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267화: 이건 우리 모두의 승리
페르세스와 이프리트는 이게 웬 떡이냐는 듯 드릉드릉 몸을 풀었다.
철없는 아이를 바라보는 부모와 같은 표정으로 트로이가 옅게 웃었다.
“세계가 알면 뭐 어때. 엘라임의 아가 계약자라면 구하고 벌을 받을 만도 하지 뭐.”
“난 못 받아! 우리 말랑이는 내가 벌 받고 오면 죽어 있을지도 모른다고!”
“그럼 혹시 들키면 벌 몰아주기 하면 되겠다.”
“좋다, 이프리트. 우리 트로이한테 몰아주자.”
늘 군림하며 살아온 정령왕들은 절대적으로 불리한 이 전황 속에서도 태연했다.
그 믿음직한 태도에 내내 참고 있던 눈물이 글썽였다. 이벨리아가 페르세스의 옷자락을 꼭 쥐고 흔들었다.
“언니, 아스가…….”
“쉬이. 괜찮아.”
페르세스가 고운 얼굴에 남은 눈물 자국을 부드럽게 닦아주며 말을 이었다.
“너도 눈치챘겠지만, 난 아주 오랫동안 걔를 봐왔거든. 그래서 제법 잘 아는데, 그놈 생명력 하나는 진짜 질기단 말이지.”
죽여도 안 죽고, 죽고 싶어 해도 안 죽고.
“장담하건대, 그놈은 지옥 불 한가운데 박아놔도 멀쩡히 걸어 나올 녀석이야.”
생긋 웃으며 페르세스가 바람을 일으켰다. 창공까지 닿는 칼바람이 연금술사들의 피조물을 사정없이 도륙했다.
“그러니까 우리 말랑이는 걱정하지 말고 조금 쉬어. 여긴 언니가 맡는다.”
자신만만하게 고개 돌린 페르세스는 사방으로 날뛰는 불 망아지 하나를 보고는 표정을 굳혔다.
“……언니가 쟤만 빼고 맡는다. 저건 네가 목줄 좀 채워줘.”
“크하하핫-! 이거 기분 째진다! 좀 더 근성 있게 덤벼라! 나 때는 말이야, 이렇게 비실비실하게 전쟁하지 않았다고! 엉? 근성! 근성, 이 새끼야!"
이프리트가 불러낸 불덩어리가 단단한 형체를 입고 땅으로 쿵쿵 떨어져 내렸다. 하나하나 부딪칠 때마다 깊은 흔적이 팼다.
“이런. 매번 멀쩡한 땅만 고생이지.”
혀를 찬 트로이가 까닥 손짓하자 그대로 갈라진 땅이 불덩어리를 비롯해 호문쿨루스와 키메라까지 전부 용암 속으로 빨아들였다.
말 그대로 자연재해, 혹은 천재지변.
지옥보다 더 지옥 같은 광경을 바라보던 이벨리아는 문득 생각했다.
‘나 사실 내 생각보다 대단한 능력을 가졌을지도…….’
정령사 최고. 대정령사 만만세.
그 멍한 표정을 흡족하다는 듯 바라보던 트로이가 이벨리아의 머리를 슥슥 쓰다듬었다.
“아가 계약자야. 안타깝지만 엘라임은 못 와.”
“왜요? 혹시 다쳤어요?”
“그놈이? 그랬으면 소원이 없겠…… 아차, 본심이 나와버렸구나.”
“…….”
“그게 아니고, 이곳이 세계에서 잠시 분리되었다고 하더라도 너와 엘라임의 혼을 묶은 계약이 끊기는 건 아니거든. 즉, 엘라임이 여기 와서 난리를 치다가 한 방이라도 얻어맞으면?”
“지금 제 상태로 봐선, 타격을 대신 받는 제가 즉사하겠네요.”
빙고. 트로이가 훌륭한 학생을 칭찬하는 것처럼 웃었다.
대화를 듣고 있던 이프리트가 좋은 생각이 났다는 듯 손뼉을 쳤다.
“맞다. 그러고 보니 우리가 받은 타격은 죄다 계약자에게 가지? 이거 대단히 좋군.”
“아무리 양아치 오라버니의 계약자가 티탄(titan)이라지만 그건 조금 나쁜 생각 같은데.”
“야, 내가 설마 산맥에다 충격을 돌리겠냐? 양심도 없이? 내 계약자 그거 말고 하나 더 있다.”
“응? 언제 또 계약했어? 그 안쓰러운 계약자가 누군데?”
“너도 아는 놈이야. 너와 참 닮았지. 특히 막무가내인 입이.”
“……?”
그러자 페르세스가 아주 못마땅하다는 듯 말했다.
“내 연인 말하는 거야. 멍청 세균 옮을까 봐 걱정이네.”
“언니의 연인이라면…… 우리 작은 오라버니? 양아치 오라버니랑 계약했다고? 언제? 왜? 하필? 굳이?”
“왜. 하필. 굳이는 왜 붙는 거냐. 얼마 전 소환진이 떠서 너인가 기대하면서 가봤더니 그 뺀질이가 있더라고.”
“세상에…….”
입버릇 사악하기로는 둘째가라면 서러울 오라버니랑 그 말 한마디 한마디에 불붙은 망아지처럼 펄쩍펄쩍 반응할 양아치 오라버니라…….
“진짜 환장의 조합이다.”
“엉? 환상의 조합이라고?”
“……좋을 대로 생각해.”
천상천하 유아독존답게 틀림없이 칭찬이 분명하다고 생각해버린 이프리트는 속도 없이 좋다고 웃으며 불덩어리를 날려댔다.
“크하하하하! 근성! 근성! 요즘 것들은 근성이 없어!”
“이쪽으론 날리지 마! 우린 밥풀 폐하의 아군이라고!”
“어엉? 으디 전쟁터에서 아군 적군을 따져! 죽기 싫으면 알아서 피해라! 하하하핫!”
“저 또라이가!”
“밥풀 폐하! 이 미친 정령왕 좀 돌려보내!”
그렇게 세계의 눈을 잠시 벗어난 정령왕들의 난입으로 인해 전황은 다시 반전.
루시우스를 겹겹이 둘러싼 벽이 서서히 얇아지기 시작했다.
***
황궁 남문 내부. 정령왕들이 가열한 실력행사 중이던 그 시점.
남문 외부에서도 새로운 바람이 불기 시작했다.
“역시 저들이 노리던 건 수도였군요.”
“우리 아가가 괜찮아야 할 텐데.”
“황궁이 아주 엉망이네요.”
바로 아르티나의 각 영지로 토벌을 떠났던 이들이 일제히 귀환한 것.
제법 여러 곳을 거점으로 삼아 떠나긴 했으나, 토벌 후반부에 이르러선 신속한 격파를 위해 군세를 합한 터다.
바삐 말을 달리던 와중. 황궁 하늘에서 비바람과 함께 벼락이 내리친다.
심각한 표정으로 바라보던 엘리시아가 오른손을 들어 군대를 정지시켰다.
“잠시. 운디네를 불러 정찰이라도 해볼게요.”
그러나 이내 당황한 음성이 고운 입술 새로 흘렀다.
“……부를 수가 없네?”
균열에서 나온 마족들을 향해 검을 휘두르던 휴고 역시 미간을 찌푸렸다.
“검기의 사용도 자유롭지 않군.”
아스트라페를 치켜든 렐리안도 답했다.
“마나 운용도 원활하지 않아요.”
이게 무슨 일이지? 모두가 당황한 표정으로 서로를 바라보던 찰나.
남문 위 창공에 붉은 용의 꼬리가 언뜻 보였다 사라진다.
- 크아아아아! 이 애송이들이!
마법을 사용하지 않고 육탄전만으로 적을 제압하는 것을 보아하니, 마나의 활용이 쉽지 않은 건 저쪽 역시 마찬가지인가 보다.
“……용의 마법을 제한할 수 있을 정도라니.”
“뭐가 되었든 보통 일은 아니로군.”
저 안에는 목숨보다 소중한 딸이 있다. 휴고가 말의 옆구리를 다시 한번 박차던 그때였다.
“잠시 멈추시지요.”
누군가 전혀 긴박하지 않은 태도로 그들의 앞을 가로막았다.
아르칸이 말을 몰아 그에게 다가갔다.
“……데퐁트 후작.”
“오랜만입니다, 아르티나 공작.”
“잡설 집어치우고. 비켜.”
“송구하오나, 그럴 수는 없겠습니다.”
리카드 데퐁트가 비릿하게 웃었다.
본디 무고한 척을 하며 이들의 걸음을 늦추려 했으나, 굳이 그럴 이유가 없다.
속속 들려오는 전황에 따르면 어차피 우리의 승리가 목전이니.
하여 리카드는 그간 당했던 수모나 좀 갚아주기로 마음먹었다.
“모두 사지 멀쩡히 돌아오신 것을 보아하니 역시 제가 보낸 자객은 큰 역할을 하지는 못한 모양입니다.”
“솔직히 말하자면, 밤손님들 실력이 영 엉망이라 실망이었다네.”
종군 이후 늘 사람 좋은 웃음을 짓고 있던 리카드의 얼굴이 삽시간에 서늘히 식었다. 그가 자신의 뒤편을 눈짓하며 말했다.
“그러실 것 같아 이번엔 잘 좀 준비해 보았는데…… 어찌, 마음에 드실는지.”
신호를 주듯 손가락을 튕기자 일제히 몰려드는 빼곡한 군대.
산 것 아닌 것들로 이뤄져 그 면면엔 아르티나에 대한 공포라곤 존재하지 않는다.
“우리 사이에 더 숨길 것도 없겠지요. 장담컨대, 저 황궁 안에선 그 누구도 살아나오지 못합니다.”
“…….”
“이미 느끼셨겠지만, 지금 이곳은 연금술사들 이외엔 그 누구의 실력행사도 허용하지 않는 공간이라.”
재미있다는 듯 느리게 턱을 쓸던 리카드는 극적인 효과를 주기 위해 잠시 뜸을 들이다 입을 열었다.
특히 휴고와 엘리시아의 얼굴을 똑바로 바라보면서.
“아. 그러고 보니 황제는 이미 서거했다던데.”
“……!”
“아차차. 동부의 지배자 역시 죽었다고 했었지.”
“……뭐?”
발밑이 그대로 무너져내리는 기분이다. 일순 깜깜해진 시야에 엘리시아가 입술을 깨물었다.
상황이 만만치 않다는 건 알고 있었지만 방금 언급한 둘이 전사했을 정도라고……?
미처 표정을 숨기지 못한 휴고가 피 끓는 음성으로 물었다.
“이브는.”
“글쎄요. 가족들의 보호를 받지 못한 가련한 공녀님은…….”
리카드가 잔악한 미소를 지었다. 뭐. 곧 진실이 될 터이니 영 거짓은 아니지.
“가장 처참한 몰골로 돌아가셨다던가.”
믿을 수 없다는 듯 엘리시아가 고개 저으며 뒤로 물러섰다. 그러나 재차 떨어지는 말이 피할 수 없는 비수가 되어 심장을 관통한다.
“어떻게, 시신이라도 보여드리면 마음이 좀 풀리시려나?”
자식 잃은 부모의 절규는 세상 그 어느 소리와도 감히 비견할 수 없다고 한다.
하여 겨우 표현을 가져다 붙이길, 창자가 끊어지는 고통에 비유하여 단장(斷腸).
피를 토하듯 절규하는 엘리시아와 휘청이는 휴고의 앞을 가로막으며, 아르칸과 세드릭, 렐리안과 네피르, 그리고 파라반트의 마스터가 검을 들었다.
“……난 안 믿어. 형님은?”
“당연히 개소리지.”
“우리 이브를 뭐, 뭐로, 흑, 뭐로 보고…….”
“품위 없게 울지 마, 렐리안. 공녀님께선 내가 구해다 드리는 세상 모든 음식을 다 드실 때까진 절대 안 돌아가신다고 하셨어.”
“흐음. 만에 하나 천국으로 가셨더라도 다 때려 부수고 나오실 분이라.”
“그대에게 우리 이브의 이미지는 대체 뭐지.”
“천사는 천사인데, 전투 천사 느낌이랄까요.”
빤히 바라보던 리카드가 푸핫 웃음을 터뜨렸다.
“애써 허세 부리는 꼴들이 아주 가관이로군.”
이젠 이 거대한 전쟁의 주역이 될 만큼 장성한 아이들이 이전 세대의 앞을 지키며 똑바로 검을 겨눴다. 선두에 선 아르칸이 단언했다.
“허세 아니다.”
세계와의 단절로 인해 내면과 세계의 합인 검기는 사용할 수 없었지만, 그럼에도 기세는 한 치 흐트러짐도 없었다.
“우리 막내. 네 모자란 머리로 상상하는 것보다 훨씬 강하거든.”
***
진실 여부를 떠나서, 자식에게 변고가 생겼을 수도 있다는 가능성 하나만으로도 부모는 무너진다.
아무리 수많은 전쟁터를 돌았던 영웅이라고 하더라도 막내딸의 죽음 앞에서까지 마냥 태연할 수만은 없다.
휴고는 날아오는 창을 맨몸으로 받아내며 악귀처럼 검을 휘둘렀고, 엘리시아 역시 다르지 않았다.
그리고 이쯤 되자, 리카드는 뭔가 잘못되었음을 슬슬 깨달았다.
‘분명 연금술 이외엔 어떤 힘도 못 쓴다고 했는데……?’
저건 숫제 괴물들이다. 아르티나는 악마보다 더하다는 말이 괜히 나온 게 아니었다.
검기와 정령술을 죄다 묶어버렸는데도 순전히 완력만으로 호문쿨루스와 맞먹다니.
게다가 카시스 후작 영애와 그 사생아 자매는 또 뭐야. 이로 물어뜯으면서 싸우는 게 정상이냐고!
‘일단 몸을 피하는 게 좋겠군.’
정신 차리니 선대 공작과 공작은 이미 자신의 지척에 다다라 있었다.
제아무리 검기를 잃었다 한들 검의 끝을 본 실력이 사라지는 건 아니니.
득의양양하던 리카드의 얼굴엔 어느새 공포가 자리했다.
“뭣들 하느냐! 그 많은 인간을 처먹어놓고 이 정도밖에 못 해?”
주춤주춤 뒤로 물러서며 리카드가 외쳤다.
“모두 내 뒤를 둘러싸라! 시간이라도 벌란 말이다, 이 밥버러지들!”
자신의 주변으로 피조물들을 겹겹이 두른 리카드는 다급히 말머리를 돌렸다.
‘황궁으로 들어가야겠다. 그곳엔 우리 군대가 더 많이…….’
생존을 위한 상념은 자신의 머리 위로 진 검은 그림자로 인해 뚝 멈춰졌다.
파랗게 질린 얼굴로 천천히 고개를 들자…….
시리게 눈에 박혀 드는 건 마치 솔개처럼 사냥감의 목덜미를 노리는 냉혹한 금안.
“뒈져라. 데퐁트 후작.”
선고와 함께, 아르칸의 검이 리카드의 목에 수직으로 내리박혔다.
***
한편 황궁 내 가장 치열한 접전이 벌어지고 있는 남문.
이벨리아의 눈은 짙은 살기를 띠고 오로지 루시우스만을 담고 있었다.
‘조금만 기다려, 아가레스. 내 토끼. 반드시 데리러 갈 테니까.’
아끼는 인간의 염원을 부족함 없이 돕겠다는 듯 세 왕의 힘이 사방을 휩쓴다.
정령왕들에게 질 수 없는 로노베와 바르바토스도 끊임없이 전방으로 파고들었다.
이를 바라보던 루시우스가 손톱을 깨물었다.
‘더러운 아르티나 같으니라고.’
사실 정령왕들의 개입은 완전히 예측 밖의 상황이다. 이 술식이면 저것의 자연력을 봉하여 정령사로서의 힘을 폐할 수 있을 줄 알았건만.
‘저 음흉한 공녀가 이 정도로 편애를 받고 있었을 줄이야.’
나아가 동부의 고위 악마들이 저토록 격렬히 저항하는 것도 예상 밖이다.
이래서야 증오스러운 아르티나가 마치 저들의 왕이라도 된 것 같지 않은가.
‘……이거 좋지 않군.’
루시우스의 눈은 본능적으로 퇴로를 모색했다.
물론 아직 자신의 승리를 의심하는 건 아니나 세상만사 확실히 해둬서 나쁠 건 없지 않겠는가.
‘상황이 정 위험하게 돌아가면 뒷일은 다른 연금술사들에게 맡기고 나는 몸을 피해야겠어.’
본디 전쟁에선 사령관을 잃으면 모든 것이 끝이다. 그러니 적어도 내 목만큼은 이 전쟁의 끝까지 붙어 있어야만 한다.
잿빛 눈을 이리저리 굴리며 자신의 안전을 도모하던 루시우스는 무언가 발견하고선 숨을 급히 들이쉬었다.
“아, 아니, 저게 왜 여기?”
마치 수를 놓듯 창공에 흩날리고 있는 것은 피로 절여진 황금용의 깃발.
“어떻게 벌써……?”
고민은 길지 않았다. 이렇게 되면 몸을 숨겨야 한다. 루시우스는 망설임 없이 말머리를 돌려 남문 쪽으로 달아났다.
그리고 동시.
정확히 그 문으로 들어온 휴고의 눈이 번뜩 빛났다.
루시우스는 자신도 모르게 뒷걸음질 쳤다. 포식자에게서 도망치고 싶은 피식자의 본능이었다. 이내 멍청한 소리가 잇새로 튀어 나갔다.
“어어…….”
아직 토벌이 끝날 때가 아닌데?
이렇게 쉽게 돌아올 수 있을 리가 없었을 텐데?
아니, 그보다 만일의 상황을 대비해서 성문 밖을 지키던 내 아들 리카드는……?
마치 맹수가 먹이를 물듯 삽시간에 루시우스의 뒷덜미를 잡아챈 휴고가 으르렁대며 물었다.
“내 딸. 어딨어.”
맹금의 것과도 같은 눈빛을 정면으로 받으며 루시우스는 생각했다.
뭐야. 이거.
설마.
내가 진 건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