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252화: 수도는 내가 지킨다!
그렇게 열아홉의 5월.
이벨리아가 아가레스와 함께 외출하여 시간을 보내는 일은 제법 잦아졌다.
봄의 문을 닫고 여름의 문지방을 넘기 전, 그 애매하게 들뜬 계절은 지금의 둘과 지독하게 잘 어울렸다.
양념이 잔뜩 묻은 꼬치를 베어 물며 이벨리아가 말했다.
“아무래도 일기 쓰길 참 잘한 것 같아.”
“그러게. 네게 이렇게 데이트 신청도 하고.”
“덕분에 우리 토끼가 자루에 처박히지도 않고.”
“내가 데이트를 신청하면 자루에 안 갇히는 상관관계인가 보군.”
“뭐. 비슷해. 근데 자꾸 데이트만 신청하면 가둬버릴 거야.”
“…….”
이브가 대체 뭘 원하는 거지.
어떻게 해야 자루에 갇히지 않는 건가.
골똘히 생각하는 악마의 미간이 설핏 좁아졌다.
“토끼야. 토끼야. 내가 줬던 목걸이랑 팔찌는 잘 가지고 있지?”
아가레스가 이벨리아의 입가에 묻은 양념을 엄지로 쓸어 혀로 핥으며 답했다.
“물론.”
“항상 지니고 있는 거지?”
“아공간에. 갑자기 왜?”
“그냥. 요즘 뭔가 조용하고 평화롭잖아. 내 인생 경험상 꼭 이런 때 예상하지 못했던 일이 터졌단 말이지.”
이벨리아가 꼬치를 한입 더 베어 물었다.
아가레스가 어김없이 이벨리아의 입가를 닦아 자신의 입으로 가져갔다.
수려한 손을 핥는 붉은 혀가 왠지 야살스러워 이벨리아는 조금 더 입을 크게 벌려 꼬치를 물었다. 최대한 입가에 묻지 않도록.
“밤엔 아직 춥다. 곧 여름이 올 텐데도.”
아가레스가 곧바로 외투를 벗어 이벨리아의 위에 덮어주었다.
성년이 된 지도 벌써 2년이 흘렀으나 악마에 비하면 훨씬 가녀린 몸이 빈틈없이 폭 덮였다.
시원한 박하 향이 은은하게 나는 외투를 만지작거리던 이벨리아가 투덜댔다.
“나 아마 이제 성장이 멈췄겠지? 어른이 된 지도 꽤 지났으니까?”
그 말에 아가레스가 살짝 내려간 눈꼬리로 이벨리아를 바라봤다.
그 눈빛이 흡사, 이렇게 작은 몸으로 이 험난한 세상을 어떻게 살아가나, 하는 그런 눈빛이었다. 꼭 세상을 오시하는 포식자가 자신의 앞발 근처에서 뒹구는 초식동물에게 보내는 것 같은.
“동정하지 마. 하르벤타엔 작은 고추가 맵다는 말이 있댔어.”
“작은 고추는 그냥 작다.”
“……자루에 처박힐래?”
그렇지 않아도 아르티나 가문 공식 최단신이 되어서 속상한데 말이야. 한껏 눈을 치켜세우고 작다고 무시 말라 경고하던 와중이었다.
봄의 끝자락을 부여잡고 발악이라도 하듯 난데없는 칼바람에 이벨리아가 몸을 바르르 떨었다.
“으으, 추워. 이 정도면 페르세스 언니가 화가 났나 본데?”
이벨리아는 아가레스가 덮어준 외투를 조금 더 여미고 자라처럼 목을 쏙 집어넣었다.
아가레스의 시선이 외투를 꼭 붙잡은 작고 흰 손으로 향했다.
그에겐 별 감흥도 없는 바람 따위가 이 여리고 약한 친우에겐 상당한 타격을 주는 모양이다. 손끝이 발갛게 물들어 있는 것을 보면.
악마는 자신의 두 손을 빤히 내려다보았다.
‘내 손은 뜨거운데.’
이벨리아의 얼굴을 다 덮고 남을 만큼 커다란 손.
‘내가 잡아주면 안 추울 텐데.’
“그러면 잡아줘.”
“……!”
“네가 잡아주면 안 추울 거라며.”
“생각만 했는데 어떻게…….”
“아주 크게 말했는걸. 꼭 들으라는 듯이.”
“…….”
악마가 귓가를 발갛게 붉혔다.
제멋대로 날뛰던 심장이 의지를 배반하고 입 밖으로 튀어나와 본심을 전했나 보다.
네 앞에 서면 바보가 되는 건 2년 전 데뷔탕트 때나 지금이나 매한가지다.
하지만 달라진 것도, 분명 있다.
언제부터였을까.
네게 닿는 손길에, 발길에, 말투에, 눈빛에, 표정에. 조금씩 다른 마음을 섞기 시작한 것은.
네 데뷔탕트. 너와 춤을 추면서 싹이 튼 걸까.
혹은 그 이후. 네가 자루를 건네며 손이 스치던 순간이었나.
그것도 아니라면 얼마 전, 네 방에서 묘한 침묵에 휘감겼을 때인가.
언제라고 명확하게 특징지을 수 없게 그 경계는 모호하다.
그럴 수밖에 없었다. 내가 네게 지닌 마음은 오래전부터 한결같이 오롯하고 깊었으니.
다만 네게 가닿는 형태가 달라진 것일 뿐.
기회를 놓치는 성정이 아닌 대악마는 망설이지 않았다. 주인의 허락이 떨어졌으니 망설일 이유도 없었다.
외투를 붙잡은 이벨리아의 두 손이 아가레스의 한 손에 소담하게 잡혔다.
안온하게 와닿는 온기에 이벨리아가 아가레스를 올려다보며 눈을 곱게 접어 웃었다.
“…….”
아가레스의 손에 자신도 모르게 힘이 들어갔다.
뭔가를 참아내는 것처럼 목 뒤가 뻣뻣하게 굳었다.
날이 갈수록 네게 조금 더 닿고 싶은 건.
한 발 뒤에서 지켜만 보는 것이 부족하게 느껴지는 건.
아마도.
감히 내가 너를…….
***
이벨리아는 아이스크림 하나를 사서 아가레스에게 내밀었다.
“이거 나눠 먹자.”
“……일부러 이러나.”
“뭘 일부러인진 모르겠지만, 난 너랑 나눠 먹고 싶어.”
하지만 토끼는 입을 벌릴 기색이 없다.
“안 먹을 거면 말고!”
어깨를 으쓱인 이벨리아가 커다랗고 부드러운 아이스크림의 오른쪽 윗부분을 핥았다.
“이제 먹을 거야.”
아가레스가 고개 숙여 정확히 그 위를 베어 물었다. 의도했나 싶을 정도로 같은 위치.
이벨리아가 멍한 표정으로 아이스크림을 바라봤다.
“…….”
“왜. 네가 먹으라며.”
“……어어. 그랬지.”
요망한 술수를 좀 부려보고자 했던 마음은 인정.
그런데 되로 주고 말로 받으니 외려 부끄러운 쪽은 자신이다.
‘참으로 만만치 않은 토끼일세.’
이벨리아가 한숨을 포옥 내쉬며 허공으로 시선을 돌렸다.
그러자 머리 위를 맴돌고 있는 익숙한 전서구 하나가 보인다.
“응? 저거 파라반트 마스터 전서구인데?”
이렇게 공개된 장소에서 웬일이지? 보통 마스터는 외부의 눈을 피한다는 명목으로 꼭 밤중에 방으로 전서구를 날렸었는데.
“꽤 급한 일인가 봐.”
이벨리아가 손을 뻗자 길들여진 전서구가 길게 소리 내며 손목에 내려앉았다.
아가레스가 전서구의 앞발에서 쪽지를 끌러 빠르게 훑었다.
눈동자가 아래를 향할수록 표정이 굳는다.
심상치 않은 일이라는 것을 직감한 이벨리아 역시 덩달아 심각한 표정으로 물었다.
“뭔데?”
“……아르티나 영지.”
***
소식을 알리고자 빠르게 달려왔건만, 일머리 좋은 마스터는 공작저에도 별도로 전서구를 보낸 듯했다. 아르티나 기사단이 오와 열을 맞춰 명령을 기다리고 있는 것을 보아하니.
이벨리아는 눈짓으로 기사들에게 인사를 건넨 후 그대로 공작저 안까지 뛰쳐 들어갔다.
오랜 외유 끝에 얼마 전 돌아온 엄마와 아빠를 비롯해 오라버니들까지 응접실에 모여 있었다. 하나같이 진중한 표정으로.
“아빠! 엄마! 이 새끼들이 우리 영지를 또……!”
“천천히, 이브. 넘어질라.”
“하지만 영지가!”
“이미 들었단다. 우리 쪽 첩보도 날아오고 있긴 하겠다만, 역시 파라반트가 빠르긴 빠르구나.”
부모님과 오라버니들은 평소보다 더욱 침착했다.
잠시 가족들을 훑던 이벨리아가 크게 심호흡했다.
그래. 우리는 이런 가문이지. 칼 겨누는 이들은 늘 앞에 있고, 지켜야 할 것은 등 뒤에 너무나도 많은.
이내 이벨리아가 차분하게 가라앉은 목소리로 물었다.
“저번처럼 둘씩 나눠 출정할까요?”
“그러기엔 공격받고 있는 영지의 수가 너무 많아.”
“그럼 다들 각자?”
“우리는 물론이고 기사들 중에서도 단독으로 군을 움직일 수 있는 장수들은 각기 사령관으로 출정해야 해.”
“……우리만으로 충분하기는 한가요?”
“아니. 황실과 카시스를 비롯한 몇몇 가문에서 지원 의사를 밝혀왔단다.”
흐음. 턱을 쓸던 이벨리아가 아르칸과 세드릭을 바라보며 말했다.
“우리 셋 중 하나는 수도에 남아야 해.”
“셋 다 죽으면 가문 명맥이 곤란해지긴 하지.”
쿠션을 끌어안고 턱을 괸 이벨리아가 고개를 저었다.
“꼭 그것 때문만은 아니야.”
“그럼?”
“불과 몇 년 전에도 우리 영지만 골라서 공격을 받았었어. 그리고 이번에도 마찬가지지.”
“우리 가문이 워낙 여기저기서 원한을 샀잖아.”
“원한. 그게 아니라면?”
“……?”
이벨리아가 장막 뒤 적의 의도를 가늠하며 말을 이었다.
“2년 전의 영지전은 일종의 실험이었을 수도 있어.”
“실험?”
“아르티나 영지를 치면 우리가 직접 수도를 비우고 달려오는지에 대한.”
“……!”
“저번처럼, 아빠, 엄마, 오라버니와 나. 게다가 이번엔 카시스의 지원군과 황실의 정예 기사들까지. 그렇게 모두 수도를 비우면…….”
세드릭의 팔에 오소소 소름이 돋았다.
“글쎄, 내가 적이어도 수도를 칠 것 같은데?”
이 자리 그 누구도 아니라 부정할 수 없다.
이건 명백한 함정이며, 동시에 걸려들지 않을 수 없는 덫이다.
제국의 심장이 수도인 것처럼 아르티나의 심장은 영지니까.
“그럼 어떻게 하면 좋겠니, 딸?”
이미 답을 낸 엘리시아는 그럼에도 딸에게 의견을 구했다.
이벨리아가 가족들을 찬찬히 둘러봤다.
“다들.”
사지를 떼어 줘도 아깝지 않을 가족들이 고개를 끄덕인다.
“다녀오세요. 수도엔 나랑 엔리르가 남을 테니까.”
아르칸이 즉각 반발했다.
“안 돼. 차라리 내가 남겠다.”
“……오라버니.”
“네 말대로라면 가장 위험한 곳은 수도잖아. 근데 너만 두고 가라고?”
“오라버니는 검을 쓰잖아.”
“네가 보기에 내 실력이 부족해서 그러는 거라면, 나도 이제…….”
“아니, 아니야, 오라버니. 난 지금 검의 한계에 대해 말하는 거야. 검은 어쩔 수 없이 힘이 한곳으로 집중될 수밖에 없잖아.”
“…….”
“수도에 필요한 건 사방위를 두루 공격하고 방어할 수 있는 능력이야. 만약 수도로 적들이 밀려들어 온다면, 한쪽 성벽만 방어해선 수성(守城)할 수 없으니까.”
구구절절 맞는 말이다. 아르칸이 입술을 짓씹었다.
“충분한 장수가 없는 시점에서 굳이 한쪽을 골라야 한다면, 여기엔 나와 엔리르가 더 도움이 돼. 오라버니보다.”
친절함 따윈 없는 지적이었다.
그럼에도 아르칸은 자존심 상한 기색 하나 없이 물러났다.
본디 전장에서 무장은 지장의 책략을 귀담아듣는 것이 장수하는 비결이라 배웠으니까.
한편, 휴고와 엘리시아의 속에선 천불이 일었다.
어떻게 우리 아가만 여기 두고. 왜 이런 상황이. 우리 아가는 아직 어린…….
“나 안 어려요. 엄마. 아빠.”
“……!”
“다 큰 지가 언젠데.”
휴고와 엘리시아가 한창 전장을 달리던 시절. 그때의 그들과 꼭 빼닮은 오만한 미소가 이벨리아의 입매에 그려졌다.
“수도는 걱정 말고. 우리 영지 잘 구하고 안전히 돌아와, 모두.”
얼른 가라고 등 떠미는 듯한 말. 아르티나 일가는 본능적으로 가장 믿음직한 이를 향해 고개를 돌렸다. 아가레스가 작게 끄덕였다.
방향이 정해지자 휴고는 망설이지 않았다.
공작저 밖으로 나선 휴고가 준엄한 표정으로 도열해 있는 기사단을 향해 말했다. 늘 그렇듯, 간결한 격문이었다.
“영지가 공격받고 있다. 수는 여럿.”
기사들의 분노와 호승심이 봄날의 대기를 뜨겁게 달궜다.
“영지는 미끼일 가능성이 크다. 적이 원하는 건 수도일 터.”
잠시 숨을 들이쉰 휴고가 피 끓는 심정으로 말을 이었다.
“수도엔 이벨리아가 남는다.”
기사들은 한치의 표정 변화도 없었다. 그들에게 아가씨란 감히 승리를 의심할 수 없는 주군이자 주인이니까.
“그러니 우리는 모두 무사하게, 신속히 돌아와야겠지.”
기사들이 일제히 검으로 땅을 내리찍었다.
쿵. 지축을 울리는 소리와 함께 짧은 기합이 내뱉어진다.
아르티나는 늘 전쟁 속을 걷는다.
하여, 출정에는 채 반나절이 소요되지 않았다.
***
늦은 저녁.
공작저에 홀로 남은 이벨리아는 부러 방이 아닌 응접실에 앉아 있었다. 사용인들의 불안을 가라앉히기 위한 방도였다.
‘아무래도 느낌이 좋지 않아.’
이렇게 대대적으로 아르티나를 수도 밖으로 끌어내다니.
‘어쩌면 내가 남을 것까지 예상했을지도.’
날 잡겠다는 소소한 목표일 수도 있고.
혹은 인마전쟁의 서막일 수도 있고.
어느 것을 가정해도 이상하지 않을 시나리오다.
이벨리아가 포옥 한숨 쉬며 창밖을 바라봤다.
“다들 싸움이야 잘하고 오겠지만 물자가 걱정이네.”
그러자 이벨리아의 무릎에 머리를 비비고 있던 엔리르가 고개를 갸웃했다.
“물자?”
“응. 다들 물자를 얼마 안 가져갔잖아.”
“그러고 보니까 주머니만 차고 갔네?”
엔리르가 자리에서 벌떡 일어나 앞발을 휘저었다.
“우리 돈 많잖아! 당장 밥이랑 약이랑 잔뜩 보내자!”
“기동력 때문이야. 속도가 생명인 영지 해방전에서 기마대의 기동력이 떨어지는 건 치명적이거든.”
“그럼 빠르게 가려고 짐을 다 덜어두고 간 거야? 내가 날기 전에 화장실에 가는 것처럼?”
“……비슷해.”
“가다가 배가 고프면 어떡해?”
“그래서 보통은 종군 상단을 고용해 물자를 조달하는데…….”
“그럼 우리도 종군 상단 사자! 나 보석 많아!”
“……바로 그게 문제야.”
이벨리아가 난감하다는 듯 미간을 찌푸렸다. 그러자 아가레스가 검지로 살살 펴주며 코코아를 건넸다.
“격전지의 수가 너무 많지?”
“응. 각 군마다 종군 상단을 딸려 보낼 수가 없어.”
이 대륙에 종군 상단은 얼마 없다. 이익을 최우선으로 삼는 상인들의 세계에서 종군 상단은 그야말로 기피 업종으로 통하기 때문이다.
먼 길을 오가는 거마비, 그동안 식자재를 신선하게 유지할 수 있는 보존비, 거기다 전쟁통에 상단을 안전히 호위할 용병 고용비까지.
상단이 부담해야 하는 금액 자체가 천문학적인 데다가, 심지어 상단원들의 목숨까지 걸고 전쟁터를 드나들어야 하니…….
이번 영지전처럼 격전지가 동시에 십수 개로 쪼개지면 종군 상단을 구하는 것도 보통 일이 아니게 되는 것이다. 애초에 인력이 없으니 돈으로 해결할 수 있는 문제도 아니었고.
“다른 왕국에 지원이라도 요청해야 하나…….”
우리 가족들, 우리 기사들. 전쟁터에서 배곯게 할 순 없는데.
만에 하나 영지전이 장기화되면 식량 조달이 승패 결정의 필수 요인인데.
이벨리아가 골머리를 앓고 있을 무렵이었다.
집사 하델이 공손하게 다가와 서신 한 장을 내밀었다.
“어디서 보낸 거지?”
“아우름 상단입니다, 아가씨.”
“네피르의?”
아마 내게 받은 은혜가 있으니 격전지 하나 정도는 종군하겠다는 의사일 터다.
지금 상황에선 그것마저도 감지덕지다.
이벨리아는 밀봉된 편지를 황급히 뜯어 정갈한 글씨를 훑었다.
「아우름은 금번 아르티나 영지전의 모든 격전지에 종군 상단으로 지원합니다. - N」
“……모든 격전지?”
헉. 이벨리아가 숨을 들이켰다.
지금 온 건 과거의 은혜 갚기 수준의 것이 아니었다.
그날 물안개 낀 새벽, 이벨리아가 건넨 주머니 하나 차고 떠난 지 어언 10년.
이제는 명실상부 제국 5대 상단으로 급부상한 신흥 상단 아우름의 젊은 상단주-.
네피르가 내민 도움의 손길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