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266화: 반격 시작이다
이벨리아가 휘청였다.
“아스…….”
아니지. 이게 아니야. 부르는 방법이 틀렸어.
알고 있잖아, 언제든 돌아오겠다고 약조했던 진명(眞名).
“……아가레스.”
희망 어린 눈이 주변을 샅샅이 훑었다. 그러고선 또다시 절망.
이 이름을 부르면 반드시 돌아온다고 했는데.
없다, 여전히.
“아, 안돼, 아니야, 아니야…….”
마치 정신을 놓은 사람처럼 턱을 덜덜 떨며 이벨리아가 읊었다.
아주 오래전의 일이지만 선명히 기억하고 있는 묵시록의 구절.
“피어라 등불이여. 피안의 경계에서 우리를 이끌어라.”
그래도 여전하다.
“피어라 등불이여, 제발…… 흐윽, 피안의 경계에서, 우리를 이끌어라.”
항상 응, 이벨리아, 답해주던 친우의 음성은 들려오지 않는다.
연(緣)을 이은 묵시록의 구절마저 통하지 않는다는 건.
혹시 네게 정말 돌이킬 수 없는 일이라도…….
굳게 믿고 있던 약조가 산산이 깨지자 이벨리아는 그대로 무너져내렸다.
바알은 그 모습이 하나의 걸작이라도 되는 것처럼 천천히 훑었다.
아름답다. 곧던 몸이 스러지는 저 모습이. 희망으로 반짝이던 눈이 절망으로 물든 것이.
“역시.”
내 생각이 맞았어. 너는 빛날 때보다 타오를 때가 더 아름답다. 불을 더 질러보고 싶어. 네가 완전히 재가 되어 바스러질 때까지.
마왕이 손을 뻗었다.
동부의 지배자가 어딘지 모를 곳으로 영영 사라져버린 이상, 이 전장에서 살아나가기만 한다면 저 절경을 마계로 끌고 가 백일 밤낮을 감상할 수 있을 터다.
어느새 지척으로 다가온 손. 퍼뜩 정신 차린 이벨리아가 이를 매섭게 뿌리쳤다.
“더러운 손 치워.”
“이런. 완전히 무너진 줄 알았더니.”
“……그럴 리가.”
가장 어두운 하늘에서도 어김없이 밝은 빛으로 길잡이가 되기에 부르길 샛별. 이제는 사(死)한 고대어로 가로되…… 이벨리아.
땅을 짚고 비틀대며 일어선 별이 허공을 바라보며 다짐하듯 중얼거렸다.
“구해주기로 했어. 내가 반드시 구해준다고 했어. 절대 혼자 두지 않겠다고 약속했어.”
숨 쉬어. 정신 똑바로 차려.
아가레스는 매번 날 구했어.
세계? 아니, 맞서야 할 것이 온 우주라고 해도 난 절대 못 물러나.
크게 숨을 내쉰 이벨리아가 마왕의 멱살을 잡았다.
꿰뚫려 반쯤 날아간 목에서 피가 분수처럼 솟았으나 아랑곳하지 않은 채로.
“어디로 보냈어.”
“……큭큭.”
“나도 같은 곳으로 보내.”
“얼마나 끔찍한 곳일 줄 알고.”
“걔 없는 여기보다 끔찍한 곳은 없어.”
아주 잠시 절망을 담았던 눈이 삽시간에 푸른 투기로 타오른다.
빠른 회복이 영 실망스럽다는 듯 마왕이 한숨처럼 내뱉었다.
“안타깝지만, 그건 어렵겠어.”
“보내줄 때까지 네 목을 천천히 자르기라도 해봐야겠네.”
“잠깐, 잠깐. 단순한 심술이 아니야.”
이벨리아가 계속 말하라는 듯 눈썹을 슬쩍 위로 올렸다.
“지금 이곳에 남은 건 찌꺼기처럼 남은 지배력의 잔재지. 난 그걸 겨우 그러모아 불완전한 힘을 사용했거든.”
“그래서, 어디로 보냈는지 알 방도가 없다?”
“지금으로선.”
이벨리아가 이 광경을 보고 광소를 흘리고 있는 루시우스를 향해 스산한 눈을 돌렸다.
“내가 저걸 죽여서 이곳을 다시 세계와 이으면. 그래도 몰라?”
“그렇게 되면 또 모르지. 대충 감은 잡을 수 있을지도.”
“……넌 잠시 살려둔다.”
당장이라도 밟아 죽여버리고 싶지만, 차원을 열 수 있는 건 세계에서 이 악마가 유일하다.
살심을 내리누르며 일어선 이벨리아가 루시우스를 향해 몸을 돌렸다.
그러자 여전히 땅에 널브러진 마왕이 말했다. 꼭 무언가를 바라기라도 하는 어조로.
“세계 밖은 넓어. 네가 그 자식을 찾을 가능성은 천에 하나, 아니, 만에 하나도 안 돼.”
바알의 바람과 달리 일절 흔들리지 않은 채.
“만에 하나?”
이벨리아는 선언했다.
“불가능이라도 상관없어. 인연으로 묶인다는 건 없는 길도 만든다는 거니까.”
***
루시우스는 자신에게 다가오는 이벨리아를 보고 승리를 확신했다.
“이거 어쩌나, 이벨리아 아르티나. 네가 그리도 아끼던 삿된 것이 죽어버렸구나!”
“죽긴 누가 죽어.”
“이 세계에서 사라진 것. 우린 그걸 죽었다고 표현한단다. 크하하하핫!”
이벨리아가 별 대꾸 않고 내팽개쳐진 검을 집으려던 찰나.
묵직하고 차분한 목소리가 들려왔다.
“밥풀 폐하.”
그 뒤를 이어 우아하게 구르는 목소리도.
“주군은 어디 가시고 혼자 이러고 있어?”
로노베가 짐짝처럼 짊어지고 있던 세레스를 휙 내던졌다.
바르바토스의 장총에 의해 어깨가 형편없이 헤집어진 세레스가 데굴데굴 굴러 이벨리아의 발치에 닿았다.
“일단 이거, 폐하께서 지명수배하신 죄인.”
그러자 바르바토스 역시 마찬가지로 손에 들고 있던 에드윈을 흡사 쓰레기 투기하듯 던져버렸다.
“이건 같은 패인 것 같길래 잡아 왔다.”
제국을 배신하여 기어코 이 사달을 만들어낸 반역자들을 빤히 내려다보던 이벨리아가 메마른 입을 열었다.
“……잘했어.”
“근데 왜 이렇게 표정이 안 좋아? 주군은 어디 가셨고?
“아스 없어.”
“없다니? 폐하를 두고 어디 가실 분이 아닌데.”
“……알아. 그래서 내가 찾아오려고.”
그 말에서 숨은 뜻을 찾아낸 두 악마의 표정이 굳었다.
이벨리아의 말투와 표정에서. 그리고 찢어질 듯 웃고 있는 연금술사와 목이 반쯤 잘린 마왕의 상태에서.
가벼이 넘길 수 없는 일이 벌어졌다는 걸 본능적으로 알아챈 터다.
한편 치욕스러워 입술을 깨물고 이벨리아의 신발코를 노려보던 세레스 역시 이를 눈치채고 어깨를 들썩이며 키득거리기 시작했다.
“흣…… 하하, 아하하하하-! 아버지, 그 악마 처리하신 거죠? 맞죠?”
세레스가 팔꿈치로 땅을 짚고 허리를 반쯤 세워 이벨리아의 다리를 물어뜯었다.
“표정이 아주 가관인데? 네가 그리 끼고돌던 악마가 아주 처참하게 죽었나 보지? 응?”
로노베가 이를 악물고 세레스를 떼어냈다.
내팽개쳐져 바닥에 이마를 찧었으나 아랑곳하지 않은 채, 복수에 눈이 먼 여인은 광인처럼 웃어댔다.
“아하하하하! 잘됐다, 잘됐어! 정말 잘됐어!”
보아하니 네 자연력도 평소와 같지 않은 모양인데 곁을 지키는 충견조차 잃었다니…….
뚫린 어깨로 겨우 바닥을 짚은 세레스가 천천히 일어나 이벨리아와 시선을 맞췄다.
“보여, 이벨리아? 지금 너와 내 처지.”
“…….”
“너는 소중한 것을 잃었고, 난 승리를 목전에 두고 서 있네?”
비틀비틀 걸어온 세레스가 이벨리아의 목덜미를 잡고 끌어당겼다.
“네 검은 저기 떨어져 있고. 자연력도 충견도 잃었고. 네 용과 부하들 곁은 이미 내 호문쿨루스들이 빈틈없이 포위했고-.”
하아. 세레스가 환희에 찬 입김을 내뱉었다.
“기다렸어. 이날을. 네게 당한 치욕을 뼈에 새기면서 기다리고 또 기다렸어.”
손에 들린 단검이 빙글빙글 돌았다.
“빌어볼래? 혹시 봐줄 마음이 생길지도 모르잖아.”
“…….”
“싫어? 재미없긴.”
이벨리아의 목에 겨눠진 날붙이가 천천히 내려와 복부 언저리에 닿았다.
“죽이진 않을게. 우리 사이에 그냥 죽이기엔 좀 아쉬운 게 많잖아. 그러니 너무 두려워하진 마. 일단 지금은 몇 번 찔러 화풀이 정도나 하려니까.”
잔악한 미소가 입가에 자리함과 동시.
- 푸욱.
생살을 찢는 소리가 섬뜩하게 울렸다.
해일처럼 몰려드는 호문쿨루스와 키메라를 가까스로 막아내고 있던 모든 이들이 황급히 고개를 돌렸다.
“허억…….”
급소를 관통당한 이의 입에서 거친 신음이 흘러나온다.
믿을 수 없다는 듯 자신의 가슴을 내려다보는 회색빛 눈.
“마왕 잡으려고 익혀둔 거였는데. 네게 쓰게 될 줄은 몰랐네.”
“……커어, 어, 떻게 물을…….”
“글쎄. 나 정도 정령사는 이게 되더라고.”
아까 마왕이 내 친우를 보냈던 것과 비슷하지.
이곳엔 아직, 세계가 열려 있을 때 존재하던 자연력이 미세하게 부유하거든.
물로 빚은 검이 점점 가슴을 파고든다.
공포에 질린 세레스가 자신의 아버지에게 시선을 돌렸다.
“아, 아버지, 사, 살려주세요……!”
“염치도 없지. 살려달라 외쳤던 무고한 이들의 비명을 듣고 웃은 주제에.”
“사, 살려줘. 너도 알고 있잖아. 마냥 내 잘못만은 아닌 거, 너도 알잖아.”
“…….”
“응? 살려만 주면 이 상황도 내가 다 책임지고 수습…… 커억!”
세레스의 배에서 검을 뽑아낸 이벨리아가 이를 역수로 쥐고 목을 그었다.
전황이 어떻게 흐를지 알 수 없는 상황에서 책임지지 못할 자비를 베풀 마음 따윈 추호도 없다.
“커억, 켁.”
“미안하다는 말은 안 해.”
이벨리아가 시선 돌려 주변에 널브러진 시신들을 훑었다.
“똑똑히 봐. 네가 얼마나 많은 이들을 죽였는지.”
“……다, 음 생엔…….”
“그래. 부디 올바르게 살아.”
“반, 드시 널 찾아,내서…….”
“……한결같네.”
끝까지 억울하다는 듯 이벨리아의 어깨를 세게 부여잡고 있던 몸이 허물어진다.
어릴 적부터 이어진 지긋지긋한 악연의 종막.
바라보던 루시우스의 눈에 언뜻 안쓰럽다는 감정이 스쳐 지나간다.
“내 딸이지만 참.”
빠르게 갈무리된 얼굴 끝에 나온 말은 추모라기엔 차디찼다.
“능력이 모자라.”
루시우스가 화려한 반지로 치장된 의수를 들어 이벨리아를 가리켰다.
“다른 것들은 필요 없다. 저것만 내 앞으로 데려와.”
이 전장. 단 하나의 사냥감이 지정된 순간.
호문쿨루스와 키메라들이 표정 없는 얼굴을 일제히 이벨리아에게로 돌렸다. 한 치의 오차도 없는 움직임. 팔에 오소소 소름이 돋는다.
로노베와 바르바토스가 곧장 이벨리아의 앞을 가로막았다.
“밥풀 폐하. 왜인지는 몰라도 일단 저것부터 잡아야 하는 거지?”
“응.”
“일단 뒤로 빠져. 가는 길은 우리가 뚫을 테니까.”
“하지만…….”
“숨어도 괜찮다. 우리가 바라는 건 검을 들고 앞장서는 왕이 아니라 늘 그곳에 그대로 평안한 왕이니까.”
“……!”
어느덧 왕의 곁으로 몰려든 동부의 마족들이 일제히 고개를 끄덕인다.
뭐야. 이래서야 우리 정말…… 군주와 가신 같잖아.
울컥한 표정으로 바라보던 이벨리아가 결심한 듯 입을 열었다.
“아스가 사라졌어.”
“주군께 저깟 농간은 아무것도 아니다.”
“아스는 아주 강하지만…… 가끔은 내 도움이 필요하기도 해.”
가령 외로움을 탈 때라든가. 세계에서 배척된 것이 문득 울적해질 때라든가. 함께 도시락을 먹거나 돗자리를 펴거나 햇볕을 쬐는 일이 영 어색할 때라든가.
“그래서 내가 아껴주고 보듬어주고 챙겨줘야 하거든.”
“……폐하.”
“한시라도 빨리 찾으러 가야 하는데.”
이벨리아가 손을 뻗어 루시우스를 가리켰다.
“그러려면 저 연금술사부터 죽여야 할 것 같아.”
동부의 악마와 마족들이 검을 고쳐 쥐었다. 목표물을 눈에 담은 채로.
“알았어. 저건 우리가 무슨 수를 쓰더라도 잡아 올 테니 폐하는-.”
“아스는 우리 모두에게 소중한 친구고, 주군이고, 왕이었지.”
“……?”
“그러니까 다 함께 싸우자.”
이벨리아가 시선 돌려 동부의 마족들을 바라보며 씩 웃었다.
여전히 눈물 자국이 진하게 메말라 있었지만, 그 태도만큼은 흠잡을 곳 없는…… 군주였다.
“내 토끼에게 가는 길은 내가 뚫을 테니, 그대들은 잘 따라오기나 해.”
***
호언장담했으나 말처럼 마냥 쉽지만은 않다.
루시우스는 마치 성벽처럼 자신의 피조물들을 두르고 있었다.
저걸 뚫으려면 그만큼 강대한 힘이 필요함은 당연지사.
그런데 악마들로서는 권능을, 이벨리아로서는 자연력을 빼앗긴 현시점에 그 정도 힘을 구사하기는 마땅치 않다.
이벨리아는 기괴한 검술이나마 최선을 다해 펼쳐냈다.
썩어도 준치라고, 아무리 소질 없다지만 무려 제국 제일의 무가에서 10년 넘게 배워온 검술은 일반 병사들보단 훨씬 나았다.
제멋대로 튀는 검의 경로에 놀란 로노베가 물었다.
“밥풀 폐하 검술은 아르티나의 비기야?”
“우리 아빠 들으면 기절할 소리야.”
“검이 아주 예측 불가인데?”
“나조차 예측할 수 없다는 게 아주 무서운 점이지.”
조심해. 내 검은 아군과 적군을 가리지 않아.
그렇게 분투했건만, 수의 차이로 인해 몸엔 상처가 늘어간다.
“폐하! 조금 뒤로 빠져!”
“됐어.”
“너 지금 피 흘리는 거 보면 우리 주군 기절하신다!”
“아스 여기…… 없잖아.”
말하면서도 가슴이 시려 이벨리아가 이를 악물었다.
동부의 마족들은 그야말로 소름이 돋았다.
항상 헤실대던 왕은 어디로 가고, 온몸을 피로 칠갑한 채 절규하는 것처럼 적을 베는 모습은 전장에 강림한 악귀라 칭해도 부족함 없을 정도였다.
‘주군께만 밥풀 폐하가 소중한 존재인 줄 알았더니…….’
‘밥풀 폐하도 더하면 더했지 절대 덜하지 않잖아.’
베어도 베어도 빼곡하게 들어차는 적을 바라보며 이벨리아는 이를 세게 악물었다.
‘난 절대 여기선 못 죽어. 우리 토끼 찾아서 안아줘야 한다고.’
그러나 몸이 늘 의지를 따라주는 것은 아니다.
개전 이후 벌써 며칠. 먹은 것 없이 피만 잔뜩 흘렸으니 기실 진작 탈진했어야 정상인 몸을 오로지 정신력 하나만으로 붙잡고 있는 상황이다.
‘안 돼. 정신 차려야 해.’
이벨리아가 흐려진 눈을 깜박이다가 휘청이던 찰나였다.
피보라 치는 전장엔 어울리지 않는 청명한 바람 내음이 코를 파고들었다.
동시에 뒤를 받치는 안온한 품.
“누가 우리 말랑이를 이렇게 만들었지?”
곧이어 차게 식은 몸에 훈기가 이불처럼 내려앉는다.
“쯧쯧, 이것 봐라. 엘라임하고 계약하지 말고 나랑 하지 그랬냐.”
아울러 마치 소풍이라도 나온 것처럼 태평한 목소리도 들려온다.
“악마 자식이 안 보이는 건…… 연금술 때문인가 보네.”
이벨리아가 피로 굳어버린 눈을 뻑뻑하게 깜박이자 페르세스가 검지로 눈가를 쓸어주었다. 그러자 보다 선명히 보이는 은빛 머리칼.
“다들 여긴 어떻게……?”
계약하지 않은 인간의 생사에 관여하면 아주 오랫동안 벌을 받는다고 했는데.
눈빛에 어린 걱정을 읽었는지 페르세스가 답했다.
“우리가 인간 생사에 개입하지 못하는 건 세계로부터 벌을 받기 때문이거든.”
아름다운 입술 위로 악동 같은 미소가 내려앉는다.
“근데 이런? 여긴 세계의 눈이 잠시 가려졌잖아?”
속살대는 페르세스의 뒤로, 이프리트가 웃옷을 화르르 태워 날리며 꽉 주먹을 쥐었다.
호쾌하게 휘어지는 입술 새로 뾰족한 송곳니가 언뜻 빛난다.
“거 깽판 치기 딱 좋은 날씨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