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254화: 뜻밖의 지원군
세드릭과 기사들은 불덩어리 그 자체가 되어 하늘을 날아다니는 이프리트를 황망한 표정으로 바라봤다.
해골들의 무덤에서 살아남았다는 안도도 잠시. 누군가 슬쩍 본심을 내비쳤다.
“원래 정령왕의 전투라는 게 저렇게 품위가 없는 것이었나……?”
세드릭은 자신도 모르게 고개를 끄덕였다.
아무리 내가 불러냈지만 저건 좀…….
불의 정령왕이 아니라 꼬랑지에 불붙은 망아지 같다.
왜 저렇게 화닥화닥 채신머리없게 뛰어다니는 거야?
한편, 원치 않았던 계약자에 대한 분노가 전장에 대한 흥미로 바뀐 단순무식 정령왕은 그저 호탕하게 웃으며 불덩어리를 쏘아댈 뿐이었다.
“크하하하핫-! 해골들 굽는 재미도 쏠쏠하구나-!”
- 화르르르륵.
“오, 다시 살아나? 영양분이 가득한 뼈인가?”
- 콰르르르릉.
“네가 이걸 불러낸 악마냐? 앙? 이야, 반갑다!”
- 콰앙.
“악마 통구이 맛 좀 보자! 군침이 싸아악 도네!”
- 쿠우우우웅.
이쯤 되자 기사들은 천천히 시선 돌려 세드릭을 바라봤다.
‘저기요, 사령관님. 아무래도 정령왕이 아니라 악마를 소환하신 것 같은데요.’
‘저거 악마랑 마족 다 잡고 나면 다음 차례는 우리일 것 같은데.’
‘웃통 깐 것부터 알아봤어, 내가.’
왠지 따가운 눈총을 받던 세드릭은 민망함에 고개를 떨궜다.
“……이브에게 계약을 무르는 법이 없는지 물어봐야겠군.”
죄송하지만 정령왕 반품이요.
***
한편 이곳, 휴고의 격전지.
날카로운 눈매가 언짢음을 가득 담고 찌푸려졌다.
‘만만치 않군.’
드넓은 창공을 온통 뒤덮은 균열.
쉴새 없이 틈을 벌려 날아드는 급 높은 마족들.
승기를 잡을라치면 어김없이 나타나 학살을 벌이고 빠지는 악마 몇.
전황을 훑던 휴고가 쯧 혀를 찼다.
‘……좋지 않아.’
휴고 자신이야 마물의 바다 한가운데 떨어뜨리더라도 한 몸 부지할 수 있었으나, 다른 기사들은 얘기가 다르다.
그 방증으로 황실 기사들과 카시스의 마법사들은 말할 것도 없고, 그가 오래도록 키운 아르티나 기사들까지 그 수가 확연히 줄어 있었으니.
‘이렇게 버티다간 답이 없겠군.’
휴고가 기민한 눈으로 생존한 기사들의 상태를 살폈다. 개전일로부터 무려 사흘이 꼬박 지난 지금, 전사자의 수도 수지만 가장 문제가 되는 것은 따로 있었다.
‘군량과 식수.’
제대로 휴식을 취할 수 없는 환경에서 충분히 먹지도 못한 기사들의 체력은 말이 아니었다.
간만에 참으로 쉽지 않은 전투다.
그러나 이 정도 생사기로쯤 밥 먹듯 넘으며 살아온 휴고의 표정엔 일절 변화가 없었다.
결단을 내린 그의 검에 황금빛 입자가 일렁였다.
“모두 물러서라.”
“……?”
“지금부터 하루. 내가 버틴다.”
“각하!”
“그게 무슨 말씀이십니까!”
“명이다. 하루 동안 참전을 금한다. 제대로 회복하고 돌아오도록.”
기사들이 믿을 수 없다는 듯 입을 떡하니 벌렸다.
아무리 제국 제일검이라도 그렇지, 일개 인간 혼자서 저 개미 떼 같은 마족들을 막는다고? 그것도 하루를 꼬박?
그 누구도 섣불리 발을 물리지 못하고 머뭇거리고 있던 그때.
휴고가 버럭 소리쳤다.
“여기서 죄다 개죽음당할 셈이냐!”
“……!”
“그리 비실대서야 쓸 데도 없으니 물러서!”
말은 독하게 했지만, 기실 승기를 잡을 희박한 가능성이나마 점치자면 유일한 방법은 이것 하나다.
마땅한 지원이 올 때까지 휴고와 기사들이 제대로 된 휴식을 가지면서 돌아가며 전투를 이어가는 것.
주군의 의도를 모를 리 없는 아르티나 기사단은 숫제 피를 토하는 심정으로 모든 기사를 뒤로 물렸다.
그들이 안전한 지역까지 물러선 것을 확인한 직후.
휴고의 검에서 터져 나온 황금빛 입자가 폭발적으로 주변을 휩쓸었다.
풍압을 이기지 못하고 이리저리 휘날리는 머리칼을 대충 쓸어넘기며, 휴고가 옅게 웃었다.
“내가 있는데 저들이 죽어서야 폼이 안 살지.”
누가 이벨리아의 아빠 아니랄까 봐. 숨겨진 폼생폼사였던 휴고는 아직 적히지 않은 자신의 묘비명을 추측했다.
휴고 폰 아르티나, 영지를 침공한 모든 마물을 홀로 막아내고 전사.
“제법 마음에 드는군.”
검 한 자루에 의지하여 살아온 세월, 어언 반 백 년.
선대 공작. 제국의 기둥. 대륙 제일검. 1차 인마전쟁의 공신-.
그 모든 길을 칼끝으로 뚫어온 휴고는 일평생 그래왔듯 전장의 최전선으로 뛰어들었다.
혈혈단신으로.
***
두 시간, 반나절…… 그리고 한나절.
사령관의 군령(軍令)에 따라 뒤로 물러나 부상을 회복하던 기사들은 경악을 금치 못했다.
사위를 뒤덮은 마족들로 인해 신형조차 보이지 않건만, 터져 나오는 황금빛 물결은 마치 그가 아직 그곳에 있음을 알리듯 도무지 기가 죽을 기미를 보이지 않는다.
꿀꺽. 누군가 메마른 침을 삼키는 소리가 끈적하게 대기에 달라붙었다.
소드마스터.
검을 쥔 자라면 모두 그 칭호를 선망하였기에 수도 없이 되뇌고 들었던 호칭.
그 단어가 저 정도 경지를 의미하는 것이었나. 막상 목도하고 나니 그들은 깨달았다. 그들이 얼마나 허황된 꿈을 꾸고 있었는지.
멍하니 바라보던 기사 중 하나가 읊조렸다.
“물과 식량만 있었다면…….”
“하다못해 응급처치 장비라도…….”
우리도 빨리 회복해서 저 전장에 뛰어들 수 있을 텐데.
몇몇 기사들이 물과 식량을 구하러 떠나긴 했지만, 의미 있는 것을 가지고 돌아오는 이들은 매우 소수.
여전히 체력이 달리는 기사들은 주변에 떨어지는 마족 잔당들을 처리하는 것에도 급급했다.
그렇게 휴고 홀로 검을 휘두른 지 약 하루가 꼬박 지날 때 즈음이었다.
휴고가 마물을 틀어막고 있는 방향과 정확히 반대편.
- 두두두두.
거대한 흙먼지가 일며 무언가 속도를 낮추지 않고 돌진했다.
후방에서 부상병을 돌보고 있던 기사들이 벼락같이 일어나 검을 치켜들었다.
“적습이다! 후방에서 적습이다!”
“전투 준비!”
이런. 앞도 벅찬 마당에 뒤까지!
기사들의 얼굴에 패색이 짙게 깔리던 찰나.
시력 좋은 정찰병 하나가 한껏 눈을 찌푸리다가 외쳤다.
“적습 아닌 것 같습니다! 잘 보니까 말 뒤에 짐 마차가 달려 있습니다!”
곧이어 다른 정찰병 중 하나가 환희에 차서 악을 질렀다.
“종군 상단입니다! 아우름 상단의 깃발이 보입니다!”
그에 의아함을 느낀 건 되레 기사들 쪽이었다.
“종군 상단이라고? 저게?”
“상단원들 몸집이 산적 뺨치는데?”
“뭔 상단이 저렇게 도적 떼 같아?”
“종군 상단원으로 먹고살려면 저 정도 덩치는 있어야 하는 건가……?”
빠른 속도로 가까워진 상행.
기사들은 선두에서 말을 달리는 이를 보고 다시 한번 눈을 크게 떴다.
“선두에 있는 상단원은 아무래도 여인 같은데?”
“저 머리색 익숙한데…… 아! 그 카시스 가문의 사생……읍.”
손뼉 치며 지식을 과시하던 황실 기사 중 하나는 아르티나 기사단원들에게 입이 틀어막혔다. 미친 멍멍이 하나가 황실 기사의 귓가에 으르렁댔다.
“공녀님께서 그렇게 부르는 이는 물지옥에 빠질 거라고 경고하셨다. 되지도 않는 호칭 가져다 붙이지 말고 저분이 노력해서 거머쥔 지위로 칭해라.”
“……사, 상단주! 그래, 상단주다!”
어느새 지척으로 다가온 네피르는 말이 채 멈추기도 전에 훌쩍 뛰어내렸다.
군더더기 없는 착지는 상단주의 기마술이 어느 정도의 경지에 이른 것인지를 익히 짐작게 했다.
흐트러진 머리칼을 대강 정리하며 네피르가 예의 그 청초한 얼굴로 말했다.
“아우름의 상단주, 네피르입니다. 각하께선 어디에 계시죠?”
어린 상단주의 기백에 속으로 감탄하며, 황실 기사 하나가 손을 뻗어 격전지를 가리켰다.
“저기에 계시다.”
“저 안에 있는 기사는 몇 명 정도 되죠? 급한 대로 식수라도 분배해 들어가고자 합니다만.”
“아니, 저긴 각하 혼자…….”
네피르가 믿을 수 없다는 듯 다시 한번 격전지를 바라봤다.
이내 유리알 같던 보랏빛 눈에 불꽃이 튀었다.
“이 작자가 지금 무슨 개소리를 지껄이고 있는 거야.”
“어, 어?”
“저 마물 천지에 각하 혼자 들어가 계신다고?”
“각하의 군령(軍令)이었다! 식량도 식수도 부족하니 우린 잠시 뒤로 빠져 체력을 보존하라는……!”
네피르가 황실 기사의 등짝을 손으로 내리쳤다.
- 퍼억!
두꺼운 갑옷을 뚫고 찌르르 울리는 통증. 화들짝 놀란 기사가 몸을 비틀었다.
“으악! 뭐, 뭐야!”
고함을 치려던 기사의 입에 대충 뭉친 주먹밥이 틀어박혔다.
“이거나 처먹고 가서 각하를 구해! 어서!”
“으읍…… 읍!”
상처를 입은 기사들의 면전엔 고약과 붕대가 와르르 쏟아졌다.
“물자 줬잖아! 빨리 안 가고 뭐 해? 각하께서 혼자 계신다며!”
이쯤 되자 아르티나 기사들도 고개를 기울였다.
물론 맞는 말이긴 한데…… 이 상단주가 우리 주군 목숨에 왜 이렇게 진심이람?
“혹시라도 각하께서 잘못되시면 다들 가만 안 둘 줄 알아! 다신 네놈들에게 밥도 물도 공급하지 않을 줄 알라고!”
성질머리 여전한 네피르가 악을 쓰며 발을 굴렀다.
일견 버릇없는 태도에 눈살 찌푸리며 한마디 하려던 기사는 네피르의 눈에 가득 고인 눈물을 보고 말을 삼켰다.
네피르는 기사들을 거칠게 밀어내고 치열한 격전지 속 휴고의 흔적을 찾아 까치발을 들었다. 초조함을 나타내듯 잇새는 연신 엄지손가락 끝을 씹어댔다.
“저분이 어떤 분이신데…… 내게 어떤 의미가 있는 분인데.”
한계 없이 밝은 금빛이 약 10년 전의 그 어느 날을 떠올리게 했다.
사생아에 불과한 나를 감히 공작저에 머물게 해주셨던 배려.
우리 아버지에게 내가 그대 딸인 것을 알고는 있었냐며 다그치던 차가운 음성.
렐리안과 네피르 둘 다 상처받지 않게 해야 했다며 꾸짖던 말씨.
나를…….
카시스의 사생아였던 나를 카시스의 곁다리로 보지 않던.
함께 따뜻한 밥상에 앉게 해주던.
무심히 고기를 잘라주던.
공녀님의 옷을 사실 적 비슷한 것으로 한 벌 걸어주던.
내 돈주머니에 찍힌 황금 용의 인장을 눈감아주던.
……아르티나에서 받은 그 모든 은혜.
언젠가 갚고자 네피르의 상단은 애초부터 무예를 익힌 상단원만을 기용했다.
나의 은인들-. 당신들은 늘 창칼 속을 달릴 테니까.
“어서 가서 각하를 구하라고, 이 천치들아!”
울먹이는 눈으로 버럭 외침과 동시.
네피르는 누구보다 앞장서서 격전지로 달려나갔다.
이 대륙 전역을 바람처럼 누비는 상단.
그 모든 험지를 손수 밟으며 거래를 트는 어린 상단주-.
홀로 떳떳이 가시밭길을 걸어온 네피르의 실력은 결코 기사들에게 뒤지지 않았다.
***
거의 검과 혼연일체가 되어 휘두르던 휴고는 미세하게 눈가를 찌푸렸다.
자신에게 소용돌이치듯 밀려들던 마족들 중 일부가 다른 곳으로 빠지고 있는 게 느껴진다.
이것이 의미하는 것은 단 하나. 휴식하던 기사들이 다시 참전하였다는 것.
‘회복하라고 한 지 아직 하루가 온전히 안 지났을 텐데.’
말이 회복하라는 말이었지, 솔직한 마음은 죽지 말란 소리였다.
밥 못 먹고 잠 못 잔 채로 싸우면 제 실력 발휘하기도 전에 개죽음이나 당할 테니, 그런 호된 역할은 사령관인 내게 맡기고 너희는 기적 같은 도움이나 기다리라는 뜻.
내게 부인이 있고 아들이 있고 딸이 있듯 너희 역시 마찬가지일 테니…… 부디 살아 돌아가라는 염원.
‘헛된 치기로 죽지 말라고, 이 머저리들.’
이를 악문 휴고가 검을 크게 휘둘러 저쪽, 기사들이 꾸역꾸역 몰려들고 있는 부근으로 검기를 날렸다.
그러자 잠시 뚫린 통로로 보인 것은.
‘산적?’
자신의 부대에 예속되었던 기사들 외에 웬 덩치 큰 것들이 봇짐 지고 창을 휘두르고 있다.
짐을 봐선 상단인가 했건만, 덩치를 보아하니 영락없는 도적 또는 산적이다.
‘아무래도 이 부근에 터를 잡고 살던 도적 떼인가 보군.’
기사들의 안위를 우려하며, 휴고가 성마르게 사위를 훑었다.
‘두목은 누구지. 잘하면 물자를 공급받을 수 있겠어.’
안 내놓는다고 하면 강탈하면 되고.
휴고가 기사들 쪽으로 몸을 돌려 활로를 열려던 그때였다.
빼곡하게 찬 마물들 사이에서 연보랏빛 머리칼이 언뜻 흔들리고…… 이내 몸집 작은 여인이 불쑥 튀어나왔다.
“각하!”
“……넌?”
얇은 검으로 적의 군세를 헤치고 겨우 격전지의 중심에 다다른 네피르는 조금 전 기사들을 대하던 박력은 애초에 없었던 것처럼 특유의 처연한 표정으로 휴고를 올려다봤다.
“오랜만에 뵙습니다, 각하. 혹시 미천한 소녀를 기억하시는지요?”
잠시 빤히 바라보던 휴고가 느리게 입을 열어 답했다.
“내 딸의 친우.”
여전히 카시스의 사생아라는 말 따위 입에 담지 않으신다. 심지어 지체 높은 아가씨의 친구라고 칭해주신다.
네피르는 다시 한번 울컥거리는 마음을 내리눌렀다. 뭐라 답하려던 찰나. 휴고가 먼저 말을 이었다.
“그리고 이젠 대상단의 주인이 되었다지.”
“아, 부족하지만 그렇습니다. 그래서 미력하나마 각하를 돕고자-.”
“기특하군.”
“……네?”
“고생 많았다. 잘 자라느라.”
“……!”
더 말은 없었다.
휴고는 네피르를 보호하듯 뒤에 두고 다시금 검을 휘둘렀다.
참으로 염치 없이, 그 뒷모습에서 네피르가 평생 바라던 아버지의 모습이 보였다.
“……감사합니다.”
갈라진 목소리 끝에, 네피르는 공작저를 떠난 이후 10년간 단 한 번도 흘리지 않았던 눈물을 이 전장에서 쏟아냈다.
돌이켜보자면, 기쁨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