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공녀님의 꽃밭에는 그들이 산다-265화 (265/323)

##  265화: 두 번째 희생자?

황궁 남문이 루시우스 데퐁트의 난입으로 인해 새로운 국면으로 접어들기 직전.

세레스 데퐁트는 흡사 포식자에게 쫓기는 쥐처럼 황자궁 주변을 헐레벌떡 뛰어다니고 있었다.

“저, 저리 가!”

가지고 놀듯 뒤를 느긋하게 쫓고 있던 두 악마, 로노베와 바르바토스가 서로 시선을 마주하고선 픽 웃었다.

“가란다고 순순히 가겠니?”

“그러게 왜 우리 왕의 심기를 건드려선.”

헉헉대며 달리던 세레스가 버럭 소리를 질렀다.

“내가 언제 마왕의 심기를 거슬렀어! 오히려 성문까지 열면서 도와줬는데! 네놈들이 이러는 거 우리 아버지가 아시면 가만 안 둘 거야, 알아?”

로노베가 심드렁하게 답했다.

“마왕? 그거 우리 왕 아닌데.”

“뭐?”

“내가 모실 왕은 내가 정해.”

“그럼 대체 누가 시켰길래 나한테-!”

“밥풀 폐하. 아. 이렇게 말하면 모르겠구나. 으음, 우리 폐하 존함이…….”

“이벨리아 아르티나.”

“맞다. 그런 구불구불한 이름이었지. 맨날 밥풀이라고 부르다 보니 헷갈렸네.”

예기치 않게 튀어나온 이름에 세레스가 휘청였다.

턱. 돌부리에 걸려 넘어지면서 무릎이 다 까졌지만 아픔보다는 충격이 더 크다. 세레스가 멍하니 입을 벌리고 되물었다.

“왕이, 누구라고?”

“귀한 이름을 감히 되묻네. 이벨리아 아르티나.”

“이, 이벨리아…… 그게 어떻게 네놈들의 왕이…….”

눈을 크게 홉뜬 세레스를 향해, 바르바토스가 철컥, 은빛 장총을 장전해 겨냥했다.

동시에 로노베는 채찍을 휘둘러 세레스 옆의 땅을 찍어냈다.

“허억!”

“이벨리아. 님.”

“……?”

“내 왕께 존칭 붙여, 버러지야.”

“……!”

세레스는 그저 떨기만 했다. 두려움이 아닌 분노로 인해서.

‘그 악한 것. 내가 이럴 줄 알았어!'

어느 날엔가 천지분간 못하고 이 제국에 악마를 끌어들일 줄 알았다고!

제국 유일한 공녀가 무려 악마들의 왕으로 군림한다는 것이 말이나 되는 일이야?

‘아니. 아니지. 외려 잘됐어.’

어차피 이번 전쟁은 우리 쪽이 승리한다.

그렇게 되면 황궁에서 벌어진 이 수라장도 모두 공녀에게 뒤집어씌울 수 있을 터다.

본디 역사란 승자의 편에서 새로이 쓰이는 것이니까.

균열도 공녀가 불러낸 것으로, 악마도 공녀가 불러낸 것으로 만들고, 데퐁트 후작가와 연금술사들은 제국을 위해 맞서 싸웠…….

- 타앙!

“꺄아악!”

잠시 다른 생각에 빠져 있던 세레스는 발포음에 이어 느껴지는 날카로운 통증에 어깨를 부여잡았다.

흔들리는 눈으로 덜덜 떨며 내려다보니…….

“으아아악! 내, 내 어깨! 아아악!”

“그러게 왜 우릴 앞에 두고 다른 생각을 해, 섭섭하게.”

“사, 살려줘! 전하! 황자 전하! 살려주세요!”

로노베가 쪼그려 앉아 세레스와 눈을 맞췄다.

“네가 지금 해도 되는 생각은 딱 하나야.”

한 손으로 세레스의 뒷머리를 잡아 고정하자 힉, 힉, 숨넘어가는 소리가 들린다. 꽃을 닮아 고운 악마가 해사하게 웃었다.

“아-. 나 제대로 엿 됐구나.”

권능의 일부인 붉은 채찍이 세레스의 몸을 빈틈없이 휘감았다.

꿈을 다루는 몽마의 이능답게 세레스의 회색빛 눈이 흐려지려던 찰나.

- 쩌억.

나무 갈라지는 소리를 내며, 로노베의 채찍이 흔적도 없이 사라져 버렸다.

털썩, 바닥으로 떨어져 쓰러지는 세레스를 벌레 보듯 바라보며 로노베가 고개를 기울였다.

“응? 이상하네? 왜 힘이 안 들어가지?”

“나 역시 마찬가지다.”

장총이 사라져 대검 위에 손을 얹은 바르바토스가 답했다.

흙투성이가 된 채 땅을 기던 세레스가 소리 높여 웃었다.

“아하하하핫-! 왜, 그 잘난 권능이 안 나와? 응? 아하하하하!”

“이거 뭔가 알고 있나 본데.”

한참 웃던 세레스가 돌연 웃음을 뚝 멈췄다.

악에 받친 손이 땅을 가득 움켜쥔다. 반쯤 빠진 손톱에선 피가 줄줄 흘렀으나, 형형한 눈빛은 조금도 죽지 않았다.

갈라진 목소리가 마치 주술이라도 외듯 낮게 속삭인다.

“너흰 다 끝이야. 마왕이고 이벨리아고 할 것 없이 전부 끝이라고.”

“……?”

“세계의 힘을 빌려 쓰는 것들은 이 황궁에서 절대 살아서 나갈 수 없어. 그렇고말고. 그게 어떤 술식인데. 얼마나 많은 것들의 목숨을 빼앗아 만든 건데.”

“……아무래도 연금술사들이 잔재주를 부린 모양이군.”

“우리의 첫 계율이 뭔지 알아?”

세레스가 키득키득 웃었다. 소리가 높아졌다. 마치 선포하듯.

“너 자신이 신임을 알라! 내가 곧 신인데, 우리가 곧 신인데! 악마? 공녀? 정령? 그깟 게 위협이나 될까!”

빤히 내려다보던 로노베가 검지를 자신의 관자놀이에 가져다 대고 빙글빙글 돌렸다.

“제대로 돌았는데, 이거.”

“대악마라며 콧대 치켜들고 다니던 루페르트 후작도 별수 없을걸!”

“오, 그것참…….”

“겁나? 두려워? 그럼 지금이라도 내 앞에 머리를 조아리고 날 왕으로 떠받들어! 내 마음에만 든다면 너희들은 살려 줄 의향도- 커어억!”

“신박한 개소리로구나.”

일장 연설하던 세레스의 얼굴을 후려쳐버린 로노베가 고운 손을 탈탈 털었다.

“에이, 지지 묻었네. 이 전쟁통에 입술은 무슨 쥐 잡아먹은 것처럼 칠해가지고. 쯧.”

로노베가 다시 손을 들어 올렸다.

“살살 쳐라. 죽지 않게.”

“알아. 죽이는 건 왕께서 하신다고 했으니까.”

퍽. 퍽. 가차 없이 내리치는 손길. 빨래처럼 얻어맞은 세레스는 몸을 옹송그리고 부들부들 떨었다.

로노베가 세레스의 멱살을 잡고 속삭였다.

“야. 그거 알아?”

“크, 커억, 그, 그마안…….”

“원래 권능으로 패는 것보다 주먹으로 패는 게 더 아파.”

한참을 두들겨 맞던 세레스는 정신이 혼미해지기 직전, 저 위 발코니를 바라봤다.

“……!”

살짝 열린 커튼 사이로 약혼자의 반질반질한 이마와 고동색 눈이 언뜻 보인다.

세레스는 지푸라기라도 잡는 심정으로 힘겹게 손을 뻗었다.

“사, 살려주세요…… 전하…….”

미우나 고우나 내가 그대의 약혼녀잖아요. 당신의 황후가 될 몸이잖아요.

조금 흔들린 커튼은-.

이내 더 볼 것도 없다는 듯 완벽히 닫혔다.

***

기절한 세레스를 짐짝 둘러매듯 들어 올린 로노베가 2층 발코니를 향해 턱짓했다.

“바르바토스. 이게 저쪽을 보면서 살려달라고 했어.”

“안에 뭔가 있겠군.”

“잡아가면 밥풀 폐하가 좋아할 수도.”

“그렇다면 일단 잡고 봐야지.”

바르바토스가 에드윈의 발코니로 훌쩍 뛰어올랐다.

곧이어 으아아악, 외치는 소리가 들려온다.

퍼억, 뭔가 둔탁한 것이 깨지는 소리도.

오래지 않아 뛰어내린 바르바토스의 손아귀에는 얼굴이 잔뜩 부어오른 에드윈이 처참한 형상으로 대롱대롱 매달려 있었다.

***

세레스와 에드윈이 두 악마에 의해 온갖 치욕을 당하고 있을 그 무렵.

남문에는 루시우스의 광기 어린 웃음이 쩌렁쩌렁 울리고 있었다.

“크하하하-! 그 넋이 나간 얼굴들, 아주 꼴좋구나! 크하하핫!”

지금껏 암문에 숨어 있던 루시우스가 호문쿨루스 여럿을 대동한 채로 마왕에게 성큼성큼 걸어갔다.

“크흐흣- 내가 진정 복종이라도 한 줄 알았더냐?”

“흐음. 이건 제법 당황스럽구나. 적어도 이 전쟁의 끝까진 손을 잡을 줄 알았는데.”

"이해하시게. 어차피 이 제국을 무너뜨리고 나면 그대들과 우리의 아귀다툼이 시작될 것은 자명하지 않은가.”

“그를 논하는 것도 이 제국을 정리한 이후인 것을…… 이렇게 되어봤자 삼파전이다.”

“아니지, 아니야. 당신들이 선봉에 서는 동안 우린 제법 힘을 비축해 뒀거든.”

삼파전은 무슨.

세계로부터 받는 힘이 없어진 그대들. 그리고 실컷 싸우느라 진이 빠진 악마, 마족, 기사들. 그 가련한 것들을 우리가 학살하는 수라장으로 표현함이 옳지.

루시우스가 과장되게 두 팔을 벌렸다.

하필 균열로 얼룩진 창공을 뚫고 내리쬔 햇볕이 오만한 연금술사의 머리 위로 내려앉았다. 그가 이 무대의 주인공이라도 되는 양.

“우리가 바로 신이다. 세계의 법칙을 벗어난 학문을 다루니 곧 신이 아니고 무엇이겠느냐.”

그 오만한 선언에 작은 목소리가 답했다.

“멍청이?”

형형한 안광을 내뿜는 루시우스의 눈이 휙 돌아갔다.

“뭐라고 했느냐.”

무슨 일인가 싶어 고양이처럼 살금살금 다가와 말똥말똥 지켜보던 이벨리아가 선명하게 말했다.

“멍청이 같다고. 죽지도 않고 와서 하는 소리가 고작 신 사칭이라니. 아이고, 신이시여. 저는 이 불경한 놈과 일절 관계가 없습니다. 불벼락은 이놈 머리 위에만 내리치세요!”

“……네가 아직도 정신을 못 차렸구나, 아르티나의 핏줄.”

때가 묻은 루시우스의 손이 이벨리아의 목으로 향했다.

그러나 미처 닿기도 전.

- 터억.

마왕과 아가레스에 의해 허공에 멈춰 세워진다.

일격에 부러져 덜렁거리는 손. 그럼에도 루시우스는 껄껄 웃었다. 음산한 눈이 환희를 담고 번뜩였다.

“어차피 다 끝났다. 이 전쟁은 나의 승리야.”

곁에 선 키메라들이 키익, 소리를 내며 금방이라도 돌격할 것처럼 자세를 낮춘다.

“악마들은 모두 효시하여 성문 밖에 걸어둘 것이다. 황가와 아르티나 역시 마찬가지.”

곧이어 호문쿨루스들 역시 무표정한 얼굴로 무기를 고쳐 쥔다.

군대를 위시하여 마치 신처럼 거들먹대던 루시우스가 검지로 이벨리아를 가리켰다.

“그러나 너만은 예외다. 이벨리아 아르티나.”

“난 왜?”

“내 딸이 너만은 살려달라고 부탁하더군.”

“헹. 만약 우리가 진다면 차라리 자결하고 말지.”

“자결하지 못하도록 손목과 발목의 힘줄을 끊고 자연력을 폐해서 데려와 달라더구나. 아마 오래도록 가지고 놀고 싶은 모양- 크학!”

빠각. 뭔가 부서지는 소리와 함께 데퐁트 후작이 저 뒤로 날아가 돌무더기에 처박혔다.

넓은 보폭으로 걸어간 아가레스가 멱살을 쥐어 잡고 허공으로 들어 올렸다.

“어디까지 지껄이나 두고 보려 했더니 끝을 모르고 입을 놀리는군.”

“크헉. 콜록. 크흐흐, 왜, 속이 타나? 저것을 잃기라도 할까 봐?”

루시우스가 까닥 검지를 움직였다.

동시에 까마득한 호문쿨루스와 키메라들이 일제히 마왕과 아가레스, 이벨리아 주변을 빈틈없이 둘러싼다.

“아무리 잘났다 하더라도 권능이 닫힌 상태에서 육탄전만으로 저것들을 모두 처리할 순 없을 텐데. 게다가 등 뒤에 지킬 것이 있다면 더더욱.”

이곳은 곧 피로 물들 것이다.

그가 그토록 갈망하던 이들의 피로. 마치 입맛이 돋는다는 듯 루시우스는 혀를 내밀어 메마른 입술을 핥았다.

빼곡하게 몰려드는 적을 바라보던 마왕이 난감하다는 듯 고개를 기울였다.

“이봐. 동부의 지배자. 우리가 남은 승부를 보기 위해선 저것부터 처리해야 할 것 같은데 말이야.”

“그래서 뭐.”

“심히 언짢겠지만, 잠시 손을 잡는 건 어떤가?”

“나는 누구와도 손잡지 않는다. 내 왕께서 내민 손이 아니라면.”

저 융통성 없는 자식. 마왕이 이벨리아를 바라봤다.

“그렇다는데. 동부의 왕께선 어떠신지?”

“나 역시 누구와도 손잡지 않아. 우리 토끼가 잡고 싶어 하는 손이 아니라면.”

바알의 표정이 짜게 식었다. 그럼 뭐, 다 같이 죽자는 소리야?

“그렇게 여유 부리다가 황천길에서 둘이 손잡게 될 텐데.”

“아닐걸.”

“믿는 구석이라도 있나?”

“아스는 내 안위 앞에서 저렇게 여유 부릴 토끼가 아니거든.”

쟤가 나를 데리고 이곳을 벗어나지 않는 건 분명 무슨 수가 있다는 소리지.

“그러니 나는 그저 믿으면 그만이야.”

“……맹목적인 믿음이로군.”

“우리가 쌓아온 시간이란 게 그런 거거든.”

호문쿨루스가 지척까지 다가와 검을 겨눔에도 이벨리아는 팔짱 낀 채 움직이지 않았다.

한 치의 의심 없이 목숨마저 맡길 수 있는 믿음. 바알의 얼굴에 음습한 욕망이 들어찼다.

저거. 그는 바로 저것이 가지고 싶었다.

저 눈. 저 믿음. 저 신념. 저 마음. 저 육신.

올곧기 그지없어 되려 부러뜨리고 싶은 저것.

한편 루시우스를 허공으로 들어올린 채 왕의 말을 듣던 아가레스의 얼굴엔 짙은 미소가 번졌다.

왕이 보내는 신뢰가 더할 나위 없이 기쁘다는 듯.

그리고.

- 쿠구구구궁.

믿음에 부합하는 것처럼 짙은 마기, 아니, 이젠 무엇인지 감히 짐작조차 어려운 기운이 루시우스를 내리누른다.

“크허어억!”

중력과도 같은 힘. 울컥 피를 토하며 바닥에 엎어진 루시우스가 믿을 수 없다는 표정으로 아가레스를 올려다봤다.

그날의 악몽이 떠오른다. 공녀가 악마와 내통하였다고 모함했다가 발로 짓밟혔던, 백의종군하기 전의 그 연회 날이.

“어떻게…… 대체 어떻게……!”

원통하다는 듯 땅을 박박 긁어대는 루시우스를 차게 오시하며, 대악마가 답했다.

“내 힘은 세계에 기반을 두고 있지 않다.”

애초에 배척된 처지라.

“그러게 잘 알아보고 판을 벌렸어야지.”

***

루시우스 곁으로 호문쿨루스와 키메라가 우르르 몰려든다. 마치 주인을 지키려는 개들처럼.

동시에 주인을 위협하는 강대한 적의 약점을 파악하였다는 듯, 이벨리아 주변으로도 매한가지로 밀려든다.

아가레스는 망설임 없이 루시우스의 배에 검을 찔러넣고 옆으로 던졌다.

그리고 곧바로 이벨리아의 앞을 가로막은 채로 적을 도륙하기 시작했다.

마왕과는 달리 권능이라 불릴만한 것을 박탈당하지 않았기에 그 손속은 실로 가차 없었다.

뒤에서 이를 바라보던 마왕이 슬금슬금 이벨리아 쪽으로 걸어왔다.

“참으로 괴물 같은 자로구나.”

“왜 친한 척이야. 저리 꺼져.”

“하나 묻고 싶은 것이 있단다. 이것만 답해주면 얌전히 꺼지도록 하지.”

“뭔데.”

잠시 말을 고르던 마왕이 느리게 입을 열었다.

“만약, 진정 가지고 싶은 것이 있는데 이미 소유자가 있어서 빼앗기가 난망하다면…… 너는 어떻게 할 거지?”

“뭘 어떡해. 내 것이 아닌가 보다, 하고 포기해야지.”

그러자 잠시 침묵.

이내 마왕이 고개를 저었다. 원하는 답이 아니라는 듯.

“……난 아니란다.”

“네 가치관 안 궁금해.”

“내가 탐하는 것을 남이 가진 꼴을 어떻게 눈 뜨고 볼 수 있을까.”

마왕이 등 뒤로 바짝 다가왔다.

이내 속삭이듯 떨어지는 숨결.

“차라리 부숴야지.”

이벨리아의 본능이 경종을 울린다.

이대로 있다가는 필시 죽을 거라는 경고.

털을 바짝 세운 짐승처럼, 이벨리아가 거칠게 몸을 흔들었다.

“이거 놔!”

하지만 단단히 목덜미를 잡은 손은 꼼짝도 하지 않는다.

권능이 사라졌다고 해서 오랜 시간 쌓아온 육체의 능력도 사라지는 건 아니니까.

이내 바알의 손에, 분리된 세계에 찌꺼기처럼 남아 부유하는 지배력의 잔재가 들러붙었다. 오물처럼 끈적하게.

동시에 오른손에 생긴 아주 작고 작은 공간의 문. 불완전하게 닫혔다가 열렸다가 또 흔들렸다가 고정되기를 반복한다.

“이벨리아. 잘 가려무나. 혹 내가 이곳에서 벗어나게 된다면 찾으러 갈 터이니.”

날선 본능이 스스로 깨닫는다.

저건. 다신 돌아올 수 없다.

머리 위로 떨어져내리는 손.

그 급박한 상황에서도 이벨리아는 허리춤에 매인 검을 풀어 바알의 팔과 배를 마구잡이로 그어댔다.

손은 멈추지 않는다. 이내 지척까지 다가온 죽음. 이벨리아의 몸이 굳었다. 다가올 미래를 예측한 듯.

“이브!”

그 순간. 폭발적으로 터지는 기운과 함께 아가레스의 묵빛 검이 마왕의 목으로 오차 없이 쇄도했다.

잠시 움찔하였으나…… 마왕은 피하지 않았다. 저것을 피하는 순간 가까스로 그러모은 지배력의 잔재가 흩어질 테니.

“크윽.”

목뼈에 검이 닿는 소름 끼치는 소리. 그리고 작은 신음.

눈앞으로 쏟아지는 핏줄기에 이벨리아가 눈을 질끈 감던 찰나.

달려온 아가레스가 팔을 뻗어 친우의 얼굴 한치 앞까지 가닿은 마왕의 손을 저지했다.

그리고-.

- 키르르르륵!

흡사 톱니바퀴가 돌아가는 듯한 소리가 들려온다.

마왕의 손아귀를 벗어나 바닥에 털썩 주저앉은 이벨리아는 낯선 소음에 천천히 눈을 떴다.

시선은 본능적으로 친우를 찾았다.

그리고 이내 작은 의문이 입을 타고 흐른다.

“어……?”

보여야 할 것이 보이지 않는다.

“토끼…….”

분명 방금까지 내게 달려오던 친우가 없다.

피가 엉겨 붙은 손이 뻑뻑한 눈을 비볐다.

힘겹게 다시 초점을 맞췄으나…… 여전히 보이지 않는다.

세상은 분명 그대로인데. 반드시 있어야 할 것만 없다.

“토끼야……? 아스……?”

불러도 답이 들려오지 않는다.

몸이 덜덜 떨리기 시작했다. 이벨리아는 양손으로 팔을 감싸 쥐고 주변을 황망히 둘러보았다. 어디에도 없어. 없다고.

엉금엉금 기어간 이벨리아가 반쯤 목이 잘려 땅에 쓰러진 바알의 멱살을 틀어쥐었다.

“너, 너…… 네 짓이지.”

항상 꼿꼿하던 바다색 눈이 마치 애원이라도 하듯 바알을 바라본다. 그 눈동자가 참으로 마음에 들어 마왕은 전율했다.

“쿨럭, 이런…… 널 보내려고 했던 건데.”

왜 그리 아름다운 눈으로 나를 바라보니, 이벨리아. 더 조각조각 부숴보고 싶게.

“내가 아니면 누구도 손대지 못하도록 다른 차원에 숨겨두려고 했는데.”

“그, 그럼 지금…….”

피범벅이 되어도 여전히 아름다운 입술이 파르르 떨린다.

“안타깝게도, 네가 그리도 아끼던 친우가 대신 가버렸구나.”

황홀하다는 듯 바라보며, 바알이 선고했다.

“영영 찾지 못할 곳으로.”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