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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녀님의 꽃밭에는 그들이 산다-251화 (251/323)

##  251화: 친구인 토끼, 사내인 악마

이벨리아는 결국 자루의 효능에 대해 자세히 묻지 못했다.

‘왠지 알면 안 되는 걸 알게 될 것 같은 기분이었어.’

사실은 우리 아빠가 납치 결혼을 당했다거나……?

‘아니지. 세상천지 어떤 소드마스터가 자루에 담겨 납치를 당하겠어.’

이벨리아는 엄마가 산적처럼 호탕하게 웃으며 아빠를 자루에 담아 발로 밟는 상상을 애써 떨쳐내고자 고개를 저었다.

여하간, 약혼에 대해 물으러 갔다가 뇌리에 박힌 건 자루 하나다.

‘효험이 좋은 자루라…….’

침대에 드러누운 이벨리아는 때마침 간식을 들고 들어오는 테사에게 부탁했다.

“테사. 나 두꺼운 노트 하나만 구해다 줘.”

“세상에, 우리 아가씨께서 노트를 찾으시는 날이 올 줄이야!”

“그리고 자루도 하나.”

“자루요? 펜 한 자루면 될까요?”

“아니. 그냥 자루. 포대자루.”

“네에? 그건 어디다 쓰시려고요?”

이벨리아가 볼을 긁적이며 답했다.

“으음. 토끼 사냥.”

***

며칠 뒤.

이벨리아는 두꺼운 노트 한 권과 자루를 들고 비밀기지로 갔다.

벽난로 근처. 탄탄한 등을 문 쪽으로 향한 채 뭔가 만지작거리고 있는 토끼가 보인다.

‘목표물 포착!’

이벨리아는 노트를 테이블에 내려두고 자루를 오른손에 쥔 채로 살금살금 사냥감에게 다가갔다.

‘이대로 그냥 오늘 확 낚아채 버려?’

잠시 고민하던 찰나. 본디 기척에 예민한 아가레스는 어김없이 한발 빨리 뒤를 돌아 늘 그렇듯 다정한 음성으로 친우를 반겼다.

“이브. 왔어?”

“쳇. 재빠른 토끼 같으니.”

“……?”

투덜대던 이벨리아는 아가레스가 만지작거리고 있던 무언가에 시선을 두었다.

“내가 좋아하는 꽃이네?”

악마가 민망하다는 듯 꽃을 매만지고 있던 손을 뗐다.

“이걸 꽂아두면 네 기분이 좋아질 것 같아서.”

픽. 이벨리아가 웃었다.

내 기분이 좋아지는 건 이 꽃 때문이 아니라 네 작은 배려 때문이라는 걸 너는 알까.

‘오늘은 자루 행 봐준다.’

흡족해진 이벨리아는 토끼를 자루에 집어넣는 대신 그저 불쑥 내밀었다. 아가레스의 코앞으로.

“……?”

“토끼야. 이 자루 보니까 어때?”

“뭘 담아올까.”

“내가 뭘 담고 싶어서 가져왔을까?”

흑표범처럼 탄탄한 목이 살짝 옆으로 기울었다. 의도를 모르겠다는 뜻. 그에 이벨리아가 환히 웃으며 아가레스의 손을 펴 자루를 쥐여주었다.

“얼른 눈치채는 게 좋을 거야. 그렇지 않으면 그 자루에 들어가는 건 토끼가 될 테니까.”

“……나를?”

“응. 깊은 밤 토끼가 자는 새에 몰래 자루에 넣고 끝을 꽁꽁 묶은 다음 질질 끌어서 내 방으로 데려갈 거야.”

“…….”

이벨리아가 까치발을 들어 아가레스에게 바짝 다가갔다. 그리고 위협하듯 작게 속삭였다.

“그러고 나서는 어떤 일이 벌어질지 장담할 수 없어.”

자칫하면 입술이 맞닿을 듯 가까운 거리.

“그러니까 똑똑하게 잘 생각해. 알았어?”

경계가 허물어지는 그 거리에서 씩 웃음 짓고 휙 돌아 걸어간다.

그 뒷모습을 진득하게 바라보던 아가레스가 자루를 꽉 움켜쥐었다.

깊은 밤. 네 방.

“……너야말로 무슨 일이 벌어질 줄 알고.”

***

뒤에 친구인 토끼가 아니라 사내인 악마 하나가 도사리고 있다는 건 꿈에도 모른 채, 이벨리아는 어느새 비밀기지에 옹기종기 들어찬 친구들을 향해 두꺼운 노트를 번쩍 치켜들었다.

“다들 이것 좀 봐!”

그러자 서류를 읽던 루드비히와 모닥불 앞에서 꾸벅꾸벅 졸던 엔리르가 대번에 관심을 보였다. 아가레스 역시 깊이 깃든 탐욕을 털어내고 평소와 다름없는 눈으로 이벨리아를 바라봤다.

“웬 노트야? 반성문 쓰게?”

“누나 예전에 쓰던 반성문 아직도 다 못 끝냈으면서.”

“그거 8년 되지 않았어?”

“……내가 매일 반성문만 쓰는 줄 알아? 이건 일기장이야.”

그 말에 루드비히가 푸핫 웃음을 터뜨렸다.

“이브와 일기장이라. 지독하게 안 어울리는군.”

“네가 황태자라고 해서 내가 널 못 때릴 거로 생각했다면 오산이야.”

꼭 주먹 쥔 이벨리아가 팔을 내뻗으며 입으로 쉭쉭 소리를 냈다. 이젠 이벨리아의 작은 주먹 따위 우스울 정도로 자란 루드비히가 가볍게 잡아챘다.

“이미 많이 맞아봐서 너무 잘 알지. 근데 갑자기 일기는 왜?”

“며칠 전에 엄마가 일기장을 보여줬거든!”

거기엔 정말 많은 것들이 담겨 있었다.

엄마가 나를 품고 얼마나 행복했는지, 나를 낳고 얼마나 기뻤는지, 우리 남매가 크면서 벌였던 온갖 사건 사고에 얼마나 마음을 졸였는지.

“엄마가 사랑하는 사람들에 대한 기록이 빼곡하더라.”

이벨리아가 아직은 빈 노트 표지를 손으로 쓸었다.

“나도 남겨두고 싶어. 너희와 뭘 하고 놀았는지, 어떤 얘기를 하면서 웃었는지, 전부.”

별로 특별할 것 없는 하루라도 내겐 결코 잊고 싶지 않도록 찬란하니까.

그 말에 깊이 감명받은 용이 커다란 눈망울을 글썽이며 앞발을 번쩍 들었다.

“나! 나도 쓸래! 같이 쓸래! 나도 다 기억할 거야!”

“허락해준다면 나도.”

“비웃어서 미안. 나도 쓸래.”

이벨리아가 하는 일이라면 뭐든 좋은 악마와 외사랑 하는 이의 기억 한구석이나마 오래도록 차지하고 싶은 황태자도 마찬가지로 손을 들었다.

그렇게 이벨리아의 말 한마디에 홀랑 설득당한 팔랑귀 셋.

어느새 그들에게 일기란 이 세상 그 어떤 것보다 고결한 목적을 가진 것으로 변모해 있었다.

결의를 담고 반짝이는 세 쌍의 눈동자. 이벨리아가 입꼬리를 미약하게 씰룩였다.

“나 혼자 쓰려고 했는데…… 너희가 정 그렇다면 뭐, 좋아. 우리 돌아가면서 쓰자!”

“돌아가면서?”

“응. 이 일기장을 비밀기지에 둘 테니까, 하루에 한 명씩 돌아가면서 일기를 쓰는 거야. 바쁘면 건너뛰어도 되고, 쓰고 싶은 말이 있다면 하루에 두 명이 써도 괜찮아.”

동시에 서로를 바라본 세 사내가 인상을 팍 찌푸렸다.

이브가 있어서 찬란한 하루에 저것들이 끼니 혼탁하기 그지없다.

“쯧. 돌대가리 용과 황태자가 낀다는 건 언짢지만, 네 뜻이 그렇다면 따르지.”

“나 돌대가리 아니야! 용대가리야!”

“자랑이다, 멍청아.”

그새를 못 참고 옥신각신하는 친구들을 가볍게 무시한 채, 이벨리아는 두꺼운 펜을 들어 노트 앞에 글씨를 새겼다.

「우리의 오늘」

그러자 기웃 목을 뺀 루드비히가 첨언했다.

“그렇게 쓰면 우리가 누군지 모르잖아.”

“오. 역시 황태자. 예리하긴.”

이벨리아가 줄을 바꿔 아래 또박또박 글자를 덧붙였다.

「아가레스, 루드비히, 엔리르, 이벨리아」

“자, 됐다!”

“글씨 여전하다, 너.”

“우리 누나 글씨는 엉망이야. 내 이름이 언리르처럼 보여.”

“……오늘은 내가 먼저 적을게! 저기 가서 몰래 적고 올 테니까 너희는 아직 보면 안 돼!”

글씨에 대한 규탄을 애써 무시한 이벨리아는 일기장을 안고 벽난로에서 조금 떨어진 테이블로 종종 걸어갔다.

입가에 잔잔한 미소를 띠고 사각사각 펜을 움직이는 것이, 아마 오늘 있었던 행복한 일들과 방금 나눴던 대화를 복기하여 적고 있는 듯하다.

오두막의 작은 창을 통해 가을 햇살이 산개하듯 내리쬈다.

친애하는 구원을 바라보던 두 사내와 한 용은 동시에 생각했다.

저 노트가 가득 차고.

또 그다음 노트가 빼곡히 적히고.

셀 수 없이 많은 노트가 빈틈없이 쌓이더라도.

그럼에도 그 모든 책장 너머 우리의 오늘엔 늘 네가 있었으면 좋겠다고.

***

[르노아 대륙력 1046년 9월 14일]

작성자 - 기분 좋은 이브.

일기장을 비밀기지에 가져왔다. 이놈들이 비웃을 줄은 이미 예상했다.

준비해온 말을 술술 내뱉으니 하나같이 눈을 반짝이며 본인들도 쓰겠다고 달려들었다.

단순한 바보들. 전부 내 계획대로다.

***

[르노아 대륙력 1046년 9월 15일]

작성자 - 루드비히.

일기가 본디 위와 같은 것이었나.

내가 알던 일기의 정의와는 심히 다르군.

여하간 내가 네 잔꾀에 넘어간 것은 잘 알았다.

***

[르노아 대륙력 1046년 9월 16일]

작성자 - 대단한 용.

책을 읽어보니 일기는 하루의 일을 기록하는 거랬다.

먹고 시원하게 쌌다.

낮잠 잤다.

기사단의 머리를 두들겨 팼다.

집주인의 보석을 몇 개 훔쳐 왔다.

끗.

***

[르노아 대륙력 1046년 9월 17일]

작성자 - 토끼.

끗 아니고 끝이다. 멍청한 용.

오랜만에 이브의 검술 훈련을 도왔다.

말로만 듣던 주화입마의 경지를 본 것 같다.

대체 어디서부터 잘못된 것인가.

***

[르노아 대륙력 1046년 9월 18일]

작성자 - 배신당한 이브.

토끼야.

분명 어젠 나 잘한다고 했잖아…….

머리도 쓰다듬어 주고 손뼉도 쳐줬잖아…….

다 거짓이었어?

가만, 자루가 어디 있더라.

***

[르노아 대륙력 1046년 11월 11일]

작성자 - 루드비히.

하르벤타 황태녀의 대관식 날이다.

그 천방지축 불덩어리가 황제라니, 하르벤타가 어떻게 될는지.

그런데 어제 이브의 일기가 비어 있는데…….

너 설마?

***

[르노아 대륙력 1046년 11월 13일]

작성자 - 돌아온 이브.

헤헤. 재밌었다.

깜짝 놀란 이샤트 표정이 웃겼다.

***

[르노아 대륙력 1046년 11월 13일]

작성자 - 엉덩이가 아픈 용.

누나랑 빨간 인간의 대관식에 다녀왔다.

내가 용으로 변해서 누나를 등에 업고 날아갔다.

구름 속에 숨어 날았으니까 아무도 우리를 못 봤을 거다.

집주인에게는 비밀로 하고 나를 닮은 지푸라기 인형을 만들어두고 갔는데 돌아오자마자 들켜서 엉덩이를 맴매 당했다.

***

[르노아 대륙력 1046년 11월 14일]

작성자 - 서러운 토끼.

나도 잘 날 수 있는데.

***

[르노아 대륙력 1046년 12월 2일]

작성자 - 잔뜩 짜증 난 이브.

이샤트가 연금술사들의 거점에 대한 정보를 보내왔다.

빌어먹게 추운 겨울, 빌어먹게 추운 산맥에 있다고 한다.

루이, 나 아스랑 엔리르 데리고 금방 다녀올게!

토끼, 여우, 병아리 연합 출동이다!

***

[르노아 대륙력 1046년 12월 5일]

작성자 - 대단한 용.

누나와 함께 산맥으로 날아가보니 연금벌레들이 알이라도 낳은 것처럼 우글바글댔다.

브레스를 뿜었다.

크와앙.

끝.

나 대단한 용.

***

[르노아 대륙력 1046년 12월 6일]

작성자 - 아가레스.

크와앙 끝은 무슨.

너 도끼에 꼬리 맞고 펄쩍 뛰는 거 다 봤다.

일기에서 사기를 치고 있네.

오늘도 이브가 내게 자루를 줬다.

……여기 널 넣어서 들고 가고 싶은데.

***

[르노아 대륙력 1047년 1월 2일]

작성자 - 눈이 퉁퉁 부은 이브.

오라버니와 렐리안이 혼인했다!

세상에, 진짜 이런 날이 올 줄이야!

오라버니가 그렇게 긴장한 건 처음 봤다.

그리고 혼약식에서 신부가 그렇게 우는 것도 처음 봤다.

렐리안은 거의 식장이 떠나가도록 꺼이꺼이 울었다.

그걸 보던 오라버니도 함께 울었다.

그리고 내가 제일 크게 울었다.

요약하자면, 난장판이었다.

***

[르노아 대륙력 1047년 1월 3일]

작성자 - 토끼.

네 버진로드는 짧게.

기억하고 있다.

***

[르노아 대륙력 1047년 1월 4일]

작성자 - 루드비히.

나도 짧은 버진로드를 선호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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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르노아 대륙력 1047년 1월 4일]

작성자 - 아가레스.

네 취향엔 관심 없다.

네가 낄 자리도 없고.

***

[르노아 대륙력 1047년 2월 20일]

작성자 - 괴도 용.

물 빠진 보라 인간이 맛있는 간식과 보석을 보내왔다.

예전에 누나가 준 돈주머니로 부자가 된 모양이다.

나도 더 분발해야겠다.

며칠 전부터 집주인이 뭔가 분주하니 이 틈을 타서 보석을 훔쳐야겠다.

***

[르노아 대륙력 1047년 3월 1일]

작성자 - 루드비히.

귀족 회의를 가보니 공작 자리에 소공작이 앉아 있었다.

혹시 공작의 몸이 좋지 않은지 묻자, 소공작이 참담한 표정으로 답했다.

간밤에 공작과 공작부인이 야반도주를 했다고.

남겨진 쪽지에는 ‘파업’ 두 글자만 남아 있었다고 한다.

대체 어디로 간 거냐고 물으니 소공작도 모른단다.

……여하간 공작이 튀었는데 별수 있나.

하루빨리 소공작을 정식으로 공작위에 봉하는 수밖에.

***

[르노아 대륙력 1047년 3월 1일]

작성자 - 부모님을 잃은 이브.

엄마아…….

아빠아…….

어디로 도망갔어……?

***

[르노아 대륙력 1047년 3월 17일]

작성자 - 토끼.

수도에 2급 균열 출현.

이브의 명에 따라 섬멸 완료.

***

[르노아 대륙력 1047년 4월 3일]

작성자 - 루드비히.

폐하의 지병이 깊어졌다.

어의들이 말하길, 1년을 넘기긴 어렵다고 한다.

고작 이럴 거. 당신은 왜 그렇게…….

***

[르노아 대륙력 1047년 4월 3일]

작성자 - 이벨리아.

이거만 써놓고 어딜 그새 사라졌어.

기다려. 찾아갈게.

항상 말했잖아.

네가 기댈 곳, 여기 내가 있다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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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르노아 대륙력 1047년 4월 4일]

작성자 - 아가레스.

원한다면 내가 고쳐줄 수 있다.

***

[르노아 대륙력 1047년 4월 5일]

작성자 - 루드비히.

고맙지만 사양하지.

군주에겐 제때 죽는 것만큼 호상이 없으니.

폐하의 서거 이후를 대비해야겠다.

벌써 에드윈 측근들의 움직임이 심상치 않아.

이브, 너도 조심해.

***

[르노아 대륙력 1047년 4월 6일]

작성자 - 이벨리아.

나 대정령사야.

먼저 덤벼주면 감사하지.

***

[르노아 대륙력 1047년 4월 27일]

작성자 - 토끼.

봄이다.

네가 좋아하는 꽃이 많이 폈다.

데이트, 어떻게 청하면 좋을까.

일기인 척 여기에 고민을 남겨두면 네가 응해줄까.

***

[르노아 대륙력 1047년 4월 27일]

작성자 - 행복한 이브.

네가 청하려는 데이트 상대가 나라면.

대답은…… 좋아!

당분간 자루는 주지 않을게.

상관관계는 토끼가 파악하도록.

***

[르노아 대륙력 1047년 4월 27일]

작성자 - 악룡.

기분이 더러워.

그걸 왜 여기다 적어?

놀리는 거야, 뭐야.

못된 악마 새끼. 가만 안 둬.

***

[르노아 대륙력 1047년 4월 27일]

작성자 - 폭군.

못된 악마 새끼. 가만 안 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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