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263화: 친우들과 함께 걷겠습니다
이 제국 모두는 예상했었다.
황제의 서거 사유는 틀림없이 병사(病死)일 거라고.
그러나 그 예측을 비웃기라도 하듯, 젊은 시절을 모두 전장에 바친 군주는 기어코 이곳, 전장에서 전사(戰死)했다.
본디 대제국 황제의 죽음엔 온갖 미사여구가 덧붙기 마련이다. 군주에게 죽음이란 곧 삶의 완성이자 방점이었으니까.
하지만 칼라일 레굴루스 에르카디아의 죽음엔 그 어떤 웅장한 수식어도 필요 없을 터다.
무엇을 갖다 붙이든, 이보다 더 ‘황제’다운 끝은 없을 테니.
***
땅을 짚은 손이 의지를 벗어나 덜덜 떨렸다.
루드비히는 차마 일어서지도 못하고 땅을 기어 심장이 꿰뚫린 채 땅에 허물어진 시신을 부둥켜안았다.
“아버지. 아버지…….”
애타게 불러봐도 이미 차갑게 식은 시신.
이런 최후가 기껍기라도 하다는 듯, 혹은 해야 할 일을 모두 마치기라도 했다는 듯, 황제의 만면엔 온화한 미소가 가득하다.
루드비히가 불안정한 손으로 황제의 얼굴을 매만졌다.
일평생 근심만 가득 안고 사시더니 떠나실 때가 되어서야 이렇게 웃으십니다, 아버지. 이래서야…….
“제가 너무 불효자 같지 않습니까…….”
루드비히가 황제의 얼굴에 남은 상흔을 어루만지던 그때였다.
황제의 마지막 일격으로 인해 권능이 파훼된 악마가 신경질적인 괴성을 지르며 이미 죽은 칼라일과 그를 안은 루드비히를 향해 검을 내리꽂았다.
전하! 외치는 소리를 들으며, 루드비히는 여전히 검을 쥐고 있는 황제의 손을 조심스럽게 펼쳤다.
이윽고 오른손에 들리는 사인검. 포효하는 붉은 사자가 새겨진 손잡이가 낯설면서도 익숙하다.
오로지 황제만이 사용할 수 있는 그 검으로…….
- 채애앵!
루드비히는 지척까지 다가온 악마의 곡도를 막아냈다. 군더더기 없는 간결한 움직임이었다.
여전히 주저앉아 한 손으론 아버지의 시신을 끌어안은 채, 루드비히가 말했다.
“환각을 다루는 악마라면, 여섯 번째인가.”
“나를 알고 있다면 네게 승산이 없다는 것도 잘 알겠구나. 그대도 제법 뛰어난 검사인 듯싶지만-.”
말을 미처 끝맺기도 전.
- 파앗.
허공에 피가 흩뿌려진다.
“어……?”
발레포르는 영문을 모르겠다는 표정으로 공중에 튀어 오른 자신의 손목을 바라봤다.
이 인간은 아직 땅에 주저앉은 그대로인데, 어째서, 아니, 어떻게……?
정신을 차릴 틈도 없이, 악마의 가슴에 연이어 깊은 자상이 새겨진다.
“무, 무슨……!”
크게 당황한 발레포르가 낙타에서 훌쩍 뛰어내려 몇 걸음 크게 뒤로 물러섰다.
루드비히는 그제야 천천히 자리에서 일어섰다. 사인검의 검날에서는 방금 막 묻은 악마의 피가 뚝뚝 떨어지고 있었다.
“……보고 계실까.”
정처 없는 질문. 어깨와 갈비뼈 여럿이 부러졌지만 여전히 꼿꼿하게 선 카밀라가 답했다.
“보고 계실 겁니다. 또, 듣고 계실 테고요.”
작게 끄덕인 루드비히가 검을 치켜들며 말했다. 마치 선언하듯.
“……아버지. 저는 당신의 뒤를 잇지는 않을 겁니다.”
발현된 푸른 검기가 한 치 흐트러짐 없는 사자의 형상을 빚어낸다.
“제겐 바라보고 따를 이정표가 많이 있으니까.”
자세를 낮추며 발을 구르던 사자가 일순 허공으로 뛰어오른다.
“저는, 제 친우들과 함께 걷는 황제가 되겠습니다.”
지혜로운 사고뭉치 땅 도둑.
안하무인 퉁명스러운 대악마.
멍청하고 모자란 용.
얄밉게 뺀질대는 보라색 여우.
“……황좌는 그 누구와도 맞바꿀 가치가 없으니.”
푸른 사자가 기어코 악마의 목덜미를 물어뜯었다.
믿을 수 없다는 듯 눈을 크게 벌린 발레포르가 미친 듯이 곡도를 휘둘렀다.
“으아아악!”
그러나 본디 상대 검사의 검결을 파악하지 못하면 파훼할 수 없는 것이 검기.
환각의 권능은 차치하고, 검술로 따지자면 악마는 감히 루드비히의 위에 있을 순 없다.
오래 지나지 않아 악마의 머리가 데구루루 바닥을 구른다.
루드비히는 베어낸 목을 집어 황제의 앞에 놓았다. 흡사 추모하듯.
그리고 비통한 표정으로 울음을 삼키고 있는 기사들에게 명했다.
“……폐하의 서거는 이 전쟁의 끝까지 함구하도록.”
루드비히가 망토를 벗어 땅에 깔고 그 위에 황제의 존체를 올렸다.
그 뒤로, 기사들이 할 수 있는 최대한의 예를 갖추어 부복한다.
이곳, 서문.
황태자가 적의 수장을 베어냈으니 명백한 승전이었으나…….
그 누구도 감히 함성을 지르진 못했다.
그러기엔 이 제국이 잃은 것이 너무도 컸으니까.
***
그리고 여기, 북문.
이크리안은 속으로 비명을 질러대고 있었다.
‘빌어먹을. 뭐 쓸만한 것들이 이렇게 없어?’
아르티나 기사단은 공녀님과 루페르트 후작 쪽으로 찢어졌고, 황실 기사 중 실력 좋은 이들은 황태자 전하를 수행하고 있으니…….
이크리안에게 남은 건 전쟁 초반부에 실드를 난사하느라 적지 않은 힘을 써버린 마법사들. 그리고 귀족의 사병들.
보라색 머리의 대마법사는 옷소매로 콕콕 눈가를 찍었다.
“아아. 서러워서 뒤지겠네.”
긴박한 상황임에도 태도는 여유롭고 말투는 평이하다. 정신없이 검을 휘두르던 병사들은 생각했다.
이 도련님만 꼭 어디 마실이라도 나온 것 같다고.
“적의 지원군이 더 밀려듭니다!”
“아이고, 큰일이네, 큰일이야.”
“말만 하지 마시고 뭘 좀 해보십시오!”
“내가 뭘 어떡할까. 수가 저리도 많은데.”
“불세출의 천재라면서요!”
“그건 맞지. 근데 천재라고 해서 이 수를 어떻게 할 순 없거든. 그걸 바라면 공녀님 같은 전략가를 데려오던가.”
그러자 마탑 소속으로 이크리안과는 꽤 오랜 시간 함께 연구해온 마법사 하나가 버럭 소리쳤다.
“아, 좀! 뺀질대지 말고 뭐라도 하라고!”
“쯧쯧, 사령관이자 마탑주에게 말버릇 보소. 말세야, 말세.”
이크리안이 병사들의 어깨를 밀어내고 최전선에 섰다.
지평선 저 너머까지 적이 빼곡하다. 마치 거대한 해일이 몰려오는 모양새.
이 제국 모두가 선망하는 젊은 대마법사가 머리칼을 쓸어올렸다. 그 아래 자안이 야살스럽게 휘어진다.
“확실히 힘 좀 써야겠네.”
저 반대편에 용 하나가 활개를 치고 있으니 내 마법이 어느 정도 빛바랠 수밖에 없는 건 아쉽긴 하다만.
궤도에 오른 대마법사에게 긴 영창은 필요 없다.
이크리안이 탁, 발을 가볍게 굴렀다.
동시에 재정립된 마나. 그저 가동을 위한 간결한 시동어.
「지혜로 구름의 수를 헤아리고 하늘의 비를 기울이니, 비로소 물은 돌처럼 굳어지고 깊은 바다의 수면은 얼어붙어라.」
영창이 끝남과 동시에 도래하는 문.
얼굴 일그러진 괴수가 음각된 그것이 지상에 떨어짐과 동시에, 문을 칭칭 감고 있던 사슬이 덜컹이며 풀리고 그 사이에서 눈발이 몰아쳐 영역 전체를 얼려버린다.
7계급 광역마법.
지옥의 문(La Porte de l'Enfer).
마족들에겐 최악의 상성을 자랑한다는 빙계 마법 중 단연 최상위의 주문.
- 쩌저저적.
크르륵 목 울리는 소리를 내며 병사들을 찔러대던 마족들의 하체가 일거에 얼어붙는다.
엔리르가 보았다면 말랑한 앞발로 톡톡 손뼉을 쳤을 광경이다.
그러나 대마법사 하나의 활약으로 곧장 반전시킬 수 있을 만큼 전황이 만만하진 않다.
마족들이 주춤하는 틈을 타 짓쳐들어오는 키메라와 호문쿨루스.
바라보던 이크리안이 난색을 표했다.
“이런. 이제 마나도 거의 바닥인데.”
이건 진짜 큰일이네.
저쪽엔 아직 통솔하는 악마도 버젓이 살아 있는 것 같고.
지옥에서 기어 나온 문을 조금이나마 더 유지하고자 버릇처럼 오른쪽 눈을 찡그렸으나, 이미 적지 않은 힘을 쓴 상황에선 영 쉽지 않다.
용도를 다한 문이 저 스스로 쇠사슬을 칭칭 두르더니 이내 흐릿하게 사라진다.
그러자 마탑 소속 마법사들이 일제히 소리를 질렀다.
“문 없애면 어떡해!”
“다시 만들어! 몰려들잖아!”
이크리안이 목덜미를 긁적였다.
“나 이제 마나 쥐똥만큼 남음. 알아서들 살아남아 보자고.”
“뭐? 마탑주 마나가 왜 이리 간장 종지만 해!”
“마탑주 갈아치워!”
“마탑주 끌어내려!”
“……아니, 그건 좀 섭한데.”
솔직히 네놈들 지금까지 내 마나에 기대서 목숨 부지했잖아.
데칼로그 다 어디 갖다 팔아먹고 남 탓이야, 이것들이.
“마탑 기강이 아주 개판이에요, 개판.”
한숨 쉬며, 이크리안이 마탑에서 훔쳐 온 아스트라페를 대충 던져두고 허리춤에 매여 있던 샴쉬르를 꺼내 들었다.
그러자 마법사들의 눈이 다시 반짝 빛난다.
“뭐야. 우리 마탑주 검도 써?”
“검술도 할 줄 알아?”
“그냥 샌님인 줄 알았더니?”
이크리안이 자신만만하게 입꼬리를 올리며 답했다.
“어허. 샌님이라니. 이래 봬도 아르칸, 아니, 아르티나 공작과 함께 배웠단 말씀.”
그러자 올망졸망 로브를 둘러쓴 마법사들이 오호, 탄성을 내뱉었다.
“역시!”
“마탑주는 다 계획이 있구나?”
“마탑주 자리 돌려주자!”
“우리 마탑주 검술한다!”
그리고…….
- 채애앵!
검날이 맞부딪치는 소리와 함께 이크리안의 샴쉬르가 허공으로 날아가 빙글빙글 돌더니 발치로 툭 떨어졌다.
“…….”
“……?”
“……하핫. 최근 검술에 조금 소홀했더니.”
“…….”
“게다가 하필 저 악마가 검을 다루는 권능을 가진 악마일 줄은 몰랐지.”
마법사들의 눈에서 희망의 빛이 푸시식 꺼졌다.
“다시 마탑주 지위 박탈해라!”
“끌어내려!”
“입만 산 여우 같으니!”
“하하…….”
그렇게 이크리안이 불러낸 지옥문의 잔재만이 눈발처럼 흩날리던 그때.
성문 저 건너에서 투덜대는 여인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아씨, 추워. 어떤 빌어먹을 악마가 이런 무식한 힘을 쓰고 난리야!”
이크리안을 비롯한 마법사들의 눈이 그쪽으로 일제히 돌아갔다.
그러자 보이는 건, 눈발 사이 내려앉은 태양.
“내 친우의 나라를 꽁꽁 얼리는 건 어느 괘씸한 악마냐! 냉큼 나와라!”
큰 오해를 안은 채, 망토를 돌돌 감은 이샤트가 버럭 소리쳤다.
***
‘아무리 공녀님께서 지원을 요청하셨기로니 무려 황제가 직접 행차했다고……?’
심히 당혹스러워, 이크리안이 빤히 이샤트를 바라봤다.
마찬가지로 적군 너머 성문 방면. 눈을 가늘게 뜨고 이크리안을 바라보던 이샤트가 알겠다는 듯 손뼉을 쳤다.
“오. 공녀의 동화책 공장 공장장이로군.”
“……카시스 소후작이라든가, 마탑주라든가, 뭐 그런 때깔 좋은 호칭들이 있긴 합니다만.”
“공녀가 더는 동화책을 읽지 않으니 이젠 실직자라고 불러야 하나.”
“제 말을 들으실 마음은 없으신 것 같으니 이만 다물도록 하지요.”
“뭐라고 중얼거리는지 잘 안 들리는데. 잠시 기다리게, 그쪽으로 갈 테니.”
이샤트가 고개를 까닥였다. 그러자 하르벤타 황제의 직속 친위대가 주변의 적을 모조리 도륙하여 길을 뚫기 시작한다.
이샤트는 그 사이로 덤덤히 말을 몰았다. 사방에서 튀기는 피 따위 익숙하다는 듯.
이크리안은 가까이 다가온 이샤트를 향해 살짝 고개 숙여 간결한 예를 갖추었다.
“지원을 요청하긴 했습니다만, 폐하께서 직접 오실 줄은 미처 몰랐습니다.”
“엥, 우리 제국에 지원을 요청했나?”
“……모르고 오신 겁니까?”
어이가 없다는 표정에 이샤트가 민망하다는 듯 시선을 모로 돌리며 변명했다.
“그게, 에르카디아가 굉장히 위험하다길래 소식을 듣고 바로 달려왔지.”
“무려 황제 폐하께서 그러셔도 되는 겁니까?”
“황제가 뭣이 중한가. 우리 공녀가 중하지. 그래서 공녀는?”
이크리안은 이 황제를 보좌하고 있을 타 제국의 누군가에게 진한 동병상련을 느꼈다.
군주란 것들은 왜 하나같이 이렇게 제멋대로인지, 원.
“공녀님께선 남문을 지키고 계십니다.”
“흐음. 그럼 그쪽으로 가봐야겠군. 수고.”
이샤트가 야박하게 말머리를 돌리자, 이크리안의 표정이 짜게 식었다.
“잠시. 지금 여기 이렇게 고전 중인 건 안 보이십니까?”
“보이는데.”
“근데 그냥 가신다고요.”
“응.”
“오신 김에 좀 도와주시는 것이 도의 아닙니까?”
“난 공녀 도우러 갈 건데.”
“절 돕고 공녀님을 도우시면 되겠군요.”
“내가 그대를 왜.”
“혹시 군주의 덕목인 측은지심은 갖다 버리셨습니까?”
“그대는 신료의 덕목인 분골쇄신을 배운 적 없는 것 같군.”
“제가 폐하의 신하는 아니지 않습니까.”
“나 역시 그대의 군주는 아니지.”
“……공녀님의 복제 인간인가.”
한마디도 지지 않는 것이 꼭 누군가의 사특한 입을 닮았는데. 현명한 이크리안은 재빨리 노선을 바꿨다.
“저 죽으면 공녀님 슬퍼하십니다.”
“공녀는 이제 그대의 동화책이 필요 없을 만큼 컸다.”
이크리안이 느긋하게 덧붙였다.
“제 여동생이 아르티나 공작부인입니다. 아실 텐데요.”
망설임 없이 말머리를 돌리던 이샤트의 손이 멈칫했다.
“제가 죽으면 제 여동생이 슬퍼하고, 그러면 아르칸도 슬퍼하고, 그러면 공녀님도 슬퍼하시겠지요. 연쇄작용 뭐 그런 거 아니겠습니까.”
“…….”
“도와주고 가십시오.”
“……그러지.”
다른 건 몰라도 우리 공녀가 슬퍼하면 안 되지. 안 돼.
이샤트가 허리춤에서 검을 빼 들었다.
동시에 양옆을 지키던 기수들이 일제히 황기(皇旗)를 들어 올린다.
하르벤타의 상징인 붉은 봉황이 감히 친우의 제국을 침략한 적을 향해 이를 드러냈다.
깃발 아래, 태양 같은 머리를 높게 묶은 젊은 황제가 씩 웃으며 검을 치켜들었다.
제국의 황제가 타 제국의 전쟁에 참전하는 건 전례 없던 일이다.
이건 다른 제국 전쟁에 자국의 명운까지 함께 걸겠다는 것과 별반 다르지 않으니까.
그러나 그 유례없는 일을 아무런 이해타산 없이 행할 정도로-.
“저들이 은인의 제국을 짓밟게 두지 마라!”
홀로 타오르는 태양에겐 바다를 닮은 친우가 소중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