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261화: 토끼야, 얘가 나 괴롭혀!
이 전장, 이미 여기저기 붉게 물든 대지 위에 어린 사령관의 피도 덧씌워진다.
더럽다는 듯, 악마가 미간을 찌푸리고 말했다.
“정령왕은 돌려보내는 게 현명할 텐데. 아, 아니지.”
가마긴은 이 상황에서도 빛이 죽지 않는 푸른 눈을 응시했다. 파내고 싶다. 저 두려움 모르고 꼿꼿한 눈동자를.
“돌려보내면 네 일신의 힘으로 날 상대해야 하니 죽는 건 매한가지겠군.”
구릿빛 악마가 한 걸음 다가선다. 엘라임과 엔리르가 동시에 이벨리아의 앞을 막아섰다.
“계약자. 물러나 계십시오.”
“누나, 괜찮아?”
“……둘 다 호들갑 떨지 마. 나 괜찮으니까.”
사실 시야가 꽤 어지럽다. 눈 한번 꾹 감았다 뜨는 것으로 견뎌낸 이벨리아가 엘라임에게 물었다.
“엘라임. 저거 이길 수 있어?”
“가능합니다. 다만 계약자의 자연력이-.”
“그건 걱정 마. 어떻게든 버틸 테니까.”
여기서 저 악마를 막지 못하면 이 남문, 그리고 남문을 지키고 있는 기사들과 병사들은 모두 끝이다.
어린 사령관의 눈에 결의가 빼곡하게 들어찼다. 바라보며, 가마긴이 옅게 입매를 올렸다. 호의가 아닌 적의를 가득 담은 비웃음.
“어리석은 인간.”
“말 막 하네. 듣는 인간 기분 나쁘게.”
“나 하나 막으면 어떻게든 될 거라고 생각하나?”
“엉.”
“네 적이 나 하나라는 건 어디서 나온 안일한 생각이지?”
“……뭐?”
높게 묶은 말총머리가 바람에 흔들린다.
“내 이명은 혼주(魂主).”
“혼주……?”
“이 세계에 단 하나뿐인 권능이지.”
보란 듯, 구릿빛 악마가 입을 열어 빠르게 뭔가 중얼거렸다. 주문 같기도 주술 같기도 한 괴이한 언어였다.
휘도는 마기가 심상치 않다. 이벨리아가 엘라임에게 명해 창을 날렸으나, 악마는 그저 몸을 살짝 돌려 어깨로 받아낼 뿐이었다.
“마왕께서 날 총애하시는 이유를 알려줄까.”
뚫린 어깨를 아랑곳하지 않은 채, 가마긴이 탁, 두 손을 합장했다.
강령술의 완성과 함께 악마의 등 뒤에서 서서히 선명하게 모습을 드러내는 것은…….
“용…….”
이벨리아가 침음을 흘렸다.
본체 그대로의 흠결 없는 용이다. 심지어 붉은빛의 용.
육신은 이미 이 세계에 존재하지 않을 텐데, 혼백만으로 이 정도의 또렷함을 갖추는 것을 보아하니 새삼 저 악마의 지배력을 짐작할 수 있었다.
“난 죽은 것의 혼을 다룬다. 생전과 거의 유사하게.”
감히 그 어떤 악마도, 어떤 연금술사도, 심지어 신조차도 할 수 없는 일이지.
“연금술사들의 말에 따르면, 이건 세계에 남은 마지막 용이었다고 하더군.”
“……!”
이벨리아가 자신도 모르게 황급히 엔리르를 돌아봤다.
아니나 다를까.
어미를 잃고 홀로 성년이 되어버린 용은 세상이 무너진 표정으로 서 있었다.
이내 망연자실 내뱉는 목소리엔 심연보다 깊은 비통함이 서려 있었다.
“엄마……?”
***
악마에겐 그 비탄이 닿진 않은 듯했다.
가마긴은 자신이 강령한 용을 만족스럽게 바라보며 말을 이었다.
“가장 처치하기 곤란한 용이었다고 하던가.”
“…….”
“나중에 보니 알을 지키고 있었다더군. 이 가련한 혼백은 알고 있으려나. 그리도 지키려 했던 자기 새끼 역시 실험체가 되어 죽어버렸다는 것을.”
“이 개자식…….”
재밌다는 듯 악마가 큭큭 웃었다.
“혼령이 오랜 시간 피안의 경계를 돌면 돌수록 생전의 기억은 점점 마모되어 가지. 특히 그 혼이 새로운 생을 허가받았다면, 이전 생의 혼은 그저 잔재처럼 남는 거야.”
“…….”
“그렇다고 해도 마지막 용의 존재력이 어디 가는 건 아니지. 육신이 있을 때보단 조금 덜하겠지만.”
“더러운 권능이로군.”
“대단한 권능이지. 이 용을 넘지 않으면 네 검은 내게 닿지 않아, 아르티나.”
악마가 엄지와 중지를 맞부딪쳐 튕겼다.
이를 신호로 받아들인 용이 피막을 찢고 창공으로 날아올랐다.
- 크아아아아아!
텅 비어버린 눈으로 내지르는 포효. 날갯짓이 일으키는 바람은 광풍이 되어 지상을 휩쓸었다.
이벨리아는 여전히 떨고 있는 엔리르의 눈을 한 손으로 가렸다.
“눈 감아. 보지 마.”
“누나…….”
“네 어머니는 네가 그 동굴에서 봤던 일기 속에 있어. 너도 봤잖아. 저건 그저 의미 없는 잔재에 불과해.”
엔리르가 더듬더듬 손을 올려 자신의 눈을 덮은 다정한 손을 붙잡았다.
벌벌 떨리던 손이 멈춘다. 늘 그랬듯, 한계 없는 위안이 밀려든다.
“물러나 있어. 여긴 내가 처리할 테니까.”
“…….”
이벨리아가 이젠 자신보다 훨씬 커다래진 동생을 한번 꽉 끌어안았다 놓으며 씩 웃었다.
“아르티나 남매를 건드리면 엿 된다는 걸 보여줘야지.”
“……맞아.”
툭툭, 엔리르의 어깨를 두드리고 앞으로 나선 이벨리아가 용의 포효를 온몸으로 받아냈다.
“다시 안식으로 돌려보내 줄게. 덤벼.”
조그만 인간이 눈앞에서 재잘대자 분개한 용이 날개를 한번 크게 휘저었다.
그러자 불과 몇 초 뒤.
대기권을 통과하며 불이 붙은 운석이 창공에서 지상으로 내리친다.
7계급 소환 마법.
유성우(meteoric shower).
이벨리아가 경악하여 입을 벌렸다.
“덤비라고 했다고 냅다 운석을 떨궈?”
아무리 용이라지만 정도가 없네, 진짜!
마찬가지로 상식 밖의 힘을 다루는 이벨리아가 엘라임의 힘을 이용해 두터운 물의 방패를 만들어 둘렀다.
맞부딪치자 그대로 열기가 죽은 운석이 데구루루 지상으로 굴러 쿵, 크레이터를 남긴다.
마법이 제대로 먹히지 않자 용이 언짢은 듯 크게 아가리를 벌렸다.
그 사이로 용 특유의 존재력을 가득 그러모은 숨결, 소위 브레스가 모인다.
“성질이 우리 엔리르를 똑 닮으셨네.”
우리 애도 틈만 나면 브레스를 퐁퐁 쏴대는데.
전조만으로도 전장을 휩쓰는 강풍. 이벨리아가 대항하기 위한 자연력을 일으켰다.
흘끗 시선을 돌리니 이 사달을 만든 악마는 돌에 기대 한가롭게 구경이나 하고 있었다.
‘최소한 잔디 급인 거 같은데. 저걸 상대할 힘은 남겨둬야-.'
그때. 다른 생각은 허용하지 않겠다는 듯 용의 입에서 뜨거운 숨결이 뿜어져 나왔다. 붉은빛을 띤 용이니만큼 다루는 것은 불.
상대가 불이라면 차라리 쉽다. 여기엔 이 세계 물의 근원이 있으니까.
이벨리아가 엘라임에게 명해 저 불을 뒤덮을 정도의 바다를 구현하려던 찰나.
- 쐐애애애액.
옆구리 쪽으로 창 하나가 쇄도했다.
엔리르가 곧바로 달려들어 쳐냈으나 워낙 빠른 속도로 날아왔던 터라 궤도를 크게 틀기는 어려웠다.
창날이 이벨리아의 옆구리를 조금 뜯고 지나간다.
“……!”
잠시 눈앞이 아찔해질 정도의 고통. 그럼에도 이벨리아는 살짝 미간을 찌푸릴 뿐 더 티 내진 않았다.
‘저 용은 내가 처리해야 해. 엔리르에게 이 부담을 지울 순 없어.’
가족이 저 꼴로 불려 나온 것을 본 것만으로도 큰 상처일 텐데.
‘얼른 저 브레스부터 막아야…….’
이벨리아는 대충 옆구리를 짚은 채 시선을 들었다. 그러자 어느새 자신의 앞을 가로막고 있는 넓은 등.
“……엔리르?”
함께 자라 이젠 어엿한 성년이 된 동생이 고개 돌려 말했다. 단 한 번도 들어본 적 없는 분노한 음성으로.
“누나.”
“엔리르, 여긴 내가-.”
“형아들이랑 누나는 항상 날 어린 애처럼 봐서 문제야.”
“……?”
“아르티나의 명예 막내, 이제 다 컸어.”
당신 하나쯤은 충분히 지킬 수 있다고.
촘촘한 근육으로 덮인 몸에서 거대한 존재력이 뿜어져 나온다.
태양처럼 붉고 밝은 광휘가 한번 휩쓸자 이내 자리한 건-.
“누나, 내 은인.”
이 세계, 현존하는 유일한 용.
“내 가족은 이 땅에 있어.”
그저 있는 것만으로도 세계에 힘을 행사한다고 하여 칭하길, 존재력.
“그래서 나는 저걸 봐도 아무렇지 않아.”
엔리르가 날개를 펴 허공으로 날아올랐다.
황궁 남문 위 창공.
두 마리의 용이 서로 대치한다.
“넌 엄마의 껍데기일 뿐이야.”
- …….
“……사라져.”
이제 막 성체가 된 어린 용은, 그리도 그리워하던 그림자에게 망설임 없이 달려들었다.
***
가마긴은 늘어지게 기대고 있던 몸을 벌떡 일으켰다.
“……용? 용이 남아 있었다고?”
믿을 수가 없어 눈을 비벼보았으나, 창공이 자신의 영역인 양 헤집어대는 저것은 용이 틀림없다.
키메라 따위가 아닌, 불러낸 혼 따위가 아닌, 완전하고도 무결한 용.
“하필 공녀의 곁에……, 하, 기가 막힌 우연이로군.”
다 닳은 혼만 남은 용이라고 하더라도 웬만한 왕국 하나는 쓸어버릴 수 있을 정도지만, 현존하는 용에 비하자면 아무래도 밀릴 수밖에 없는 것이 사실이다.
힘이란 본디 육체와 영혼의 합으로써 발현되는 것이니까.
쯧, 아쉽다는 듯 혀를 차는 가마긴의 앞으로 물로 빚은 창이 쇄도했다.
“허접한 공격이군.”
옅게 고개 돌려 피했으나.
“……!”
정령사의 의지를 따르는 창은 기어코 가마긴의 목젖을 스치고 지나갔다.
악마가 피 흐르는 목을 손으로 대강 훑으며 이벨리아를 응시했다.
“든든한 지원군이 있다고 기고만장해진 모양인데. 내 앞에서 바로 설 수나 있나?”
“…….”
“지금도 입에서 피가 줄줄 새는군. 힘을 쓰려고 마음먹는 순간, 네 몸은 폭사할 거다.”
“혹시 입 나불대는 걸로 일등 먹어서 고위 악마가 됐어?”
“뭐, 그럭저럭 장관이긴 하겠군. 시체조차 남지 않는 죽음. 잘 어울려.”
“혹시 헛된 상상하는 걸로 일등 먹어서 고위 악마가 됐어?”
“……그 입이 네 명을 재촉하겠군.”
같잖은 협박에 이벨리아가 픽 웃었다.
“야. 네가 인간을 너무 우습게 보는데.”
“……?”
“인간은 말이야, 의지 하나로 이 땅에 살아남은 종족이야.”
서서히 기세를 일으킨 대정령사의 자연력이 가마긴의 마기를 짓눌렀다.
동시에 울컥 뱉어지는 검붉은 피. 손등으로 쓸어내며, 수도에 유일하게 남은 아르티나가 사냥 직전의 짐승처럼 몸을 낮췄다.
“내가 죽더라도 너는 데리고 간다.”
우리 용용이 눈에 눈물 나게 한 값으로.
***
가마긴이 이벨리아의 몸통만 한 대검을 휘둘렀다.
엘라임이 본능적으로 막아내자 다시금 이벨리아의 잇새에서 피가 흐른다.
엘라임은 입술을 짓씹었다. 계약은 양날의 검. 한계 없는 힘을 제공하는 대신 위험 부담도 함께 진다. 그가 피를 토하는 심정으로 말했다.
“계약자. 그 악마 녀석을 부르는 게 어떻겠습니까?”
“지금 못 오는 상황이야.”
“그 자식에게 그런 상황은 없을 텐데요.”
“정확히 말하자면 내가 못 부르는 상황이지. 동문엔 배치된 기사들이 현저히 적어. 아스 능력 하나 믿고 분병한 거라, 걔가 빠지면 전멸이야.”
“하지만…….”
“사령관이 돼서 나 살자고 다른 기사들을 모두 죽일 순 없잖아. 버틸 수 있는 데까진 내가 버텨봐야지.”
창공에선 여전히 굉음과 함께 강풍이 분다. 이벨리아가 위를 슬쩍 올려다봤다.
엔리르가 입을 벌려 용의 등을 물어뜯자, 용이 고통스러운 비명을 지르며 꼬리를 휘두르고 있었다.
단단한 비늘 덮인 엔리르의 몸에도 하나둘 상처가 늘어간다.
“……이 악마를 빨리 없애야 해. 그래야 저 싸움도 끝나.”
이벨리아가 엘라임을 바라보며 청했다.
“함께 싸워줘.”
“자연력의 충돌. 괜찮겠습니까.”
“견뎌봐야지.”
그게 내가 누리고 살아온 것들의 무게니까.
이벨리아가 허공에 손을 뻗었다.
그러자 대기를 휘돌던 물이 일제히 빨려들어 날카로운 창의 형태를 빚었다. 바라보던 가마긴이 고개를 기울였다.
“정령사가 자연 그 자체를 다룰 수도 있었나?”
“난 특별해서.”
“……보아하니 그 힘은 지배력과의 충돌도 일어나지 않는 모양이로군.”
“네 왕을 잡기 위한 비장의 무기였는데. 영광으로 생각해.”
“……역시.”
이 인간은 반드시 여기서 죽여야 한다.
대악마가 지닌 지배력이 남김없이 이벨리아에게 쏟아 부어졌다.
***
엔리르는 최대한 생각을 자제하고자 노력했다.
상황을 인지하기 시작하면 걷잡을 수 없이 무너질 것만 같아서.
눈앞의 용은, 그러니까 한때 자신의 어머니였던 용은, 자신의 상대가 되진 않았다.
아무래도 죽은 지 제법 오래되어 혼이 닳고 육신도 잃었으니까.
그러나 이를 세우고, 마법을 난사하고, 브레스를 내뿜고, 꼬리를 휘두를 때마다 일기장에 적혀 있던 문장 하나하나가 생각나서…… 밤새 읽고 또 읽었던 그 다정한 조언들이 떠올라서…….
엔리르는 차마 결정적인 타격을 가할 수가 없었다.
“……혹시 내 말 들려?”
- 크르르르르.
“……나 엔리르인데.”
- 그아아아아!
아무렇지 않다 큰소리쳤던 용의 눈에선 연신 눈물이 흘렀다.
“……용은 위대하잖아. 그러니까 듣고 있다고 믿을래.”
엔리르가 날카로운 발톱을 세워 몸부림치는 혼을 붙잡았다.
“있잖아, 엄마. 나 좋은 가족들을 만났어. 사랑하는 인간들이 생겼어. 친구들도 사귀었어. 하나는 악마고 하나는 황태자여서 성격은 다들 더럽지만, 그래도 소중한 친구야. 아, 이젠 보라색 제자도 있어.”
- 크아아아아!
“……나를 이 세상에 남겨줘서 고마워.”
나는 이곳에서 정말 행복해.
그러니까 엄마도 그곳에서, 어쩌면 내세에서, 부디 편안한 안식을 취하기를.
엔리르가 날카로운 이빨을 용의 목덜미에 깊이 박아 넣으려던 찰나였다.
모자의 연을 스스로 잔인하게 끝맺기 직전. 혼이 산개하여 흩어졌다.
“……!”
설마. 엔리르가 지상을 내려다봤다.
“아…….”
악마의 목에 기어코 창을 꽂아 넣은 은인이, 피투성이가 된 채로…… 어김없이 자신을 구하고 괜찮냐 묻고 있었다.
***
“허억. 허억.”
창을 조금 더 깊게 찔러 넣으며, 이벨리아는 거친 숨을 몰아쉬었다.
몸이 온통 엉망진창이다.
자연력과 지배력의 충돌을 견디면서 엘라임을 불러낸 데다가, 직접 창을 빚어 육탄전까지 벌였으니 멀쩡한 것이 외려 이상할 터였다.
힘이 빠져 손이 바르르 떨리자 엘라임이 계약자의 손을 덮어 창을 함께 쥐었다.
“계약자. 악마의 목은 제대로 베는 것이 좋습니다.”
“……그렇지.”
“제가 할까요?”
“아니. 내가 할게.”
이벨리아가 악마의 목을 찌른 창을 없애고 허리춤에서 검을 뽑아들었다.
점멸하는 눈으로 가마긴이 증오를 내뱉었다.
“빌어먹을 아르티나. 결국 네가 모든 것을…….”
“말했지. 인간은 근성이라고.”
황금 용이 음각된 검이 가마긴의 목을 베고 지나간다.
이벨리아는 바닥에 떨어진 악마의 목을 한 손에 높이 들어 올렸다.
만신창이로 얻어낸 승리였다.
***
하늘까지 뻗치는 기사들의 함성이 채 멈추기도 전.
승리를 만끽하던 이벨리아는 반파된 성문을 통해 걸어 들어오는 인영을 보고 으득 이를 갈았다.
“악마들은 상도덕이 없어? 차례로 이러기야?”
부드러운 원단으로 만든 장포가 바닥에 쓸리며 옅은 먼지를 일으켰다.
흡사 미끄러지듯 유려하게 걷던 마왕은 익숙한 몸뚱어리 앞에서 걸음을 멈췄다.
“……이런. 내가 아끼던 수하가 죽었군.”
“정당방위야.”
“널 죽이려 했나?”
“내 꼴을 보면 몰라?”
“내 명을 어겼구나, 가마긴.”
어차피 돌아왔어도 내 손에 죽었을 테니 크게 억울하지는 않기를 바라마.
마왕이 진심으로 애도한다는 듯, 나긋하게 몸을 낮춰 목 잘린 가마긴의 육신을 쓰다듬었다.
“수하의 수급은 내가 수습할 수 있도록 해주지 않겠나?”
이벨리아가 가마긴의 머리를 휙 던졌다.
받아든 마왕이 여전히 부릅떠져 있는 눈을 감겨주었다.
잠시 수하의 얼굴을 내려다보던 마왕은 이를 몸 위에 내려두고 입을 열었다.
“이벨리아.”
“…….”
“전쟁은 막바지다.”
“승리도 목전이지.”
“그 꼴로는 패배가 목전이라 봄이 옳겠지.”
마왕이 손을 뻗었다. 이벨리아의 뺨에 닿을 듯 말 듯 아슬아슬하게.
엘라임과 엔리르가 막아서려 했으나, 이벨리아가 눈짓으로 만류했다.
“내게 오렴, 이벨리아.”
“그 헛소리는 아직도 안 끝났어?”
“마지막 회유란다. 네겐 마지막 기회일 테고.”
“답은 예전에 했던 걸로 아는데.”
“번복의 여지는?”
“추호도 없어.”
“……아쉽군. 참으로 아쉬워.”
마왕의 손이 이벨리아의 볼에 살짝 닿았다가 떨어졌다.
한 걸음 물러선 그가 커다란 손으로 눈가를 가렸다. 비단으로 만든 장포가 사각거리며 특유의 소리를 낸다.
손 틈 사이 탐오에 젖은 눈이 이벨리아를 응시했다.
“그렇다면 어쩔 수 없지.”
“드디어 포기하네.”
“사지를 잘라서라도 데려가는 수밖에.”
“……!”
으아악 토끼야!
얘가 나 괴롭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