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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녀님의 꽃밭에는 그들이 산다-264화 (264/323)

##  264화: 이브를 다치게 한 놈이 너냐

한편 이곳, 동문.

아르티나 기사들 일부를 이끌고 도착한 아가레스는 성벽 위에 대충 걸터앉았다.

아직 앳된 티가 가시지 않은 기사 하나가 쭈뼛쭈뼛 물었다.

“저, 저기. 명령을 내려줘야…….”

“무슨 명령.”

“사령관은 당신인데 그걸 나한테 물으면…….”

자리 잡고 대충 검이나 던지려던 아가레스가 귀찮다는 듯 주변을 둘러봤다.

배속된 신입 기사들이 뭔가 바라는 듯한 눈으로 자신의 입을 뚫어져라 바라보고 있다.

“귀찮게.”

쯧 혀를 차며 투덜대면서도 아가레스는 몸을 일으켰다.

세상 모든 것에 무감했던 악마는, 이젠 그의 왕이 아끼는 모든 것을 자신의 울타리 안에 넣었으니까.

“검 들고, 눈에 보이는 것들을 죄다 베어라. 그러다 보면 이기겠지.”

뭐야. 그런 당연한 소리 하라고 사령관이 있는 건줄 알아? 기사들의 눈이 짜게 식었다.

그러자 이런 신파 따위 익숙하지 않다는 듯 차갑게 뒤로 돌아 적을 마주하며, 아가레스가 들릴 듯 말 듯 중얼거렸다.

“……웬만하면 죽게 안 내버려 둘 테니까.”

무려 마계의 한 축을 지배하는 대악마의 보증. 공작저에서야 으르렁대는 것이 일상이었지만 전쟁터에서 이보다 더 든든한 아군은 없다.

신입 기사들이 서로를 바라보며 씨익 입꼬리를 올렸다.

이 중에선 그나마 선임 축에 속하는 기사 로웰이 아가레스의 팔을 툭 치며 장난스럽게 말했다.

“이봐, 악마. 너 다시 봤다.”

“네까짓 게 다시 보면 뭐.”

“네가 우리 저택에 올 때마다 아가씨 기분이 어떠신지 알려줄 수 있지.”

“……네까짓 거라는 말은 취소다.”

너, 내 왕의 치세에서 제법 중책을 맡을 수 있겠어.

투명하게 내비치는 속내에 로웰이 킥킥 웃으며 검을 돌렸다.

“자. 얼른 처리하고 아가씨 도우러 가자.”

“네놈들만 제 몫을 하면 된다.”

“그건 걱정 마. 우리가 이래 봬도 아가씨를 보고 자란 기사들이란 말이지.”

꾸역꾸역 밀려드는 마족들에게 파묻힌 로웰이 일검에 적을 모두 베어낸 뒤 피 묻은 얼굴을 닦으며 태연히 걸어 나왔다.

“주인 닮아서 다들 한가락씩은 한다, 이거야.”

***

……는 무슨.

아가레스는 목이 잘릴 뻔한 기사의 뒷덜미를 잡아 끌어냈다.

동시에 다른 기사의 가슴팍으로 쇄도하는 창을 맨손으로 잡아 되돌려 던졌다.

벌써 몇 번째인가. 이놈들 뒤치다꺼리를 한 것이.

땅에서 솟는 마족에게 다리를 잘리기 직전이었던 기사 하나를 대롱대롱 든 채, 아가레스가 스산한 눈으로 로웰을 바라봤다.

“한가락씩, 뭘 해?”

“……미안하다. 신입들 실력이 생각보다 안 받쳐주네.”

“어디 가서 아르티나 기사단이라고 하지 마라. 주인 얼굴에 먹칠이니.”

“쟤들은 아직 서임식 한 지 반년 정도밖에 안 됐다고! 이 정도면 제법 잘 버티고 있는 거야!”

“이 녀석. 저 녀석. 그리고 저기 저 녀석도. 내가 안 구했으면 이미 황천길 갔다.”

할 말이 없어진 로웰이 볼을 긁적였다.

“……아가씨께 잘 말씀드릴게. 네가 아주 큰 활약을 했다고.”

“또.”

“네가 우리를 많이 구해줬다고.”

“또.”

“또? 으음…… 네가 아주, 음, 다정하게 우리를 이끌어줬다고.”

“토씨 하나 빼먹지 마라.”

“활약. 구해줌. 다정함. 이끌어줌. 입력 완료.”

빠릿빠릿한 대답에 흡족해진 아가레스는 동문 전장 이곳저곳을 벼락처럼 누비며 적을 베어냄과 동시에 목숨이 경각에 달려 있던 기사 여럿을 구해냈다.

그렇게 전황이 순조롭게 흘러가던 와중.

- 크르르르르.

거대한 짐승의 으르렁거림이 들린다.

곧이어 집채만 한 사자 한 마리가 전장에 난입하더니, 감히 아가레스의 등 뒤에서 검을 휘두르려던 적들을 앞발로 쳐 날려버리고는 몸을 납작 낮추었다.

주군 앞에서 본능적으로 살랑이는 꼬리가 땅 위에 실선을 남긴다.

바라보던 아가레스가 냉정히 시선을 돌렸다.

“여긴 네가 필요 없다. 왕께 가보도록.”

“그렇지 않아도 다녀오는 길입니다, 주군.”

“괜찮으시던가.”

“성질머리를 보니 괜찮아 보였습니다.”

“……?”

“저더러 냉큼 동문으로 가지 않으면 좌천시켜버리겠다고 협박을 하시지 뭡니까. 무슨 땅콩이 그렇게 사나운지. 아마 세상 땅콩 다 모아둬도 그 땅콩을 이길 순 없을 겁니다.”

“왜 동문으로 가라고 하셨지?”

“그건 모릅니다. 그저 꼭 동문으로 가라면서 빽 소리를 지르기에 이쪽으로 왔지요. 땅콩 폐하는 똑똑하니 뭐 다른 생각이 있겠지, 싶어서 말입니다.”

가만히 듣던 아가레스가 마르바스의 갈기를 냅다 잡아채더니 적진 한가운데에 던져 넣었다.

“으아악! 주군!”

“잘 처리해라.”

“저만 두고 어디 가십니까!”

“이브한테.”

“땅콩 폐하 알아서 잘 살아남고 계시는데요!”

“널 여기로 보냈다는 건 내가 필요하단 뜻이니.”

오랜 시간 함께 한 친우의 의도를 정확하게 짚은 아가레스가 기사들을 턱짓했다.

“저것들 죽게 두지 마라. 이브가 아끼는 이들이니까.”

그 말을 끝으로 사라져버린 주군의 신형.

마르바스는 멀뚱멀뚱 서 있는 앳된 기사들을 바라봤다.

기사들 역시 마찬가지로 머리 위만 푸릇푸릇한 요상한 사자를 바라봤다.

“…….”

“…….”

어색하다. 어색해.

마르바스는 짐짓 신경질적으로 앞발을 쿵쿵 굴렀다.

“에잉, 빌어먹을 짐 덩어리들!”

***

곧바로 남문으로 달려온 아가레스는 눈앞에 보이는 광경에 그야말로 눈이 돌았다.

바람만 스쳐도 아까운 그의 친우에게, 감히 불순한 손이 닿을락 말락 하고 있었으니.

심지어 이벨리아의 표정은 명백히 거부 의사를 내비치고 있었다.

아가레스로서는 상상조차 하지 못할 일이었다. 싫다는데 어떻게 감히.

- 퍼억.

이벨리아에게 뻗던 마왕의 손목이 괴이한 소리를 내며 부자연스러운 각도로 꺾였다.

“감히 내 주인에게-.”

섬뜩하게 타오르는 눈으로 성큼성큼 다가오던 아가레스는 이벨리아의 상태를 보고 일순 말을 멈췄다.

이내 조금 전과는 감히 비교조차 되지 않는 마기가 폭발하듯 전장을 휘감는다.

“……!”

아르티나 기사단을 비롯한 주변 모든 병사들이 맥을 추지 못하고 털썩 주저앉았다.

심지어 용인 엔리르조차 땅에 배를 깔고 납작 엎드린 채로 분하다는 듯 앞발질을 했다.

엘라임마저 신형이 흐릿해지더니 계약자에게 무리가 될까 미안하다는 말을 남기곤 아예 정령계로 돌아가 버렸다.

그 무자비한 힘에서 자유로운 것은 오로지 이벨리아 하나.

아가레스는 감히 닿지도 못하겠다는 듯, 친우의 어깨선을 따라 손을 쓸어내렸다.

그러고선 형용할 수 없는 분노로 타오르는 금안을 마왕에게 돌렸다.

“네가 이렇게 만들었나.”

“이건 나도 유감이야.”

아가레스가 천천히 걸음을 옮겼다. 사냥을 마친 포식자인 양, 준비를 마친 온몸의 근육이 검은 옷에 뚜렷하게 비친다.

마왕은 피하지 않고 다만 자세를 조금 낮췄다. 언제든 마주 달려들 준비를 하는 것처럼.

“내가 지금까지 널 죽이지 않았던 건, 네가 내 것을 건드리지 않았기 때문이다.”

“내가 널 그냥 뒀던 이유도 마찬가지지.”

“그런데 이제 네가 내 것을 탐하는군.”

“이제야 네가 탐낼 만한 것을 가졌으니.”

포식자들은 본디 그러하다.

빼앗고 싶은 것이 없는 맹수의 영역엔 침범하지 않으며, 마찬가지로 자신의 영역을 침범하지 않는 맹수와는 굳이 다투지 않는다.

마왕과 동부의 지배자는 그런 관계였다. 꽤 오랫동안.

그러나 지금 이 순간.

마왕은 동부의 영역에서 무언가 빼앗고자 했고, 아가레스에게 그건 차라리 목숨을 내어주는 한이 있더라도 결코 빼앗길 수 없는 신이자 하늘이었다.

즉, 더 이상의 공존 또는 방관은 불가능.

그렇게 되면 포식자들의 말로는 단 하나다.

둘 중 하나의 죽음.

***

“토끼야…….”

“너 자꾸 이렇게 아슬아슬할 때 부르지.”

“…….”

“내가 네 명령 잘 듣는 것을 이용해서 이리도 가혹하게 굴고.”

“……미안.”

우리 토끼 화났다. 음성도 차갑고 표정도 무시무시하다.

익숙하지 않은 어조. 이벨리아는 자신도 모르게 입술을 삐죽였다. 그러자 위에서 낮은 한숨이 뱉어진다.

“가마긴은. 네가 처리했어?”

“으응.”

쪼그라든 이벨리아가 도르륵 눈을 굴리던 그때.

“……!”

머리 위에 따뜻한 온기가 얹어진다. 흘끗 올려다보니 아가레스가 그 커다란 손으로 자신의 머리를 쓰다듬고 있다.

“강하네, 나의 왕.”

“……토끼 화 안 났어?”

“났어.”

“……또 미안.”

아가레스는 다시 고개 숙이려는 이벨리아의 턱을 붙잡고 조심스레 들어 올렸다. 지척에서 맞닿는 시선.

“그럼 끝나고 제대로 달래줘.”

“쓰다듬어줘?”

“데이트도.”

“그럴게.”

“한 번으론 어림없어.”

“응. 여러 번.”

원하는 것을 얻어낸 아가레스가 이벨리아를 돌려 세웠다. 그러고선 마치 길을 알려주듯 뒤에서 감싸 저쪽을 가리킨다.

“잠시 저기 가 있어.”

“응.”

이벨리아는 냉큼 고개를 끄덕였다. 되지도 않는 만용을 부릴 생각 없다.

자신은 이미 호문쿨루스 수백 개체를 해치우고, 심지어 대악마 하나까지 처리한 참.

더 남은 힘이 없는데 괜히 알짱거려봤자 토끼의 전투에 방해가 될 뿐이다.

아가레스는 이벨리아가 제법 거리 있는 곳으로 물러설 때까지 마왕의 공격을 방어하기만 했다.

그러다 친우가 안전한 곳에 발 딛는 순간.

- 쿠구구구궁.

곧바로 마기를 방출해 공세로 전환한다.

사방에 널려 있던 파편이 힘을 이기지 못하고 일순 허공에 떠올랐다가 산개한다.

바짝 붙으며 마왕이 진정 궁금하다는 듯 물었다.

“그렇게 재밌어?”

묵빛 검이 아슬아슬 목덜미를 스치고 지나간다.

“인간 데리고 노는 거 말이야.”

연이어 아가레스의 검이 마왕의 장포 소맷자락을 주욱 갈라냈다.

“재미라……. 그리 보였나.”

“흥미 외엔 관심 없던 그대가 저 인간이라면 목을 매니 말이지.”

허공에 열린 틈으로 수십 개의 검이 일제히 날아든다. 어렵지 않게 스쳐내며 아가레스가 답했다.

“하루아침에 하늘이 생기는 기분을 넌 모른다.”

“……?”

“애처로워진단 소리야.”

흘끗, 이벨리아에게 시선 돌리려는 눈을 향해 아가레스가 검을 휘둘렀다. 마왕의 오른 눈에 세로로 깊은 자상이 남는다.

“잃을까 두려워서.”

숨결 하나 닿는 것도 용서하지 않겠다는 듯, 입술 부근에도 긴 흉터가 그어진다.

“손길 하나에도 신의 안배를 갈구하게 되지.”

그 잔악한 말에도 마왕은 그저 웃었다.

“그렇게 말하니까…… 더 탐이 나잖아.”

두 지배자의 검이 정면으로 맞부딪친다.

어쩌면 파천(破天)이라고 표현할 수 있을 터였다.

세상 만물을 오시하는 마계의 지배자들은 하늘마저 가르길 저어하지 않았으니.

농도 짙은 마기를 견디지 못한 창공은 그대로 두 갈래로 찢어져 용과 호랑이처럼 우짖었다.

본디 전쟁이란 수장들의 전투가 큰 몫을 차지하는 법.

둘의 전투가 이 전쟁의 승패를 좌우할 것임이 너무도 자명하다.

하여 그 누구도 눈을 떼지 못하던 순간을 틈타-.

전 데퐁트 후작, 현 금제탑의 장로.

루시우스 데퐁트가 남문 뒤로 몰래 숨어들었다.

***

본디 연금술의 기본은 ‘값’이다.

키메라를 만들고자 한다면 그에 상응하는 대가를 지불해야 하며, 그건 인간의 팔다리 등 신체다.

살육 병기 호문쿨루스를 연성하려면 마찬가지로 그에 필요한 값을 지불해야 하며, 그건 수천 인간의 목숨이다.

그리고 연금술의 궁극이라 불리는 ‘공간’을 불러내고자 한다면 역시 등가를 내놓아야 하며, 그건…… 연금술사 수백의 목숨이다.

루시우스의 백묵이 땅 위에서 미끄러지듯 춤을 췄다.

1차 인마전쟁 당시 금제탑 토벌에 앞장서서 스승과 제자, 동료들을 모두 산 채로 불태워 얻어낸 술식.

화마 속 비명과 애원이 여전히 선연하게 아른거린다. 루시우스가 끌끌 웃었다.

“그대들 원통함을 오늘 여기서 푸시게. 죽음으로써 연금술의 궁극을 이루었으니…… 연금술사로서는 더할 나위 없는 영광 아니던가.”

다 그려진 진은 오망성을 기본으로 복잡하게 얽혀 있었다.

발아래를 물끄러미 바라보던 루시우스는 이 황궁에 발을 들인 지배자들을 하나하나 손에 꼽았다.

마왕과 동부의 지배자를 비롯한 악마들, 황태자, 대마법사, 대정령사…….

“큭큭…….”

우습다. 우습기 그지없다.

세계의 힘을 빌려 쓰고자 그리 발버둥 치면 무얼 하는가.

이 공간을 세계에서 분리하면.

지배력도, 자연력도, 존재력도, 마나도, 그 어느 것 하나 사용하지 못하게 되는 것을.

“이래서 연금술이야말로 최고의 학문이라 부르는 것일세.”

우린 세계의 법칙에 영향을 받지 않거든.

끈적한 미소를 띤 루시우스가 수없이 많은 동료들의 목숨을 넣어 둔 구슬을 발로 밟아 깨트렸다.

오랜 시간 갇혀 있던 혼백들이 우우우우- 울부짖으며 오망성 위로 내려앉는다.

동시에 번쩍, 진이 빛나고.

일렁이는 파동이 황궁, 더 나아가 수도 전역을 휩쓴다.

“…….”

루시우스가 꿀꺽 침을 삼키며 마왕과 아가레스의 전투를 일별했다.

아직 달라진 것이 눈에 띄진 않는다.

이제 슬슬 효과가 나타나야 하는데…….

‘설마 실패했나……!’

그렇다면 금제탑은 끝이다.

악마들과 인간들의 날카로운 잇새에서 갈기갈기 찢어져 흔적도 남지 않게 될 터다.

좌절한 루시우스가 비틀거리던 찰나.

마왕이 권능으로 만들어낸 여러 공간의 문이 일제히 크기를 줄인다.

아가레스가 피워올린 마기 역시 불안정하게 일렁이고.

이벨리아가 기사들의 안전을 위해 쳐둔 물의 장막 역시 이곳저곳 구멍이 난다.

“하하…… 그래, 그럴 리가 없지. 내가 실패할 리가 없지.”

세계가 힘을 잃었다.

아니, 정확히 말하자면, 이 황궁은 세계로부터 잠시 격리되었다.

지배자들이 근간된 힘을 잃는 장면은 절경이었다.

루시우스가 광소를 터뜨렸다.

“크핫, 크하하핫! 성공이구나! 성공이야! 크하하하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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