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268화: 지금 갈게, 너에게로
휴고가 루시우스의 입에서 미처 답을 듣기도 전.
겹겹이 쌓인 적의 틈새에서 잔뜩 성질이 난 목소리가 물방울처럼 솟았다.
“양아치 오라버니! 불덩어리 좀 작작 날려! 나 맞을 뻔했잖아!”
“어엉? 다 맞아 뒈져도 넌 맞으면 안 되지. 죄송, 죄송.”
“너 우리 밥풀 폐하 털끝이라도 다치면 가만 안 둔다!”
“악마 새끼들은 닥쳐. 나 때는 말이야, 악마들은 정령왕 얼굴도 못 쳐다봤어!”
지금 이 순간 휴고에겐 세상 그 어느 찬가보다도 아름다운 음성.
빼곡하게 들어찬 군세의 한가운데, 굽이치는 금빛 머리칼을 발견한 휴고의 눈이 환희로 젖었다.
휴고의 시선을 따라 고개 돌린 엘리시아 역시 마찬가지. 잠시 잃었다 생각한 딸을 되찾은 어머니는 그대로 달려가며 외쳤다.
“아가! 이브!”
창칼 부딪치는 소리로 소란한 전장이었지만 애끓는 부모의 외침은 선명히 부유한다.
연금술사들의 피조물에 둘러싸인 이벨리아가 고개를 탈탈 흔들었다.
“피를 너무 많이 흘렸나. 엄마 목소리가 다 들리네.”
“이브!”
“……무슨 환청이 이렇게 선명해?”
이벨리아는 이끌리듯 고개를 돌렸다. 그러자.
“……!”
개전 이후 한시도 그리지 않은 적 없던 가족들의 얼굴이 보인다.
극도로 분노하여 루시우스의 목덜미를 세게 부여잡은 아빠.
수없이 검을 날려대는 적들 사이를 아랑곳 않고 달리는 엄마.
걱정이 담뿍 담긴 눈으로 무언가 소리치고 있는 오라버니들.
나무 막대기 하나로 단탈리온을 막아섰던 어린 날처럼 얇은 아스트라페를 휘두르고 있는 렐리안.
게다가…….
“이 잡것들이 감히 우리 아가씨를-!”
“다 뒈졌다. 진짜 다 뒈졌어.”
“우리 보송보송 아가씨를 이렇게 꼬질꼬질하게 만들다니.”
“광견병 걸린 개의 이빨 맛 좀 봐라!”
고참부터 신입까지 가릴 것 없이 일제히 날뛰는 미친개 기사단.
친애하는 이들을 가만 바라보던 이벨리아의 잇새에서 안도와 기쁨을 담뿍 담은 신음이 옅게 흘렀다.
“……아아.”
그래. 사랑하는 내 사람들.
그대들 모두가 있어야 비로소 이곳이 황궁이고, 수도이며, 나의 터전이다.
잦아들지 않는 포화 속이라 하더라도 그대들만 있다면 내겐 꽃밭이나 다름없으니.
울지도 무너지지도 스러지지도 않고 전장을 굳게 지켜내던 이벨리아는 이제야 마음 놓고 울음을 터뜨렸다.
***
토벌에서 돌아온 가족들과 친구들, 그리고 기사단이 이벨리아에게 다가오기 위해 착실히 적을 베고 있던 그때.
북문에서 남문 방향으로 일대의 군세가 흙먼지를 일으키며 달려왔다. 그리고 그 선두에 선 자의 다급한 외침.
“공녀! 공녀! 우리 공녀 어딨나!”
뿌앵 눈물을 쏟으면서도 멈춤 없이 검을 휘두르고 있던 이벨리아가 훌쩍이며 고개를 기울였다.
“이상하다. 여기서 들리면 안 되는 목소리가 들려.”
“다 비켜라! 갈라져라! 조아려라! 우리 공녀 얼굴 좀 보자!”
“……이건 진짜 환청이어야 하는데?”
설마설마한 이벨리아가 익숙한 목소리를 향해 고개를 돌리려던 찰나.
부정할 수 없는 자기소개가 우렁차게 전장을 울렸다.
“덤벼라, 내 친구의 제국을 짓밟는 무도한 역적들-! 내가 바로 하르벤타의 황제다-!”
***
그리고 이샤트의 군대로부터 정확히 대칭점의 위치.
서문 방향에서 달려온 루드비히가 이벨리아의 생각을 그대로 대신 읊었다.
“저게 진짜 돌았나.”
황제가 남의 제국 전쟁에 직접 참전을 해?
한편 동문에서 남문으로 이어지는 길목에선 거대한 사자 한 마리가 크르렁 목을 울리며 겅중겅중 뛰어오고 있었다.
“출세. 출세. 총애. 총애.”
이것으로 동서남북, 그리고 각 영지에서 각개전투를 벌이던 에르카디아 제국 주요 전력이 모두 이곳, 황궁 남문으로 집결했다.
단 한 사람-.
이벨리아를 중심으로 하여.
***
사방으로 눈을 굴리던 루시우스는 절절히 깨달았다.
‘이건 진다.’
하나하나 뜯어봐도 그 면면이 판세를 바꿀 수 있는 실력자들이다.
잘 알기에 기껏 떼어두었던 이들이 한데 모였으니 승기를 잡는 건 요원하다고 봐야 했다.
‘봐두었던 퇴로가…… 옳지, 저기로군.’
휴고의 정신이 딸에게 팔린 틈을 타, 루시우스는 달아나기 위해 몸을 비틀었다.
그러나 아가레스에게 꿰뚫렸던 배의 상처가 깊어 움직임은 미력하다. 휴고가 같잖다는 듯 시퍼런 검날을 들이밀었다.
“허억.”
“어딜 가나, 반역자.”
“바, 반역자라니! 악마들의 수장을 딸로 둔 그대가 내게-!”
“혀 잘라버리기 전에 닥쳐.”
딸이 피투성이가 되어 군사를 이끌고 있는데, 그 아비에게 뵈는 게 있을 리 없다. 휴고가 이벨리아에게 물었다.
“아가. 생포할까, 죽일까.”
“지금 죽여야 해.”
그래야 이곳이 다시 세계와 연결될 테고, 마왕이 아스를 어디로 보냈는지 감이라도 잡을 수 있을 테니까.
그러자 세드릭이 언짢다는 듯 투덜댔다.
“쉽게 죽이기엔 좀 아쉬운데.”
“아쉬울 거 없어, 오라버니. 어차피 저건 지옥에 떨어질 테고…… 거긴 내 친우의 영역이거든.”
루시우스가 이해하지 못했다는 듯 눈을 빠르게 깜박였다.
아니, 어쩌면 닥칠 현실을 부정하고 싶은 것일지도 모르겠다. 하여 이벨리아는 부러 또박또박 읊었다.
“요약하자면, 네놈에겐 죽음이 끝이 아닐 거라고.”
“……!”
“넌 무한한 시간 동안 뼈째로 씹어 먹힐 거야. 매 순간 몸이 조각나고 살점은 불에 타겠지만 그래도 고통은 끝나지 않겠지.”
“아, 아아…….”
“행한 대로 되돌려 받는 콘트라파소? 그런 정의로운 형벌은 개나 줘. 너와 네 자식들은 가장 끔찍하고 잔혹한 벌을 영원토록 받게 될 거야. 나와 내 악마가 그리 만들 테니까.”
“아, 안 돼…… 안 돼…….”
저건 진심이다. 허세가 아니다. 본능적으로 느낀 루시우스가 덜덜 떨었다. 저 어린 지배자의 뒤에서 지옥의 편린이 아른거린다.
비릿한 냄새가 전장에 퍼진다. 공포에 잠식된 루시우스가 바지에 실례를 한 터다.
일단, 일단은 이자에게서 달아나야 해. 달아난 이후에 생각하자. 괜찮아, 진정해, 군을 재편할 기회는 얼마든지 있어.
“모, 모두 이자를 막아라! 공녀와 정령왕들은 내버려 두고 이자부터 떼어내!”
명령에 우르르 달려오는 부자연스러운 군대.
루시우스의 귓가에 휴고가 속삭였다.
“저것들이 다가올 때까지 기다릴 줄 알았어?”
악당의 변신을 기다리는 그런 고루한 이야기는 우리 딸이 어릴 적 즐겨 읽던 동화에나 나오는 법.
“자, 잠깐! 잠까안!”
“내 딸과 동부의 악마는 어설픈 자비가 없지.”
“사, 살려줘. 살려줘. 제발……!”
“지옥에서 다가올 재앙을 기다려라, 루시우스 데퐁트.”
서걱. 뚜둑.
살이 패는 소리. 이어 목뼈가 잘리는 소리. 동시에-.
“커윽.”
변변찮은 단말마.
금제탑의 장로이자 이 환란의 원흉.
한때 온갖 부귀영화를 누렸던 데퐁트 가의 가주이자 이 제국의 반역자.
루시우스 데퐁트의 목이 더러운 흙바닥을 초라하게 굴렀다.
***
명을 내리던 주인이 죽었다.
피조물인 호문쿨루스와 키메라들은 체계를 잃고 혼란에 빠졌다.
엘리시아는 누구의 것인지도 모를 피를 흠뻑 뒤집어쓰고 있는 딸을 세게 끌어안았다.
내 딸. 내가 끝내지 못한 일을 기어코 이어받은 안쓰러운 내 아가.
안도일까. 죄책감일까. 뜨거운 눈물이 고운 뺨을 타고 흘렀다.
“이브, 내 아가…… 미안해, 엄마가 미안해…….”
잠시 멈칫한 이벨리아는 이내 천천히 손을 올려 엘리시아의 등을 토닥였다.
돌이켜봐도 처음인 것 같다. 늘 강인하던 엄마가 내게 기대는 것은.
이벨리아는 자신이 엄마의 기댈 곳 중 하나가 되어줄 수 있다는 사실에 안도했다.
“난 괜찮아요.”
“…….”
“엄마를 보고 자라서. 이렇게 잘 컸으니까.”
끌어주고 밀어준 그 길 따라 걷다 보니 이깟 환란쯤 의연히 견뎌낼 수 있는 단단한 어른으로 자랐으니까.
딸의 담담한 위로에 엘리시아는 외려 더욱 눈물을 쏟았다. 자신을 꼭 닮은 딸이 애달프면서도 또 부정할 수 없이 자랑스러워서.
***
겨우 진정하고 주위를 둘러보던 엘리시아가 갈라진 목소리로 물었다.
“그런데 동부의 지배자가 안 보이는구나.”
“……데리러 가려고요.”
영민한 엘리시아는 그 간결한 답에서 많은 것을 유추해냈다.
조금 전까지 울먹이던 어머니의 눈은 삽시간에 냉철한 전략가의 것으로 변모한다.
“설명하렴. 내가 도울 수 있을지도 모르니.”
이벨리아는 벌어졌던 일을 요약하여 전했다.
“……그래서 술식을 만든 연금술사를 죽이면 이 황궁이 다시 세계와 연결될 줄 알았는데. 왜, 왜 아직도…….”
침착하게 말을 잇던 이벨리아의 목소리가 종내엔 형편없이 떨렸다.
왜 저걸 죽였는데도 여전한 거야? 왜 아직도 자연력이 희미해? 왜 아직도 세계가 돌아오지 않았지?
설마 파훼할 방법이 없는 술식인 건가? 저놈이 무려 10년 이상을 준비한 건데 내가 너무 만만하게 생각했던 걸까?
토끼를 찾을 수 없으리라는 가정만으로도 심장 한구석이 선득하게 내려앉는다. 견딜 수 없는 두려움으로 손끝이 덜덜 떨렸다.
차가운 눈으로 바닥에 짙게 깔린 백묵의 흔적을 샅샅이 뜯어보던 엘리시아가 딸의 손을 토닥이며 읊조렸다.
“등가.”
“……?”
“연금술은 등가가 원칙이란다. 술식을 사용하는 데 수천의 목숨을 썼다면, 술식을 잠재우는 데는 그 원혼들을 달랠 제물이 필요하지.”
보렴. 엘리시아가 휴고에게 까닥 눈짓했다.
찰떡같이 알아들은 휴고는 루시우스 데퐁트의 몸과 머리를 집어 진의 한가운데로 던졌다.
그러자.
- 우우우우우우…….
- 흐윽. 흐윽…….
술식 위에 진득하게 들러붙어 있던 검은 혼령들이 마치 원수를 대하듯 우짖으며 마구잡이로 머리를 내밀었다.
자신들을 불태워 학살한 이 술식의 주인. 그 머리와 몸통이 먹음직스럽게 진 위에 올라와 있다. 마치 위혼제에 바쳐진 제물처럼.
눈코입이 닳아 없어진 혼령들의 덩어리에서 날카로운 이빨이 솟아났다.
이내 탐나는 먹이를 씹듯 루시우스 데퐁트의 육신을 와그작 와그작 씹어 삼킨다.
사방으로 피가 튀고 살점이 뜯기는 것은 실로 참혹한 광경이었다.
“우욱…….”
생존한 기사들 대부분이 시선을 돌렸으나 이벨리아는 눈 하나 깜짝하지 않고 지켜봤다.
아니, 그보단 어딘가에 정신을 팔고 있다는 게 더 맞을 터다.
루시우스의 몸이 뼛조각 하나 남기지 않고 다 씹혀 들어갈 무렵.
비로소 자연력이 돌아왔다.
***
사방에 널린 시체.
딛는 곳마다 발목 위로 끈적이는 핏물.
그럼에도 끝내 선 것은 아르티나를 비롯한 제국군이었으니-.
바야흐로 길고 길었던 인마전쟁의 종막.
동시에 많은 것을 잃은 승리였다.
***
이벨리아는 달려가 마왕의 멱살을 잡았다. 땅에 짓이겨진 다리에 또다시 흉터가 늘었으나 신경 쓰지 않았다.
“세계가 돌아왔어.”
“…….”
“아스를 보낸 곳으로 나도 보내.”
“…….”
답이 없자 망설임 없는 애원. 자존심 챙길 여력 따윈 없다.
“……제발, 보내줘.”
“……이것도 좋네.”
경탄하며 이벨리아를 바라보던 바알이 띄엄띄엄 말했다. 세계가 돌아왔어도 지나치게 깊은 상처가 쉬이 낫지는 않은 탓이다.
“근데 어쩌지. 어딘지 정확히는 모르겠는데.”
“……뭐?”
“세계가 돌아오면 짚을 수 있을 줄 알았는데 아니네. 힘이 너무 불안정했던 탓인가, 희미해.”
분노하며 따질 시간은 없다. 지체하는 일분일초 내 친우의 기다림은 길어질 테니. 하여 이벨리아는 되레 차분히 말했다.
“그럼 나도 비슷한 곳으로 대충 던져.”
“미쳤구나, 이벨리아.”
“내 절반을 잃었는데 제정신일 리가. 보내기만 해. 나머진 내가 알아서 할 테니까.”
“이 세계 밖으로 나간다는 게 무슨 의미인지 넌 몰라. 얼마나 넓은지, 얼마나 광활한 시간과 공허가 자리하고 있는지…….”
“그깟 거 다 상관 없어.”
끝내 이벨리아의 푸른 눈에서 눈물이 뚝뚝 떨어졌다.
"난 알아. 반드시 찾을 수 있어. 그러니 보내줘.”
바라보며, 바알은 생각했다.
어쩌면 찾을 수 있을지도 모른다는 작디작은 희망만으로도 이리 아름다운데.
막상 가서 자신이 할 수 있는 게 아무것도 없다는 걸 알게 되면, 그때는 얼마나 더 절경일까.
나아가 그 허무한 공간 속에서 꺼내달라고 내게 손이라도 뻗는다면…….
“어디 한번 해봐. 이벨리아.”
하여, 내가 널 보내주는 건 오로지 너의 완벽한 파멸을 위하여.
가까스로 숨을 내쉬는 바알의 손에 붉은 문양이 떠오르더니 이내 작은 공간이 휘몰아친다.
이벨리아는 시선 돌려 가족들과 친구들을 보며 말했다.
“나, 다녀올게.”
눈물 젖은 눈이 여전히 식지 않은 희망으로 빛난다.
많은 이들이 함께 가겠다며 나섰으나 마왕이 손을 들어 막았다.
권능의 궁극이나 다름없는 차원의 이동은 마왕으로서도 쉬운 일은 아니었고, 희미한 정신으로 그러모은 힘은 오로지 한 명을 위한 것이었으니.
휴고는 입술을 깨물고 세게 주먹을 쥐었다. 그렇지 않으면 당장에라도 딸을 끌어당겨 어디에도 가지 못하도록 가둬버릴 것만 같아서.
세드릭은 뛰쳐나와 고래고래 소리쳤다. 가지 말라고. 그곳이 어디일 줄 알고 가냐고. 그 곁에서 아르칸은 발밑이 무너지는 기분으로 휘청였다.
감정을 주체하지 못하는 세 부자를 바라보던 엘리시아는…… 그저 다가와 이벨리아의 볼을 쓰다듬었다.
세상 단 하나뿐인 보석을 만지듯 조심스러운 손길로.
그녀라고 다를까. 가지 못하도록 붙잡고 싶었다. 빌고 싶었다. 차라리 딸의 눈을 가리고 귀를 막아 안전한 울타리 안에 두고 싶었다.
하지만. 사실 그들 모두는 알고 있다.
그게 외려 이벨리아를 죽이는 길이라는 것을.
“……무사히 돌아올 거지, 딸?”
“반드시.”
이샤트와 렐리안은 숨김없이 눈물을 쏟으며 털썩 주저앉았다.
“이브, 흐윽, 돌아오는 방법은 생각해뒀어요?”
“아이고, 세상 사람들, 내 친구가 날 버리고 떠난답니다-! 흐어엉-!”
이벨리아는 흡사 세상이 무너진 것처럼 울어대는 친구들을 끌어안고 토닥였다.
“걱정하지 마. 토끼랑 함께 있으면 뭐든 가능하니까. 우리 둘은 그래.”
참으로 대책 없는 말임에도 왠지 모르게 수긍하게 된다.
모두에게 이벨리아와 아가레스의 관계란 그러했다.
결코 떼어둘 수 없는. 절대 불가능을 가져다 붙일 수 없는.
한편 몸집을 작게 바꾸고 뽀작뽀작 걸어온 엔리르는 의외로 가장 담담했다.
“누나. 마음 놓고 다녀와. 1년의 밤이 다 지날 때까지 안 돌아오면 차원을 찢어서라도 찾으러 갈 거니까. 난 용이잖아. 대단한 용. 누나가 키워준 용.”
털을 부풀리는 용을 발로 밀어내며 다가온 루드비히는 무릎 꿇고 친우를 끌어안았다.
어릴 적부터 함께 자란 소꿉친구의 품은 어느새 이벨리아를 다 덮고도 남을 정도로 커져 있었다.
“늦지 않게 돌아와야 해. 너 없으면 나 못 버텨.”
이벨리아의 어깨가 젖어들었다. 울먹이며 이 제국의 군주가 말했다.
“나를 지옥에서 건져냈으면 책임도 져, 이벨리아.”
“…….”
“마음 받아달란 소리 따위 안 해. 그저 너는 내가 이끌 제국에서 이대로 평안하기만 해. 그게 나에 대한 네 책임이야.”
“……반드시 돌아올게. 다치지 않고. 늦지 않게.”
작게 읊는 다짐 뒤. 모두가 한마디씩 얹었다. 잡고 싶은 마음을 애써 눌러 숨긴 응원이자 또 염원이었다.
“이브. 그 시커먼 악마 놈에게 전해. 오면 대련 한 번 하자고. 이제 안 질 것 같거든.”
“크흠. 나 먼저라고 전해라, 엘라임의 아가 계약자. 아직 정령과 악마 중 누가 더 강한지 결판을 못 냈다고.”
“이프리트 말은 무시해, 말랑아. 얘 이미 처발린 전적이 있어.”
“……그놈이 없으면 비밀기지가 조금 쓸쓸하긴 하겠지.”
“공작저도 아주 약간 허전할 테고.”
“사실 이거 비밀인데, 그놈이 그동안 나 보석 되게 많이 줬어. 내 보석줄 끊기면 곤란해.”
이곳엔 없는 아가레스에게 제각기 건네는 말들.
푸핫, 이벨리아가 작게 웃었다.
봐. 아스. 내 친구.
이젠 이곳에, 널 소중히 여기는 이들이 이렇게나 많아.
배척되지 않았어. 외롭지 않아. 혼자가 아니야.
‘그러니 함께 돌아오자. 돌아와서 우리가 가꾼 이 아름다운 꽃밭을 거닐자.’
작별 인사는 끝났냐는 듯 마왕이 바라본다.
이벨리아는 망설임 없이 고개를 끄덕였다.
차디찬 손이 닿는다.
동시에 어디론가 흘러 들어가는 감각을 느끼며, 이벨리아가 눈을 감고 속삭였다.
“울지 말고 기다려, 아가레스.”
지금 갈게.
이번엔 내가. 너에게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