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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녀님의 꽃밭에는 그들이 산다-269화 (269/323)

##  269화: 아가레스의 신이자 하늘

눈을 감고 있으나 알 수 있다. 사방이 어둡다는 것을.

어렴풋하게 톱니바퀴가 맞물리며 돌아가는 소리가 들린다. 아니, 귀 기울여보니 외려 쇠사슬이 끌리는 소리와 비슷하다.

몸을 스치고 지나가는 바람은 살던 세계의 그것과는 사뭇 달랐다.

관장하는 페르세스의 존재가 없어서인가. 그보단 조금 차갑고, 더 가벼운 느낌.

직관적으로 알 수 있었다.

여긴 자신이 속한 세상이 아니라는 것을.

“후우. 좋아.”

이벨리아는 크게 심호흡하고선 천천히 눈을 떴다. 어떤 광경이 펼쳐져 있더라도 놀라지 않으리라 다짐하면서. 그러나.

“……!”

적어도 인간이라면 이 광막한 공간을 보고 감히 태연할 수만은 없을 것이다.

지나치게 넓어 외려 숨이 막히는 하늘…… 아니, 그 위의 아득한 우주.

둘러보니 마냥 검다고 생각했던 공간엔 작은 빛이 콕콕 박혀 있다. 아마 이곳과는 멀리 떨어져 있는 별인 듯하다.

곧이어 시야가 어둠에 익숙해지자 굉음을 내며 궤도 따라 흐르는 천체도 흐릿하게 보였다.

이벨리아가 꼴깍 침을 삼키고 입을 열었다.

“누구 없어요?”

한계 없는 공간임을 증명이라도 하듯 메아리조차 들려오지 않는다.

잠시 멍하게 서 있던 이벨리아는 두 손으로 볼을 짝 내리쳤다.

정신 차려. 침착해.

“설마 우리 토끼 찾으려면 저 별들 하나하나를 다 들여다봐야 하는 건 아니겠지?”

그랬다간 100년이 지나도 내 친구 못 찾을 텐데.

혹시 여기서 이름이나 묵시록의 구절을 읊으면 뭔가 반응이 있지 않을까?

“아가레스.”

조심스레 불러봤으나 별들 사이에선 딱히 변화가 없다.

“피어라, 등불이여. 피안의 경계에서 우리를 이끌어라……?”

구절을 외워봐도 마찬가지.

“으음. 곤란하네.”

어쩌면 좋지. 이벨리아가 고민하던 찰나였다.

- 카르르륵.

- 카르르륵.

기묘한 소음을 내며 어둠 사이 뭔가가 가까이 다가온다.

이벨리아는 살짝 자세 낮춰 허리춤에 찬 검집에 손을 가져다 댔다. 여차하면 발검할 기세로.

그러자 머릿속에 그대로 때려 박는 것만 같은 음성이 들려왔다.

“쉬이. 진정하거라. 해칠 생각은 없으니.”

“…….”

“추호도 믿지 않는 것을 보아하니 불신이 많은 아이로구나.”

“누구세요.”

“와중에 묻기까지. 먼저 신분을 밝히는 것이 인간 세계의 예의라 알고 있는데.”

“두 번 묻기 전에 답하지 않으면 그냥 벨게요.”

“……검술엔 소질도 없는 것이 입만 살았구나.”

“허. 내 검술 실력 운운하는 것을 보아하니 분명 적이로군요.”

슬쩍 검을 뽑자 얼굴이 제대로 보이지 않는 상대가 혀를 쯧쯧 차는 것이 들려온다. 희미하게 성질머리 어쩌고 하는 소리는 덤이었다.

찰그락. 찰그락. 소리와 함께 상대가 천천히 다가온다. 흡사 초식동물을 달래듯 조심스러운 몸짓으로.

약 열 보 앞으로 다가온 상대의 머리 위로 별빛이 슬그머니 비쳤다.

신형을 확인한 이벨리아의 눈이 티 나게 동그래졌다. 상대의 입꼬리가 옅게 올라갔다.

“내 꼴이 퍽 우스운 모양이지.”

“왜 그렇게 묶여 있죠?”

물음에 사내인지 여인인지 알 수 없게 모호한 이가 사슬에 얽매인 팔을 슬쩍 들어 올렸다.

온몸을 억죈 이깟 사슬 따위 별것 아니라는 듯한 태도였다.

“절대자일수록 지켜야 할 법칙 또한 많은 법이라.”

“절대자?”

“다른 말로 하자면…… 신.”

이벨리아의 눈이 한층 적대적으로 바뀌었다. 신. 아가레스는 분명 신이란 존재를 좋아하지 않았다.

살쾡이 같은 눈빛 정도야 아무렴 어떠냐는 듯 신이 픽 웃었다. 얽힌 쇠사슬이 서로 부딪치며 짤그랑 소리를 낸다.

“이곳이 어디인 줄 아느냐, 아이야.”

“내 토끼를 찾으러 가는 길. 그 외엔 관심 없어.”

“말이 냅다 짧아졌구나.”

“신이라는 걸 알았으니까.”

“알면 보통 경어를 사용하던데.”

그러나 눈앞의 아이는 예의를 갖출 생각 따윈 없어 보인다. 이것 참, 타고난 천성인지, 아니면 자란 배경 탓인지…….

“누가 보면 네가 신인 줄 알겠구나.”

“농담 따먹기 하고 있을 시간 없어.”

“……그래, 되었다. 네 어미는 평화의 신에게 시원하게 목을 쳐버리게 시련을 달라 기도하질 않나, 네 아비는 사랑의 신에게 자루를 한 번 더 내려달라고 기도하질 않나…….”

신이 낮은 한숨을 흘리며 고개를 저었다. 대대로 신앙심이 바닥이로구나.

신앙 없는 이에게 경배를 바라는 것만큼이나 어리석은 짓은 없다.

신은 정갈한 손길로 머리를 쓸어올렸다. 모든 움직임 끝에 덧붙는 쇠사슬 소리가 자연스럽다.

“내가 굳이 네 앞에 나타난 이유는 하나란다.”

“뭔데?”

“이곳에 속한 존재가 다른 세계의 문턱을 밟지 못하도록 하는 것 역시 이 세계의 법칙이거든.”

“그게 법칙이라면 내 친구도 나랑 같이 여기 서 있어야 하는 거 아닌가?”

“친구라 함은 필시 아가레스를 뜻하는 것이겠지.”

신이 한층 무감해진 눈으로 말했다.

“그 아이는 예외란다.”

“어째서?”

“세계가 배척한 아이에게 세계의 법칙을 들이밀 수는 없는 노릇이니까.”

배척.

가차 없이 잘라내는 단어에 이벨리아의 눈은 외려 차분하게 가라앉았다. 이것 역시 언젠가는 해결해야 할 문제였으니.

“그 배척은 당신이 정한 건가?”

“형벌은 내가 내렸으나, 배척은 내가 아닌 세계의 의지라 봄이 옳겠구나.”

“둘이 달라?”

“나는 세계의 어버이일 뿐. 세계는 나름대로 나와 다른 자아를 가지고 있단다.”

“당신의 형벌과 세계의 배척이 번복될 여지는?”

“모든 일이 그러하듯 반대급부에 따라 달라지겠지.”

신은 가만히 턱을 쓸며 이벨리아를 응시했다.

머리부터 발끝까지. 여러 번. 제법 오랜 시간.

마치 드높은 존재들의 이야기를 들을 자격이 있는지 살피는 것처럼.

이벨리아는 탐색하는 눈길을 담담히 감내했다.

신이 느릿하게 입을 열었다.

“그 아이는 나의 신물을 부수었다. 동시에 그건 이 세계의 커다란 축이기도 했지.”

“……신물?”

“부서진 것은 바로 시간.”

순간 이벨리아는 아찔했다.

어렴풋하게 듣는 것과 눈앞에서 떨어지는 선고는 결이 다르다.

“세계의 가장 큰 질서를 무너뜨린 그 아이는…… 그저 ‘있을’ 뿐이란다. 사는 것도, 존재하는 것도 아닌 채로.”

이벨리아는 세게 입술을 깨물었다.

네가 신물을, 시간을 부쉈다면 그건 분명 이유 있는 선택이었을 터.

하여 너를 비난할 생각은 추호도 들지 않는다.

다만 당장이라도 소리치고 싶었다.

나의 소중한 친구를 존재하지 않는 부유물 따위로 만들지 말라고.

어엿하게 웃을 줄도, 울 줄도 아는 존재라고.

그러나 이벨리아는 치받는 감정을 내리눌렀다.

사실이 그러하다면, 아가레스를 다시 세계로 편입할 수 있는 권한을 가진 것 역시 눈앞의 신과 딛고 선 세계일 테니까.

‘자존심 같은 건 필요 없어. 골백번도 더 던질 수 있어.’

이벨리아는 한풀 꺾인 태도로 신을 올려다보았다.

“용서를 구하려면 어떻게 해야 하지?”

“어차피 한낱 인간인 너는 못 하는 일일 텐데.”

“일단 말이나 해 봐.”

“……우리, 그러니까 나와 세계의 용서는 그리 어렵지 않단다. 본디 어버이와 형제라 함은 혈육을 미워는 할지언정 증오할 수는 없는 법이니. 부서진 신물을 되돌려둔다면 아마 그럭저럭 마음이 풀릴 것 같구나.”

이벨리아의 표정이 짜게 식었다.

이 미친 작자가. 그걸 쉽다고 표현해?

“아주 언짢다는 듯한 표정인데.”

그 말에 푸른 눈이 삽시간에 순박하게 바뀌었다.

“아니? 내가 언제? 그래서 그건 어떻게 돌려놓는 건데?”

“신물은 핵심이 되는 것을 복구하면 수복되지.”

신의 입매가 호선을 그렸다.

“시간축은 물레 형상의 신물이었단다. 그렇다면 물레의 핵심은?”

“틀.”

“아니.”

“돌아가는 돌림판.”

“아니.”

“사용하는 사람.”

“……무식하기 이루 말할 데가 없구나.”

“방금 속마음이 밖으로 들렸는데.”

“잘 들렸다면 다행이다.”

“…….”

신이 선심 쓴다는 듯 말했다.

“물레의 핵심은 실이란다.”

“그럼 실을 주워오면 돼?”

“그냥 실이겠냐!”

“……왜 갑자기 소리를 지르고 그래.”

이벨리아가 우물우물 나는 신물 같은 건 처음 들어본다고 항변했으나 신은 숫제 덜떨어진 존재를 보는 표정을 지었다.

“물레에 감겨 있던 실들은 바로 시간이란다. 시간.”

“시간을 어떻게 줍는데?”

“그 시간들을 다시 걸어야지.”

잠시 말을 멈춘 신이 손을 까닥 움직였다. 그러자 아무것도 없던 허공에서 의자 하나가 뚝 떨어져 내린다.

신은 느긋하게 걸터앉아 흐르는 별들을 바라봤다.

“시간이란 것은 단순하단다. 단 하나의 존재에게만 의미를 갖더라도 그건 시간이지.”

“…….”

“시간을 살아가는 모든 존재가 그 시간의 주인이다. 그러니 단 한 명이라도 잃어버린 시간을 걸어준다면, 그 시간은 무에서 유로, 없었던 일에서 있었던 과거로 바뀌게 되고.”

“그건…….”

신은 웃었다.

“그래. 아가레스가 용서를 받기 위해선 누군가 그 잃어버린 시간들을 죄다 다시 걸어야 한다는 뜻이지.”

면죄의 대가는 실로 가혹했다.

***

신은 확신했다.

이 정도 이야기했으면 이 아이가 어깨를 내려뜨릴 거라고.

신물. 형벌. 배척. 시간.

인간의 힘으로는 어찌할 수 없는 것들이니, 아가레스의 구원은 포기하고 그저 자신에게 친구를 되돌려달라고 빌기나 할 것이라고.

그러나 예상 외로, 눈앞의 아이는 씩 웃으며 짝다리를 짚었다.

“됐네, 그럼.”

마치 안도하기라도 한 것처럼.

“날 보내.”

“……뭐?”

“내가 다 걸으면서 봐줄게. 너와 네 세계가 잃은 시간.”

“지금…… 아가레스의 벌을 대신 받기라도 하겠다는 말이냐.”

“응.”

“대체…….”

어지간해서는 당황하는 일 없는 신도 말끝을 흐릴 수밖에 없었다.

이 맹목적인 신뢰와 애정은 신에게는 익숙하지 않은 것이었다.

바라고 세상을 만들었으나 도무지 찾아볼 수 없었던 것.

눈을 가늘게 좁히고 바라보는 신을 향해 이벨리아는 태연히 말했다.

“내가 지켜준다고 약속했어.”

“…….”

“당신이 버리고 세계가 버려도. 내가 신이자 하늘이 되어주겠다고.”

이 짙푸른 눈엔 홀로 미로 같은 시간 속에 빠져야 한다는 두려움 따윈 존재하지 않는다.

담긴 건 오로지 친우를 해방시킬 방법을 찾았다는 환희.

“……익히 알고는 있었지만, 정말 특이하게 자랐구나.”

어쩌면 한때 결점 없는 세계에 집착하던 내가 바라던 이상적인 존재에 가장 부합하기도 하고.

신은 손을 뻗어 저 멀리 빛을 뿜는 별들을 흩트렸다. 이곳저곳을 가만히 바라보던 그가 옅게 혀를 차며 말했다.

“용기는 가상하나, 안타깝게도 그 아이가 먼저 그곳으로 빠진 모양이구나.”

“그곳?”

“잃어버린 시간들이 혼재된 곳. 시간의 단층(斷層). 세계가 심술을 좀 부린 모양이야. 이참에 가서 잃은 것을 되돌려 오라고.”

이제 이벨리아는 이해할 수 있다.

그 단층 안에서 아가레스는 이 세계가 만들어진 이후부터 현재까지 버려진 모든 시간과 모든 차원이 혼재된 장소를 홀로 걷게 되리라는 것을.

그 고행이 끝나야 비로소 신과 세계로부터 면죄부를 받을 수 있다는 것을.

“그러면 나도 보내줘. 거기로.”

“아까도 말했다시피, 내 세계에 속한 존재가 단층에 빠지게 둘 순 없단다.”

이벨리아는 망설임 없이 무릎을 꿇었다.

“부탁이야. 내가 지켜준다고 약속했어.”

신이 작게 웃음을 흘렸다. 네 경배는 오롯이 네 소중한 이들을 위해서만 이뤄지는구나. 오만한 아이야.

“끝내 보내주지 못하겠다면?”

“여기서 당신을 죽이고라도, 나는 반드시 가.”

신살(神殺)의 두려움보다 홀로 버려진 시간을 떠돌 내 친구에 대한 두려움이 더 크니까.

“……참. 누굴 닮아 이리 컸는지.”

철이 덜 든 자식을 바라보듯 응시하는 신의 눈에 이벨리아는 눈치채지 못한 친애가 스쳐 지나간다.

신이 혼란을 뜻하듯 어지러이 섞인 별들 쪽으로 손을 뻗었다.

- 차르르르륵.

법칙에 반하려는 것을 눈치챘는지 쇠사슬이 조금 더 날카로운 소리를 내며 신의 팔과 몸을 옥죈다.

“보이듯 세계가 이렇게 난리이니 네게 규칙 위반의 대가 하나를 전가하지 않을 수가 없겠구나.”

“얼마든지.”

신의 검지가 이벨리아의 이마에 살짝 닿았다가 떨어진다. 이내 채워지는 족쇄.

“너는 단층에서 네 힘으로 직접 그 아이를 찾아야 할 것이다.”

수많은 시간과 차원이 얽힌 그 무한의 공간을 떠돌며, 연(緣)이 닿아 만나기를 어디 한번 간절히 소망해 보거라.

“바라던 바야.”

시선을 든 이벨리아가 시원한 미소를 그렸다.

동시에 신은 깨달았다.

내가 형벌을 내리고 세계가 배척한 그 아이에게…….

내가 창조한 그 어느 빛보다도 밝은 것 하나가 내려앉았구나.

“세계가 대가를 지웠으니 나는 선물 하나를 주도록 하마.”

“거절은 안 해.”

반쯤은 변덕으로. 반쯤은 바라던 그림을 보고 싶다는 욕망으로. 신은 이벨리아의 머리 위에 손을 얹었다.

“너는 단층 속의 이정표가 될 것이다.”

“……?”

“지금은 말해도 모를 것이다. 다만, 작지 않은 선물이란 것만 알아주면 되겠구나.”

순순히 끄덕인 이벨리아가 물었다.

“참. 돌아오는 방법은요?”

“다시 말을 높이는 이유가?”

“날 보내준다면서요. 그것도 선물까지 줘서. 도움을 준 사람에겐 예의를 갖추는 편.”

“……확실하구나. 아주.”

잇속 확실한 것이 재물의 신 뺨을 치고도 남겠어.

잠시 가늘게 눈을 뜬 신이 이내 답했다.

“이것도 연(緣)이라면 연(緣)이겠구나. 그 아이가 가진 신물이 하나 있지.”

“죄업의 해방?”

“자세한 건 때가 되면 알겠지만, 그게 있으면 어찌어찌 될 거란다. 역으로 너는, 그 아이를 찾기 전까진 돌아올 방도가 없지.”

이벨리아가 대수롭지 않다는 듯 어깨를 으쓱였다.

“못 찾으면 돌아올 생각 따위 처음부터 없었어요.”

“…….”

참. 존재들이란 신기하다.

창조주가 의도하지 않았음에도 자기들끼리 얽히고설켜 신의 힘으로도, 세계의 힘으로도 감히 끊어낼 수 없는 붉은 실을 두르기도 한다.

신의 눈엔 선명하게 보였다.

약지에 단단히 매인 붉은 인연이.

“그저 하나만 염두에 두어준다면 좋겠구나.”

“……?”

“나 역시 한때는 미숙하고 어린 신이었다는 것을.”

아득해져 가는 이벨리아의 정신 속.

많은 것이 닳고 닳아 무감함에도 어딘가 들뜬 음성으로 신이 말했다.

“그 아이의 죄를 사하여 보거라, 이벨리아 아르티나.”

그리만 된다면, 글쎄-.

그 아이에게 너는 진정 신이자 하늘이 되겠구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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