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262화: 첫 번째 희생자
상대가 마왕이라면 이벨리아 혼자선 승산이 없다. 심지어 지금은 앞선 전투들로 인해 꼴이 말이 아니니까.
‘하지만 토끼를 부르면 동문 쪽이 위험할 텐데.’
한 걸음 다가오는 마왕을 피해 두 걸음 뒤로 물러서며, 이벨리아가 주변을 살폈다.
‘어떻게 해야…… 응?’
마왕의 대각선 뒤, 저 멀리 겅중겅중 뛰어대는 사자 한 마리가 보인다.
‘잔디!’
입에 먹이처럼 뭔가 물고 있는 것이, 아무래도 이벨리아에게 활을 쏘았던 그 악마인 듯했다.
휙휙 고개를 돌리던 사자는 금빛 머리칼을 발견하자마자 팔짝 뛰며 크게 외쳤다.
“땅콩 폐하아-! 이거 잡아 왔다아-!”
다행히, 잔디가 달려오는 방향에선 돌무더기에 적절히 가려진 마왕이 보이지 않는다.
이벨리아는 피투성이가 된 자신의 몸도 적당히 숨기며 열심히 입을 벙긋댔다.
‘여기로 오지 말고 동문으로 가, 동문으로!’
“응? 뭐라고?”
이벨리아가 손가락으로 동쪽을 콕콕 찔렀다.
‘네가 동문으로 가야 내가 마음 놓고 토끼를 부르지!’
“그 열렬한 눈빛 뭐야? 이게 바로 총애라는 건가?”
이 표정이 총애하는 표정으로 보이냐. 이벨리아가 자신의 눈을 가리켰다. 제대로 보라는 뜻. 그러자 마르바스가 크게 고개를 끄덕였다.
“아! 최측근으로 삼아주겠다고? 하, 참 나. 정 그렇다면 뭐 어쩔 수 없지!”
참다못한 이벨리아가 혼자 상상의 나래를 펼치고 있는 사자에게 버럭 소리를 질렀다.
“동문으로 가라고, 이 멍청아! 동문! 당장!”
“……엉?”
“1초 안에 안 가면 대악마고 뭐고 확 좌천시켜버릴 거야!”
“……!”
좌천? 그건 안 되지!
집사 자리는 절대 못 뺏기지!
입에 물고 있던 악마를 휙 던져 돌무더기에 처박아버린 마르바스는 갈기를 휘날리며 동문으로 달려갔다.
사자의 뒷모습을 바라보던 이벨리아의 얼굴에 따가운 시선이 느껴진다. 돌아보니 마왕이 아주 묘한 표정으로 자신을 응시하고 있었다.
“뭘 봐. 왜. 뭐.”
“내게도 해 봐.”
“뭘?”
“소리 지르는 거.”
“왜?”
“좋을 것 같아서.”
“……변태 자식.”
취향도 더럽게 가지가지네.
***
한편 여기, 루드비히가 방어를 맡은 서문.
왕관 쓴 붉은 사자가 그려진 왕기(王旗)가 잿빛 창공에 펄럭이자 기사들의 사기가 하늘 높은 줄 모르고 치솟았다.
이 전장에서 저 왕기를 휘날릴 수 있는 이는 단 한 명.
황태자, 루드비히.
일인이 곧 일국과 맞먹는 소드마스터와 함께 전투를 치르는 것은 기사들에겐 큰 영광일 뿐만 아니라 동시에 생존을 담보하는 것이기도 했다.
적의 수는 이쪽의 몇 배에 달한다.
하여 루드비히는 기운을 아끼지 않고 곧바로 검에 씌워냈다. 그러자 이내 발현되는 검기.
‘여전히 푸르군.’
누군가의 눈동자와 한치 다름없는 색이다.
검기란 것은 본디 검사의 심상을 그대로 반영하니, 루드비히는 검을 드는 매 순간 깨닫고 또 깨달았다. 내가 너를 연모한다는 것을.
‘신속하게 끝내고 이브를 도우러 가야 해.’
보란 듯, 푸른 기운이 길게 뻗어 나가 전장을 휩쓸었다.
검신이 닿지 않는 범위까지 날아간 검기가 마족과 연금술사, 호문쿨루스를 가릴 것 없이 베어낸다.
뒤에서 루드비히의 보좌관, 에르트 백작이 파랗게 질려 소리쳤다.
“전하! 너무 깊이 들어가셨습니다!”
그러나 모시는 주군은 들은 체도 하지 않으신다.
“혹여 전하께 무슨 일이라도 생기면 황자 전하가 황위에 오르신다고요!”
이 말에는 멈칫하시는군. 좋아. 쐐기를 박자.
“그러면 감히 공녀님을 측실로 들이겠다며 괴롭힐 것이 뻔하지요!”
“…….”
“그러니 옥체 상하시지 않게 얼른 나오, 아니, 더 들어가 버리시면 어떡합니까!”
“열 받네.”
“열은 제가 받습니다!”
시커멓게 몰려드는 적들의 목을 쳐내며 루드비히가 말했다.
“백작. 그대 뭐 좀 하나 잡아 와야겠다.”
“제가 지금 잡아 와야 하는 건 바로 전하입니다!”
“그래. 나 말고 다른 전하.”
“……네?”
“그 모자란 꼴뚜기 잡아 와.”
“그건 지금 방패막이로도 못 써먹을 텐데요?”
“쓰긴 뭘 써.”
루드비히가 에르트 백작에게 달려드는 키메라를 향해 참격을 날리며 말을 이었다.
“죽일 건데.”
바로 옆에서 뿜어지는 마족의 피를 그대로 맞은 에르트 백작이 으으 진저리를 쳤다.
“그럼 금방 가서 잡아 올 테니 죽어 계시면 안 됩니다?”
염려 섞인 말에, 루드비히는 그저 픽 웃고 몸을 돌렸다.
***
루드비히의 약진으로 서문은 큰 피해 없이 승기를 잡아가고 있었다.
기사들의 표정은 한결 밝아졌지만, 루드비히는 외려 얼굴을 굳혔다.
‘이상한데.’
이렇게 쉽다고?
잠시 주변을 둘러보던 루드비히는 이 기시감의 원인을 빠르게 추려냈다.
‘고위 악마가 나타나지 않았다.’
분명 이건 양측 모두 사활을 건 전면전인데. 그 많은 고위 악마가 하필 이 서문에만 단 하나도 배치되지 않았을 리는 없다.
무슨 꿍꿍이지. 루드비히가 눈을 가늘게 뜨던 찰나.
묘한 향을 내는 희뿌연 연기가 일순 아지랑이처럼 피어올랐다.
반사적으로 눈을 감았다 뜨자 보이는 것은…….
“……이브? 너 왜 여기…….”
묻자, 보고 있어도 그리운 친우가 빙긋 웃으며 답한다.
“뭘 당연한 걸 물어. 우리 루이 도와주러 왔지!”
“남문은 벌써 끝났어? 다친 데는 없고? 힘들진 않아?”
“루이를 보면 다 괜찮은걸.”
“……?”
루드비히는 살짝 고개를 기울였다. 뭐지. 이브는 이브인데 묘하게…….
“루이. 루이.”
희미한 의구심은 달콤한 부름에 연기처럼 흩어진다. 늘 그렇듯.
“네가 선산에서 했던 고백 있잖아.”
“……응.”
“그거 지금 답해도 될까?”
루드비히가 자신도 모르게 천천히 고개를 끄덕였다.
이벨리아가 사뿐히 걸어 루드비히의 지척으로 다가왔다. 자칫 숨결이 맞닿을 정도로 가까운 거리.
루드비히의 심장이 속절없이 떨림과 동시. 이벨리아의 머리에서 피가 새기 시작한다.
주르르 흘러 얼굴을 타고, 턱에 맺혔다가, 바닥으로 떨어지면서.
“이, 이브……?”
“이것 봐. 루이. 네가 날 이렇게 만들었어.”
루드비히가 눈앞의 친우를 끌어안았다. 벌벌 떨리는 손이 어쩔 줄을 모르고 환부를 눌러 지혈한다. 그럼에도 피는 멈출 기미를 보이지 않았다.
“안 돼, 안 돼……!”
“널 구하러 왔다가 내가 이 꼴이 됐어.”
아아.
루드비히의 잇새에서 의미를 알 수 없는 신음이 터졌다.
이건 거짓이다. 이럴 리 없다. 세상 모두가 지옥에 처박히더라도 너만은 그래선 안 된다.
루드비히가 세차게 고개를 저었다. 그러자 피로 젖은 손이 루드비히의 턱을 잡고 들어 올린다. 똑똑히 보라는 듯.
“이래도 날 좋아해? 나를 죽여놓고?”
톡. 떨어진 핏방울이 눈을 적셨다.
피눈물을 흘리며, 루드비히는 그대로 무너졌다.
***
“전하! 정신 차리세요! 전하!”
카밀라가 실 끊긴 인형처럼 주저앉은 루드비히의 어깨를 부여잡았다.
주변은 온통 지옥도.
기사들 역시 죄다 바닥에 나뒹굴고 있다.
그나마 피눈물을 흘리는 루드비히의 상태가 좋은 편. 누군가는 스스로 목을 긋거나 발광하며 날뛰고 있었다.
그 사이, 적들은 여유롭게 걸어와 기사들을 도륙하기 시작한다. 카밀라는 적진 한가운데 서 있는 존재에게 시선을 고정했다.
‘저게 원흉이구나.’
낙타 위에 올라탄 긴 머리의 악마. 머리 위엔 화려한 왕관을 쓰고, 여성인지 남성인지 알 수 없을 정도로 곱게 생긴 외형이다.
‘환각을 다루는 악마인가 봐.’
비교적 후방에 있었던 카밀라는 앞줄의 기사들이 원인 모르게 허물어지자 영리하게도 곧바로 호흡기를 막고 방독 기능이 있는 복면을 둘러썼더랬다.
그럼에도 미약하게 흐릿해지려는 머리를 탈탈 털어내며 카밀라가 다시금 루드비히를 흔들었다.
“전하! 제발 정신 차리세요! 이러다 다 죽는다고요!”
“……이브…….”
카밀라가 입술을 세게 깨물었다. 전하의 환각이 공녀님과 관련된 거라면 아마 자력으로 빠져나오긴 힘드실 터다.
어쩌면 좋지. 카밀라가 뭔가 방법을 찾고자 고개를 든 그때.
다각, 다각, 굽 소리와 함께 낙타 위에 높이 올라탄 악마가 다가왔다.
이명, 환각의 사계(四界).
6위 발레포르(Valefor).
인간이 가장 두려워하는 것을 환각으로 만들어 그 속에 가둬버리는 권능을 가진 악마.
칼을 역수로 쥔 카밀라가 루드비히의 앞을 막아섰으나, 악마는 관심 없다는 듯 루드비히만을 응시했다.
“깃발을 보아하니 이게 황태자인가 보군.”
외형만큼이나 아름다운 목소리가 노래처럼 떨어진다.
“제법 실력 있는 검사이긴 하다만…… 상처가 많은 이는 환각에 쉽게 물들지.”
악마가 품속에서 곡선으로 구불구불 휘어진 짧은 검을 꺼내 들었다.
카밀라가 쳐내고자 달려들었으나 단번에 검이 깨지고 어깨가 빠진다.
“윽……!”
옆으로 처박히며 갈비뼈 어딘가가 부러진 것 같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카밀라는 꾸역꾸역 기어 루드비히의 앞을 가로막았다.
“흐음. 뭐, 좋아. 이 곡도는 인간 둘을 한 번에 꿰뚫기에는 부족함이 없으니까.”
악마가 검을 높이 들어올렸다.
카밀라는 쨍하게 떨어지는 검날 앞에서도 눈을 감지 않았다.
기괴한 곡도(曲刀)가 카밀라와 루드비히를 동시에 베려던 찰나.
바람처럼 달려온 군마가 악마의 손을 스치고 지나간다. 악마가 쥐고 있던 곡도가 쨍그랑 소리를 내며 바닥으로 떨어졌다.
시선 들어 말 위에 탄 자를 바라보던 카밀라의 눈이 화등잔만 하게 커졌다.
“폐하……?”
와병 중인 황제가 환각을 일으키는 연기를 마시지 않기 위해 복면을 쓴 채 말 위에 올라타 있었다.
이윽고 창공을 향해 일제히 올라가는 황기(皇旗).
루드비히의 왕기보다 더욱 커다란 붉은 사자가 기지개 켜듯 존재를 알린다.
악마, 발레포르가 중년의 황제를 보며 고개를 기울였다. 부드러운 머리칼이 사르르 옆으로 떨어진다.
“1차 인마전쟁에서 그대를 본 듯도 한데.”
“쿨럭…… 그랬었지.”
“인간의 삶은 참으로 짧고도 덧없군.”
악마의 얼굴에 잔악한 미소가 번졌다.
“굳이 명을 재촉하지 않아도 곧 죽을 것처럼 보이는데 말이야.”
황제는 주저앉은 아들을 잠시 내려다보곤 다시 악마에게 시선을 돌렸다.
“나는 살면서 그 어느 것도 선택하지 못했지만…… 적어도 죽는 방식은 택할 수 있지 않은가.”
쿨럭, 또다시 기침과 함께 핏덩이가 손을 적신다.
그럼에도 황제는 웃었다.
“전쟁으로 황제가 되었으니, 전쟁으로 죽는 것도 나쁘지 않지.”
그 끝에서 처음으로 내 아들의 방패가 되어줄 수 있다면 더할 나위 없는 호상이고.
황제, 칼라일이 악마에게 검을 겨눴다.
오랜 와병으로 근육이 소실되어 과거보단 불안정한 자세였으나, 그 혹독한 전쟁을 이겨냈던 군주이니만큼 눈빛은 형형했다.
그러나 악마는 별 위협이 되지 않는다는 듯 자신의 머리칼을 느리게 매만졌다.
“그대는 날 못 죽여. 알 텐데.”
“상관없네. 내가 살아온 인생 중, 승리가 필요하지 않은 유일한 전투거든.”
아랑곳하지 않으며, 황제가 망설임 없이 달려들었다.
***
몸에 상처가 하나씩 늘어갈 때마다 황제는 웃었다.
주마등처럼 스쳐 지나가는 과거를 반추하면서.
너무 일찌감치 별이 되어버린 황후, 로아나를 처음 만났던 그 날.
아르티나 공작과 함께 전쟁터를 달리던 그 밤.
갓 태어난 루드비히를 품에 안았던 그 아침.
일평생 제국을 위해 헌신했으나, 자신을 위한 선택은 단 하나도 하지 못한 황제. 하여 행복과는 동떨어진 삶을 살았다고 생각했으나…….
젊은 시절 잠시 곁을 내주었던, 그가 지키지 못했던 사람들과의 시간은 죽음을 목전에 둔 이 순간까지 반짝였다.
그리운 이의 얼굴이 점차 선명해진다.
쿵. 쿵. 심장이 서서히 느리게 뛰는 것이 느껴진다.
죽음에 대한 공포 따윈 없었다. 다만.
가슴을 베이며, 칼라일은 생각했다.
‘로아나. 나의 황후. 그대는 나를…… 용서해 줄까.’
목 언저리를 찔리며, 칼라일은 또 바랐다.
‘휴고. 언젠가 너와 다시 술잔을 부딪칠 날을 기다렸는데.’
이윽고 심장을 꿰뚫리는 순간.
황제는 고개 돌려 그의 아들을 바라봤다.
단 한시도 그의 자랑이 아닌 적 없었던.
‘사랑하는 내 아들아. 부디 좋은…… 아니, 행복한 황제가 되길…….’
황제의 검은 처음부터 그곳만을 노렸다는 듯-.
환각의 권능을 내뿜는 발레포르의 손목에 닿아 있었다.
***
환각이 걷힌다.
분노 어린 악마의 포효와 함께, 루드비히가 멍한 눈을 깜박였다.
초점이 돌아오자 곧바로 보이는 건 입술을 깨문 채 눈물을 흘리는 카밀라.
“……뭐지?”
들려오는 대답은 없다. 이상하게 여긴 루드비히가 수하의 시선을 따라 고개를 돌렸다.
홍안이 크게 흔들린다. 믿을 수 없다는 듯 잔뜩 메마른 목소리가 목을 비집고 튀어나온다.
“폐하……?”
끔찍한 환각에서 깨어나니 마주하는 건 잔인한 현실이다.
“아버지-!”
르노아 대륙력, 1047년 5월 29일.
제9대 황제, 칼라일 레굴루스 에르카디아.
황궁 서문에서-.
전사(戰死).