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253화: 아르티나 가문 최고 또라이
금제탑엔 왕이 없다.
대신 13인의 장로들이 각각의 세력을 이끌며 마치 신처럼 군림했다.
장로들이란 숫제 연구에 돌아버린 자들이었기에 연구실에서 두문불출하는 것이 일반적이다.
흡사 폐인처럼 연구만 거듭하는 장로들을 일반 연금술사들과 구분하는 방법은 회색 로브 소매에 박힌 역십자(逆十字) 엠블럼.
지금 이곳, 아르티나 영지.
얼굴까지 칭칭 감싼 채 키득키득 웃는 이의 로브 소맷자락에는 검은 역십자 문양과 함께 고대의 표기법으로 11을 뜻하는 숫자가 찍혀 있었다.
그리고 장로의 앞에는 인세에선 찾아볼 수 없는 붉은 말을 타고 금관을 쓴 악마 하나가 삐딱한 눈을 이리저리 굴리고 있었다.
72위의 악마 중 28위.
베리스(Berith).
이명, 거짓말쟁이 광대.
백 번의 말이 구십구 번의 거짓과 한 번의 진실로 이뤄져 있다는 악마가 투덜거렸다.
“이봐, 웃지만 말고 균열이나 만들지 그래?”
“그런 말투는 기분이 나쁜데. 우린 상하 관계가 아니라 동맹 관계 아니었나?”
“동맹은 무슨. 대 마계의 왕께선 너희 인간 따위와 동맹은 맺지 않으신다.”
“하지만 대 마계의 왕께선 하실 수 없는 일을 우리 연금술사들은 할 수 있지.”
장로가 주름진 손 위에 들린 연회색 구체를 통통 튀기며 씩 웃었다.
“균열. 필요하잖아?”
악마가 쳇 혀를 차며 고개를 돌렸다.
몇 년 전부터 제국 전역에 발발하기 시작한 각종 균열은 결코 자연현상 따위가 아니었다. 모두 연금술의 산물이었으니까.
그리고 그 획기적인 발명을 가져다 대자면, 적어도 인마전쟁을 앞둔 지금, 악마들은 연금술사들의 손을 놓을 수가 없었다.
1차 인마전쟁 당시엔 없었던 ‘균열’. 이건 이번 인마전쟁에서 악마들의 승리를 점치게 하는 비장의 카드였다.
늙수그레한 연금술사가 마치 똑똑히 봐두라는 것처럼 연회색 구체를 굴렸다.
“너희 악마들은 언제든 인간계를 자유롭게 오갈 수 있지만, 휘하 마족들은 혼자 힘으론 서로 다른 계(界)를 넘지 못한다지?”
“잘도 아는군.”
“그렇다면 너희 악마들이 일일이 휘하 마족들을 소환해서 인간계로 불러내야 한다는 건데…… 거기에 소모되는 지배력도 무시할 게 못 되겠지. 특히 전쟁이 길어지면 길어질수록 말이야.”
“……쯧, 빌어먹을 연금술사.”
뱀 같은 꿍꿍이속이 영 마음에 들지 않아 대번에 목을 잘라버리고 싶건만, 그럴 때마다 악마들에게 필요한 것을 쏙쏙 내놓으니 그것조차 쉽지 않다.
“우리가 미운 건 알겠지만 진정하라고, 친구. 그대들이 지배력을 쓰지 않더라도 내 이 손길 한 번이면 세계가 틈을 벌리고 그곳에 계(界)를 넘을 수 있는 통로가 생기잖나.”
그곳을 통해 마계에 거하는 마족들이 끝도 없이 인간계로 밀려들 수 있으니, 그것만으로도 1차 인마전쟁 때와는 상황이 달라진 거나 다름없지.
장로가 번들거리는 눈을 휘어 웃었다.
“어때. 이래도 우리가 동맹이 아닌가?”
“알았어, 알았다고! 동맹! 됐지?”
균열의 편리함과 유용함을 잘 알고 있는 악마, 베리스가 투덜댔다.
“이왕 만들 거 많이 만들어라, 동맹.”
“그래야지, 그래야지. 아르티나 일가가 직접 온다면 균열 한두 개 가지곤 어림도 없을 테니까.”
어디 보자…….
애당초 틀어막을 생각조차 하지 못하도록 하늘을 온통 균열로 뒤덮어버리는 것이 좋겠군.
복잡한 진을 그린 다음 회색 구슬을 여기저기 올려둔 장로가 중얼거렸다.
“고작 균열로 무려 휴고 아르티나를 잡을 수 있을 거라곤 기대하기 어렵지만…….”
“그래도 제대로 발을 묶어둘 순 있겠지.”
악마가 말을 잇자 장로가 고개를 끄덕였다.
어차피 영지라는 미끼의 목적은 아르티나 일가의 멸절이 아니었다.
수도를 함락하고 황제와 황태자, 공녀의 목을 베 수급을 확보할 때까지 아르티나 일가가 이곳에서 검을 휘두르게 만드는 것.
붉은 얼굴의 악마가 균열로 온통 새빨갛게 물든 하늘을 보며 낄낄 웃었다.
“불바다가 된 수도는 장관이겠군!”
***
- 히히히힝!
악마들이 점거한 아르티나 영지로 달리던 휴고의 말이 일순 앞발을 높게 들고 주춤거렸다.
능수능란한 기수는 태연하게 말의 목을 두드리며 고삐를 당겼으나, 말은 무언가 불안한 듯 투레질을 치며 앞으로 나가길 거부했다.
‘겁을 먹었군.’
휴고의 말은 휴고와 함께 제법 많은 전장을 누빈 군마(軍馬)다.
바꿔 말하자면, 웬만한 살기나 칼침엔 진절머리가 날 만큼 익숙해진 말이란 뜻이다.
그런 군마가 아직 눈에 띄지도 않는 무언가에 공포를 느끼고 달리기를 거부하고 있다.
‘앞에 뭔가 있다.’
휴고가 흘끗 시선을 뒤로 돌렸다.
다른 기사들의 군마도 별반 다를 것 없이 주춤거리고 있었다.
그가 망설임 없이 말에서 훌쩍 내리며 명했다.
“말을 버려라. 뛰어간다.”
기사들이 일제히 뛰어내리자 말들은 마치 기다렸다는 것처럼 반대로 달아나기 시작했다.
기동력을 잃었지만 크게 문제가 되진 않았다.
어차피 함락된 영지는 코앞.
묘하게도 조금 이른 노을이 내리 앉은 바로 저곳이니까.
***
약 두 시간 정도 달려 영지, 아니, 영지였던 곳에 도착한 휴고는 질린 듯한 표정으로 하늘을 응시했다.
‘군마가 도망갈 만했군.’
그가 ‘조금 이른 노을’이라고 표현했던 붉은 음영은 실상 노을이 아니었다.
후미에서 기사 하나가 기겁하여 읊조렸다.
“저, 저게 다 균열이라고……?”
말 그대로였다.
창공을 노을처럼 빼곡히 뒤덮은 것들은 모두 틈새를 벌리고 있는 균열.
수를 셀 수도 없다. 급을 측정할 수도 없다.
명확한 것은 단 하나.
곧 저 틈새를 찢고 마족들이 이 지상으로 쇄도한다는 것.
아르티나 기사단을 비롯해 지원군으로 따른 황실 기사들과 카시스의 마법사들까지 일거에 얼어붙었다.
저건 전투를 치를 대상이 아니다. 재해라는 말로도 다 표현하지 못하는 저것은 인간이 도망치고 피하고 숨어야 하는 대상이다.
“아아…….”
“아, 안 돼, 저건…….”
저기서 쏟아져 내리는 마족들만으로도 능히 인마전쟁을 시작할 수 있는 군세일 터.
그런데 그들은 고작 수백의 인원으로 그 파동의 선두에 서 있는 것이다.
“죽을 거야…… 전멸할 거라고…….”
황실의 문양을 단 누군가 읊조렸다.
전쟁은 기세가 반이라는 것을 알고 있는 아르티나의 기사들이 입을 막아보았으나 공포는 이미 전염병처럼 빠르게 퍼진 뒤였다.
“각하, 후, 후퇴를……!”
“저희만으로는 안 됩니다!”
파랗게 질려 악을 쓰는 몇몇 기사들. 휴고는 미동도 하지 않았다.
그때였다.
균열이 전조를 담고 일렁였다.
흡사 신의 눈처럼 거대한 그것이 조금씩 틈새를 벌린다.
그렇지 않아도 붉던 하늘이 이젠 핏빛으로 화했다.
그 사이. 노란 눈 번뜩이는 마족들이 하나둘씩 머리를 디밀었다.
푸르게 평평했던 하늘이 온갖 종류의 기괴한 머리로 우글거리는 건 지옥의 재림이라 칭해도 과하지 않았다.
고개 들어 바라보던 휴고가 담담히 입을 열었다.
“수도엔 내 딸이 남아 있다.”
주춤 뒷걸음질 치던 기사들이 이 제국 기둥의 너른 등을 바라봤다.
“마찬가지로 그대들이 소중히 여기는 이들 또한.”
고저 없는 목소리가 말을 이었다.
“저것들이 이곳을 뚫어내면 어디로 향할 것 같나.”
“…….”
“그대들의 터전인 수도다.”
“……!”
“이곳에서. 저 재앙으로부터. 그대들의 부모를, 형제를, 자식을, 친우를. 그 손으로 지켜내라.”
짧은 격문. 그러나 기사들의 전의를 불태우기엔 부족함 없다.
본디 인간이란 등 뒤에 지킬 것이 있을 때 비로소 단단히 서는 법이니.
정신을 차린 기사들이 입술을 짓씹으며 발을 단단히 땅에 붙였다.
덜덜 떨리던 손이 진중함을 담고 검을 고쳐 쥔다.
카시스의 마법사들이 일으킨 빙계 마법이 기사들의 검에 내려앉아 서리를 만들어냈다.
- 키르르르륵.
- 카아아아악!
세상의 종말이라 불러도 과언이 아닌 광경. 창공을 찢고 쇄도하는 마족 군단을 향해 얇은 검 한 자루를 치켜들며, 휴고가 읊조렸다.
“단 한 놈도 수도로는 보내지 않는다.”
아비가 되어서 딸에게 부담을 지울 순 없는 노릇이니.
***
한편, 마찬가지로 점령된 영지 인근에 다다른 세드릭은 신경질적으로 침을 퉤 뱉었다.
점거된 영지가 사막 한가운데 있는 바람에 모래바람을 뚫고 달려왔더니 입안에 불쾌한 모래가 가득하다.
“어우. 내 동생이었으면 정령을 불러서 모래를 전부 날려버렸을 텐데.”
그러자 곁을 따르던 황실 기사 중 하나가 의문을 표했다.
“공녀님께서 사막의 모래를 다 날려버리실 수 있다는 말씀이십니까?”
“걔라면 이미 날려버리고도 남았어.”
“그, 그렇게 무지막지하십니까?”
“이브에 대한 소문은 과소평가된 것들이 많지. 힘이 무지막지하면 성정이라도 온유하든가, 성정이 무지막지하면 힘이라도 덜 강해야 하는데…… 애석하게도 내 동생은 둘 다 무지막지해.”
물로 입안을 헹궈 남은 모래를 털어낸 세드릭이 중얼거렸다.
“우리 아가가 수도를 지키려다 되레 수도를 짓밟아버리는 불상사는 일어나지 않아야 할 텐데 말이야.”
뭐. 곁에 우리 용하고 그 재수 없는 악마도 붙어 있으니 괜찮…….
……아니, 오히려 그것들이 붙어 있어서 더 불안한데.
“말릴 이는 없고 깽판 칠 이는 셋이라…….”
이런. 삼가 수도의 명복을 빕니다.
그렇게 머나먼 수도 방향으로 애도를 표하던 세드릭의 앞.
까마귀 머리를 셋 달고 있는 악마 하나가 불쑥 솟아올랐다.
- 까아아악!
흩날리는 검은 깃털 사이, 까마귀 머리 중 왼쪽이 한껏 부리를 벌리고 소름 끼치는 소리로 울음을 토한다.
세드릭이 절레절레 고개를 저었다.
“……악마 중엔 정상적으로 생긴 이가 내 동생 곁의 그놈밖에 없는 건가.”
저게 무슨 참담한 외형인지.
72위의 악마 중 24위.
나베루스(Naberus).
이명, 시체 술사.
까마귀 머리 중 가운데가 부리를 달싹였다.
“황금색 머리를 보아하니 내가 잘 찾아온 모양이로군.”
“까마귀가 말을 하네.”
“아르티나의 후계자와 천덕꾸러기, 둘 중 누구지?”
“까마귀가 우리 가문을 알고 있네.”
“네가 누구냐고 물었다!”
“까마귀가 묻기도 하네.”
“이 건방진 인간이!”
“까마귀가 화도 내네.”
나베루스는 당황했다.
뭐야. 이 인간. 말이 하나도 안 통하잖아?
“너, 너는 필시 아르티나의 천덕꾸러기겠구나!”
“그러는 너는 필시 까마귀네.”
분노한 악마가 이를 악물고 도발을 펼쳤다.
“흥. 내 격이라면 후계자를 상대함이 걸맞은데, 고작 천덕꾸러기라니!”
“네가? 형님을?”
적을 열받게 하는 말재간엔 뛰어난 재주가 있는 세드릭이 피식 웃었다.
“형님이 왔으면 네 목 중 두 개는 이미 모래에 처박혔을 텐데. 아, 내 동생이 왔다면 노릇노릇 까마귀 통구이가 되었겠군.”
세드릭이 군침 돈다는 듯 혀로 입가를 쓸었다.
“별미겠어.”
나베루스가 씩씩 콧김을 뿜었다. 사정없이 돌아가는 저 인간의 혓바닥을 뽑아버려야 속이 시원할 것 같다.
“건방진 인간. 곧 후회하게 될 거다.”
“어우, 진부해. 신선한 대사 없어?”
악마가 쥐고 있던 뱀 머리 형상의 홀을 모랫바닥에 푹 내리찍었다.
“너도 나름 강해 보이긴 한다만, 일신의 강함만으론 이기지 못하는 적이 있지.”
까악 까악 웃던 악마가 돌연 눈을 번뜩였다.
“압도적인 숫자.”
이내 악마의 발밑에서 뭔가 꿈틀거린다.
모래를 덮고 사는 동물이나 곤충인가 했건만…….
- 파삭.
겹겹이 쌓인 모래를 뚫어내는 소리와 함께 솟구친 것은.
“……뼈?”
세드릭의 황당하다는 듯한 목소리 뒤로, 여기저기 백골이 솟아올랐다.
팔부터, 다리부터, 어떤 것은 머리부터.
이윽고 모래를 헤치고 기어 올라온 그것들은 다 말라비틀어진 인간의 형상을 하고 텅 빈 눈으로 비틀댔다.
“미쳤군.”
곱게 죽지 못했을 망자들을 억지로 깨워내는 그 끔찍한 광경에 세드릭이 눈을 바짝 찌푸렸다.
“끔찍한 능력이야.”
“아름다운 능력이지.”
일신의 힘 자체는 별 볼 일 없는 나베루스는 망자를 다룸에 있어선 대적할 이 없는 황제가 된다.
어느새 사막의 지평선 저 끝까지 안식으로부터 끌려 나온 망자들이 빼곡하게 서 있다.
겉으로 애써 태연한 척하던 세드릭은 속으론 식은땀을 흘렸다.
‘수로 따지자면 우리의 스무 배는 되겠어.’
사막에 묻혀 죽은 이들이 이렇게 많은 줄은 꿈에도 몰랐네.
그러나 사령관은 어떤 경우에도 패색(敗色)을 내비쳐선 안 된다.
하여 세드릭은 늘 그렇듯 여유롭게 웃으며 검을 겨눴다.
“아, 아쉽네. 우리 용용이만 있었으면 한 방 컷인데.”
***
허억. 허억.
턱 끝까지 차오른 숨이 혈향을 띤다.
끝도 없이 몰려드는 해골들의 바다에서 세드릭을 비롯한 기사들은 그야말로 휩쓸려가기 일보 직전이었다.
지금 이 순간, 이 사막은 저 악마가 완벽하게 파 놓은 덫이었고 세드릭과 기사들은 방비 없이 걸려든 산짐승이나 다름없었다.
해골 하나만 놓고 보면 감히 세드릭과 기사들에게 상처 하나 입힐 수 없는 수준이었으나, 죽여도 죽여도 달그락거리며 달라붙으니 어느 순간 생긴 작은 생채기가 온몸을 뒤덮었다.
‘젠장. 이러다간 전멸하겠군.’
하필 장소도 뜨거운 태양이 내리쬐는 사막.
흘끗 둘러보니 일부 기사들은 이미 탈진하여 혼미한 상태에서 본능적으로 검을 휘두르고 있다. 세드릭이 후방을 살폈다.
‘후퇴도 불가능하겠어.’
이미 전후좌우 모두 포위당했다.
세드릭의 얼굴에 언뜻 절망이 피어올랐다가 빠르게 가라앉았다.
‘그때 이브가 뭐라고 했더라…….’
땅에서 솟아오른 해골 하나가 세드릭의 발목을 붙잡았다.
하얗게 바랜 머리를 검으로 내리찍으며 그는 떠올렸다.
‘내게 운만 좋으면 왕을 소환할 수 있을 정도의 자연력이 쌓였다고 했던 것 같은데.’
그래, 이브가 코코아를 마시면서 투덜댔었지.
누구는 죽을 고비 넘겨 엘라임을 불러냈는데, 누구는 대정령사를 동생으로 두고 정령왕을 연인으로 두어 일평생 붙어 있는 바람에 자연력이 자연히 차곡차곡 쌓였다면서.
검을 휘둘러 해골 몇을 단번에 베어내며, 세드릭이 씩 웃었다.
‘밑져야 본전. 여기서 죽을 바엔 모험이라도 해 봐야지.’
성공하면 승전(勝戰), 실패하면 전멸.
판돈은 목숨이나 세드릭의 얼굴엔 긴장감 하나 없다.
아무렴, 무려 대정령사께서 해주신 말씀인데 틀릴 리가.
이제 남은 건 내 운이 닿느냐, 그것뿐.
검을 던져 해골에게 목 뚫리기 직전인 기사 하나를 구해낸 세드릭이 읊조렸다.
“추프리트.”
아차. 헷갈렸다.
“이프리트!”
***
일순 세드릭은 생각했다. 태양이 지상에 떨어진 것만 같다고.
그렇게 착각함이 이상하지 않을 정도의 열기가 사막 전체를 달궜다.
솟구치는 화염 사이, 웃통 벗은 채 삐딱하게 선 이프리트가 고개를 기울였다.
“날 부른 게 누군가 했더니. 너냐.”
“계약하자.”
“사내놈과 계약하는 취미 없다.”
“네가 원한다면 여자 하지 뭐.”
“하? 어디 해 봐.”
“호. 호. 호. 나는 세순이다. 나와 계약하자.”
가벼운 마음으로 해보라고 했건만 돌아오는 공격이 참으로 묵직하다.
표정 변화 하나 없는 기괴한 반응을 바라보던 이프리트가 휘청였다.
“……병아리 가문의 최고 또라이라는 말이 딱 맞네.”
“빨리. 계약. 내 기사들이 죽어가고 있잖아.”
“나는 내 나름대로 꿈꾸던 계약자가 있거든? 넌 거기에 전혀 부합하지 않고. 아니, 그보다 넌 페르세스 불러서 계약하면 되잖아! 걔는 좋다고 달려 나올 텐데!”
그러자 세드릭이 세상에서 가장 한심한 소리를 들은 것처럼 쯧쯧 혀를 찼다.
“너 연인 없지.”
“그, 그건 왜!”
“은애하는 연인에게 나 대신 싸워달라 부탁하는 멍청이가 어디 있나.”
“그럼 나는 뭐 전쟁통에 밀어 넣어도 되는 그런 만만한 정령왕이냐?”
“몰랐다면 유감.”
“하! 난 이런 싸가지 없는 계약자는 안 둬! 꺼져!”
“내가 여기서 해골이 되어 돌아가면 이브와 페르세스가 그대를 잘도 가만두겠군.”
그 말에 이프리트가 으득 이를 악물었다.
이 더러운 세상!
여동생 없고 연인 없는 정령왕은 서러워서 살겠나!
“자, 가라, 추프리트. 아니, 이프리트.”
“이, 이, 개자식, 내가 꿈꿔온 계약자가 고작 이딴 놈이라니……!”
부들거리던 이프리트의 분노가 그대로 해골 병사들에게 쏟아져 내렸다.
“으아아아아! 다 뒈져어어어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