨을 내쉬었다.
***
한편 허름한 로브를 걸친 이벨리아는 신성 왕국에 들어와 있었다.
대체 헌금을 얼마나 처바른 건지 휘황찬란한 신전 앞.
경비병이 오만한 태도로 창을 뻗어 이벨리아를 가로막았다.
“정지. 신분을 밝혀라.”
“이벨리아 아르티나.”
“아르티나? 처음 듣는 성인데.”
“타국에서 왔다.”
시간의 단층에 떨어진 이후 이곳 시간으로 이미 십수 년이 지났다.
떨어지자마자 낯선 언어를 말한다는 이유로 마녀라고 오인당하며 쫓기고, 이후 보석과 질 좋은 옷을 탐내는 도적 떼에게 쫓기고, 인신매매단을 피해 도망치고.
그렇게 동굴에서, 산에서, 들에서, 혹은 단단히 변장하여 국경을 넘으며 견딘 것이 어언 십수 년.
아르티나의 성이 의미가 없어진 세상에서 이벨리아는 그저 혈혈단신 온갖 세파와 부조리에 맞섰다.
곱던 피부엔 생채기가 가득하고 보드랍던 머리칼은 뻣뻣해져 있었으나, 다만 눈빛만큼은 과거보다 더욱 형형했다.
“방문 목적은?”
“예배.”
경비병은 이벨리아의 허름한 행색을 위아래로 훑으며 혀를 찼다.
“재림절을 앞둔 지금은 헌금을 내지 않으면 출입이 불가능하다.”
이벨리아는 대수롭지 않게 금화 하나를 던졌다.
눈을 번뜩 빛내며 낚아챈 경비병은 곧장 영업용 미소를 장착했다.
신전의 품은 넉넉하다. 물론 재력가들에게만.
“아이고, 조금 전의 실례는 부디 잊어주시고 어서 들어오시지요. 보셔서 아시겠지만, 재림절엔 천사님의 성체(聖體) 한 번 보고자 밑바닥 인간들까지 주제 모르고 몰려들어서 말이지요.”
이벨리아는 호응 없이 묵묵히 따라 들어갔다.
그 고압적인 태도에 혹시 귀족인가 싶어 기가 죽은 경비병은 조금 더 공손한 태도로 타국의 방문객을 안내했다.
이벨리아가 멀고 폐쇄적인 이 신성 왕국까지 찾아온 건 다 이유가 있었다.
묵시록의 구절을 아무리 외워봐도 빛이 반짝 가리키는 곳은 하늘 위.
연을 묶은 구절이 잘못된 방향을 가리킬 리는 없으니…….
‘믿기 어렵지만, 우리 토끼가 저 하늘 위에 있다고 봐야겠지.’
그렇다면 꾀를 부릴 생각 따윈 없다.
차원을 건너 단층에 갇힌 이 상황에서 하늘이라고 못 갈 이유는 없으니.
하여 이벨리아는 결심했다.
‘재림절.’
10년에 한 번, 신성 왕국에 치천사인 세라핌(seraphim)이 현현하여 직접 인간을 굽어살피는 날.
‘그날 천사를 납치하자.’
하늘로 가는 방법?
인간인 이벨리아가 그런 걸 알 리 없다.
그렇다면 거기 사는 거주민을 잡아 짤짤 털면 그만 아니겠는가.
천사 납치범 꿈나무는 지나가는 사제를 향해 세상 신성하게 성호를 마주 그어주었다.
***
이벨리아가 자신을 찾겠다고 이 단층에 뛰어들어 호된 시간을 보내고 있다는 사실을 아가레스가 알았더라면 이미 심장을 쥐어뜯고도 남았을 것이다.
하지만 현시점의 아가레스는 아직 이를 알 방도가 없는 상태.
이벨리아가 착실히 천사 납치 계획을 세우는 동안 아가레스는 단층을 벗어나는 방법에 대한 조사를 게을리하지 않았다.
오늘도 어김없이 신계의 서고에 출입한 아가레스의 손에는 문양 없는 흰색 목걸이와 팔찌가 들려 있었다.
“신물이라기에 뭐라도 있을 줄 알았더니…….”
흔들고 깨물고 심지어 불에 태워봐도 변화가 없다.
“그나마 지금 써먹을 수 있는 거라곤 이것밖에 없는데.”
사용방법이나 발동 조건을 모르니 영 난망하다.
광활한 서고 이곳저곳을 뒤져보았으나 이 시기는 신조차도 알지 못하는 신물이 널려 있는 만큼 이런 약소한 신물에 대한 기록은 찾아보기도 어려웠다.
‘오늘도 허탕인가.’
깊은 한숨을 쉰 아가레스가 서고에서 나가려던 순간.
“흐아아아암-! 잘 잤다-!”
물을 뿌려대는 천사를 피해 서고 한구석에서 한가롭게 낮잠을 자던 이프리트가 쩌억 늘어지는 하품을 해댔다.
“그 날파리 없으니 잠이 아주 다네, 달아.”
천사는 신의 서고에 출입하지 못하는 게 얼마나 다행인지.
반질반질해진 얼굴로 흥얼흥얼 콧노래를 부르던 이프리트는 조금 전까지 햇빛 가리는 용도로 얼굴을 덮고 있던 책을 툭 밀어 떨어트렸다.
그리고.
우연히 펼쳐진 책장 사이 언뜻 익숙한 장신구를 본 아가레스의 눈이 커졌다.
“읏차- 이제 그 날파리 볼이나 꼬집으러 가볼까.”
뒷머리를 벅벅 긁으며 설렁설렁 나가는 이프리트의 뒤. 떨어진 책을 집어 든 아가레스가 중얼거렸다.
“저 망나니가 도움이 될 때가 다 있군.”
예기치 못한 시점에 예상치 못하게 얻은 쾌거였다.
***
아가레스는 책을 들고 밖으로 나가 풀숲 사이 거목에 기대앉았다.
너와 나의 비밀기지를 닮아 가장 애착이 가는 곳.
수려한 손이 고서의 책장 위를 조심스럽게 쓸고 지나간다.
현세에는 그저 누군가의 죄를 사하는 정도로만 알려진 ‘죄업의 해방.’
그러나 여기 남겨진 기록은 사뭇 다르다.
「면죄를 위해서는 죄를 함께 짊어질 희생 하나가 필요하니.」
작은 악력에 의해 책장 끄트머리가 살짝 구겨진다.
「죄인이여, 걱정하지 말지어다. 그대와 더불어 가시로 엮은 면류관을 쓸 구원 하나만 존재한다면, 죄업의 해방은 그의 희생을 대가로 그대의 죄를 사할지니.」
……빌어먹을.
차원의 이동은 바알의 힘이었으나, 그 기회를 틈타 이 단층에 처박은 건 세계다.
결국, 오랜 과거에 지은 죄의 대가로 이곳에 갇혔으니 이 신물이 어떤 식으로든 도움이 될 거라고 기대했는데.
“이래서는 쓸모가 없군.”
이 신물의 발동 조건은 철저한 등가다.
누군가 자신과 함께 이 단층을 떠도는 극한의 형(刑)을 감내할 때 비로소 사용할 수 있는 신물.
잠시 신물을 내려다보던 아가레스는 망설임 없이 이를 아공간에 처넣었다.
기껏 찾은 활로 하나가 막혀버렸으나, 괜찮다.
나는 늘 그래왔듯 네게 돌아가는 길을 찾을 테니까.
늦지 않게 곁으로 돌아가서, 함께 데이트하러 가자는 그 기꺼운 명령을 받들어 모실 테니까.
***
이후 아가레스는 단층에 대한 자료를 수집했다.
왕도(王道)가 없다면 정도(正道)를 걸으면 된다.
신물을 사용할 수 없다면 단층 자체의 파훼로 가닥을 잡으면 그만.
거목 아래에서 자료를 탐독하고 있던 아가레스의 기감에 바스락거리는 인기척이 잡혔다.
이 동산. 저 가벼운 걸음은 그 천사 외엔 없다.
시선 드니 역시나. 말간 얼굴의 천사가 풀숲 앞에 서서 눈을 슴벅이고 있다.
“왜.”
“오늘은 화 안 내?”
“화낸 적 없다.”
“날개도 안 잡아?”
“……안 잡아.”
다짐을 받은 천사가 살금살금 다가와 곁에 슬쩍 엉덩이를 붙이고 앉는다.
“뭐 봐? 나도 볼래.”
아가레스는 답하지 않았다.
그래도 천사는 물뿌리개를 잠시 내려두고 빼꼼 고개를 들이밀었다.
“시간의 단층이네?”
“알고 있나?”
“응. 신 옆에서 꽃에 물 주다가 주워들었어.”
아가레스는 오늘 들어 처음으로 자료에서 눈을 뗐다.
“신이 뭐라고 했지?”
“여기 빠지면 답이 없대.”
순진한 얼굴로 뼈를 때린다.
아가레스가 답지 않게 채근했다.
“그 외에 긍정적인 얘기는 없었는지 기억 좀 해봐.”
“으음…….”
천사가 고개를 기울였다. 맑은 벽안이 몇 번 깜박이더니 이내 말을 잇는다.
“맞다. 만약에 있잖아. 단층에 빠진 존재를 위해서 누군가 뒤따라 뛰어들면 그건 단층의 이정표가 된댔어.”
“이정표?”
“응. 여러 시간이 혼재되어 있던 단층에 표지판이 딱 세워지는 거지.”
“……이해하기 어렵군.”
천사가 검지로 자신의 볼을 톡톡 두드리며 말했다.
“무슨 말이냐면, 여기도 적혀 있는 것처럼 원래 시간의 단층에 빠진 존재는 세계의 시작부터 끝까지 혼자 걸어야 하잖아?”
“그렇지.”
“근데 뒤따라 이정표가 뛰어들었다? 그러면 시간을 다 걸을 필요가 없어.”
“……그러면?”
“시간은 그 이정표를 중심으로 돌아. 그러니까, 이정표의 영혼이 살아서 숨 쉬던 시간의 전후만 걸으면 충분하댔어.”
어때. 나 굉장히 많은 것을 알고 있지. 뿌듯한 기색이 역력한 천사의 말끝.
아가레스는 흡사 벼락이라도 맞은 것처럼 멍하니 입을 벌렸다.
커다란 둔기로 머리를 내리친 것처럼 속에서 굉음이 울린다.
손에 쥐고 있던 자료들이 흩날려 땅으로 떨어졌다.
“저, 저기…… 괜찮아?”
묻는 천사의 음성이 혼몽하게 부유한다.
한참 뒤. 아가레스의 입에서 작은 탄식이 샜다.
“……하.”
이곳은 시간의 단층.
그렇다면 마땅히 세계의 시작부터 걸었어야 할 터인데.
나는 이미 세계가 시작된 이후로 떨어졌다.
그 말은 곧-.
나의 뒤에. 이정표가 뛰어들었다는 뜻.
“아아…….”
아가레스는 손바닥으로 얼굴을 감싸 쥐고 몸을 웅크렸다.
“이브, 이브…….”
왜. 대체 왜. 왜 네가.
고작 나 때문에 왜 네가.
얼굴을 가린 손 틈 사이 주체하지 못한 눈물이 흐른다.
심장이 강제로 뜯기는 것처럼 억장이 무너진다.
동시에 바라던 꿈이라도 꾼 것처럼 손끝이 간질거린다.
네가 날 구하러 이 지옥에 뛰어들었다는 것이 마냥 슬프지 못해 괴롭다.
네가 나와 함께 이 시간을 걷고 있다는 사실이 마냥 기쁘지 않아 다행이다.
양가적인 감정 끝에.
아가레스는 눈앞의 천사를 천천히 올려다봤다.
이 단층의 이정표는 너다.
나는 너의 혼이 새긴 자취를 따라 걷는다.
그럼 내 눈앞의 이 천사는.
“……이브.”
너이되 네가 아닌.
내가 잊은 너의 전생이로구나.
***
아가레스는 한참을 웃으며 울었다.
분명 조금 전까지만 해도 극악의 형벌이라 여겼는데. 내가 알지 못하는 네 모든 자취를 따라 걷게 되리라 생각하니 이보다 더한 상이 없다.
그래도 미적거릴 생각은 추호도 없다.
‘나의 진짜 이브가 기다리니까.’
속으로 되뇌는 것만으로도 심장이 입 밖으로 튀어나올 것처럼 갈급하게 뛴다.
어서 보고 싶다.
만나면 너를 꼭 닮은 작은 천사를 봤다고 말해줘야지.
그 천사의 이름도 이브였다고. 놀랍게도 날 보고 토끼라 불렀다고.
그러면 너는 아마 신기하다 웃어주겠지.
홀로 떠돌고 있을 그의 왕을 떠올리니 마음이 급해진다.
뭐라도 해보고자 아가레스가 벌떡 일어선 그때였다.
- 쿠르르르르릉.
세계의 축이 어긋나는 듯한 굉음이 울려 퍼졌다.
아가레스에겐 지독히도 익숙하나 지난 물레의 작용 이후 태어난 천사에겐 생소한 소리.
여유롭게 콧노래를 흥얼거리던 이프리트가 벌떡 일어섰다.
“또야?”
천사가 키운 꽃송이를 따서 꿀을 빨아 먹고 있던 페르세스도 눈을 찌푸렸다.
“이번엔 좀 오래가나 싶더니.”
이전 같았으면 별 감흥 없었을 모든 것의 소멸.
그러나 지금은 다르다.
아가레스를 비롯한 견습신들의 눈이 본능적으로 천사를 향했다.
금빛 물뿌리개를 생명줄처럼 꽉 쥐고 허망하게 선 천사.
본능적으로 알 수 있었다.
“……나 죽어?”
“…….”
“…….”
“……죽는구나. 나.”
천사의 커다란 눈에서 눈물이 뚝뚝 떨어졌다.
신이 완벽한 세계를 원하는 것을 알기에 그에 걸맞은 천사가 되려고 노력했는데.
농땡이를 피우는 견습신들의 머리에 물을 뿌리며 다닌 것도 다 그래서였는데.
흠결 없는 세계에 어울리는 피조물이 되고자 고군분투했건만.
신은 지금 선고했다.
“나는, 실패작이었어.”
툭. 물뿌리개를 떨어뜨리고 서럽게 울면서도 천사는 감히 반항할 생각 한번 하지 못했다.
엉엉 우는 천사를 가만히 바라보던 이프리트가 답답해 죽겠다는 듯 웃통을 벗어 던졌다.
“야. 너네 잘 생각해 봐라. 이게 맞냐?”
“……뭐가.”
“언제까지 이 짓을 계속할 건데? 어차피 신이 꿈꾸는 이상적인 세계 따위 못 만드는 거 다들 알잖아.”
“그거 신에 대한 모독이야, 이프리트.”
“모독이고 자시고. 이게 맞냐고.”
이프리트가 탈진할 듯 울어대는 천사를 가리켰다.
“얘도 죽이고? 응? 쟤도 죽이고? 다음에 태어나는 것들도 다 죽이고, 또 죽이고, 또 없어지고. 그럴 때마다 하하, 우리는 살아남았네, 역시 견습신은 대단해, 이럴 거야?”
“…….”
“신이라며. 완벽? 개소리. 완벽하지 않아도 품는 게 신이고 어버이지. 하자 있으면 죄다 없애버리는 게 무슨 신이야? 소꿉놀이하냐고, 지금.”
페르세스가 천사의 머리를 도닥이며 살짝 손을 들었다.
“난 이프리트 말에 동의.”
엘라임은 무릎을 굽히고 앉아 천사의 눈물을 닦아주었다.
“나도 다르지 않다. 신이 세계를 무로 돌린 것이 벌써 몇백 번인지 셀 수도 없어. 앞으로도 계속 반복될 테고.”
“너희. 이 천사 하나 때문에 이러는 거면 지금…….”
“틀려, 트로이. 얘가 나타나기 전에도 우린 수도 없이 같은 이야기를 나눴잖아.”
“없던 이유가 생긴 게 아니야. 있던 것에 더해진 것이지.”
그 말에 트로이마저 푹 한숨을 내쉬었다.
알고 있었다. 언젠가 이런 일이 일어날 줄.
한계 없는 시간 속에 그들은 이미 정을 준 많은 것들을 잃어왔다.
억누르고 억눌렀던 울분과 허탈함은, 그어둔 선을 넘는 애착을 가진 존재 하나가 생긴 순간 그대로 터지는 것이 당연했다.
“아가레스. 넌 어떠냐.”
“뭘 묻나.”
잠시 천사를 바라본 아가레스가 묵색의 검을 꺼내 들었다.
“가자.”
“웬일로 적극적이야? 저거랑 정 많이 들었냐?”
“그런 문제가 아니다. 물레의 작용을 받아 사라진 존재가 다시 태어나는 경우가 있던가.”
“있긴 하지만 희박하지. 존재의 탄생에는 수도 없는 경우의 수가 얽히잖아.”
“그 말은, 물레가 시간을 과거로 돌리면 다시 이 천사가 태어날지는 미지수란 소리지.”
“아무래도 그렇겠지?”
“나는 그걸 용납할 수 없다.”
이 천사는 이브의 전생이다.
그리고 내가 이 단층에서 빠져나가는 순간, 세계는 이 시간을 물레에 감아 자신의 과거로 편입할 것이다.
그러면. 만일 여기서 이 천사가 사라진다면.
전생을 잃은 현재의 이브는 존재할 수 있을 것인가.
전형적인 시간의 역설(time paradox).
아가레스로서는 현재의 이벨리아가 사라질지도 모른다는 그 일말의 가능성조차 그냥 흘려넘길 수가 없었다.
***
“때리기 전에 먼저 빌어볼까?”
“소용없다.”
“네가 어떻게 알아?”
“해봤으니까.”
과거에 어쭙잖게 간청하다가 물레가 돌아간 이후에야 그걸 부수지 않았던가.
하여 아가레스는 신의 성전을 박차고 들어갔다.
***
그가 기억하는 과거와 마찬가지로 신은 대로했다.
신의 뜻을 따르지 않는 견습신들 역시 신에게는 바로잡아야 할 오류였다.
강대한 신력을 받은 물레가 세차게 실을 감는다.
동시에 세계를 지탱하는 시간축이 어긋나 몸을 뒤튼다.
엘라임은 온몸으로 물레바퀴를 틀어막았다.
트로이는 물렛돌을 부숴 균형을 잃게 했고.
페르세스는 시간을 자아내는 실을 찢어냈으며.
이프리트는 손잡이를 거세게 내리쳐 부숴버렸다.
그리고…….
아가레스는 신의 복부에 검을 박아 넣었다.
과거와 동일한 자리였다.
신의 분노 어린 포효가 성전을 쩌렁쩌렁하게 울렸다.
엉망이 된 물레는 어떻게든 역할을 다하겠다는 듯 마찰음을 내며 반쯤 돌다가 이내 영영 멈춰 섰다.
실패한 신살자.
창조주의 패륜아.
신물의 파괴자.
타락한 역신.
그 모든 죄업을 떠안고, 그들은 지상에서도 가장 외로운 땅에 처박혔다.
신과 세계가 내린 벌이었다.
다시는 완벽한 세계를 창조하지 못하게 된 신의 곁에서.
다시는 흠결 없는 시간을 가질 수 없게 된 세계의 곁에서.
너희 또한 외롭고 괴로운 영생을 걷고 또 걸으라고.
***
지상으로 추락하던 그때.
어두운 구름 사이 언뜻 익숙한 황금빛이 반짝였다.
동시에 주변을 이룬 모든 것들이 빠르게 바뀌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