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258화: 인마전쟁, 개전
일행은 성벽으로 향하는 회랑을 걸었다.
시녀들과 시종들, 그리고 나름대로 사병을 이끌고 몰려든 귀족들이 뭔가 바라는 듯한 표정으로 그들을 바라봤다.
전쟁의 승패를 나누는 건 군세가 아닌 명장(名將)이다.
그런 만큼 그들의 활약에 따라 황궁 수성전, 더 나아가 이 제국의 명운이 결정될 터.
시선을 여유롭게 흘려보낸 이벨리아는 회랑 틈을 통해 하늘을 올려다보며 감탄을 내뱉었다.
“와, 균열 진짜 많다.”
“내가 가서 지울 수 있는데.”
“토끼는 힘을 아껴야 해. 분명 마왕도 올 거란 말이야.”
“그럼 누나, 내가 가서 불 뿜을까?”
“엔리르도 힘을 아껴야 해. 분명 연금술사들도 올 테니까.”
“그럼 제가 가서 닫을까요, 공녀님?”
“그거 좋다.”
“……저는 힘을 아낄 필요 없습니까?”
“동화책 공장 공장장은 안 아껴도 돼.”
“……예에.”
전략가의 냉정한 평가. 대마법사는 삽시간에 풀이 죽었다.
이벨리아가 킥킥 웃으며 이크리안의 어깨를 두드렸다.
“농담이야, 공장장. 저 정도 균열이면 우리 가족이 다 달라붙어도 어차피 못 막아. 나오는 것들을 처리하는 게 차라리 승산 있어.”
하늘을 채찍질한 듯 죽죽 그어진 붉은 실선들.
수의 한계가 어딘지 알 수 없는 이상 하나하나 닫는 데 심력을 소모하는 건 하수다.
이벨리아는 그저 발을 조금 더 빠르게 움직였다.
“근데 루이. 황궁 지하엔 비밀통로가 있다고 들었는데.”
“음. 황족들의 대피를 위해 만들어졌다고 들었다.”
“루이가 괜찮다면, 그거 개방하는 건 어때?”
“개방?”
“무력 없는 이들은 거기 최대한 숨기면 좋을 것 같은데.”
“좋은 생각이야.”
비밀통로는 대대로 황족을 위한 도피처다.
제국민 몇이 죽어 나가든 황족만 살아 있다면 제국은 부활할 수 있다는 일념으로 만들어진.
그러나 루드비히나 이벨리아나, 이 전쟁에서 이기지 못한다면 살아나갈 생각 따윈 없다.
그러니 오랜 시간 황족을 위해 존재해온 구명줄을 내어놓길 저어하지 않았다.
멈추지 않고 걸으며 이벨리아는 계속 새로운 안을 내놓았다.
“하르벤타에도 지원 요청을 보내자.”
“지원이 필요하겠어?”
“괜한 도박을 할 필요는 없잖아. 전쟁은 외줄 타기라 어느 쪽으로 기울지 모르니까.”
이벨리아의 안을 받아 적던 시종의 양피지가 한 장 가득 채워질 즈음. 이벨리아와 일행들은 성벽 위로 올라섰다.
긴장한 채로 전투를 대비하고 있던 기사들의 면면에 일제히 화색이 돈다.
이벨리아가 한쪽에 몰려 있는 아르티나 기사들의 어깨를 치며 말했다. 부러 가볍게.
“우리 멍멍이들. 황실 기사단이랑 싸우지 말고. 응?”
마찬가지로 루드비히 역시 황실 기사들을 바라보며 경고했다.
“아르티나 기사단 등에 칼 꽂지 마라.”
평소 주군의 명이라면 죽는 시늉이라도 하던 두 기사단은 오늘만큼은 대답 없이 헛기침만 흘렸다.
싸우다가 정 깔짝이면 별수 있나. 이참에 실수인 척 없애는 것도 방법이지.
침묵 속에서 뜻을 읽은 이벨리아가 절레절레 고개를 저었다.
1차 인마전쟁 때도 툭하면 서로 싸워댔다더니. 세대가 바뀐 지금도 다를 것 없나 보다.
이벨리아는 여장(女牆)을 짚고 하늘 위를 올려다보았다. 마치 단말마를 내지르듯 쨍하게 내리쬐는 햇살을 손으로 대강 가리면서.
“공장장 오라버니. 실드 가능하겠어?”
“절 뭐로 보시고.”
“오올. 역시 대마법사.”
“당연히 불가능하지요.”
“……엉?”
“저 하늘을 다 덮는 실드를 혼자 치라고요? 그건 대마법사가 아니라 대마법사 할아버지가 와도 불가능합니다.”
옆에서 인간형의 엔리르가 가슴을 활짝 폈다. 이크리안이 흘끗 보고 말을 이었다.
“뭐. 여기 누구는 가능하겠지만, 적어도 인간이라면 불가능합니다.”
“하지만 엔리르를 쓸 곳은 따로 있는걸!”
전쟁이 시작되는 순간, 전략가의 눈에 장수들은 체스판 위의 말이나 다름없다.
나름대로 적재적소에 효과적으로 투입할 것을 예정하고 있다는 소리다.
이를 잘 알고 있는 이크리안이 주변을 훑으며 대안을 내놓았다.
“혹시 몰라서 마탑 마법사, 황실 마법사, 카시스의 마법사들을 죄다 끌고 오긴 했습니다만…… 창공이 워낙 넓으니 조금 아슬아슬하긴 하겠군요.”
“역시 공장장은 일 처리가 빠릿빠릿해.”
“그 말씀, 전하 들으시도록 크게 한 번 더 부탁드립니다.”
곱게 눈을 접은 이크리안이 노대(弩臺) 위로 훌쩍 뛰어 올라갔다.
균열로 얼룩진 창공. 휘도는 강풍.
그 아래, 자타공인 대마법사의 마력이 흐른다.
“마법사.”
이크리안이 입을 열었다.
“우리의 데칼로그엔 이런 계율이 있지.”
세계 마나를 담은 소리는 크지 않되 널리 퍼진다.
“마법은 네게 굴레를 씌우지 않으매, 설 곳은 너 스스로 구하라.”
육성의 대답은 들려오지 않으나, 응답하는 마나가 술렁인다.
“설 곳이 여기가 아니라면 물러서라. 탓하지 않을 테니.”
사방의 성벽에서 모습을 드러낸 마법사들. 누구도 뒷걸음질 치지 않는다.
“그러나 존재를 이곳에 세우고자 한다면.”
우우우웅-. 이크리안의 연한 보랏빛 마나가 세계와 공명하며 기세를 넓힌다.
“계율에 따라, 오롯이 바로 서라.”
이내 언뜻 피어나는 금술 달린 방패.
6계급 보호 마법, 아이기스(Aegis).
찬란히 솟구친 방패가 하늘에 가닿아 점차 부피를 키운다.
대마법사의 실력 행사에 고조된 마법사들 역시 제각기 할 수 있는 한도 내에서 가장 단단한 방패를 띄워 올렸다.
이윽고 균열과 황궁 사이가 마력으로 빈틈없이 메워진다.
감히 뚫을 수 없을 것만 같이 견고하게.
기사들의 얼굴에 얼핏 희망이 비치던 것도 잠깐.
- 쿠우우웅.
- 쿠우우웅.
마족들이 그야말로 무식하게 방패를 들이받기 시작한다.
저 높은 하늘까지 날아올랐다가 그대로 가속하여 떨어지면서.
육신을 아끼지 않는 맹목. 수십의 몸이 방패에 부딪혀 터져나갔으나 멈출 기미는 없다.
계급 낮은 마법사들의 방패가 흔들리기 시작한다.
진동하고 금이 가더니…….
- 콰아아아앙!
굉음과 함께 방패 하나가 결국 부서져 산개한다.
파열음, 곧 전쟁의 서막을 알리는 포고였다.
2차 인마전쟁-.
개전(開戰).
***
이크리안이 곧바로 범위를 넓혀 막아냈으나, 그 짧은 틈을 비집고 쇄도하는 장창 하나.
이 방해의 주역이 누구인지 알고 있다는 듯 똑바로 이크리안을 향하고 있다.
이벨리아는 이크리안이 선 노대 위로 뛰어 올라갔다.
이내 창공에 닿을 것처럼 높이 솟구친 수벽(水壁).
땅에서 하늘로 역류하는 폭포가 거대한 장창을 집어삼킨다.
재차 굉음이 들려온다. 마법사들의 방패가 차례로 깨져나간다.
일제히 틈을 벌린 균열에서 까마득한 마족들이 쏟아져 나온다.
가장 앞서 떨어지는 건 2급 괴수종, 바실리스크(Basilisk).
단단한 비늘로 뒤덮인 거대한 뱀이 혀를 날름이며 독을 내뿜자 닿는 범위 내 모든 것이 매캐한 연기를 피우며 녹아내린다.
파충류 특유의 번들거리는 노란 눈이 희번덕 시선 돌리고, 마주친 이들이 석상으로 굳는다.
“으아아악!”
“누, 눈을 마주치지 마라!”
개전을 알리는 마족부터 평소 일반 기사들이 대하던 것과는 급이 다르다.
말 그대로 아비규환.
개중 경험 적은 기사들은 겨우 서 있는 것이 고작이었다.
이벨리아는 피아의 눈에 가장 띄는 노대 위에 자리를 지키며 끊임없이 물보라를 일으켰다.
바람처럼 전장을 휘도는 물은 족족 마족의 육신을 태웠다.
곁에서 일반 기사인 척 검을 휘두르던 엔리르가 이벨리아의 어깨를 톡톡 건드렸다.
“누나. 저 뱀 눈 보면 돌로 변한대. 보지 마.”
“저것들의 지배력이 내 자연력을 넘을 때의 얘기지. 저깟 건 별 위협도 안 돼.”
“응. 그런데 저 실드 곧 뚫리겠어.”
“어차피 우리 쪽에서 풀어버리려고 했어.”
“그럼 왜 마법사들한테 저거 시켰어?”
“밑에 제국민들 도망가고 있잖아.”
무력 없는 이들에게 도망칠 시간을 벌어주기 위해 무리를 해서라도 만들어낸 잠시의 틈이 제국민 수천의 목숨을 살렸다.
이벨리아가 성벽 아래를 두루 훑었다. 어느 정도 대피가 완료된 듯하다.
그렇다면 창공을 억지로 틀어막은 저 실드는 용도를 다했다.
“공장장 오라버니. 실드 풀어.”
“……지금요? 얼마나?”
“전부.”
“하하, 확실히 아르칸보다 과격하시네요.”
기실 이크리안으로서도 반가운 제안이었다.
어차피 이젠 오래 버티지 못하고 깨질 마법. 유지하는 것에 드는 마나가 아쉬운 시점이기 때문이다.
이크리안이 모든 마법사들에게 마법을 거둬들이라 명했다.
그와 동시. 이벨리아는 루드비히의 어깨를 짚었다.
“루이. 한마디 해.”
“……?”
“힘든 싸움이 될 테니까.”
이벨리아가 기사들을 턱짓했다.
검을 쥔 이들이 모두 루드비히를 바라보고 있다.
그들이 가닿지 못한 경지를 넘어선, 젊은 소년왕을.
루드비히는 자신이 사랑해온 수도로 잠시 시선을 돌렸다.
이제 평온했던 수도는 간데없다. 남은 건 잿더미와 불바다, 두 개의 선택지뿐.
하늘 위. 마법사들의 실드가 하나씩 옅어져 간다. 몇몇 기사들이 움찔 몸을 물렸다.
루드비히가 천천히 입을 열었다.
“두렵나.”
기사들이 애써 고개를 저었다.
“나는 두렵다.”
먹잇감을 찾은 마족들이 우짖는다.
“그대들을 잃을까 봐. 저 아래 도망치는 내 제국민을 잃을까 봐.”
거센 날갯짓으로 일으킨 바람이 광소를 터뜨린다.
“내 사지를 잃는 것보다, 내 목숨을 잃는 것보다, 그것이 두려워서…… 나는, 이 전쟁의 끝까지 이곳에 서 있을 것이다.”
“……!”
“그러니 부디 살아라. 살아서 이 이야기를 후세에 전하라. 그대들의 활로는-.”
루드비히가 황제로부터 하사받은 제왕검을 뽑아 하늘을 겨눴다.
“내가 뚫는다.”
함성은 없었다. 다만 들어차는 결의는 굳건했다.
일평생 홀로 외로운 길을 걷던 황태자의 뒤.
이젠 기사 모두 함께, 결연히 검을 치켜들었다.
마땅한 사지이나-.
단 일인의 이탈자도 없이.
***
‘잘 컸다. 내 친구.’
내게 솔방울 맞고 엉엉 울던 때가 얼마 전 같은데.
토벌 다녀와서 힘들었다며 품에 안겨 울던 때도 얼마 전 같은데.
‘이젠 완연한 군주가 되었네.’
알 수 없는 뿌듯함에 씩 웃고 있던 이벨리아도 허리춤에 차고 있던 검을 빼 들고 비장한 분위기에 가담했다.
빤히 응시하던 아가레스가 슬쩍 물었다.
“이브. 그 검은?”
“가져왔지. 장군의 허리엔 마땅히 검이 있어야 하는 법이니까.”
“……그걸로 아군 찌르면 안 된다.”
“토끼는 대체 날 뭐로 보는 거야?”
“주화입마.”
이벨리아가 입술을 삐죽였다.
반박할 새도 없이, 머리 위, 각양각색의 마족들이 쇄도한다.
이벨리아가 발을 탁 굴렀다. 그러자 일제히 형상을 갖추는 작은 물고기 여럿.
평소와 달리 매섭게 눈을 부라린 운디네가 꼬리를 칼날처럼 벼리고 적 사이를 훑고 지나갔다. 닿는 족족 마족들을 절단 내면서.
“공녀님, 위험하니 조금 뒤로……!”
“누굴 신경 써. 너희나 조심해.”
이벨리아를 걱정하던 기사는 운디네 하나가 자신의 뒤를 노리던 마족을 반으로 가르는 것을 보고 입을 다물었다.
갈라도 갈라도 끝도 없이 쏟아지는 마족. 마치 거대한 자루를 거꾸로 뒤엎은 것만 같다.
이벨리아가 앞으로 흘러내린 머리를 후 불어 올리며 투덜댔다.
“와. 지긋지긋하네. 이거.”
힘을 좀 쓰더라도 수를 줄여둘 필요가 있겠다.
“일레스트.”
동시에 엘라임을 부르는 것에 비하면 약소한 자연력이 빠져나간다. 이내 딛고 선 곳에 근원인 물이 몰아친다.
물길 사이 고개를 내민 갈기 풍성한 늑대가 눈을 반짝였다.
[나 출세하는 건가! 드디어!]
“한결같네.”
[전쟁터엔 늘 공적이 따르지! 내가 뭘 하면 출세시켜줄 텐가, 계약자!]
“마족들이 너무 바글바글해. 한번 싹 쓸자.”
[흐음. 냇물?]
“강물 정도는 되어야 할걸.”
[바다는?]
“그건 나중에 엘라임 불러서. 나도 자연력을 아껴둘 필요가 있거든.”
[좋아. 강물로 타협.]
늑대가 이를 드러내며 으르렁 우짖는다.
곧이어 넘실대는 건 우레와 같이 쏟아지는 강물. 막힌 둑이 터진 것처럼 일제히 흘러 마족들을 휘감는다.
“크아아아악!”
“빌어먹을! 정령사다!”
“정령사부터 죽여라! 저쪽 성벽 위에 있다!”
지배력과 자연력은 상극.
일으킨 강물에 맞닿은 마족들은 그대로 형체 없이 녹아 물의 일부로 화했다.
이벨리아가 강풍에 휘날리는 머리칼을 쓸어올리며 말했다.
“느그 왕이라도 데려오든가.”
***
한편 이벨리아로부터 약간 떨어진 곳.
엔리르는 휴고와 아르칸, 세드릭으로부터 배운 검술을 착실하게 시연하고 있었다.
누가 명예 아르티나 일가 아니랄까 봐, 제법 훌륭한 실력으로.
그리고 아가레스의 경우엔…….
“동부의 지배자가 미쳐 날뛴다!”
“저 무식한 마기에 닿으면 즉사다! 피해!”
마치 적을 농락하듯 검도 꺼내 들지 않은 채 전장을 걷고 있었다.
폭풍처럼 휘도는 마기로 주변 모든 마족을 일거에 없애면서.
모르는 이가 본다면 늘 보던 풍경으로 산책이라도 나온 것처럼 무료한 표정이다.
악마의 시선은 수시로 이벨리아를 향했다. 덩달아 마기 역시 시도 때도 없이 이벨리아 곁을 맴돌며 근처 마족들을 도륙했다.
창칼 난무하는 시끄러운 소음 속 이벨리아가 크게 외쳤다.
“아스! 이쪽으로 마기 안 보내도 돼! 내 적은 내가 잘 처리하고 있다고!”
“내 마기는 조절이 안 돼서.”
“조절이 안 되는 게 말이 돼, 대악마께서?”
“……네 앞에 서면 뭐라도 조절 안 돼.”
“뭐라고? 잘 안 들려!”
“아니야. 아무것도.”
아가레스는 실수인 척 자신을 향해 검을 휘두르는 엔리르를 발로 뻥 차며 답했다.
***
전황의 유의미한 흐름이 생기는 곳마다 루드비히와 이벨리아, 엔리르와 아가레스가 버티고 서 있으니, 황궁 수성전은 큰 밀림 없는 교착상태.
그렇게 약 한나절 정도 지난 시점이었다.
재애애애앵-.
재애애애앵-.
성벽 가장 끝, 적대(敵臺) 쪽에서 위급을 알리는 징 소리가 울린다.
두 번. 의미하는 건 성문에 적의 침공이 있다는 것.
분주히 전투를 이어나가던 기사들이 경악했다.
“성문?"
“저 균열에서 쏟아지는 게 끝이 아니었어?”
이벨리아는 노대 위로 훌쩍 뛰어올라 성벽 밖으로 고개를 내밀었다.
성문을 침공하고 있는 건 분명 연금술사들이겠지. 뭐, 딱히 예상하지 못했던 것도 아니…… 아니, 저게 뭐야?
“……이건 반칙이지.”
황궁 사방위의 성벽과 성문이 모두…….
“포위 수준이 아니잖아, 이건.”
말 그대로 흘린 과자 부스러기에 개미 떼가 모여든 형세다.
연금술사들과 호문쿨루스, 그리고 그들이 만들어낸 정체불명의 키메라들이 창공을 뒤덮은 마족들만큼 빼곡하게 지상을 점거하고 있었다.
격렬한 전투 중에도 흘끗 아래를 바라본 기사들의 얼굴에 일순 패색이 떠올랐다.
각 군을 이끄는 사령관급 장수들 역시 매한가지.
그러지 않을 수가 없었다. 군으로 타파할 수 있는 수적 열세에도 한계가 있는 법이다.
그 어떤 병법에서도, 그 어떤 전쟁서에서도, 이 정도 차이를 극복했다는 전례를 읽은 적 없다.
좋지 않은 예감.
이벨리아가 남문(南門) 방향으로 달려가며 외쳤다.
“수성은 공성보다 압도적으로 쉽다! 정신 차리고 성벽과 성문만 지키도록!”
그럼에도 잠시 굳은 기사들의 움직임이 좀 전 같지 않다. 기세에서 밀린 탓. 이벨리아가 부러 크게 소리쳤다.
“수성전 한두 번 해봐? 끓는 기름과 돌을 가져와라!”
정확한 지시를 내리자 그제야 기사들이 빠릿빠릿 움직이기 시작한다.
이벨리아가 기민한 눈으로 전황을 살폈다.
그래. 성벽에 끓는 기름을 뿌리든, 바위를 굴리든, 마법을 난사하든. 어쨌든 성벽을 타고 올라오는 것들과 성문을 두드리는 것들만 막으면 그만이다.
창공에서 끝없이 몰려오는 마족들이 위협적이긴 했으나, 이 정도 실력자들이라면 견제하지 못할 것도 아니니까.
“성문만 지켜! 성문만 지키면 황궁은 무너지지 않는다!”
“성문을 지켜라!”
“성문이 열리면 끝장이다!”
하늘에서 쇄도하는 것들을 막아내며 동시에 연금술사들의 저 대군까지 한 번에 상대할 순 없다.
성벽과 성문의 사수가 전쟁의 승패를 가른다는 것을, 이곳 모두가 인지하고 있었다.
균열에서 떨어지는 마족들을 처리하기 위한 중앙군을 제외하고 나머지 군이 일사불란하게, 또 필사적으로 사방위의 성문 쪽으로 달려가던 그때.
- 끼이이이이.
“……어?”
제국의 기사들에겐 사형선고나 다름없는 소리를 내며…….
성문이 열렸다.
***
아직 공격 한번 받지 않은 성문이.
마치 투항이라도 하는 것처럼 부드럽게 열린다.
이벨리아의 등허리에 소름이 내달린다.
“안 돼…….”
이건 위험하다.
유리하던 수성전에서 압도적으로 불리한 난투전으로.
“대체 성문이 왜……!”
까닭을 알 수 없어 크게 뜨인 바다 빛 눈에-.
저 아래 성문 뒤로 후다닥 도망치는 잿빛 머리칼이 보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