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257화: 우리 사이에 선이 더 필요해?
이벨리아는 쪽지를 가져온 전서구를 어깨에 얹고 응접실로 내려갔다.
아직 전서를 건네지 못한 새들이 뒤뚱뒤뚱 이벨리아의 뒤를 따라 걸었다.
도무지 끝나지 않는 아침 식사에 잔뜩 심통이 나서 앞발 사이에 얼굴을 파묻고 있던 엔리르가 번쩍 고개 들고는 마치 자기 마음을 알아달라는 것처럼 우다다 달려가 새들을 날려버렸다.
괜히 전서구에게 화풀이를 한 용은 앞발을 땅에서 떼고 주먹질하는 자세를 취한 다음 아가레스의 앞에서 털을 부풀렸다.
“내 누나랑 뭐 했어.”
“밥 먹었다.”
“왜 이렇게 오래 먹었어.”
“먹여주느라.”
“먹여줬다고? 네가 누나를?”
“이브도 나를.”
“누나가 너를? 밥을 먹여줘?”
“빵을 입에 넣어줬지.”
“너어, 너어, 너어어……!”
용의 주둥이 속, 심상치 않은 빛이 번뜩인다.
“너 내가 진짜 가만 안 둬!”
“가상하군.”
“네가 내 본체를 못 봐서 그렇게 기고만장한가 본데!”
“있어도 기억 안 난다. 하찮아서.”
“이익, 누나보다 더한 재앙의 조동아리……!”
엔리르가 솜방망이를 아가레스 쪽으로 쭉쭉 뻗었다. 단단한 다리에 먹여지는 원투펀치.
가소롭다는 듯 웃은 아가레스는 발로 엔리르를 주욱 밀어 구석에 처박아버렸다.
도무지 긴장감 없는 용과 악마를 향해 경고의 눈길을 보내며, 이벨리아는 오와 열을 갖춰 모인 사용인들을 향해 담담히 말했다.
“황궁이 위험해.”
“……!”
“이미 짐작했던 일이었어. 지키고자 내가 수도에 남았고.”
사용인들의 얼굴이 일제히 일그러진다. 꼭 금방이라도 울음을 터뜨릴 것처럼.
누군가 들릴 듯 말 듯 중얼거렸다.
“아가씨…… 가지 마십시오.”
그 말이 물꼬를 텄는지, 다른 사용인들 역시 한마디씩 얹기 시작했다.
“저희와 함께 이곳에 계셔 주세요.”
“아가씨께선 황궁보다 공작저를 우선해 지키셔야지요.”
“황궁이 위험하다면…… 다들 아가씨를 붙잡고 구해달라 애원할 텐데.”
“애원은 무슨 애원! 강요겠지! 나가서 싸우라고 아가씨 등을 떠밀어대겠지!”
“황실부터 귀족들까지 죄다 나서서 우리 아가씨 소맷자락 붙잡을 것이 뻔히 보이는데!”
사용인들의 언성이 높아져 간다.
아르티나의 품에 있기에 그 누구보다 아르티나의 무게를 잘 아는 이들.
제국민이란 정체성보다 아르티나에 대한 충성심이 더욱 높은 자들.
그들에겐 제국의 위기 때마다 주인 일가가 앞장서는 것도, 심지어 이번엔 그들이 자식처럼 길러온 어린 아가씨가 떠밀리듯 사지로 나간다는 것도 마음에 들지 않는 일임은 자명했다.
분개하여 제각기 소리치는 이들을 가만히 바라보던 이벨리아가 입을 열었다.
“혹시 기억나?”
사용인들이 일말의 희망을 담은 눈으로 그들의 주인을 올려다봤다.
옅게 웃은 이벨리아가 등 뒤에 있는 소파를 가리켰다.
“예전에 나, 저 위에 올라가서 이제 날 대장이라고 부르라며 검을 치켜들었었대. 나는 잘 기억이 안 나지만 말이야.”
그때를 기억하는 몇몇 사용인들이 희미하게 미소 지었다.
이벨리아는 시선 돌려 벽장 안의 목검을 가리켰다.
“내가 처음으로 아빠에게 선물 받은 목검이야. 저걸 들고 수련하러 나갔는데 알렉이 어찌나 웃어대던지.”
지금도 별반 달라진 것 없지만. 작게 덧붙인 이벨리아가 맞은편 벽을 바라봤다.
“저기 남은 건 나랑 작은 오라버니가 암살자가 되겠다며 던졌던 단검의 흔적이야. 카론이 둘 다 영 소질 없다고 하는 바람에 그만뒀지.”
이번엔 몸을 돌려 주방으로 들어가는 길의 벽을 턱짓한다.
“카론은 매일 아침 저기서 내 키를 재줬어. 열일곱 살 생일이 지난 뒤엔 더는 재지 않았지만.”
사용인들은 가만히 시선을 옮기며 이 어린 주인의 자취를 함께 훑었다.
잠시의 침묵 뒤.
이벨리아가 말을 이었다.
“난 이곳에서 아르티나로 자랐어.”
“…….”
“제국을 수호하겠다는 사명보다는 내 사람들을 지키겠다는 염원으로. 전장에 앞장서 달려가기보다는 적어도 내 친애하는 이들의 앞은 막아주겠다는 바람으로.”
“…….”
“어떻게 안 갈 수가 있겠어. 그대들이, 그대들의 가족이, 내 친우들이, 이 따뜻한 공간이. 모두 이 제국과 함께하고 있는데.”
“……아가씨.”
“그러니 염치없지만, 이번에도 그대들이 이해해줘.”
저 굳건한 얼굴에 망설임은 한 점도 없다.
차라리 무섭다 외치기라도 하시지.
가기 싫다 투정이라도 부리시지.
그럼 우리 모두가 당신 앞을 가로막은 단단한 벽이 되어드릴 텐데.
선뜻 그러시라 답할 수 없어 사용인들은 입술을 깨물며 시선을 아래로 내렸다.
그때였다.
집사 하델이 벽장 속 검 하나를 꺼내 들고 앞으로 나섰다.
“아가씨.”
“응, 하델.”
“감히 말씀 올리건대…… 참 잘 자라셨습니다.”
“알아. 여기 있는 모두가 키워줬는걸.”
“……공작저는 저희에게 맡기십시오. 이곳에 무기 다룰 줄 모르는 이는 단 한 명도 없으니.”
“믿어. 우리는 제국 제일의 무가잖아.”
“그러니 제발…….”
“…….”
“……돌아오십시오. 안전히.”
어느새 잔주름이 진 집사의 얼굴.
한동안 바라보던 이벨리아가 활짝 웃었다.
“물론이지. 금방 올게.”
그 말이 진심이라는 걸 모르는 이는 없다.
다만, 이번 수도전은 말 그대로 서로 사활을 건 총력전이 될 터.
안전을 담보할 수도, 귀환의 시기를 점칠 수도 없는 것이 사실이다.
그럼에도 저 굳건한 모습에, 사용인들은 그저 속으로 탄식하며 어린 주인을 배웅했다.
***
전역에 감도는 전운과 어울리지 않게 날씨는 선선하다.
“이런 날씨엔 비밀기지에서 돗자리 펴고 놀아야 하는데.”
“빠르게 끝내고 그렇게 하자.”
“그리고 토끼랑 밖에도 또 나가야 하고.”
아가레스가 느리게 고개를 기울였다. 어딜 나간단 뜻이지.
이벨리아가 픽 웃으며 쐐기를 박았다.
“나 지금 데이트 신청하는 거야.”
“……!”
“이 전쟁이 끝나면, 나랑 데이트하자, 아가레스.”
“……언제든. 몇 번이고.”
“미리 말하자면, 매일. 많이. 그랬으면 좋겠어.”
“……나는 늘 네 명을 따르니.”
갈증이 일어 갈라진 목소리로.
“왕을 탐하는 신하를 두고 볼진 네가 정해.”
충심과 연심의 경계를 아슬아슬 걷는 신하는.
“선을 정해주지 않으면, 나는 어디서 멈춰야 하는지 모르니까.”
이벨리아의 머리칼을 쥐고 가볍게 입을 맞췄다.
그러자 홀리듯 눈을 접어 웃으며 왕이 답한다.
“우리 사이에 더 필요한가, 선이?”
맞부딪쳐 달려들어도 좋다는 허가이자.
죄던 굴레를 풀어주는 겁 없는 해방이었다.
***
한편 이곳, 황궁.
루드비히는 말 그대로 눈코 뜰 새 없이 이리 뛰고 저리 뛰는 중이었다.
와병 중인 황제가 전시상황에 기민한 대처를 할 순 없기에 신하들은 황태자를 찾아댔고, 그 결과 군 통수권자 역할을 비롯한 모든 업무를 루드비히 혼자 보게 된 것이다.
황태자비도, 그렇다고 믿음직한 황족도 없으니…….
날아드는 서류를 움켜쥐며 루드비히는 또 새삼 느꼈다.
황궁엔 진정 자신 혼자라는 것을.
‘아…… 이브 보고 싶다.’
너만 있으면 이 중압감도 별거 아닌데.
‘그나마 저거라도 있어서 다행이라고 해야 할지…….’
쾅. 쾅. 황태자의 옥새를 마구잡이로 찍어대고 있는 보랏빛 머리의 여우 하나.
그 방만한 행태를 가만히 바라보던 루드비히가 미간을 찌푸리며 물었다.
“제대로 검토하고 찍는 거 맞나?”
“천재는 시력도 좋습니다. 머리도 잘 굴러가지요.”
“아무리 그래도 거금이 적힌 그 서류 검토가 1초 만에 끝나니 하는 말이지.”
“전하. 돈 없으십니까?”
“……있지?”
“이런 전시상황엔 돈으로 때울 수 있는 건 돈으로 때워야 하는 법입니다. 어차피 제국 망하면 그 돈 무덤에도 못 갖고 들어가요.”
보랏빛 여우가 요요하게 웃으며 보란 듯 옥새를 쾅 내리찍었다.
“아. 그리고 전하.”
“왜.”
“이왕 돈 쓰시는 김에 조금 더 쓰실 곳이 있습니다.”
“또 뭔데.”
“공녀님께서 마탑의 신물이나 다름없는 아스트라페를 훔치셨거든요.”
“뭐?”
청천벽력 같은 소리. 루드비히가 이마를 짚었다.
“신물을 훔쳐? 그것도 마탑의? 아니, 마법도 할 줄 모르는 애가 왜?”
“렐리안에게 줬답니다.”
“영애는 그걸 넙죽 받았고?”
“홀랑 받았다고 합니다. 여하간 제가 나중에 따지러 쫓아가니 글쎄 하시는 말씀이, 제 동생도 공범이니 알아서 해결하라지 뭡니까.”
“아무리 내 친우지만 양심이…….”
“그런 것이 공녀님 심장 속에 살 리가 없지요.”
“…….”
“폭군이 따로 없습니다.”
“……내가 대신 사과하지.”
“마탑의 원로들이 제대로 화가 났으니, 사과로 해결될 단계는 지났습니다.”
“돈으로는 해결이 되겠는가?”
이크리안의 눈이 반짝 이채를 발했다. 조금 전보다 훨씬 온화해진 것이, 꼭 이것이 정답이라 외치는 듯하다.
“귀물이니만큼 거금이 필요하겠지?”
보랏빛 여우가 크게 고개를 끄덕였다. 역시 현명하십니다, 전하.
곧바로 품속에서 기안서 한 장을 꺼낸 이크리안은 ‘0’이 한참 붙은 숫자 하나를 써서 팔랑팔랑 흔들었다.
루드비히가 헛웃음을 흘렸다.
“아무리 귀물이라도 금액이 말도 안 되는데?”
“노고가 많은 제 수수료입니다.”
“이건 내 사비로 지출된다는 건 알고 있나?”
“돈 많기로 따지자면 둘째가라면 서러우신 분인 것도 알고 있습니다.”
“……하, 찍어라, 찍어.”
오늘도 황태자 등쳐먹기에 성공한 대마법사는 씩 웃으며 옥새를 반듯하게 찍었다.
작게 흘러오는 콧노래를 들으며 루드비히가 짙은 한숨을 내쉬었다.
“환란엔 늘 도적이 날뛴다더니.”
그 도적이 내 집무실에 있네.
***
균열 발생 시각으로부터 약 한 시간 뒤.
균열은 틈을 벌리진 않은 채 꼭 분열이라도 하듯 점차 수만 늘려갔다.
차라리 거대한 균열 하나가 발생했다면 루드비히가 나서 폐쇄하기라도 했을 텐데, 저렇게 다수여서야 그건 불가능하다.
언제 균열이 터지고 본격적인 침공이 이어질까 조마조마한 마음으로 황궁 인원 모두가 하늘만 바라보고 있던 그때.
- 콰앙!
루드비히의 집무실 문이 굉음을 내며 열렸다.
“얍! 나 왔다!”
“깜짝이야. 균열 열린 줄 알았잖아. 너 그 문 여는 버릇 좀 어떻게 안 돼?”
“난 19년을 이렇게 살았는걸. 루이가 포기해.”
귓등으로도 안 들으며 이벨리아가 가벼운 걸음으로 집무실에 들어섰다.
아가레스와 엔리르도 뒤따라 들어왔지만 루드비히는 그쪽은 본 척도 하지 않았다.
“왜 왔어. 여기 위험한데.”
“뭘 당연한 걸 물어. 우리 루이 도와주러 왔지!”
이크리안은 느꼈다. 알게 모르게 긴장으로 굳어 있던 주군의 표정이 한순간에 풀어진 것을.
“응? 동화책 공장 공장장 오라버니도 있네?”
“폭군 공녀님 오셨습니까.”
“내가 훔친 아스트라페는 잘 해결했어?”
“전하 돈으로요.”
“에엥. 렐리안이 쓴 아스트라페인데. 공장장 오라버니는 한 푼도 안 내고 루이 돈만 빼먹다니 너무하다.”
“훔치신 분은 돈 내셨습니까, 그럼?”
할 말이 없어진 도둑은 황급히 시선 돌려 루드비히 곁에 선 주홍빛 머리칼의 여인에게 괜히 크게 인사를 건넸다.
“카밀라! 잘 지냈지?”
“예, 공녀님. 배려 덕분에 잘 지냈습니다.”
카밀라가 이벨리아 앞으로 다가와 깊이 고개를 숙였다.
“지난번 일, 다시 한번 진심으로 감사드립니다.”
“에이, 뭘. 별것도 아닌걸.”
둘이 무슨 대화를 하는지 알지 못하는 루드비히가 물었다.
“무슨 일 있었어?”
“카밀라에게 온 구혼서 내가 찢어버렸어.”
“왜. 상대가 별로라서?”
“이렇게 능력 좋은 카밀라한테 웬 마흔은 다 되는 백작을 갖다 붙이겠다잖아! 심지어 카밀라는 원하지도 않는데!”
“그럼 델포이 영애가 거절하면 될 것을 왜 너까지 끼어들었어?”
“카밀라가 거절했지. 그랬더니 그놈이 델포이 자작가의 자금줄을 다 막아버렸어. 사업장에 와서 행패도 부리고, 심지어 하녀들을 납치까지 하고!”
“개차반이군. 잘 찢었어, 구혼서.”
“고백하자면, 구혼서만 찢은 건 아니야.”
“……뭘 또 찢었어?”
“…….”
묵묵부답. 루드비히의 동공이 흔들렸다.
왜. 불길하게 왜 대답이 없어.
그 눈빛을 받은 이벨리아가 슬슬 시선 피하며 답했다.
“이브는 못된 사람을 찢어.”
루드비히가 파렴치 백작의 예후를 조금 더 자세히 물으려던 찰나.
- 드드드드득!
창밖, 세계를 강제로 잡아 찢는 듯한 굉음이 벼락처럼 내리꽂혔다.
“……!”
균열을 마주한 적 있는 이들은 익히 아는 소리.
세계가 틈을 벌리는 소리다.
이젠 서로 전우라 칭해도 모자람 없을 이들이 자리를 박차고 일어섰다.
“드디어.”
“오래도 끌었군.”
루드비히가 검집 위에 손을 올리고 말했다.
“그대들은 적당히 상황 보다 나서도록.”
그러자 아가레스가 삐뚜름하게 웃었다.
“그 말, 제일 먼저 죽는 클리셰군.”
창틀에 기대 있던 이크리안도 거들었다.
“어허, 위대한 마법 두고 한미한 검사들께서 싸우실 필요 없습니다.”
그 말엔 가만있을 수 없다는 듯 엔리르가 고개를 기울였다.
“누가 지금 마법 소리를 내었는가? 여기 용이 있는데 버릇없이.”
그러자 이벨리아가 탕탕 테이블을 내리쳤다.
“다들 허세 부리는 거야? 허세라면 내가 또 한 허세 하지! 내가 새끼손가락으로 쓸어버릴게!”
제각기 큰소리를 땅땅 치는 이 제국 주역들을 가만히 바라보며, 카밀라가 확언했다.
“보아하니 이번 전쟁에서 제국이 망할 리는 없겠네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