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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녀님의 꽃밭에는 그들이 산다-270화 (270/323)

##  270화: 아가레스의 진짜 정체

눈이 무겁게 달라붙는다.

그토록 바라던 안식 같기도 하여, 아가레스는 어렵게 눈을 떴다.

혼몽한 시야에도 다만 또렷한 것 하나.

“……이브.”

입 밖으로 되뇌니 온갖 사념이 날아가고 정신이 돌아온다.

맞아. 이브.

이브에게 닿는 바알의 손을 저지하고 내가 대신 빨려 들어갔지.

그럼 여긴 어디지? 이브는?

순간 심장 한편이 선득해지는 기분에 아가레스는 벌떡 몸을 일으켰다.

“이브!”

그러자 불쑥. 태양처럼 붉은 머리칼이 눈앞에 살랑인다.

“이브가 누구냐? 내 애칭이냐?”

“빌어먹을. 꺼져라, 이프리트.”

“네가 내 이름을 불러주는 날이 다 있네? 그런 면에서 한 판 붙자! 기념비적인 날이니까!”

“지금 이럴 때가 아닐 텐데. 이브는 어디 있지?”

“아까부터 무슨 이브 타령이야. 그게 누군데.”

“……뭐?”

이브를, 몰라?

당혹감에 아가레스가 잠시 굳어버린 그때.

파릇파릇 풀이 돋은 화원 방향에서 차분한 목소리가 들려왔다.

“아가레스. 페르세스가 널 좋아한대.”

“닥쳐, 트로이! 내 양피지 내놔!”

“세계를 만드는 법은 배우지도 않고 아가레스를 유혹하는 법만 가득 적혀 있네.”

“내가 신이 되면 너부터 죽여 버릴 거야!”

아. 저 대화.

왠지 익숙한데.

“근데 얘는 왜 이렇게 멍해?”

“이참에 내가 얘를 척살하면 1위가 되는 건가?”

“아서라. 그러다 또 처맞고 엉엉 울지나 말고.”

“처맞긴! 나는 무려 파괴를 관장하는 신이 될 몸이거든?”

“되고 나서나 말씀하시고요.”

“될 거라니까?”

“성질머리 봐선 바로 탈락.”

그 소란함 속.

아가레스는 고개 젖혀 나무에 머리를 쿵 박으며 욕설을 내뱉었다.

“……젠장.”

많고 많은 시간 중 왜 여기로 떨어진 건데. 왜.

안면 익숙한 저것들이 이브를 모르는 세계.

저들과 자신이 스스럼없이 대화를 나누던 세계.

의심할 여지 없다.

여기는 내가, 아니, 우리가.

신이 되기 위한 가르침을 받던-.

견습신 시절의 신계(神界)다.

***

현세에 와선 인간들에게 ‘에덴의 동산’이라는 거창한 명칭으로 알려진 곳.

많은 와전이 되었으나 기본적으로 낙원이라 불리기에 부족함 없는 장소임은 맞다.

개중 가장 울창한 나무에 기대앉은 아가레스는 생각했다.

‘바알의 권능이 크게 왜곡된 건가.’

잘 익은 사과가 자신을 한 입 먹어보라는 듯 도르르 굴러내려 왔지만 건드릴 생각조차 들지 않았다.

‘아니, 그보단 차원을 이동하는 중 세계가 개입하였다고 봄이 맞겠군.’

그렇지 않아도 나를 못 잡아먹어 안달인 것이었으니, 이 기회를 틈타 내가 쉽게 돌아올 수 없는 곳으로 보내고 싶었겠지.

‘아무래도 시간의 단층인 모양인데.’

낮은 한숨이 흘렀다.

“……이브가 너무 걱정하면 어떡하지.”

그나마 긍정적인 면을 찾자면 단층에서의 시간은 현실의 시간과는 다르게 흐른다는 점이다.

길고 긴 토막 하나를 떼어내도 현실의 며칠에 지나지 않으니-.

나는 수천수만 년의 시간을 이곳에서 보낸다고 하더라도 기어코 다시 네 곁으로 돌아가는 길을 찾을 텐데.

그때까지 네가 나의 이름을 부르다가, 묵시록의 구절을 외우다가, 울지는 않아야 하는데.

아가레스는 심정과 달리 청명한 하늘을 올려다보았다.

아주 멀어도. 한껏 험해도. 무척 고되어도.

“……반드시 돌아갈게, 나의 신.”

***

한편 그 시각.

난데없는 곳에 떨어진 이벨리아는 그나마 인상이 좋아 보이는 인간 하나를 붙잡아 묻고 있었다.

“여기가 어디인가요?”

“-----.”

“혹시 제국어 모르세요?”

“-----?”

“아. 하하. 그러고 보니까 알 리가 없나?”

그러자 삽시간에 얼굴을 붉힌 사내가 위협적으로 주먹을 흔들어댄다.

“아니, 이거 욕 아닌데! 잠깐! 잠깐!”

동시에 사내 근처에 있던 사람들까지 일제히 이벨리아를 향해 달려든다.

영문도 모른 채 도망치며, 이벨리아는 생각했다.

토끼야. 비록 너는 아직 모르겠지만, 나 역시-.

“아! 솔방울 던지는 건 반칙이지!”

나 역시 이 무한한 시간 속에 너와 함께하고 있어.

아주 멀어도. 한껏 험해도. 무척 고되어도.

반드시 함께 돌아가자, 나의 아가레스.

***

신의 목표는 단 하나다.

완벽한 세상을 창조하는 것.

완벽에 두는 가치가 무엇인지는 저마다 다르겠으나, 이 세계를 관장하는 신에게 있어서 ‘완벽’의 정의란 확고했다.

부정적인 감정이라곤 단 한 점도 없는 세상.

그건 숫제 강박에 가까운 신념이었다.

신은 분쟁이 일어나는 순간, 혹은 마뜩잖은 불순물이 하나라도 섞이는 순간. 신물인 물레를 사용해 시간을 뒤로 돌려버렸다.

참으로 편리한 초기화. 그 이후 신은 다시 한번 공들여 창조하는 과정을 반복했다. 수십 번, 수백 번.

물레를 돌릴 때마다 신을 돕던 천사도, 하루하루 부단히 살아가던 인간도. 모두 예외 없이 지워졌다.

신물로도 감히 존재를 지울 수 없는 신격들, 그러니까 견습신들을 제외하면 모든 것이 사라지기를 반복했다.

이번에도 마찬가지.

조금 전까지만 해도 함께 간식을 먹던 천사가 가루처럼 흩날리며 흩어져버렸다.

페르세스가 허탈하다는 듯 털썩 주저앉았다.

“에이. 또 사라져버렸네.”

“이번에 우연히 연을 맺은 인간은 제법 마음에 들었는데.”

“너희는 그게 문제야. 어차피 다 사라질 것에 뭐 하러 정을 줘선.”

“그야 모르는 일이지. 언젠가는 신이 만족할 만한 세계가 만들어질 수도 있잖아.”

“그러려면 종족부터 싹 다 갈아엎어야 해. 인간과 악마가 존재하는 이상 분쟁이 없을 수는 없어. 저 멍청한 천사와 정령들로나 가득 채워두든가.”

각자 악마와 정령이란 종족을 처음 빚어내는 데 관여했던 아가레스와 엘라임이 못마땅하다는 듯 반응했다.

“정령들은 사실 마냥 순하지만은 않아.”

“악마들은 사실 호전적이지 않다.”

“둘이 바꾸면 딱 알맞은 종족 소개고요.”

그렇게 그들은 물레가 작용할 때마다 함께 뒤로 돌아갔다.

아니, 어쩌면 다른 모든 것들은 삭제되고 그들만이 앞으로 나아가는 것일지도 모르겠다.

다만 아직 완전한 신은 아니니만큼, 물레가 돌 때마다 그들의 기억엔 크고 작은 구멍이 생겼다.

“근데 걔 있잖아. 이번에 신전에…… 아니, 내가 뭐 말하려고 했지?”

“이번에 잊은 건 그건가 보네.”

“에이, 중요한 거였는데.”

아쉬워하는 말투와는 달리 이프리트는 담담하게 벌렁 드러누웠다.

잊는 것. 그리고 잃는 것.

다섯 견습신에겐 지독히도 익숙한 일이었으니까.

***

어느 순간부터 그들은 더 이상 다른 존재들에 대한 이야기를 나누지 않았다.

누군가 금기시한 것도 아닌데 모두가 그랬다.

아무리 신의 격을 갖추었다고 하더라도 마모되는 정신엔 한계가 있는 법.

애써 일군 인연이 흩어지고 또 흩어짐에야…….

그 상실감을 견뎌내고 또 견뎌냄에야…….

차라리 정을 주지 말자고 다짐해버린 것이었다.

에덴의 동산엔 그렇게 침묵이 내려앉았다.

***

이건 모두 과거의, 잃어버린 시간 속의 일이다.

아가레스는 아무래도 상관없었다.

물레의 반작용으로 인해 그가 잊는 것들 중, 단 하나만 온전하면 무관했다.

“이브.”

되뇌기를 수백 번. 수천 번.

그것으로도 부족하여 아가레스는 동산 이곳저곳에 이벨리아의 이름과 애칭을 새겨두었다.

돌에도. 나무에도. 흙에도.

행여라도 잊을까 봐. 만에 하나라도 이곳에 안주할까 봐.

그렇게 신계의 서고를 샅샅이 훑어 단층에서 벗어날 수 있는 방법을 연구하고 또 연구하던 어느 날.

신의 손끝은 천사 하나를 빚어냈다.

***

만사에 무감해져 고요한 시간을 보내고 있던 견습신들의 머리 위에 자꾸 그림자가 진다.

페르세스가 텅 빈 눈으로 위를 올려다봤다.

무언가 황금색 물뿌리개를 들고 부산하게 날아다니고 있다.

이 꽃에서 저 꽃으로. 또 저 꽃에서 이 꽃으로.

“……저건 뭐야.”

“……천사인가 보지.”

“그렇다기엔 몸집이 너무 작은데.”

보통의 천사는 신을 보좌하기 위해 성인 남성보다 훨씬 큰 체격을 가진다. 그러나 창공 위의 저건 잘 쳐줘야 인간 소녀 정도의 크기다.

여태 본 적 없던 특이한 것의 등장에 이프리트의 호기심이 반짝 살아났다.

공중으로 훌쩍 뛰어오른 그는 뽈뽈 날아다니던 것의 날개를 우악스럽게 잡아챘다.

“……!”

“야. 너 케루빔(cherubim)이냐?”

바둥바둥. 붙잡혀 내려온 천사는 그저 발버둥을 치기만 했다.

마찬가지로 궁금해진 페르세스가 슬쩍 다가와 의문을 제기했다.

“뭐지. 말할 줄 모르나?”

“…….”

“모르나 본데. 아직 태어난 지 얼마 안 되었나 봐.”

“…….”

“흐음. 그럼 알아들을 줄은 아나? 야, 바보야. 멍청아.”

천사는 그저 순하게 동그란 벽안을 깜박이기만 했다.

모처럼 생소한 존재.

어딘가 맹해 보이는 천사.

매번 고만고만한 것들만 보던 견습신들의 흥미를 끌기엔 충분했다.

장난기 많은 이프리트가 손가락으로 천사의 말랑한 볼을 쿡쿡 찔렀다.

“우웅…….”

하지 말라는 듯 도리질을 친다.

재미있었는지 이프리트는 손가락에 조금 더 힘을 주어 꾸욱 눌렀다.

“우웅!”

조금 신경질적인 반응이 돌아온다.

이프리트는 간만에 픽 웃음을 흘렸다.

“재밌네, 이거.”

그가 두 손가락을 집게처럼 만들어 천사의 볼을 꼬집었다.

그러자.

“아, 하지 말라고! 더럽게 재수 없는 망아지 같으니라고! 아주 그냥 날개로 뺨따귀를 처맞아봐야 정신을 차리지?”

“……?”

“……엉?”

부지불식간에 날아온 걸쭉한 협박에 견습신들이 입을 떡 벌리던 찰나.

이프리트의 비명이 울려 퍼졌다.

“아악! 무, 문다! 얘가 나 깨문다!”

정신 차려보니 순하게 생긴 천사가 마치 도사견 같은 표정을 지은 채로 이프리트의 손가락을 꽉꽉 깨물고 있다.

“뭐, 뭐야. 얘 말을 할 줄 모르는 게 아니라…….”

“입이 험해서 성질 죽이고 있던 거였어?”

천사가 씩씩거리며 말했다. 손가락을 물고 있어 약간 어눌해진 발음으로.

“견습신이면 다야? 싫다는 천사 볼을 막 그렇게 찔러도 돼? 내가 싫다는 표현 했어, 안 했어?”

“해, 했어, 했어! 으아악!”

“싫다고 했는데도 계속 볼을 찌르는 손가락은 똑 잘라서 사라져버려야지!”

“미안! 미안해! 안 그럴게! 진짜야!”

기실 잡아서 확 내동댕이쳐버리려면 얼마든지 가능했겠지만, 유난히 몸집이 작아서 그런가 이프리트는 그럴 마음이 들지 않았다.

늘 유아독존이던 이프리트가 작은 천사에게 싹싹 비는 것은 정말이지 돈 주고도 못 볼 광경이었다.

하여 견습신들은 다 함께 웃었다.

아주 오랜만이었다.

***

- 졸졸졸졸.

달게 낮잠을 자던 페르세스의 머리 위로 물줄기가 떨어져 내린다.

페르세스는 경기를 일으키듯 진저리 치며 벌떡 일어섰다.

“아악! 너냐, 또!”

“졸지 말고 일해, 일.”

금빛 물뿌리개로 늘 꽃에 물을 주던 작은 천사는 어느 순간부터 꽃이 아닌 견습신들의 머리 위에 물을 주기 시작했다.

그것도 어디서 농땡이를 피우고 있으면 어떻게 알고 꼭 찾아와서.

머리가 쫄딱 젖어버린 페르세스가 위협적인 자세로 삿대질했다.

“내가 졸든 말든 네가 무슨 상관이야! 귀엽게 생겼다고 다 봐줄 거라고 생각했다면 그거 아주 오산이야!”

“졸고 있으면 물뿌리개로 뿌리랬어.”

“누가!”

“신이.”

아. 그렇다면 할 말 없고.

물을 탈탈 털어낸 페르세스가 옆에 놓인 책을 집어 들고선 까닥까닥 손짓했다.

“야. 그럼 언니라고 좀 불러봐 봐.”

“싫어.”

“한 번만 불러주면 안 졸고 열심히 일할게.”

“언니.”

“……너 혹시 우리가 채우는 할당량에 따라서 뭐 수수료라도 받냐?”

볼이 말랑한 천사는 그저 어깨를 으쓱였다.

곁에 앉아 페르세스가 건네준 간식을 오독오독 씹어먹던 천사는 어느 한곳에 시선이 닿는 순간 벼락처럼 일어나 물뿌리개를 집어 들었다.

“졸고 있는 양아치 발견.”

뽈뽈 날아간 천사는 이번엔 붉은 머리의 사내에게 물을 졸졸 뿌려댔다.

한창 깊은 잠에 빠져 있던 이프리트가 성가시다는 듯 손을 휘적였다.

“저리 꺼져라, 날파리…….”

“날파리?”

순한 눈에 바짝 독기가 오른다.

“싫다고 했는데도 계속 그렇게 부르는 입에는 물을 가득 넣어버려야지!”

“푸릅, 꼬르륵, 야!”

정확히 입을 조준해 물을 가득 부어버린 천사는 마지막으로 텅 빈 물뿌리개를 던져 머리에 맞춰버리고선 툴툴댔다.

“하여간. 일 제대로 하는 건 딱 둘밖에 없다니까.”

천사는 예리한 눈으로 사방을 훑었다. 그러자 저 풀숲 안쪽. 심드렁하게 기대앉은 베짱이 하나가 더 보인다.

“항상 보면 졸지는 않는데 농땡이는 피우고 있단 말이지……?”

뭔가 골똘히 생각하는 척을 하면 내가 봐줄 줄 알고?

신계의 밥버러지는 가만둘 수 없지.

물뿌리개를 주워 물을 가득 담은 천사는 목표물을 향해 파닥파닥 출발했다.

***

머리 위로 차가운 물줄기가 확 내려앉는다.

동시에 들려오는 음성.

“토끼 발견!”

아가레스의 눈이 커졌다.

다부진 손이 천사의 여린 날개를 부여잡고 가까이 끌어당겼다.

“……너 지금 뭐라고 했어.”

“아야! 아파! 날개!”

그 외침이 꼭 누군가의 것과 겹쳐 보여 아가레스는 단번에 힘을 뺐다.

“뭐라고 했냐고. 방금.”

“방금? 토끼 발견……?”

“네가 왜 나를 그딴 호칭으로 불러.”

“그, 그야 맨날 이렇게 풀숲으로 숨어 다녀서…….”

기가 팍 죽은 천사가 손아귀에서 바들바들 떨었다.

한편 아가레스는 거칠게 뛰는 심장을 다독였다.

이건 나의 이브가 아니다.

다만 기가 막힌 우연이다.

이번 페이즈 역시 물레의 작용으로 사라질 것이고, 이 천사는 내가 그 반작용으로 잊은 부산물에 불과하다.

현실의 내가 이 천사의 존재를 기억하지 못하는 것을 보면 분명 그러하다.

형편없이 떨고 있는 천사를 던지듯 내려놓으며, 아가레스가 물었다.

“너. 이름이 뭐야.”

천사가 울망울망한 눈으로 아가레스를 올려다보며 답했다.

“여기 동산에 내 이름이 가득 적혀 있던데?”

“……?”

“이브. 내 이름이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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