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260화: 어엿한 사령관, 이벨리아
“회색 머리? 내가 잡는다!”
로노베가 채찍을 휘둘러 앞을 가로막는 마족들을 일거에 가르며 달려나갔다.
“총애……. 그걸 받으면 호칭도 바꿔주시겠지.”
바르바토스는 애용하는 무기인 은빛 장총을 견착하고, 겁도 없이 자신을 향해 달려오는 마족의 미간을 조준한 뒤 방아쇠를 당겼다.
타앙.
발포음과 함께 터져나가는 건 마족 하나가 아니라 일대 전체.
두 고위 악마가 난동 부리며 지나간 길이 불모지처럼 휑하게 뚫렸다.
그 길을 따라 동부의 마족들도 허겁지겁 달리기 시작했다.
“먼저 찾는 게 임자다!”
“잡으면 바로 출세다!”
“운 좋게 내가 잡으면 나도 왕과 주군의 총애를 받는…… 집사가 되는 건가?”
총애라니. 이 얼마나 달콤한 현상금인가!
특히 왕의 총애를 받으면 주군의 총애가 별책부록처럼 따라온다는 건 모두가 아는 사실이다. 그야말로 은혜로운 1+1.
짐승 같은 직감으로 황궁 안쪽을 향해 달리던 동부의 악마들과 마족들은 저 멀리 후방에서 펄쩍펄쩍 날뛰고 있는 거대한 사자를 보며 쯧쯧 혀를 찼다.
“측은한 멍청이 같으니라고.”
“이런 호재를 놓치고 저기서 혼자 개고생하고 있네.”
“마르바스님은 왕의 총애에 관심이 없으신가?”
“관심 많으실걸. 그냥 조금…… 모자라실 뿐.”
아마 지금 이 시각. 분홍빛 미래를 꿈꾸며 들뜬 세레스는 짐작도 못 하고 있을 것이었다.
손속 잔인하기로는 둘째가라면 서러운 동부의 악마들이 자기 하나 잡겠다고 황궁을 이 잡듯 뒤지고 있음을.
***
“단순하기도 해라, 내 부하들.”
뜬구름 같은 현상금에 혹해서 발바닥에 불이 나게 뛰어가네.
여하간 무려 고위 악마 둘을 비롯한 마족들이 눈을 번뜩이며 달려갔으니, 괘씸한 매국노를 찾아 끌고 오는 건 일도 아닐 터다.
악마들의 천성이 본디 자비 없는 만큼 제법 험한 꼴을 당하겠으나 그건 이벨리아가 알 바 아니었다.
어차피 살려둘 생각은 추호도 없으니까.
그렇게 동부의 악마와 마족들을 보낸 뒤 기사들을 이끌고 남쪽 성벽에 도착한 이벨리아는 입을 떡 벌렸다.
“……멀리서 볼 때랑은 차원이 다르네.”
세레스가 열어버린 성문이 바로 이곳 남문이었기에, 짓쳐 드는 공세는 사방위의 다른 성벽과는 결이 달랐다.
이젠 흔적조차 찾을 수 없게 반파된 성문을 통해 물 들이닥치듯 쏟아지는 연금술사와 호문쿨루스들.
동시에 창공에서 쉼 없이 이를 드러내는 마족들.
대체 어디부터 막아야 하지? 사고가 잠시 정지한 찰나.
“적이 성벽을 기어 올라옵니다!”
“……!”
기사의 외침이 멍해진 정신을 일깨웠다. 성문과 창공이 뚫린 상황에서 성벽 위까지 난전으로 번져선 곤란하다.
고개를 흔들며 정신을 다잡은 이벨리아가 노대 밖으로 고개를 내밀었다. 그러자 지척에서 시선을 마주쳐오는 것은…….
“거, 거미……?”
새까맣게 번들거리는 여덟 개의 눈에 자신의 모습이 또렷하게 비친다. 그 정도로 가까운 거리.
“으아아악! 거미이!”
이벨리아가 빽 소리를 지르며 뒤로 크게 물러섰다.
만사에 겁이 많은 편은 아닌 이벨리아가 극도로 두려워하는 것을 꼽자면 바로 벌레. 그중에서도 특히 거미.
보통 거미보다 수백 배 확장된 크기로 털이 숭숭 난 다리를 십분 이용하여 타다다닥 성벽을 기어서 올라오고 있는 데다 그 수도 성벽을 온통 뒤덮을 정도로 빼곡하니…… 이벨리아로서는 환장할 노릇이었다.
“징그러워! 기사다안! 기사다안!”
태어나 처음으로 배웠던 호신술. 해결하지 못하는 일이 생기면 언제 어디서든 미친개를 불러라.
뒤에서 전투태세를 갖추고 있던 멍멍이들이 곧바로 이벨리아의 앞을 막아서며 소리쳤다.
“이런, 거미다!”
“우리 아가씨는 전투에서 열외다!”
“예에? 아가씨께서 빠지시면 저희끼리 어떻게……!”
“닥쳐라, 솜털! 우리 아가씨는 어릴 적 정원에서 노시다가 거미 떼에 둘러싸여 기절하신 전적이 있단 말이다!”
“저만큼 거대한 거미였습니까?”
“당시의 아가씨만큼 거대했지!”
사실 손톱만 한 새끼 거미였으나 중견 기사들의 눈엔 아가 이벨리아나 새끼 거미나 밥풀만 하긴 그게 그거였다.
이벨리아의 트라우마를 잘 알고 있는 기사들이 성벽 위를 속속 기어 올라오는 거미들을 향해 창을 내리찍기 시작한 그때.
휘청이던 이벨리아는 옆에 있던 기사의 팔뚝을 짚고 가까스로 중심을 잡았다.
이 와중에도 얼굴 붉히는 소년 기사를 향해 다른 이들의 날카로운 시선이 날아들었다.
“으으, 악독한 것들…… 만들어도 이딴 키메라를 만들어내다니.”
“그러게 말입니다, 아가씨.”
“내가 거미를 무서워한다는 걸 알고서 만든 게 분명해.”
물론 아니었지만, 이벨리아에게 이건 정확히 자신을 겨냥한 선전포고 그 이상도 이하도 아니었다.
이벨리아는 앞을 가로막은 기사들을 헤치고 전방으로 나아갔다.
“아가씨, 저희가 하겠습니다.”
“됐어. 그렇게 하나씩 찔러 죽여서 언제 다 처리해.”
어느새 성벽 끄트머리에서 징그러운 거미 다리들이 우글대는 게 보인다.
진저리 치며, 이벨리아가 자연력을 일으켰다.
“우웨엑, 일레스트!”
[와! 하루에 두 번! 아무래도 내 출세가 머지않은 모양인데!]
“성벽을 모두 얼려버려. 저 징그러운 것들이 타고 올라오지 못하게!”
[오, 거미네, 커다란 거미. 하나 잡아다 줄까, 계약자?]
“그러기만 해. 출세고 뭐고 아주 운디네보다 낮은 자리로 좌천시켜 버릴 테니까.”
[그럼 구워 먹게 다리라도 가져다줄까?]
“그날부터 넌 구정물의 정령이야.”
[……우리 왕께선 네 성질머리를 아시나 모르겠다.]
툴툴대며, 짙푸른 늑대가 허공을 한번 크게 박차고 성벽 위로 도약했다.
상급 정령이라는 고고함에 걸맞게 오시하는 눈빛. 마치 발길질이라도 하듯 두 앞다리를 들어 올리자.
- 쩌저저저적.
드넓은 남쪽 성벽 전체가 일제히 얼어붙는다.
이벨리아의 자연력이 적지 않게 빠져나갔다. 본디 물의 정령에게 그와 완전히 같다곤 할 수 없는 얼음을 다루게 하였으니.
그러나 그 대가로, 기어오르던 거미들은 성벽에 발 묶인 조형물이 되어버렸다.
흘끗 바라보던 이벨리아가 다시 한번 몸을 떨었다.
“야, 꼭 이렇게 생생하게 얼려버려야만 속이 시원했냐!”
[뭐야, 계약자. 거미가 무서워?]
“누나. 비켜봐. 내가 깨트려줄게.”
어디선가 커다란 돌을 들고 온 엔리르가 그것을 번쩍 들어 성벽 밖으로 굴리기 시작했다.
- 쨍그랑! 쨍그랑!
얼어붙은 거미들이 산산이 깨져 아래로 떨어진다.
수북하게 쌓인 잔해를 내려다보던 이벨리아가 작게 구역질했다.
“우욱, 전쟁 진짜 쉽지 않다.”
***
성벽 쪽은 해결 완료.
그러나 이곳에 정신을 쏟는 동안 성문 쪽은 상황이 더욱 심각해져 있었다.
성문을 지나 속속 안으로 들어오는 것은 푸른 피부의 호문쿨루스들.
주인인 연금술사가 지척에 있을수록 본연의 힘을 내는 병기들은 지금 이 전쟁에선 지극히 위협적이다.
잘 벼려진 손톱에 기사들의 갑옷이 그대로 찢겨나가고 피가 흩뿌려졌다. 성벽 위에서 바라보던 이벨리아가 이를 갈았다.
“저것들이 내 멍멍이를……!”
실프! 외치며 까마득한 성벽에서 훌쩍 뛰어내린 이벨리아는 소년 기사의 등을 노리던 호문쿨루스를 발로 차 떨어뜨렸다.
“아가씨!”
“정신 똑바로 차려! 호문쿨루스는 다섯이 짝을 지어 하나를 상대해라!”
수 없는 인간의 생명을 잡아먹고 태어난 만큼, 개체 하나하나의 실력은 아르티나의 상급 기사들에 비교해도 떨어지지 않는다.
그런 것 수백 개가 사방을 유린하는 것을 바라보자니, 과거 금제탑이 왜 자신들을 신과 동일시하였는지 알 법도 했다.
‘나한테도 제법 까다로워. 그나마 악마들의 지배력은 내 자연력과 상극이기라도 하지.
이것들한테 쓰는 자연력은 반쯤 그냥 흩어지는 기분이야.’
연금술이라는 것이 본디 세계의 법칙을 깨고 부수고 거스르는 것이니만큼, 세계에 기반을 둔 자연력이 그대로 다 먹힐 리가 없었다.
통상 장기전에선 체력을 잘 배분해야 한다곤 하나, 지금 큰 힘을 쓰는 건 이 지지부진한 전황을 새로운 국면으로 바꿔줄 열쇠가 될지도 모른다.
이벨리아는 주변을 둘러보았다.
일견 악마로 보이는 것이 저 창공에서 벼락을 내리치고 있기는 한데, 느껴지는 지배력을 보아하니 그다지 고위의 악마는 아닌 것 같다.
그렇다면…….
“엘라임.”
평소보다 자연력을 가득 담아 부른 맹약자.
계약 이래 가장 충만한 힘을 받은 세계 모든 물의 근원이 지상에 현현했다.
- 솨아아아아.
황궁 전역이 해저에 처박힌 것처럼, 혹은 거대한 해일에 휩쓸리기라도 한 것처럼 흠뻑 젖는다.
약간의 시간차를 두고, 수도 외곽 헤센 강의 수위가 아슬아슬하게 높아진다.
또 제국 끄트머리 티베레 해상의 물결까지 일제히 내륙으로 깊이 밀려들었다가 이내 제자리를 되찾는다.
말 그대로 제국 전역을 아우르는 짙은 생명력을 몰고온 엘라임이 호문쿨루스 두엇을 꿰뚫으며 자신의 맹약자를 흘끗 바라봤다.
“나의 계약자. 항상 사건 사고가 끊이질 않는군요.”
“대부분 내 잘못은 없다는 게 슬픈 점이지.”
“별 잡것들이 다 꼬이는 게 우리 계약자 잘못은 물론 아니지요.”
순리에서 어긋난 이런 것들은 보기만 해도 심히 불쾌하군요. 중얼거리며 엘라임이 고운 손을 들어 올렸다.
그러자 사방에서 넘실대며 밀려 들어온 대양이 호문쿨루스들을 흐름 속에 가둬버린다.
빠른 유속 안에서 시퍼런 병기들이 손톱과 검을 휘둘렀으나, 아무리 베어봤자 물속. 엘라임이 물었다.
“계약자. 저것들을 한 번에 없애려면 힘을 좀 써야 할 것 같은데 괜찮겠습니까?”
“써. 어차피 여길 타개하지 않으면 방법이 없으니까.”
“힘들면 바로 말씀하셔야 합니다.”
엘라임이 빙긋 웃으며 계약자의 머리를 쓰다듬었다.
이벨리아의 자연력이 대거 빠져나감과 동시, 빠르게 흐르던 물 사이 일부가 얼어붙더니 이리저리 휩쓸리고 있는 호문쿨루스들을 갈가리 찢어냈다.
“끝났습니다. 괜찮으십니까?”
“힘들면 말하라며. 말할 틈도 없이 왕창 가져다 써버렸네!”
맹약자의 투덜거림에 엘라임이 어쩔 줄 모르고 이벨리아의 볼을 감싸 쥐었다.
“이런. 차라리 한 번에 끝내는 게 덜 힘들 것 같아서 그랬는데. 어지럽습니까? 속이 울렁거려요? 눈앞이 흐릿합니까? 응?”
“그럭저럭 괜찮으니까 볼 좀 놔.”
“하지만 우리 계약자 말랑말랑 볼따구가 파랗게 질렸는데…….”
“배고파서 그래. 전쟁 끝나면 물고기나 왕창 잡아다 주든지.”
“물론입니다. 바닷속을 텅텅 비워 우리 계약자 앞에 바치도록 하지요.”
낚싯대 정도의 취급에도 엘라임은 마냥 웃으며 유일한 맹약자의 머리칼을 매만졌다.
눈앞이 조금 흐릿하다. 이벨리아는 엘라임의 팔을 붙잡은 채 사방을 둘러보았다.
무리한 보람이 있는지, 확실히 기사들의 숨통이 트인 게 보인다.
성벽과 성문 앞을 어느 정도 정리하였으니, 이제 남은 것들을 처리하는 데는 큰 무리 없을 터.
“남은 적을 섬멸해라! 승리가 코앞이다!”
인간이라고 정의하기엔 아득한 힘을 다루는 사령관을 향해 기사들과 병사들은 숫제 신을 영접하는 듯한 눈빛을 보냈다.
사기가 제대로 오른 기사들이 흩어지려던 그때.
“아주 엉망이로군.”
부유하는 대기를 억지로 잡아 짓누르듯 음습한 목소리가 고요히 전장에 들어찼다.
“역겨운 냄새, 게다가 이 정령술. 아르티나의 잡것인가.”
터벅. 터벅. 황궁이 반파된 탓에 불규칙하게 쌓인 돌무더기를 밟으며 걸어오는 낯선 이. 이벨리아가 고개를 기울이며 물었다.
“누구?”
흡사 쓰레기를 보는 눈으로 이벨리아를 내려다보던 불청객이 후, 숨을 내뱉어 틀어막고 있던 기운 일부를 해방했다.
“……윽!”
격통. 이벨리아가 심장께를 짚으며 허리를 숙였다.
사내가 송곳니를 내보이며 비릿하게 웃었다.
“왜. 그 알량한 자연력이 날뛰어 고통스럽나?”
구릿빛 피부. 하나로 높이 묶은, 마치 말총같이 구불대는 머리칼.
제4악마, 가마긴(Gamygin).
이명, 혼주(魂主).
닳아 없어진 혼과 백을 다시금 이 지상에 불러낼 수 있는 강령술에 그 권능이 닿은, 지극히 특수한 능력의 악마.
대악마의 반열에 올라 있는 악마가 혐오스럽다는 눈빛으로 이벨리아를 쏘아보았다. 감히 저것이 왕의 관심을 앗아갔단 말이지.
‘왕께선 저것을 살려 데려오라 하셨으나 아무래도 불길하다.’
짐승 같은 악마의 직감이 경고를 보내고 있었다.
세계 어디서나 반복되는 역사는 말하고 있지 않은가. 현왕(賢王)의 눈을 흐리게 하는 여인을 멀리하라고.
‘설령 왕께서 나를 내치신다 하더라도 저건 여기서 죽여야만 해.'
가마긴은 가쁜 호흡을 몰아쉬고 있는 이벨리아를 머리부터 발끝까지 천천히 훑었다.
‘해치우기 어렵진 않겠어. 왕께서 오시기 전에 머리부터 날려야겠군.’
악마의 검은 눈이 언뜻 빛을 발했다. 그와 동시, 끝을 알 수 없는 지배력이 아지랑이처럼 피어올랐다.
심연처럼 짙은 마기가 항거할 수 없는 재해처럼 밀려와, 여전히 엘라임을 불러둠으로 인해 꼿꼿하게 날을 세우고 있던 이벨리아의 자연력과 그대로 충돌한다.
이 세계 속 가장 상극의 힘.
최상위의 자연력과 그에 비견할 지배력의 격돌.
“콜록……!”
이벨리아의 입에서 선혈이 울컥 뿜어져 땅을 적셨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