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250화: 쪽, 네 손에 묻은 꿀이 달아
제각기 왁자지껄 떠들어대던 참석자들은 어디선가 날아오는 따가운 시선을 느꼈다.
‘뭐지. 뭐가 뒤통수를 마구 찌르는 기분인데.’
눈치 빠른 이들이 슬그머니 고개 돌려 시선의 근원을 찾았다.
저쪽. 이 제국 실세란 실세는 죄다 모여 있는 연회장 한가운데.
‘공녀님께서 잠드셨군.’
‘몹시 피곤하셨을 법도 하지.’
‘이른 시간부터 얼마나 고생하셨을까.’
참석자들은 이 연회의 주인공이 과음하여 뻗어버린 것이라고는 감히 상상조차 하지 못했다.
그도 그럴 것이, 세상천지 누가 본인이 개최한 연회에서 술이 떡이 되어 잠들어버리겠는가.
‘공작 각하께서 눈으로 말씀하고 계시네. 닥치라고.’
‘대악마와 정령왕도 우릴 노려보고 있어…….’
‘공녀님께서 깨시면 우리 모가지도 깨지겠군.’
생존이 걸리면 인간의 눈치는 기하급수적으로 상승한다. 참석자들은 일제히 술잔을 내려두고 하인들에게 눈짓했다.
‘저 포식자들에게서 우리를 좀 구해내거라.’
‘편히 머물 수 있는 곳으로 안내해줘, 제발.’
어차피 오늘 밤 그들은 모두 별채에서 묵게 될 테니, 그곳에서 마음 편히 여흥을 즐기는 것이 낫겠다.
참석자들이 꾸물대며 연회장 밖으로 나갈 기미를 보이자 휴고가 말했다.
“별채에 부족함 없는 술과 음식을 보내겠네. 원하는 만큼 즐기도록.”
역시 굴지의 공작가. 이 대인원을 맞이하여 음식과 방을 내어주는 것에 부담감 따윈 일절 보이지 않는다.
거나하게 취한 참석자들이 소리 죽여 웃으며 연회장을 빠져나갔다.
연회장 문이 완전히 닫힌 뒤.
휴고의 눈에 섬찟한 불길이 튀었다.
“잠든 게 아니라 혼절한 것으로 보이는데. 무슨 일이 있었던 거지?”
이벨리아의 음주를 막지 못한 죄인들이 일제히 시선을 피했다.
“무슨 일이 있었냐고 묻지 않나.”
“……술을 먹었다.
“아주 순식간에 먹었어.”
“작은 밥풀답게 굉장히 빨랐지.”
“응. 응. 용의 대단한 눈으로도 미처 보이지 않았어.”
“내 딸은 몸치다. 빨라 봤자 뭐가 얼마나…… 후, 아니, 됐다.”
휴고가 하나같이 이름값 못하는 이들을 한심하다는 듯 바라보며 이마를 짚었다.
술. 술이라니. 성년식 날에 기다렸다는 듯이 술이라니!
게다가 이렇게 취할 정도면 웬만큼 적당히 마신 것도 아닐 터다.
마침 같은 의문을 가지고 있었는지 엘리시아가 고개를 기울이며 물었다.
“대체 얼마나 마셨길래?”
“보드카 한 잔.”
“한 동이?”
“아니, 한 잔.”
“한 잔? 한 자안?”
애걔, 고작?
무려 내 딸이 고작 그걸 먹고 이렇게 취했다고?
“이상하다? 나랑 휴고는 술을 동이째로 퍼부어도 끄떡없는데?”
“저도 그렇습니다, 어머니.”
“저도요.”
아르칸과 세드릭이 시선 돌려 엔리르를 바라봤다.
마치 너는 어떻냐고 묻는 듯. 잠시 눈을 깜박이던 엔리르가 환하게 웃으며 번쩍 손을 들었다.
“나! 나도 이깟 액체 아무렇지도 않지!”
“봐, 우리 가족은 전부 말술인데 이브만 예외였다니.”
세드릭이 안타깝다는 듯 고개를 저었다. 여동생과 대작하는 건 아무래도 무리겠네.
한편, 아르칸은 루드비히에게 물었다.
“전하. 이브 술버릇 있습니까?”
“……있다.”
“어떻습니까? 아주 귀여웠겠지요?”
그에 대한 답은 엉뚱한 곳에서 들려왔다. 밟힌 잔디처럼 풀이 죽은 마르바스가 입을 주욱 내밀고 툴툴댔다.
“땅콩 폐하다운 술버릇이었어.”
“그게 무슨 말이지?”
“취한 와중에도 내겐 아무것도 안 줬어…… 아무것도…….”
“……?”
“심지어 저 인간한테도 푸딩 없는 푸딩 그릇을 줬는데 나한텐 아무것도 안 줬다고…… 이 녀석 취한 거 아닐지도 몰라.”
취한 와중에 어쩜 이렇게 칼같이 악마 차별을 해?
그때, 부하의 투덜거림을 들어줄 생각이 전혀 없는 아가레스가 이벨리아의 머리를 받치며 조심히 몸을 일으킨 뒤 무릎 아래로 손을 넣어 번쩍 들어 올렸다.
“재우러 간다.”
“가긴 어딜 가! 내 동생 내놔!”
“이브의 파트너가 네놈은 아닐 텐데.”
“연회가 끝났으니 파트너도 끝이지!”
“나의 왕께선 분명 오늘 하루, 곁을 지키라고 명하셨다.”
그리고 아직 날이 바뀌지 않았지.
세드릭의 항변을 깔끔하게 무시한 아가레스가 뒤돌아 걸음을 옮겼다.
휴고가 낮은 목소리로 경고했다.
“선 지켜라.”
“그 선이 한 평짜리 감옥이라도 감히 넘을 생각 없다.”
“곧바로 테사에게 맡기도록.”
“물론.”
단호하게 답한 아가레스가 연회장을 나섰다.
이미 시야에서 벗어난 뒷모습을 한참 좇던 휴고가 못마땅하다는 듯이 이를 갈았다.
“……쯧, 되지도 않는 놈팡이가.”
저딴 녀석에게 내 딸의 첫 춤을 도둑맞을 줄이야.
***
이벨리아의 방까지 가는 길이 이리도 먼 줄은 몰랐다.
아니, 분명 물리적으론 가까운 거리였으나, 아가레스에겐 세상 끝과 끝을 이은 것처럼 한없이 멀게만 느껴졌다.
취해 의식 없는 상태에서 내뱉은 숨결이 뜨겁다. 무의식적으로 뒤척이는 보드라운 몸이 악마의 손을 간지럽혔다.
“……제발 가만히 좀.”
“우웅…….”
이 와중에도 대답은 잘만 하네.
걸음을 조금 더 빠르게 놀려 방에 도착한 아가레스는 황급히 테사에게 이벨리아를 넘겼다. 마치 폭탄을 넘기듯.
“어머. 아가씨!”
“술을 마셨다. 벌컥벌컥.”
“아이고, 세상에! 그리 조심하시라 일러드렸건만!”
주인님과 마님께서 술을 물처럼 드시는 괴상한 능력을 지니고 계시니 우리 아가씨께서도 괜찮으시겠지 싶었는데.
안타깝게도 우리 아가씨만큼은 그 특이한 능력의 혜택을 받지 못하신 모양이다.
“아가씨의 침실 시중은 제가 들 터이니 각하께선 이만 돌아가 보시지요.”
“…….”
“각하?”
“……다른 뜻이 있는 건 아니다. 절대.”
“예?”
“이브가 편히 잠드는 것까지만 보고 가겠다.”
“하지만 아가씨께선 지금 목욕을 하셔야 하는데…….”
잠시 멀뚱멀뚱하게 서 있던 악마의 얼굴이 한여름 태양처럼 붉어졌다.
당황하는 일이 드문 악마가 어울리지 않게 허둥댔다.
“나, 나갈 거다. 끝나면, 끝나면 부르도록.”
도망치듯 다급히 나가면서도 혹여 아가씨의 단잠에 방해가 될까, 세게 닫히는 문을 붙잡아 살짝 놓아두는 태도는 조심스럽기만 하다.
한마디 말로 대악마를 방에서 몰아낸 테사가 후후 웃으며 이벨리아의 이마를 부드럽게 쓸었다.
“우리 아가씨. 곧 봄날을 맞이하시겠네.”
***
정처 없이 공작저를 떠돌며 열을 삭이던 아가레스의 귀에 하녀들의 말소리가 들려왔다.
“아가씨께서 술을 드셨다던데.”
“숙취가 심하실 텐데 걱정이네. 이따 주방장님께 꿀물이라도 부탁드려야겠어.”
토끼의 귀가 쫑긋 세워졌다.
숙취. 사전적 의미로는 이튿날까지 깨지 아니하여 괴롭게 만드는 취기.
일생 단 한 번도 느껴본 적 없는 그가 미처 세심히 신경 쓰지 못했던 것이다.
‘내가 안일했군.’
이브가 내일 불편함을 느껴서야 곤란하지.
숙취와 꿀물의 상관관계는 전혀 알 수 없지만, 어쨌든 인간들은 술을 꿀로 중화시키는 모양이다.
새로운 정보를 알게 된 악마는 곧장 주방 쪽으로 걸음을 옮겼다.
주방은 별채로 간 참석자들의 음식을 만드느라 늦은 밤까지 불 꺼질 새 없이 분주했다.
아가레스는 국자를 들고 고래고래 소리치며 주방을 진두지휘하고 있는 세토의 뒷덜미를 붙잡았다.
“거기, 왜 얼이 빠져 있어! 고기 다 삶아…… 어억!”
“이봐.”
“아, 아, 아, 악마님!”
“꿀 내놔.”
“꾸, 꿀이요? 혹시 오늘 식사가 영 마음에 안 드셨습니까? 악마님께서 꿀을 좋아하시는 줄 미처 모르고…….”
“이브가 술을 마셨다.”
“아, 아아. 아이고, 우리 아가씨께서 지지를 드셨군요. 꿀물이 필요하신 거라면 제가 진하게 타서 올려드리겠습니다.”
“내가 탄다. 꿀과 물을 내놔.”
후작 각하께서 꼬물꼬물 꿀물을 타시는 건 영 상상이 안 돼서요.
마음에서 우러나는 말을 애써 밀어 넣은 채, 세토가 찬장을 열어 거대한 꿀단지를 꺼낸 다음 꿀물을 탈 작은 컵과 함께 건넸다.
“여기 있습니다. 적당히 섞으시면 됩니다!”
그런데 순순히 고개를 끄덕이던 악마님은 그가 내민 컵 따위엔 시선도 주지 않은 채로 거대한 꿀단지에 그대로 물을 콸콸 부어버렸다.
“……지, 지금 뭐 하시는……?”
“꿀과 물을 섞었는데.”
“그 꿀단지에 물을 부어버리시면 어떡합니까!”
“……?”
“그거 다 드시면 우리 아가씨 당뇨로 죽습니다!”
“이브는 단 걸 좋아한다.”
“그건 곰이 먹어도 쓰러질 양입니다!”
“이브는 곰보다 많이 먹어.”
“우리 아가씨는 그 꿀단지 들지도 못하실 겁니다!”
“내가 입에 넣어줄 거다.”
“게다가 그 꿀은 공작저에 남은 꿀 전부란 말입니다!”
“새로 사. 뭐가 문제지?”
그렇게 주방의 꿀을 죄다 꿀물로 만들어버린 악마 새끼…… 아니, 악마님은 어느 동화 속에 나오는 꿀에 환장한 곰돌이처럼 꿀단지를 안고 휑하니 사라져버렸다.
뒤에 남은 세토가 망연자실한 얼굴로 국자를 추욱 내렸다.
“당장 내일 아침에 우리 아가씨 드릴 꿀빵을 못 만드는 것이 문제지요…….”
***
테사의 눈이 휘둥그레졌다.
“가, 각하, 그건 뭔가요?”
“꿀물.”
“……꿀물을 컵이 아니라 항아리에 타오셨어요?”
“얼마나 먹어야 숙취가 없어지는지 몰라서.”
테사는 생각했다. 후작님께서 꿀물이 숙취에 좋다고 알고 계셔서 정말 다행이라고.
행여라도 황금이 숙취에 좋다고 아셨어 봐라. 세상 모든 황금이 우리 아가씨 입에 퍼부어졌을 터다.
경악한 테사의 시선을 무심히 흘려넘긴 아가레스가 꿀물 항아리를 들이밀었다.
“지금 먹여야 내일 아침에 머리가 안 아프다던데.”
“그, 그건 맞지요. 잠시 아가씨를 깨워야겠네요.”
뽀송뽀송하게 씻긴 채로 침대에 널브러져 있던 이벨리아가 본능적으로 이불을 파고들었다.
아가레스가 꿀단지를 들고 이벨리아의 침대 모서리에 앉았다.
“이브.”
“…….”
“꿀 먹자.”
“…….”
“이거 안 먹으면 너 내일 아프대.”
“…….”
곤히 잠들었는지 색색 소리만 들려온다.
아가레스는 꿀을 한 숟갈 퍼서 이벨리아의 코앞에 들이댔다.
킁킁. 단 냄새를 맡은 오뚝한 코가 움찔 흔들렸다.
이내 푸른빛 눈이 아주 작게 뜨인다.
“……맛있는 냄새…….”
“아 해봐. 먹여줄게.”
아가레스는 자신의 손에 비해 심히 작은 티스푼으로 연신 꿀물을 떠서 이벨리아의 입에 흘려 넣어주었다.
목말랐던 꿀벌처럼 잘도 받아먹던 이벨리아가 살짝 고개를 돌리는 바람에 입가에 흘러내리는 꿀물 한 방울.
아가레스가 본능적으로 검지를 뻗어 닦았다.
달콤한 것을 놓치고 싶지 않았던 이벨리아는 입술 가까이 다가온 악마의 손가락을 쪽 빨아 꿀을 훔쳤다.
벼락같이 내리친 감각에 악마가 그대로 굳어버린 것도 모른 채, 이벨리아가 중얼거렸다.
“손가락이 단 거야…… 꿀이 단 거야…….”
아니야.
“……어쩌면 내 기분이 아주 단 걸지도 몰라.”
헤헤.
꿈과 현실의 경계에 선 이벨리아가 푸른 눈을 혼몽하게 뜨고 웃었다.
악마에게는 세상 그 어느 꿈결보다 아름답게 내리 앉은 밤이었다.
***
성년식 겸 데뷔탕트 이후.
해가 한번 바뀌어 새해의 칼바람이 불 때까지 이벨리아에겐 제법 번거로운 날들이 이어졌다.
주된 원인을 찾자면, 성년이 되었음에도 아직 약혼하지 않은 이벨리아의 귀책이 2할, 그런 대제국 공녀를 탐내는 이리떼들의 탐욕이 8할이라 볼 수 있겠다.
그나마 에르카디아 제국에선 아르티나와 루페르트가, 하르벤타 제국에선 이샤트와 아드니엘이 눈에 불을 켜고 있었기에 감히 구혼서를 보내는 이들이 드물었는데…….
두 제국의 실정을 잘 모르는 타 왕국 왕족들 또는 고위 귀족들은 날이면 날마다 지치지도 않고 구혼서를 날려댔다.
딱히 이해하지 못할 일은 아니었다.
설령 한미한 왕국의 다 쓰러져가는 가문이라고 하더라도 운이 좋아 이벨리아와 연만 닿는다면 대제국에서도 큰소리 뻥뻥 치며 위세 떨 수 있음은 물론이니까.
오늘도 벽난로 땔감이 되어버린 구혼서들을 바라보며 이벨리아는 진지하게 고민했다.
“확 그냥 약혼을 해버려야 이런 귀찮은 쓰레기들이 안 올 텐데.”
흐음…….
약혼. 약혼이라…….
***
곧바로 2층으로 올라간 이벨리아가 엘리시아의 집무실 문을 두드렸다.
일과를 마치고 두꺼운 노트에 뭔가 빼곡히 기록하고 있던 엘리시아가 따뜻하게 웃으며 딸을 맞이했다.
“무슨 일이니, 이브? 마들렌 바구니를 들고 온 거로 봐선 부탁할 게 있는 모양인데.”
“헤헤, 엄마 예리해.”
아무리 성년이 되었다고 하더라도 부모의 눈엔 여전히 어린아이나 다름없다. 엘리시아가 두 팔 벌려 이벨리아를 꼭 끌어안았다.
“우리 딸이 뭐가 필요해서 왔을까?”
“별 건 아닌데…… 그…….”
“말해보렴.”
“엄마는 아빠랑 어떻게 약혼하게 되었어요?”
“……혹시 엄마가 허리를 역으로 꺾어버릴 새끼가 정해졌니?”
“아니, 아니, 그냥 궁금해서 그러지! 나도 어른이 된 지 한참 지났으니까!”
흐음. 영 수상쩍다는 듯 눈을 가늘게 뜨고 딸을 바라보던 엘리시아가 허리 숙여 책상 아래를 뒤적였다.
이내 바리바리 손에 들린 건 두꺼운 노트 몇 권.
“이게 다 뭐예요?”
“일기란다.”
“이게 다요? 거의 실록 수준인데?”
엘리시아가 일기를 뒤적이며 여상히 말했다.
“어느 하나 잊고 싶지 않게 빛나는 삶이었거든. 베르타샨에 살던 시절도. 네 아버지를 만났던 때도. 우리 아가가 내게 찾아온 날도. 이렇게 자랑스럽게 큰 오늘까지 전부.”
“…….”
“아. 여기 있네.”
엘리시아의 눈이 일기 위를 더듬었다. 잔잔한 미소가 입매에 피어올랐다.
“이리 와보렴, 아가. 여길 읽어봐.”
이벨리아가 두근거리는 마음으로 노트를 내려다 봤다.
두 분 중에 누가 먼저 약혼하자고 청하셨을까?
아마 아주 멋들어진 말을 건네셨겠지?
우리 엄마는 글씨도 참 잘…….
「휴고는 더럽게 멍청하다. 날 좋아하는 건 분명한데 눈치를 이렇게 줘도 약혼하자는 말이 없다. 모든 힘을 무예에 쏟느라 뇌도 근육으로 덮여버렸나.」
……엄마?
「며칠만 더 살살 웃어주다가 그래도 진척이 없으면 특단의 조치를 취해야겠다. 야밤에 자루에 처넣고 방으로 끌고 와야지.」
……제가 지금 뭘 본 거죠?
「그 자루. 참 효험이 좋았다.」
이벨리아가 손을 달달 떨었다.
아빠를 자루에 넣어서 뭘 어떻게 하셨는데요……?
우리 토끼도 눈치를 못 채면 자루 행인가요……?